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양식 호그와트가 보고 싶어서 만든 세계관입니다. 해리포터와 유사성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 이번 편의 비중은 세븐틴이 더 많으므로 카테고리는 '세븐틴'입니다.
* 노래 있습니다.
음양학당(陰陽學黨)
한편, 신수 계약을 맺은 덕분에 전보다는 비교적 수월하게 소환 주문 없이 자기 의지로 자신을 소환한 순영은 여주가 잠에서 깨기 30분 전, 방 안 창문을 열어 7층 높이에서 뛰어내려 가볍게 바닥으로 착지했다. 음양 학당 교복과 상당히 비슷한 옷을 입고 있는 순영은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성의 없어 보이기도 하고, 가벼워 보이기도 하는 발걸음으로 어딘가로 향했다.
"헤에? 이렇게나 많이? .... 아침 댓바람부터 쟤네도 열심히네"
학교 정문 쪽으로 걸어간 순영은 근처에 다다르자 일말의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리곤 조롱 아닌 조롱을 내뱉는 순영이었다. 순영의 눈에 들어온 것은 적어도 100명은 넘어 보이는 사람들이 서 있거나, 앉아있거나, 아니면 누군가와 통화를 한다거나 각자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그들은 '기자'였다. 다들, 화제가 된 기사덕분에 취재하러 학교 앞까지 찾아온 것이었다. (여주가 발현식 하기 위해 들어왔던 곳은 후문) 순영은 그들을 보며 한 번 피식 웃더니 발끝에 힘을 주어 힘차게 도약했다. 꽤 높은 곳에 떠 있는 순영은 근처에 있는 나무 중 가장 큰 나무의 가지에 앉아서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나무 기둥에 등을 기대어 양반 다리 자세를 하고 팔짱을 낀 순영의 모습은 퍽 여유로워 보였다.
순영도, 기자들도 한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은지 한참이 됐을까. 순영도 지루한지 하품을 크게 하더니 팔짱을 풀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높은 나무 꼭대기에서 뛰어내렸다. 뛰어내렸다기 보다는 공중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 맞다고 봐야겠다. 허공을 천천히 걸어 내려와 고개를 들어야 끝이 보이는 학교 정문 위 뾰족한 쇠창살 위에 발을 디뎠다. 정문 앞에 있는 기자들은 하나둘씩 정문 위에 무언가가 있다는 걸 눈치챘고 웅성웅성거리며 다들 순영을 쳐다보았다. 순영이 위치한 곳에서는 바로 태양이 뒤에 있어 순영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고 사람 형체만 기자들 눈에 보였다. 그렇지만 그들 중 그 누구도 한 치의 의심 없이 저 형상은 '순영'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다들 기다렸다는 듯이 카메라를 들어 셔터를 이리저리 눌러댔다. 그들을 쳐다보고 있는 순영의 눈에는 감정의 싹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메말라 있었다.
"여, 안녕들 하신가"
순영은 여전히 감정 없는 눈으로 쳐다보고 있지만 입꼬리를 들어 올려 장난기 있는 목소리로 기자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인사의 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에 순영도 올렸던 입꼬리를 내렸다. 그리고 뒷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혀를 찼다. 하여간 특종에 눈이 멀어서는. 얘네는 몇십 년을 봐도 짜증 나. 순영은 다시 한번 뛰어내렸다. 이번에는 허공을 걷는 대신, 가볍게 바닥에 착지했다. 순영의 발이 지상에 닫자마자 또 다시 길다고 하면 긴 시간 동안 플래시 세례와 함께 셔터 누르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순영의 눈썹이 꿈틀댔다.
"그만 들 하지. 19년 만에 일신이 부활했다는 기사에 쓸 사진은 이미 충분하게 다 찍은 거 아닌가"
숲에 학교가 위치해서 그런지 순영의 목소리는 보통 크기로 이야기해도 크게 느껴졌다. 순영의 말에 기자들은 찍던 카메라를 들었던 팔을 살며시 내려놓았다. 카메라를 내려놓고 두 눈으로 직접 보는 일신의 모습은, 그 자태가 어마어마하다고 느껴졌다. 붉은 머리와 날카로운 눈매의 조화. 날렵하고도 단단해 보이는 몸선. 어느 누군가가 말했었다. 선대 일신 스물 여덟 명 중, 스물 여덟 번째 일신의 외향이 가장 아름답다고. 일신의 자태는 그건 거짓말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는 듯했다.
"다들 무슨 이유로 이곳에 모였는지 대충은 안다"
".... 저, 정말로 주인이 무영인인 것입니까?"
어떤 남기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일신 에게 질문했다. 일신의 날카로운 눈초리는 그 기자로 향했고, 그 기자는 흠칫 떨었다. 눈초리만 날카로웠을 뿐이지 단지 쳐다만 본 것뿐이었다. 그렇지만 일신의 눈길을 맞은 남기자는 손이 떨려왔다. 한 장 수첩(한 장만 있는 수첩. 한 장을 찢으면 다시 한 장이 생긴다)과 주술 볼펜(자신이 정리한 생각을 그대로 옮겨적는 볼펜)을 들고 있는 두 손은 눈에 보일 정도로 떨고 있었다. 딱 봐도 신수는 '개'이군. 나름 귀엽네. 일신은 픽하고 웃었다. 일신은 다시 뛰어올라 정문 위로 올라가 쇠창살 바로 위의 허공에 자리를 잡아 앉았다. 자주 하는 양반다리 자세를 하고선. 그리고 큰 목소리로 말하였다.
"자, 그럼 여기서 질문!"
힘이 있는 목소리였다. 이곳에 있는 모든 기자가 웅성거렸다. 질문을 받은 건 일신임에도 불구하고 대답 대신 질문을 하겠다는 것이기 때문일 테지. 뭔가 이상하긴 하나, 일신의 말이니 웅성거림은 곧 조용해졌고, 일신의 다음 말에 집중하였다.
"무영인이 음양 세계에 오면 어떻게 될까-요?"
"...."
"별 두 개짜리 문제다. 그러니 잘 맞힐 수 있겠지?"
"...."
"오, 너 안경테가 참 마음에 든다. 그러니 네가 한 번 답 해보아라"
일신은 말 뒤꼬리를 길게 늘이며 물어보았다. 너무 쉬운 질문에 당황하여 기자들은 눈을 껌뻑거리기만 할 뿐 아무도 답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일신은 그 분위기를 무시하고 제 할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선 검은 진한 뿔테의 여기자를 가리키며 답을 요구하는 일신이었다. 검은 뿔테를 낀 기자는 자신이 지목당했다는 사실에 믿기지 않는 듯, 이리저리 둘러보며 자신을 말하는 거냐는 듯한 눈빛을 발사하였다. 일신은 너그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한 번 끄덕거렸다. 여기자는 대충 주위의 반응을 본 후 일신을 쳐다보고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선 대답하였다.
"미, 미치거나, 아니면 미쳐서 죽, 죽거나...."
"정답!"
"...."
"그 기사의 말대로 김여주가 무영인이라면 지금쯤 미쳐있겠지. 하지만 걘 아무런 이상도 없이 잘 다니고 있단다, 얘들아?"
일신은 부드러운 목소리와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크게 얘기하였다. '아무런 이상도 없이'에 강조를 하며. 일신의 말뜻이 다들 무슨 말인지 알았을 것이다. 여주는 무영인이 아니라는 것. 일신은 그걸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영력이 결계 때문에 없는 것처럼 보였던 거지, 자신이 족자에 갇혀있는 동안 미세한 영력은 항상 느껴져 왔으니까 원래부터 음양인이었다는 건 확실하다. 기자들의 주술 볼펜은 빠르게 공책에 적어져 내려갔다.
"그, 그럼 편입생이라는 말도 거짓인...."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졸려"
어떤 남기자가 질문을 하려 할 때, 일신은 눈을 반쯤 뜬 채로 하품까지 하며 질문을 제지했다. 일신의 행동에 또 당황한 기자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또다시 웅성거렸다. 일신의 말은 '더 말하기 싫어'라고 하는 것이라고 알아챘다. 일신이라는 존재는 잠을 자는 존재가 아니니까. 일신의 졸린다는 말에 당황스러운 기자들을 뒤로하고 순영은 허공에 앉아 있던 자세를 풀고 일어나려 하고 있었다.
"질문 몇 개만 더 받아주세요! 질문 하나는 너무 작...."
"내가 졸린다고 했을 텐데"
또 다른 여기자가 순영의 행동을 저지했다. 하지만 여기자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말을 가로채는 순영이었다. 갑작스럽게 풍겨오는 커다란 위압감에 용감하게 요구를 하던 여기자는 일신의 말에 곧바로 입을 닫았다. 하필 높은 곳에 있는 덕분에 눈을 자연스레 내린 깔게 된 일신이었다. 일신의 내리깐 눈을 보는 순간 그 누구도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게 될 것이다. 눈 속에 깔린 경시와 얕보는 눈빛은 모두를 기죽게 했다. 일신은 여유롭게 뒤를 돌아 하늘 위로 걸어갔다. 그리고 큰 소리로 전했다.
"심심하면 또다시 이런 시간을 갖도록 하지. 정식적으로 회견장을 마련할 테니, 그때까지 근거 없는 소설들은 쓰지 말도록"
"...."
"한 번 더, 이런 식으로 학교 앞에 진을 치고 있다면 신경 안 쓰고 다 쓸어버릴지도?"
살짝 뒤 돌은 채로 주의를 주는 일신의 서늘한 말에 기자들은 하나둘씩 빠르게 장비를 챙겨 떠나갔다. 소환술없이 소환된 시간은 제약이 있었고, 뒤돌아가서 공중을 걷던 일신은 어느 순간 기숙사에 도착하기도 전에 공중에서 사라졌다.
-
"어? 음양 학당 훈녀님 아니세요?"
"진짜 죽일 거야"
다음 날, 여주가 등교하기 위해 문을 여는 순간 보이는 건 민현이었다. 민현의 얼굴을 보자마자 여주는 미간이 찌푸려졌다. 왜냐하면 입학실 날보다 민현의 얼굴이 좀 피곤해 보이고, 푸석해 보였던 것. 걱정되는 마음이 피어올라 민현에게 한마디 하려는 순간 민현이 입을 열어 여주를 놀렸다. 여주는 걱정 한마디 해주려던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리고 눈을 치켜뜨고 살인예고를 전했다. 그런 여주의 모습에도 끄떡하지 않고 웃을 거 다 웃는 민현이었다.
"여주야, 다 챙겼어! 가자"
"전날에 미리미리 좀 챙겨"
"요새 친구들이 생겨서 그런지 피곤한가 봐. 친구가 생기니까 전에보다 활동량이 많아져서... 오늘부터 꼭 챙기고 잘게!"
"친구들 생겼어?"
"응. 석민이 덕분에 알게 된 애들이야! 다음에 너한테도 소개해줄게"
"아니. 필요 없어, 신발 꺽지 말고 똑바로 신어"
"응!"
민현과 한참 옥신각신하다 은우가 뒤에서 나오는 소리가 들리자 여주는 잡고 있던 민현의 멱살을 놓고 은우를 쳐다보았다. 둘의 대화는 지극히 평범한 대화였다.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는 민현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슬며시 웃음이 나오는 민현이었다. 차별로 인해 웃는 얼굴 없이 항상 움츠리고 다니던 불여우와 당당해 보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어둡고 침울한 분위기였던 무영 세계에서 온 고등학생. 그 둘이 서로를 만나 그냥 평범한 고등학생이 된 것 같았다. 이제야 고등학생 얼굴이 나오네. 이것이 기분 좋은 변화라고 생각하는 민현은 여주와 은우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웃고 있었다.
"회장, 뭐해? 왜 혼자서 웃고 있어? 변태 같으니까 빨리 와"
민현이 따라오는 느낌이 느껴지지 않는 여주는 뒤로 훽 돌아서 민현에게 날카로운 말투로 말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훽 돌려 은우와 앞으로 걸어갔다. 민현은 여주의 말을 듣고 육성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투덜대는 여주의 말속에 같이 가고 싶다는 의미가 숨어있다고 생각하는 민현은 크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뒤에서 크게 웃는 민현을 뒤로 하고 여주는 앞만 보고 걸었다. 곧 민현이 옆에 올 것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아, 하여간 김여주, 귀엽다니까"
민현은 긴 다리를 옮기면서 여주와 은우의 뒤를 곧장 쫓아갔다.
-
등교 중, 민현은 여주가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바로 발을 돌려 학교 밖을 나갔다. 역시나 교장이 시킨 일을 해야 해서 학교를 나서는 것. 여주는 민현의 뒷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저거저거, 굳이 안 데려다줘도 되는데 또 일부러 온 거구먼? 여주는 한숨을 푹 쉬었다. 민현과 같이 등교하는 시간은 싫지 않았지만 안 그래도 피곤한 몸을 자기 때문에 더 움직이게 하는 건 싫은 여주였다. 점심시간도 일주일에 세 번 정도는 꼭 자신이랑 먹는 민현의 모습도 떠올라 여주는 다시 한번 세게 혀를 찼다. 은우는 민현이 나간 자리만 쳐다보고 있는 여주의 모습을 보면서 스리슬쩍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여주의 팔을 잡아끌어 홈베이스로 향했다. 여주의 1교시는 성연과 같이 듣는 국어 수업이었다. 여유롭게 국어실에 도착하니 미리 자리를 잡은 성연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성연의 손에는 물론이고 반에 있는 모든 학생이 성연에 손에 든 것과 같은 걸 읽고 있는 듯했다. 여주는 별로 관심이 생기지 않아 바로 성연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국어책을 펼쳐 지난 시간에 했던 페이지를 찾았다.
"여주님, 이거 봐요! 완전 예쁘게 나왔죠? 역시 곽영민 오빠. 사진을 그렇게 잘 찍는다더니, 뜬소문이 아니었어요"
".... 미친"
여주는 별 관심이 없었음에도 성연이 교과서 위로 들이미는 덕분에 궁금하지도 않던 성연 손에 들려 있던 정체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전날, 민기와 영민이 속해있는 방송부의 신문이었다. 그리고 그 신문의 1면은 대문짝만하게 '훈녀와 나!'라는 제목이 적혀있었고 여주의 사진이 석 장 정도 인쇄되어있었다. 그걸 보자마자 여주는 쪽팔려 죽는다는 게 무슨 기분인지 알 것 같았다. 분명 이런 기삿거리는 신문의 마지막 페이지에 조그맣게 넣어놓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화려하게 1면을 장식하다니. 여주는 인상을 쓴 채로 신문의 상태를 확인했다. 민기의 수정 능력으로 탄생한 여주와의 인터뷰도 실려 있었고, 인터뷰 끝나고 영민이 찍은 사진 석 장과 여주에 관해 주절주절 쓴 글이 있었다. '그녀는 자외선도 튕겨내는 강철의 피부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강철의 정신력도 가지고 있었....' 뭔 이딴.... 여주는 주먹이 쥐어졌다. 내용을 읽다 여주는 빠르게 고개를 올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신문의 1면을 읽고 있었다. 여주의 입에서 험한 욕이 곧 나올 것 같았다.
"얘네는 할 게 없데? 왜 다 이거 읽고 있는 거야? 지난 시간 내용 복습 안 해?"
"우리 학교 방송부는 재밌는 거 취재 많이 해서 다들 웬만하면 신문 정독하는 애들 많아요"
"...."
"그리고 복습은 저희도 안 하잖아요...."
"...."
괜히 신문을 읽고 있는 학생들을 욕하는 여주였고 성연은 그런 여주를 제지했다. 여주는 석민과 민현을 만나면 한 대 때려주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이런 인터뷰를 응하게 된 원인은 그 둘이 제일 컸으니까. 인생에서 흑역사라고는 찾아볼 수 없던 여주였지만 이로써 흑역사 하나가 만들어졌다. 여주가 쪽팔림에 해탈하고 있을 때, 여주와 성연 앞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
".... 무, 무슨 일로 여주님한테 찾아온 거야?"
"...."
"요?"
그림자의 주인공은 시연이었고 시연도 1교시는 여주, 성연과 같은 수업이었다. 시연의 모습에 놀란 성연은 말을 더듬으며 시연에게 왜 찾아왔냐고 물어봤다. 같은 학년이라 반말하는 게 당연했지만 아무 말 않는 시연이 무서웠던 것인지 곧바로 존댓말을 붙이는 성연이었다. 그런 성연을 보고 여주는 속으로 혀를 찼다. 동급생한테 '요'가 뭐야, '요'가. 그리고 '찾아온거야요'는 무슨 말이야. 하여튼 부승관군이던, 배성연양이던. 둘 다 쫄보네. 시연을 보고 안 떠는 척하고 있는 성연을 보고 고개를 젓는 여주였다.
"혹시, '훈녀와 너' 주인공이 네가 아니라 여주님이라서 해, 해코지라도 하러 온, 온거야?!"
".... 왜 그딴 식으로 이야기가 흘러가는 거야, 배성연 양?"
"여주님이 이번년도 첫 번째 훈녀가 되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하지만 아무 얘기 듣지 않고 자신의 망상을 말하는 성연은 언제 기죽어 있었냐는 듯이 시연의 눈을 정확히 바라보며 소리쳤고 그것에 어이없어지는 건 여주였다. 아니, 어떻게 생각하면 그딴 생각이 나오는 거지? 성연이 소리친 덕분에 반의 모두가 주목했다. 안 그래도 방송부 신문 때문에 쥐구멍을 찾았던 여주였는데, 이제는 구멍이 아니어도 좋으니 그냥 여기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성연은 멋대로 떠들고 있었다.
"여주님은 얼굴도 예쁘시지만, 영력도 강하시고 마음씨도 착하...."
"알겠으니까, 그만해줄래"
"...."
아까와는 다른 모습으로 쫄지 않고 당당하게 말하던 성연이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사방신은 겁이 났던 모양인지 시연의 말 한마디에 바로 조용해지는 성연이었다. 쪽팔림의 극치를 달리던 여주도 성연의 모습에 바람 빠진 웃음소리가 나왔다. 반에서 보는 시연은 특별 수업 때와의 시연과 또 다른 모습이었다. 귀여운 막내 이미지의 특별 수업과는 다르게 지금 모습은 영락없는 얼음 공주였다. 확실히, 시연이 풍기는 분위기는 차가웠고, 다가가기 힘든 분위기였다. 왜 그렇게 승관과 성연이 사방신에 대해서 겁냈는지 알 것 같은 여주였다.
사실은 성연이 시연을 무서워하는 것뿐만 아니라 시연도 성연을 무서워하는 중이다. 여주에게 할 말이 있어서 찾아왔는데 갑자기 큰소리를 내면서 뭐라고 하는 성연이 무서웠다. 무서워서 가만히 듣고 있다가 자신의 의도는 그런 게 아니라는 걸 말하려고 했지만 성연이 무서워서 긴장한 탓에 경직된 목소리와 함께 딱딱한 말투로 성연에게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 .... 시연은 자기가 어떻게 말하고 그것이 어떻게 들리는지 잘 몰랐다. 덕분에 성연은 얼어붙어버렸다. 성연의 머릿속에는 '나 지금 뭐한 거지'라는 생각이 지배했다.
"여주 언니, 저랑 얘기 좀 해요. 여기는 사람이 많으니까 나가서..."
성연이 조용해지자 다행이라 생각한 시연은 곧바로 여주에게 말을 건넸다. 아까 성연에게 했던 말투 그대로 여주에게 말하는 시연이었다. 역시나 시연은 긴장 중이었다. 특별 수업 말고 정규 수업 시간에 여주와 말을 섞는 건 처음인 시연은 긴장해버린 것이었다. 그렇지만 여주 눈에는 특별 수업 실에서의 시연의 모습이 강하게 남아있기에 그런 말투를 들어도 별다른 느낌을 못 느끼는 여주였기에 주저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리 난 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여주를 바라보는 성연이었다. '아니, 또 신수 대결이라도 하시려는 건가. 아니야, 이번에는 그냥 주술 대결일지도 몰라. 아직 여주님, 주술이 비정상적으로 셀 텐데 박시연 얘가 다치는 거 아니야? 현무 다치면 고소가 들어올....'라고 생각하는 성연은 불안한 눈빛으로 여주와 시연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교실 밖을 나서는 시연과 여주의 모습에 뒤따라 나가려 했지만 여주가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하는 덕분에 다시 제자리에 재빠르게 앉았다. 사실, 따라가기 무서웠거든.
-
"와, 미친.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머리채 잡고 싸우더냐?"
"따라 나가지는 못 했어요. 여주님께서 오지 말라고 하셔서"
"아, 중요한 순간에서 끊기네. 그래서 김여주, 박시연이랑 뭐 했는데? 그만 먹고 빨리 알려줘!"
아이들, 석민, 은우와 점심시간을 가진 여주였다.(민현과 종현은 일이 있어서 같이 못 먹었다) 다들 하나둘씩 자리에 앉고 밥을 먹기 시작하였다.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성연이 1교시 시작 전에 있었던 일들을 말해주었고 다들 흥미롭게 듣고 있었다. 여주는 고개를 저었지만. 그중 제일 재밌게 들고 있었던 건 석민. 역시 남 싸우는 얘기가 제일 재밌다는 석민이었다. 여주는 절대 석민의 질문에 답을 해주지 않았다. 먹음직스럽게 생긴 돈가스를 잘라 입에 넣고, 국을 떠서 먹고, 밥을 한입 먹을 뿐, 절대 대답해주지 않았다. 아니, 대답해줄 수가 없었다. 말한다면 백 퍼센트의 확률로 석민의 놀림이 뻔했기 때문에. 석민이 옆에서 졸라 대고, 한솔도 궁금해하고 승관도 물어보았지만 굳건히 입을 닫은 여주였다.
'언니, 피부 관리 비법 없어요? 진짜 타고나야 하는 거에요?'
'평소 즐겨 입는 패션은 츄리닝이라면서요. 어디 츄리닝 입으시는데요? 혹시 10시 10분 브랜드 츄리닝 입으세요?'
'언니, 편식하는 거 정말 없으세요....? 저 브로콜리 싫어하는데....'
시연과 복도에 나가서 했던 이야기들을 떠올리는 여주는 더더욱 굳게 입을 닫았다. 절대 말 안 할 거야. 전날과 비슷한 상황이 되풀이되는 듯했다.
-
"여주야, 어디 가?"
"그걸 내가 알려줘야 하는 이유는?"
모든 정규 수업이 끝나고 힘든 몸을 이끌고 특별 수업 실로 향하는 여주 곁에 민규가 찾아왔다. 벌써 더 피곤해지는 느낌에 여주는 퉁명스럽게 민규를 대했다. 하지만 역시, 아랑곳 하지 않는 민규였고 여주의 발걸음에 맞춰서 어딜 가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걸어갔다. 안 그래도 마지막 교시가 체육-이라 쓰고 무술이라고 읽는다. 여주는 무술 젬병-이라 피로가 다른 날보다 쌓인 채로 민규를 만나니 기분이 썩 유쾌하진 않았다. 민규가 귀찮게 하는 것도 있고 또,
"여주야, 좋아해"
계속 이런 식으로 뜬금없이 고백을 해온다. 어제도, 음의 숲을 빠져나오면서 '좋아해'를 열댓 번은 들은 것 같았다. 그리고 마주칠 때마다 꼭 한 번씩은 좋아한다고 말해주는 민규였다. 할머니한테 '손녀, 사랑해'라는 말만 들어봤지, 좋아한다는 말을 생전에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여주는 '좋아해'라는 말에 면역이 전혀 되어있지 않아 괴로웠다. 민규가 좋아한다고만 말하면 막, 몸이 꿈틀거리며 안쪽으로 말리는 듯한 느낌이 들고 그 말에 꼭 답을 해줘야 할 것 같은 느낌에 속으로 안절부절못하는 여주였다.
"특별 수업실 가는 중이야. 알려줬으면 됐지? 이제 가"
"아, 맞다. 일신도 특별 수업 받지? 깜빡했다"
민규가 좋아한다는 말이 끝나자마자 여주는 자신이 어디 가는지 얘기해주었고 얘기해준 이유는 민규와 빨리 떨어지고 싶어서. 누가 들어도 상처받는 목적이지만 민규는 태평스레 바보같이 웃고 있었다. 여주는 '이제 빨리 사라져주지 않으렴?'하는 눈빛을 가득 담아 민규에게 쏘아 보냈지만 민규는 눈치가 없는 것인지 그냥 모른 척하고 가는 것인지 여주의 발걸음에 맞춰 계속 여주 옆에 있었다.
"걸을 거면 빨리 걷던가. 아니면 길 막지 말고 비키던가"
뒤에서 들려오는 짜증 섞인 미성의 목소리에 여주와 민규가 동시에 뒤를 쳐다보니 목소리만큼이나 짜증 난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지훈이 보였다. 지훈을 보자마자 지훈과 똑같은 표정으로 바뀌는 여주였다. 그리고 크게 한숨을 쉬었다. 아니, 옆에 빈 곳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내가 걷고 있는 길로 걷겠다는 심보는 도대체 뭐지. 여주는 어이없음, 황당함, 짜증 남이라는 감정을 동시에 겪고 있었다.
"네가 피해서 가면 되잖아. 굳이 내가 비켜줘야"
"와, 너 되게 귀엽다. 네가 사방신의 주작이었던가?"
"...."
지훈에게 여주가 한마디 하려는 순간, 민규가 끼어들었다. 여주는 그 말을 듣자마자 미간만 살짝 찡그리고 있던 표정에서 모든 얼굴의 여백을 다 구긴 채로 민규를 쳐다보았다. 여주가 감정 상태를 얼굴에 드러내는 경우는 잘 없었다. 그런데 드러냈다는 것은 지훈이 귀엽다는 말에 크게 반박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문장의 주체인 지훈은 여주보다 더 구겨져 있었다. '내가 귀여워?' 1학년 때, 학기 초, 모르는 많은 아이가 그런 식으로 말하면서 다가왔었다. 지훈은 그때가 살짝 떠올려져 비소를 흘렸다. 그때 그랬던 애들을 내가 어떻게 해줬더라. 지훈은 곰곰이 그때를 생각했다.
"아, 이렇게 작아서 내가 널 잘 못봤던거구나"
"...."
"앞으로 친하게..."
"야"
민규는 지훈이 싫어하는 말들만 골라서 말했고, 친해지기는 틀려먹었다. '키가 되게 작다', '귀엽다', '친해지고 싶다' 지훈이 최고 싫어하는 말 3위이었다. 원래 지훈 자체가 사람과 쉽게 친해지지 않는 성향의 사람인데 싫은 말만 골라 하는 민규가 좋아 보일 수가 없었다. 지훈은 민규가 말하는 도중에 말을 끊었고, 민규는 자신의 말이 끊기든 말든 상관 없이 지훈이 자신한테 말 걸자 놀라 아무 말 하지 않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대답을 대신했다.
"닥치고 좀 꺼져. 주화(做火)"
지훈은 너무나도 예쁜 눈웃음을 보이면서 주술을 민규에게 걸었다. 지훈의 엄지 손가락과 중지 손가락이 마찰을 내면서 나는 경쾌한 '딱'소리가 퍼짐과 동시에 작은 불씨들이 생겨나더니 민규의 엉덩이 부근에 빠르게 움직여 엉덩이를 열심히 공격했다. 너무 뜨거운 데다가 따가운 걸 넘어서 아픈 느낌에 민규는 소리치면서 제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복도를 내달리기 시작했다. 아마, 자신이 빠르게 뛰면 못 따라잡을 것으로 생각한 듯했다. 지훈은 그 모습을 보며 얼굴에 '평온함'이 자리 잡혔다. 그렇다. 지훈은 1학년 때, 민규처럼 말하는 아이들, 혹은 지훈의 집안, 신수를 보고 껄떡(?)대는 아이들의 엉덩이에 항상 주화(초급 주술로, 작은 불씨를 만들게 해서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를 사용하여 엉덩이에 불을 쏴주곤 한 지훈이었다.
"가림막이 없어서 좋네"
지훈은 정말 시원하다는 말투로 말했고, 뒷짐을 지며 특별 수업실로 걸어갔다. 여주는 지훈의 뒷모습을 보고 생각했다.
저 새끼한테 나대면 안 되겠다.
- 다음 편에 계속
+ 기억 안 나실까봐 첨부하는 빅스 도원경 사진(음양 학당 교복)
- 허리춤에 부채 대신 학년 노리개
+ 순영이 착장
- 엔님이 입고 계신 착장(오른쪽에서 두번째)
+ 앞으로의 암호닉 신청은 최근 화에 댓글 달아주시면 됩니닷!!! (암호닉... 하악...)
읽어주시고 댓글 달아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점점 늘어나는 댓글을 보며 뿌듯함도 느끼고 있고, 더 잘 써야겠다는 책임감? 같은 것도 늘고 있답니다. 다시 한번 더 감사드립니다!! ♥
[암호닉]
♥ 에밀 롕 3536 젠부 딸기빵 0846 마릴린 요플레 서랑 감자 딩동 랭 체리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