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녹차하임
종대는 결국 크리스 옆에 강제로 앉혀졌다.
한숨을 내쉰 종대는 발장난을 하면서 크리스의 얘기가 빨리 끝나기만을 바랬다.
그런데 크리스는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다.
천근만근 같은 시간을 버티다 못한 종대가 크리스에게 다시 떽떽거리려던 찰나 드디어 크리스의 입이 열렸다.
"아주 좋은 목소리였어."
"에..?"
"사람의 노래소리가 그렇게 좋은지 몰랐는데.."
"무슨 말을 하는거에요?"
"네 노래를 듣고 알았어. 목소리도 꽤 괜찮은 악기라는걸."
"..."
제눈을 똑바로 마주하고 얘기하는 크리스의 모습에 종대의 입이 다물어졌다.
순간 그의 눈빛에 압도당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너무도 진지한 눈빛에 이 얘기를 곧이곧대로 믿을 뻔 했다.
고개를 내저은 종대가 다시 경계태세에 들어가자 크리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오해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네 목소리 별로라고 생각한 적 없다. 오히려 넋을 놓고 바라볼 정도로 매력적이라고 생각해.
그때 스타일 운운했던건 루한에 대한 얘기였어."
"... 진짜에요?"
"그래."
크리스는 단순하게 대답하고 시선을 돌려 음료를 마셨지만 종대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가장 혹독한 악평을 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지금 바로 앞에서 단순하지만 설레일 정도의 단어를 사용하며 호평을 하는 이 상황이 바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거짓이라고 하기에는 그는 너무도 진지했고 그의 말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크리스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그의 의중을 파악하려 애쓰는 중에 크리스가 갑자기 일어나 종대의 고개도 따라 올라갔다.
"이제 그만 돌아갈까? 병실로."
"아..."
입꼬리가 휘어지도록 웃어보이며 크리스가 종대에게 물었다.
종대가 작게 탄식을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병실까지 데려다주고 돌아가는 크리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종대는 그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어디 갔다오냐?"
"어? 아... 그, 그게..."
"어서 와서 누워. 자야지."
"으, 응."
어느새 깨어나 팔짱을 끼고 앉아있는 백현에 당황했지만 화내지않고 사근사근한 말투에 종대는 쭈뼛쭈뼛 침대에 누웠다.
이불을 얼굴 바로 밑까지 덮고 백현을 말똥말똥 쳐다보았다.
"왜?"
"아니.. 그냥..."
"어서 잠이나 쳐 자. 또 나가면 죽는다?"
백현을 보고있음에도 왜 머릿속에는 크리스의 말로 가득한 것일까.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혼란에 빠진 종대는 쉽게 잠에 들 수 없었다.
자꾸만 귓가에 도는 그의 말이 종대의 심장을 자꾸 간지럽힌다.
누군가의 진심어린 말 한마디가 그리웠던 종대에게는 크리스의 말이 쉽게 잊혀지지 않았다.
"백현아."
"아, 자라니까 또 왜?"
"크리스라는 사람, 그렇게 나쁜 놈은 아닌가봐..."
"갑자기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크리스형이 왜 나와? 나쁜 놈은 또 뭔 소리래?"
"그냥... 그런 것 같다고..."
괜히 볼이 뜨거워진 종대가 말끝을 흐리면서 이불을 올려 얼굴을 덮었다.
백현이 의아해했지만 입을 크게 벌리고 하품을 하고는 곧 관심을 끄고 다시 눈을 감았다.
이불 속에서 꿈틀거리던 종대는 점점 조여오는 듯한 심장과 몸이 붕 뜨는 것 같은 기분에 미간을 좁혔다.
사고의 후유증이 이제서야 나타나는 것일까?
괜한 걱정에 종대가 잠든 백현을 다시 깨워 귀찮게 했다.
"아, 잠 좀 자자. 제발!!!"
며칠동안 종대의 수발을 자처하고나서 꽤 피곤이 쌓여있던 백현이 결국 폭발했다.
그 뒤로는 가끔씩 병원에 발걸음하는 그는 정각 아홉시만 되면 가차없이 집으로 돌아갔다.
덩달아 찬열의 발길도 뜸해지자 심심해진 종대는 그날의 행동을 후회했지만 찬백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며칠 후 찬백의 빈자리는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꿰차버렸다.
***
나이롱 환자 김종대의 소문으로 병원이 떠들썩해졌다.
팔이 부러진 것을 핑계삼아 거의 한달 가까이 입원해있으니 그럴만도 하다.
유명한 가수였기에 간호사들의 관심을 받기도 했고 한동안 간병을 해주던 친구들의 인물도 한몫했다.
그보다 더 이슈였던 것은 그의 주치의가 병원에서 제일 잘나가는 크리스 선생님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을 크리스 선생이 원해 직접 요청했다는 것도 이미 소문으로 널리 퍼져있었다.
어느새 두사람은 유명한 병원 커플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훤칠한 인물들이 하나같이 한 병실로 쏠리니 여간호사들의 반찬거리가 되는 것은 당연지사.
그들의 입김은 순식간에 퍼지며 종대의 병실은 핫이슈로 떠오를 수 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재밌는건 언제나 들려오는 종대의 아련한 외침이었다.
"아, 진짜!! 나 이제 퇴원시켜 달라고오!!!"
오늘도 역시나 베개가 벽에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절규에 병실 앞을 지나가던 사람들은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