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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덕 오세훈 사장님
사장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마자 아무렇지 않게 사람 좋은 웃음을 띠고 좋은 아침. 하며 아침 인사를 건네는 그를 보며 나는 따라 웃고 싶던 내 표정도 애써 굳혔다. 손을 찔러 넣은 겉옷 주머니에서 ‘사직서’ 하고 적혀 있는 흰 봉투를 책상 위로 툭 건네는 내 모습에 그는 표정을 굳히며 그 흰 봉투를 들어 살펴 보았고, 한숨을 쉬며 의자에 앉았다.
“진짜 사직서 들고 왔네. 이럼 내가 뭐가 돼.”
“인수인계라도 하고 갈까요? 그냥 시시때때로 사장 기분에 맞춰 놀아나면 된다. 뭐 이 정도로요. 사장님 능력에 저 보다 일 못하는 비서 구할 것 같진 않은데요.”
“나 지금 세 번째 물어 보는 건데, 내 도움이 그렇게 불편 하냐고.”
“네. 불편해요.”
“어떻게 해야 안 불편할까.”
“제가 저번에 분명히 말씀 드렸잖아요. 저 사장님 같은 분 도움 없어도 잘 살아요.”
그는 긴 마른 세수 끝에 입을 열었다. 그가 피곤하다는 낯으로 내게 내린 지시는 정말 아무 것도 아닌, 그가 고용주인 이상 내게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시켰어도 이상하지 않은 명령이었다.
“커피 타 와.”
나는 아무렇지 않게 외투의 소매를 걷어 올리며 커피포트에 뚜벅뚜벅 다가갔다. 그가 나를 채용한 이후에 처음으로 시킨 지시라면 지시였다. 그래, 오늘까지만. 딱 오늘까지만. 안 하겠다던 출근을 한 건 나였으니까.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순간까지 그와 나는 아무 말이 없었고, 믹스 커피를 대충 휘저으며 타 그에게 건네고서야 그는 침묵을 깼다.
“다시 타 와.”
침묵을 깼다고 하기엔 너무나도 의미가 없는 말이라 허무했다. 다시 타 와. 분명 비서가 사장에게 받은 지시라고 하기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임에도 불구하고 서러운 기분은 뭘까. 맘에 응어리가 진 것처럼 무거워졌다. 나는 또 기계처럼 움직여 커피포트 앞에서 작은 스푼으로 커피를 휘저으며 그의 책상에 올려 두었고, 단 한 번도 내 눈을 마주치고 있지 않던 그가 이번엔 차가운 눈초리로 내 눈을 맞닥뜨렸다.
“다시.”
“여기요.”
“다시.”
“아직 안 드셨잖아요, 어디가 맘에 안 드시는 건지…”
기계처럼 커피를 타고 또 타길 그렇게 몇 번, 이번에는 여섯 잔 째 커피잔이 그의 책상 위에 올려졌을 때였다. 어느덧 일곱 번째
‘다시’라는 말만 반복하는 그 때문에 답답함과 서러움이 뒤엉켜 가슴 깊이서부터 목울대까지 한참을 두드려댔다. 아울러 이르자면 갑작스런 그의 의도 모를 행동과 왜 나에게 그의 친절이 익숙해지게 만들었나. 하는 원망 따위 정도. 그가 커피를 다시 타 오란 말이 아닌 진심 어린 목소리로 내게 염려를 해 준 것은 커피포트에서 팔팔 끓고 있던 물이 내 손목을 타고 뚝뚝 떨어졌을 때였다. 자리에서 급하게 일어난 그는 나동그라지고 있는 커피포트는 안 보였던 건지 달려와서는 내 손목을 빼냈다. 와이셔츠가 진한 커피 색으로 물든 것을 봐서는 그도 뜨거울 텐데. 포트를 세우고는 곧장 화장실로 나를 끌고 갔다. 붉게 올라온 손목 위로 잔잔하게 소리 없이 흐르는 찬물은 무엇보다 따끔하고 아렸다. 내 자신에게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그에게 여태껏 놀아났다는 분함을 가장한 상처가 더.
“내가 너한테 해 줄 수 있는 최대한의 대우가 이 정도라고 생각해?”
조용히 손목을 타고 흐르는 물소리와 함께 그의 잔잔한 목소리가 내 귓가를 타고 흘러온다. 잔잔한 물결과도 같은 그의 나직한 목소리에선 나 지금 화 났어. 하는 성난 어투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그 익숙한 목소리에 이성의 끊을 놓쳐버리고 마는 내가 한없이 나약하다고 느껴진다. 이 남자 목소리 따위가 뭔데. 날 좋아하는 사람도 아니고, 나에 대해 좋은 감정이라곤 동정심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남자였다. 가장 큰 이유는 그가 내게 영향력 큰 인물이라서. 라는 핑계였을까. ‘여자 화장실’ 이라고 붙어있는 푯말은 무시하고 들어온 탓에 발길을 들이는 여성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그가 충분히 창피하다고 느낄 만큼 그들의 시선이 노골적이었으나 울며 손목을 적시고 있는 내 옆에서 우두커니 내 손목만 잡고 있어 주는 그에게 일말의 고마움과 미안함이 이르렀다. 거기엔 자꾸만 내 감정을 부풀리는 행동을 하는 그의 행동에 느끼는 원망 따위도 따랐다.
“부모도 없고, 그렇다고 먼 친척도 없고, 어린 나이에 공장이나 다니면서 또래에 안 맞게 한숨이나 달고 다니는 사고무인한 어린 애한테 내가 뭘 더 어떻게 해줄까.”
그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뼈에 사무친다. 다 맞는 말이며, 아무리 발악을 해도 내 맘을 아는 날은 오지 않을 거란 확신을 주는 그의 대답에.
그에게 잡힌 손목을 비틀어 빼내었다. 화장실을 나와 끅끅 소리를 내며 울던 나는 목을 놓아 울었다. 코와 목이 따끔해질 만큼 숨도 몰아 쉬면서. 부모도 없고. 그렇다고 먼 친척도 없고. 사고무인하다. 내 신세가 한 없이 서러웠고 나도 모르게 폭풍우처럼 몰아친 그에 대한 나의 감정도 미웠다. 한참 동안이나 설움을 쏟는 동안에도 열이 받는 것은 그런 내 옆에서 우수에 찬 눈빛으로 나를 빤히 주시하는 그였다. 모든 걸 다 쏟아 낼 때 까지 기다려 주겠다는 듯 양 손으로 옆구리를 짚고 있던 그의 표정.
악덕 오세훈 사장님
손을 잡고 나를 일으켜 주는 그의 행동에 주춤거리다 사장실로 들어갔다. 친절하게 약을 바르고 붕대까지 감아 주며 흉 지면 미스코리아 못 나갈 텐데. 하는 사려 깊은 한 마디를 아무렇지 않게 툭 내뱉으며.
“오늘은 내 비서 하지 마. 울어서 피곤할 텐데 좀 자라. 이따가 밥 먹을 때 깨울게.”
날 억지로 눕히며 담요까지 덮어주는 그의 행동에 심장이 우둔우둔 뛰었다. 머리 끝까지 쓴 담요를 슬쩍 내려 그를 바라보았다. 아뿔싸. 아까 쏟은 커피 탓에 축축이 물들은 그의 셔츠를 잊고 있었다. 셔츠를 벗고 맨 몸으로 새 셔츠의 포장을 뜯는 그의 모습을 봐 버리고 말았다. 얼굴이 화끈해지고 심장이 더 세차게 뛰고. 언제나 그를 볼 때마다 느꼈던 감정들이 무뎌질 만큼 배가 되어 내게 돌아왔다.
“항상 어른인 척 하면서도 결국엔 넌 애야.”
“…”
“네가 더 잘 알지."
“…”
“자던 안 자던 간에 상관 없어.”
자던 안 자던. 상관이 없다고 했으니 나는 내가 안 자고 그의 이야기를 엿 듣는 기분이었던 묵직함에서 조금은 해방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안 자고 있는 네가 이 말을 들으면 쪽 팔릴 것 같긴 해.”
“…”
“거짓말 했어.”
“…”
“그 짧은 시간 동안에도 누군가에게 마음을 빼앗길 수도 있구나.”
그가 내게 거짓말을 했던 적이 있던가. 항상 무엇보다도 진실 된 말만 할 것 같던 그의 눈빛에 그가 나를 만났던 시간들 동안 나를 속였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바보처럼 몰랐던 거지.”
“…”
“좋아해, 아저씨가.”
숨이 멎는듯한 충격에 나는 정말로 색색 쉬고 있던 숨을 멈추었다. 좋아해. 아저씨가. 이 한 마디가 내 심장을 움켜 쥐었다 편 것이라는 말이 과언이 아닐 정도로 내 심장은 주체를 못 하게 뛰어댔다.
“아까 우는 거 보고 알았어.”
“…”
“이 정도로 심장이 뛰고 맘이 아픈 거 보면 내가 얘 좋아하긴 하는구나.”
멈추었던 숨을 다시 쉬었다. 심장은 계속해서 뛰었다. 멈추지 않고. 그의 말이 끝나고 난 뒤 그가 몇 십 분일지 모르는 그 시간 동안 업무를 처리하는 도중에도. 누군가 내게 마법을 부리고 갔다는 말이 더 믿기 쉬운 증상들이었다. 맘은 얼떨떨, 손이 덜덜, 숨이 컥컥. 어느 유명한 사랑 노래 가사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