OH MY RAINBOW
;Caramel Drizzle
<NICE TO MEET YOU, MA BOY>
27.
세상은 예기치 못한 일의 연속 선상이라 했다. 새벽 등굣길에 만난 고양이와 친구가 되고, 귀인이 들 예정이라던 운세에 우연히 건물을 지나다 물벼락을 맞고, 자정 넘어 도착한 집 대문 밖에서 교실 사물함에 두고 온 키가 생각나고, 그리고 바로 옆에서 새벽에 만난 고양이가 날 기다리고.
지금도 그 선상 중의 하나였다. 일 년 가까이 알아 오고 거진 반년을 사귄 사람과의 소개팅 말이다. 버릇처럼 입술을 앙다물고 지그시 눈을 맞추는 그가 어색하게 웃는다. 어지간히 떨렸는지 귓바퀴가 빨갛다. 물론 내 뺨도 그랬다.
- “처음 뵙겠습니다.”
- “진심이야?”
- “응, 진짜 소개팅하러 온 건데. 너랑.”
웃음기 뺀 진지한 얼굴로 답한다. 볼을 짧게 감싸 쥐는 그는 정말 부끄러워하고 있다. 그러니 더더욱 의심은 수그러들지 않는다. 뭐든 두 배로 갚아준다는 ‘개’선배의 말이 떠나지 않았으니. 어쨌든 이것도 복수의 하나인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는 나보다 한 뼘 빨랐다.
- “이렇게 만나면 어떤 느낌일까 싶어서.”
- “…….”
- “우리가 다르게 만나도 결국 너는 나고, 나도 너일까.”
갑자기 고백을 해버렸네. 뒷머리를 매만지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는 옆모습에 긴장감이 서린다. 나 또한 창 너머 펼쳐진 밤하늘을 눈에 담는다. 유리창에 비친 어엿한 얼굴을 담는 줄도 모르고.
석민이의 힘내라는 말도, 승관이가 불쑥 과방에 들어온 것도, 말까지 더듬으며 알려주던 민규도, 지금 내 앞에서 긴장하는 이지훈도 다 한통속이었다. 그 모든 것, 바로 이 순간을 위해.
- “솔직히 과팅 얘기 들었을 때 화났고, 아예 똑같이 해줄까 생각도 해봤는데 그건 진짜 못 하겠더라.”
- “…….”
- “내가 너 말고 누굴 만나.”
- “…….”
- “그런 건 생각도 안 해봤는데.”
고백은 고백의 꼬리를 문다. 인적 없는 바닷가에 나란히 앉아 얘기하고픈 지금, 그의 입술이 둥근 곡선을 그리며 배시시 웃음을 띤다. 대신 나랑 소개팅해. 이 말 하려고 어제 잠도 설쳤어. 한껏 멋 부린 머리를 긁적이면 어김없이 나오는 도깨비 뿔이 뾱-, 소리를 냈다. 우뚝 솟은 머리칼이 손마디를 가로지른다.
열 아홉, 소독 냄새가 진동하던 병실 안에서 마주했던 앳된 얼굴이 스친다. 모든 것들이 처음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습관처럼 말랑한 혀로 입술을 적시는 것도, 양 보조개로 사람을 홀리는 것도, 어색하다 싶으면 미쳐 죽을 것 같은 눈웃음을 흘리는 것도 전부 변함없다. 하지만 크게 달라진 게 있다면, 전보다 직접적으로 제 마음을 표현하고 싶은 이지훈이 있다는 것. 내 곁에서 조금씩 자라던 그가 열매를 맺는다. 칭찬 스티커 다섯 장 감이었다.
- “정말 나랑 소개팅할 거야?”
- “응.”
- “그럼 지금부터 초면처럼 대한다?”
- “콜.”
카페에서 가장 신나 보이는 그가 옷매무새를 고친다. 사귀는 사람과 소개팅 한다고 머리까지 만지고 온 이 남자를 도대체 어떡하면 좋을까. 테이블 가까이 꾸벅 인사하는 초보를 어떡하면 좋을까요. 아무리 웃음을 참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 고개를 푹 숙여 웃는 건 나뿐만이 아니다. 이벤트의 당사자인 그도 손 부채질로 열심히 얼굴을 식혔다.
-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애인 없어요?”
- “없어요.”
- “진짜 없어요?”
- “응.”
- “근데 왜 초면에 반말이세요?”
- “아…….”
짧은 탄식에 콧구멍은 사이즈를 가늠할 수 없다. 지훈아, 나 못 하겠어. 너무 웃겨서 콧물 나올 것 같아. 슬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이지훈과의 소개팅. 이따금 엉뚱한 구석이 있는 줄은 알았지만 이런 귀여운 복수가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초면 공격에 무언갈 골똘히 생각하던 그가 당당히 첫 질문으로 다음 포문을 열었다.
- “취미가 뭐예요?”
- “미치겠다.”
- “취미 알려주세요.”
- “그냥 뭐……. 이지훈 피아노 레슨?”
- “나 피아노 가르쳐 줄 거예요?”
- “그쪽이 원하면요.”
그는 '그쪽'이란 단어에 작게 웃음을 터트리다 이내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참 된 배움을 얻으러 온 수련자 같달까.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레슨을 승낙한 행운아는 짐짓 심각한 얼굴로 테이블에 손가락을 두드렸다. 피아노를 치는 시늉에, 내 손은 무의식적 꽃받침을 만든다. 이건 대놓고 오래도록 봐야하는 그림이었다.
- "나 진짜 하나도 몰라."
- "정말?"
- "네가 하나부터 열까지 다 알려줘."
여기가 도였나, 파였나. 띵똥땡똥 손가락을 움직이며 초보 티를 낸다. 드디어 이지훈에게도 부족한 점을 찾았다. 근 일 년만이었다. 역시 이지훈도 사람이다. 피아노는 김여주 피아노지. 초면에도 손을 잡고 의지를 다진다. 바이엘 기초부터 쌓아가면 넌 분명 천재가 될 거야. 아니 그쪽은 천재가 될 거예요. 기승전 존댓말로 소개팅을 이어간다. 그는 테이블 밑으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눈치를 봤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뜻이었다.
-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요.”
- “…….”
- “나 어때요.”
소개팅의 ‘소’자도 모르는 그가 두 걸음씩 뛰어 마음을 두드린다. 소리 없이 얼굴을 폭 감싸는 날 보며 웃던 그가 음료를 들이켰다. 목이 타는 모양이었다.
- “내일도 우리 만날 수 있어요?”
- “아마도.”
- “모레는?”
- “그건 좀…….”
- “만나주면 안 돼요?”
오늘만을 작정하고 온 사람처럼 그는 모든 걸 걸었다. 서툰 감정이 이토록 장족의 발전을 하게 될 줄이야. 그를 아는, 적어도 승관이 본다면 입을 막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른다.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얼굴만 발갛게 물들이던 아이는 어느새 제 마음을 보이며 내 앞에 있다. 지훈이, 네가.
- “사실 예전부터 말하고 싶었어요.”
- “…….”
- “항상 생각하게 돼요.”
- “…….”
- “그쪽이요.”
지훈이는 내 약지에 반지를 끼웠다.
꽃집에서 산 장미 다발도 내 품에 안기고.
주황 장미.
꽃말은 첫사랑.
Epilogue.
네, 다음 환자분. 병원 로비 휴게실에 앉아 차트 기록을 넘기던 정한이 구석에 처박힌 안타까운 남자를 불렀다. 네, 다음 중증 환자분 여기로 컴온. 터벅거리며 다가오는 지훈을 보며 정한은 끌끌 혀를 찼다.
응급 환자가 따로 없네. 동그란 안경 너머 환자의 상태를 살핀다. 정한은 지훈에게 꼭 필요한 전문의였다. 말하자면 야매로 심리를 담당하는 주치의랄까. 지훈은 피곤한 눈가를 비비며 가벼운 안부부터 전했다.
- “소개팅했어.”
- “주어는.”
- “여주.”
- “병에 걸렸구나.”
이 정도면 중증인데……. 정한은 빈 차트에 ‘애정 말기’를 적으며 본격적인 상담을 진행했다. 그러자 지훈은 가슴을 툭툭 두드리며 증상을 말했다. 꽤나 오랫동안 지속된 병이었다.
- “가슴이 막 답답하고 쓰린 게 꼭…….”
- “엿 같다?”
- “정답.”
- “여주를 보고 있을 때마다 발병되는 증상인가요?”
- “……어, 그러니까 걔를 보면 막 뭐가 돌긴 하는데 그게 엿 같고 답답한 건 절대 아니야. 재밌어. 같이 있으면 좋고 가끔 속도 뻥 뚫리는 것 같고.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아?”
- “계속해봐.”
인상까지 찌푸린 지훈은 짐짓 심각했다. 정한은 고개까지 끄덕이며 환자의 말을 경청했다. 오랜만에 방문한 VVIP에게 최선을 다하려 애를 쓰는 것이다. 이미 뻔히 답이 나온 병이었지만.
- “근데 막 누가 걔 옆에 있으면 좀 답답해. 김여주 옆에서 좀 꺼져줬으면 좋겠고 불가피한 상황이라면 내가 있을 때만 존재했으면 좋겠어. 이것도 무슨 말인지 이해해?”
- “그들이 혹 너와 같은 존재인지요?”
- “나 같은 존재는 나밖에 없지.”
- “야 이 환자야…… 아니, 환자분.”
- “상담해준다는 사람이 정신이 오락가락하면 어쩌자는 거야.”
- “세포 분열이 오고 있어.”
- “정신 분열을 말하고 싶은 거겠지.”
- “이것 봐, 벌써부터.”
정한이 한껏 멋스럽게 넘긴 머리를 헤집는다. 그 와중에도 지훈이 나열한 증상을 단 한마디로 요약하는 지훈의 주치의였다. 고약한 스트레스가 아닐까 하는 지훈의 생각을 뒤엎고 정한이 내린 병명은 바로 이것. 지훈은 충격을 금치 못했다.
- “질투지 질투. 그것도 말기.”
- “윤정한 드디어 맛이 갔어?”
- “그거 내가 딱 너만 할 때 하던 거다? 다 겪어 봤어.”
- “내가 왜 말기야. 딱 봐도 초기 증상인데.”
정한은 스크랩 페이퍼에 뇌 모양을 그리고 다시 그 안에 작은 원들을 그렸다. 가장 콩알만 한 원에 ‘4년 내내 수석을 위한 걱정’, 중간 사이즈 원은 ‘졸업 후 미래에 대한 걱정’, 그리고 가장 큰 사이즈에 ‘김여주’라는 대단원을 새기는 정한이었다.
- “네 뇌에는 여주가 제일 커. 근데 자꾸 엿 같은 세포들이 여주한테 달라붙으면 네 기분이 어때?”
- “큰 엿 같아.”
- “여주한테 말이라도 걸면?”
- “엿 장수한테 팔아 넘기고 싶어.”
- “그래, 그게 바로 질투 말기 증상이야.”
- “아니 근데 솔직히 다른 남자인 친구를 만날 수도 있는 거고…….”
- “그 ‘남자’인 애들이 여주를 여자로 보면 얘기가 달라지지.”
- “……자세히 말해 봐.”
정한이 동그란 안경을 벗어 미간을 매만진다. 여주 옆에 너 같은 존재가 있냐고 물어본 건, 네 감정이랑 비슷하게 여주를 보는 애가 있냐는 뜻이야. 여주는 절대 아닌데 다른 애가 옆에서 자꾸 너처럼 붙어 있어 봐. 그건 당연히 질투가 나지. 너랑 같은 감정인 놈이 여주를 보는데 열이 안 받고 배기겠니. 외과 의사의 허를 찌르는 명언에 지훈이 탄식을 한다. 정한은 팔짱을 끼며 사족을 붙였다.
- “정신 똑바로 차려 환자분. 네 눈에 예뻐 보이면 열에 여섯도 같은 생각을 한단다.”
- “나머지 네 명은 무슨 생각 하는데.”
- “겁나 예쁘다.”
- “돌팔이 찾아온 내가 또라이다.”
지훈은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다. 형은 진짜 입원 좀 해라. 보호자는 걱정 말고. 병원 밖으로 나서던 지훈은 백팩에서 꺼낸 이온 음료를 정한에게 던졌다. 이거 먹고 힘내. 돌팔이라고 해도 난 이해해. 포물선을 그리는 그것을 낚아챈 정한이 손가락 하트를 만든다. 지훈은 보지도 않은 채 병원을 빠져나갔다.
- “우리 동생 고생 좀 하겠네.”
……
- “여주는 수능 끝나면 같이 손잡고 오라니까 말도 안 들어.”
지훈이 닮아가나. 사랑하면 닮아간다던데. 실내용 슬리퍼를 직직 끌어 매점에 당도한 정한이 메로나를 입에 문다. 휴대폰에 찍힌 부재중 전화에 망설이던 정한이 메로나 반절을 문다. 밀려드는 업무량에 벌써 막대 아이스크림을 세 개째 비웠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지훈의 문자를 확인한 정한이 짧게 한숨을 쉰다.
- [누나 좀 만나라]
병실을 지나치는 하얀 가운의 뒤태가 오늘따라 외롭다. 정한은 여주를 떠올리며 즐겁게 웃는 지훈을 생각했다. 대기실에서 장난치는 두 아이가 정한의 눈에 곧 지훈이 되고 여주가 되어 정한의 발걸음을 잡는다. 정한의 뇌구조에 박힌 ‘지훈의 대한 걱정’이 점차 옅어지고 있었다.
- “……이제 걱정 안 해도 되겠다.”
복도로 사라지는 정한의 슬리퍼 소리가 멀어진다.
새벽이 올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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