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시작
정국이는 어떻게 생겼냐면 말이지. 일단 상큼한 동물을 떠오르게 하는 올망졸망하게 생긴 동그란 코는 귀엽고, 높고 매끄러운 콧대를 따라 올라가면 마주치게 될 유독 반짝이는 큰 눈은 참 깊다. 짙은 쌍꺼풀이 자리 잡혀있는 눈이지만 속눈썹이 예뻐서 그런지 부담스럽지 않은, 보면 그저 떨릴 뿐인 바다 같은 눈동자는 장난스럽고도 진중하다. 그 눈 밑의 애교살은 또 얼마나 도톰한지 만져보면 정말 말랑말랑할 것 같고 달처럼 차오르는 게 사랑스럽지만 실제로 가까이서 본 적은 없는 게 흠이라면 흠이다. 그리고 야무지게 올라가있는 입꼬리는 보조개처럼 파인 듯 선명해, 잘못보면 스치는 날 보고 웃는 것 같아서 넘어질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지. 또한 안에서 공부만 해서 그런지 밝은 피부색은 뽀얀 피부결과 어우러져 언뜻 깐달걀 같아보이기도 했고 그에 대비되는 살랑이는 검정색 머릿결도 빛났다. 뭉툭하고 조금 짧은 턱과 유독 돋보이는 앞니 두 개는, 또 어찌나 귀엽고 천진해보이는지. 근데 또 이상한 건, 앞니와 상반되게 단단한 얼굴형은 어른다운 느낌을 받게 해서 내 맘을 그렇게 된통 흔들어 놓는지 모를 일이기도 하다. 전체적으로 모난 데 없이 유하고 곱디 고운 인상이지만 그 안에 한없는 매정함도 보이는 정국이는, 내 눈엔 언제나 온정을 베푸는 작은 토끼처럼 보이는 날이 많았다.
"흡.."
맞아, 그리고 넌 동복이 참 잘 어울렸었지. 다른 애들보다 유난히 눈이 초롱초롱한 너는 이 사진에서도 빛나는구나. 근데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눈이 정말 크긴 크다. 너무 커서 눈동자를 움직이면 움직이는 대로 소리가 나는 건 아닌가 싶다. 도르륵, 도르륵 이렇게. 지금 보는 것처럼 정국이의 밝은 모습은 정말이지 내게는 귀했다. 웃느라 부드럽게 접혀있는 눈가와 씨익 올라간 입꼬리는 내 보물이었기 때문에. 여느 날과 다를 것 없는 쉬는 시간, 사물함에 있는 휴지를 꺼내려다 그 위에 수북하게 쌓여있는 학교 홍보 책자에 오늘도 시선이 묶여버렸다. 굳이 펼치지 않아도 표지에 대문짝하게 자리해있는 보기 좋은 정국이와, 보고 싶지 않은 여자 아이들 사진에 오늘도 여러 의미로 주먹을 문다. 정국이 어깨 위에 올라가 있는 손과 누가 봐도 예쁘게 마주 보고 웃는 두 선남선녀. 종이 느낌만 날 뿐인 정국이를 어루만지다 마음속의 눈물을 훔친다.
“가져가면 안 된다고 그렇게 말해도.. 혹시 넌 누가 가져가는 거 본 적 있니? 걸리기만 해봐. 바로 벌점이야.”
그때 한숨을 푹푹 쉬며 책자 도둑들을 탐색하러 나오시는 부장쌤 때문에 앓다가 흠칫 놀랐다. 학교 방문객을 위해 비치해놓은 게 자꾸 사라진다며 답답해하시는 기색이다. 저는 잘 모릅니다만, 누구긴 누구겠어요. 자습실에 두 개씩은 꽁쳐놓은 다 저 같은 닝겐들이겠죠. 잘 모르겠다며 둘러대고는 제 발 저린 도둑은 허둥지둥 교실로 피했다. 아무래도 화장실은 수업 중간에 가야겠다.
우리 학교 2학년은 문과 네 반, 이과 다섯 반으로 총 9반이다. 1~4반까지는 문과, 5~9반은 이과고 유일한 남녀 합반인 문과 3반을 제외하고는 모두 남녀 분반으로 구성되어있다. 문과는 여자가 많아 네 개 반 중 절반이 여자 반이었고, 반대로 이과는 남자가 많아 다섯 개 반 중 세 반이 남자 반이었다. 이 많은 9개의 반은 한 층에 다 몰빵되어있어 1반부터 9반까지 50미터는 족히 넘었다. 중간에는 한 개의 계단 복도도 있었긴 했지만 그래도 좀 과하게 먼 거리였다. 음, 하여튼 정리하자면 나는 문과 여자 2반, 정국이는 문과 남자 4반이라는 얘기인데 내가 딱 3반이었으면 바로 옆 반이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조금 남아있긴 하다. 그래도 내가 이과가 아닌 걸 천만다행으로 여겼어야 하는 게, 이과 여자 반인 5반부터는 4반과의 사이에 계단 복도와 교무실이 있어 분리되기 때문에 상상하면 눈물이 절로 앞을 가리는 일이었다. 문과와 이과는 정수기와 화장실, 심지어 급식실도 따로 써서 정말 하마터면 정국이를 코빼기도 못 볼 뻔한 거다. 아쉬워지려다가도 정신이 번쩍 들고, 새삼 내가 문과인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정수기 앞으로 향했다. 잊지 않고 치마 주머니에 휴지도 두둑이 챙겼고 텀블러의 뚜껑이 꽉 닫혀있는 것도 잘 확인하고서 들고 나왔다. 수업하는 선생님들의 목소리가 옅게 울려퍼지는 복도에는, 4반 앞에 있는 정수기로 향하는 내 실내화 소리도 더해졌다. 4반 앞에 같이 있는 정수기와 화장실은 내가 또 감사해하는 것들 중 하나였지. 항상 기가 막히게 내가 정국이를 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니까.
“...”
숨죽이며 정수기 앞으로 조용히 다가갔다. 물을 뜨며 까치발을 들고서 4반 안을 힐끗힐끗 훔쳐보기 시작했다. 이놈의 반은 자리를 하도 자주 바꿔서 내가 매번 정국이의 자리를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이런 기회가 생길 때마다 항상 기를 쓰고 너를 찾아야 찾을 수 있는데 오늘은 좀처럼 정국이가 잘 안 보인다. 열성적인 수업을 하는 윤리 선생님 눈을 피해가며 열심히 짧은 점프를 해대는데,
“...”
그제야 정국이를 찾았다. 서있는 책상에 있었구나. 물을 다 뜨고 한참이나 지난 후에야 보이는 정국이에 그래도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근데 오늘따라 졸려보이는 정국이는 서있는 책상에서 고개를 숙이고 잠깐 눈을 감았다가 뜨고 있었다. 느려진 깜빡임에, 그래 정국이도 사람이었지 하며 텀블러 뚜껑을 덮었다. 내 기억으로는 정국이가 조는 것도 처음 보는 것 같아서 이따가 나영이한테 말해줘야겠다 싶었다. 뱅글뱅글 텀블러를 닫고서도 왠지 계속 욕심이 나 정수기 앞에서 계속 점프를 해댔다. 더 보고 싶은 마음에 윤리쌤이 눈치 못 채게 조용하고 높은 점프를 선보이고 있는데 하필 그때 미끄러져버린 실내화.
“헛..!”
복도를 쩌렁하게 울리는 쿠당탕 소리와 생각보다 큰 음량의 내 목소리. 어제 어깨의 고통과는 상충될 수 없는 뻐근한 엉덩이에 나도 모르게 그 자리에서 으.. 하고 더 아픈 소리를 냈다. 그때 밖에 무슨 소리지, 하는 윤리쌤의 목소리에 깃발이 올려진 경주마처럼 어택 당한 엉덩이를 이끌고 화장실 안으로 냅다 튀었다. 또 넘어질 뻔하게 화장실에 들어와서야 교복을 살피는데 이런, 엉덩이가 폭삭 젖은 건 물론이고 셔츠에 물을 또 흘렸다. 아파서 마비된 것 같은 엉덩이 때문에 속으로 치밀어오르는 울화와 함께 터지는 실소. 내가 지금 뭐한 거지 싶은 생각에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왜 이렇게 바보 같냐.
여기가 맞는 것 같다. 저번에 다른 반 친구가 상담 갔다 왔던 얘기 풀어줄 때 잘 귀 기울여 들어 학원 이름을 기억해서 망정이지. 자리가 빈 걸 알았는데 정작 그 학원이 어딘지도 몰랐으면 세상에서 제일 슬픈 사람이 될 뻔했다. 조퇴증 끊어서 석식 급식도 포기하고 왔는데 생각보다 잘 찾아와서 다행인 일이었다. 근데 예상치 못한 복병을 만났다. 오.. 내가 사는 아파트랑 방향이 정반대다. 집에 갈 때 고생 좀 하겠다 생각하며, 일단 화이트 톤에 조명이 쨍하게 밝은 내부가 보이는 유리문을 소심하게 밀었다. 정중앙에 있는 인포 데스크에 선생님 같은 분이 프린트를 정리하고 있었는데 인기척이 들리자 이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처음 보는 학생인데.. 어떻게 왔어요?”
“아, 저, 그 어제 전화 드렸는데 오늘 테스트 보러 오라고 하셔서.”
“아, 어제 어머님께서 전화 주셨던 2학년 문과?”
“네. 맞아요.”
“어머님이랑 통화했던 사람이 나예요. 음.. 가만 있어보자.. 그럼 일단은 거기 소파에서 기다릴래요?”
“네.”
다행히도 우리 엄마와 통화했던 분이어서 바로 말이 통할 수 있었고 나를 앞에 두고 잠시 고민하시다 프린트를 재빠르게 챙겨 강의실이 있는 것 같은 복도로 향하셨다. 그래도 쌤이 나를 꽤 반기는 눈치라 다행인 것 같다.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소파에 다가가 앉으니 그제야 학원 내부가 눈에 자세히 들어온다. 화이트 톤에 맞춘 건지 소파와 에어컨과 화분은 빈틈없이 하얬다. 여기 있으면 뭔가 피부색도 밝아질 것 같아.. 너무 쨍하단 생각을 잠시 하다가 눈길이 닿은 교무실과 원장실. 저 인포 데스크를 중심으로 한 쪽은 교무실과 원장실이 있었고, 아무래도 다른 한쪽은 강의실이 이어지는 복도가 맞는 것 같았다. 여기서 봐도 문이 좀 많이 보이는 것 같았기 때문에. 근데 학원이 크기에 비해 학생들이 생각보다 별로 안 보인다. 물론 수업 중이거나 아직 수업 시간이 아닌 학생들도 있겠지만 예상보다 훨씬 휑한 학원 로비에 나 홀로 멀뚱멀뚱 앉아있으니 이만큼 뻘쭘한 게 없다. 그러다 저 멀리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와 혹시나 싶어 두리번거렸다.
“...”
선생님이길 바랐지만 소리의 방향이 달랐다. 내가 방금 열고 들어온 문에서 나는 소리였다. 우리 학교 교복을 입은 갈색 머리의 남자애가 들어오는데 괜히 반가워 잠시 눈이 마주쳤다. 분명 처음 보지만 어딘지 모를 구석이 낯익은 애인데. 누구지, 싶어서 나도 모르게 잠깐 스치듯 마주쳤던 눈길을 잡아 따라붙었다. 아, 누구지. 이름은 당연히 모르겠지만 그냥 같은 학교라 오다가다 본 거였으려나.
“...”
“...”
미안. 난 그냥 큰 뜻 없이 얼떨결에 계속 봤던 건데 그런 내가 많이 거슬렸니. 같이 마주보던 눈빛이 약간 쌀쌀해져서 먼저 눈길을 피했다. 나쁜 뜻으로 본 건 아니었는데 날 보는 눈빛이 완전 상관없는 사람 보는 눈빛이라 약간 주눅들어버렸다. 그래, 상관없는 사람이 맞기는 한데 그렇게 차갑게 보니 조금은 무섭구나. 이제 보니 표정 없는 얼굴이 좀 무섭게 느껴지는 인상이다. 정색 잘할 것 같아. 명찰 색 보니 나랑 같은 학년인데 왜 이렇게 선배 느낌이 나는 건지.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내가 수업이 있어서. 일단 교무실로 올래요?”
“네.”
“쌤, 저 문제 풀이는요?”
“이따가, 이따가. 기다려봐.”
이유 없이 하던 그 남자애와 눈싸움을 피하고 따라 들어온 교무실 안. 선생님이 앉으라는 자리에 앉아 수학과 영어 시험지를 받았다. 보니 사설 모의고사 시험지였다.
“영어는 듣기 빼고 풀고 있어봐요. 강의실 하나라도 주고 싶은데 지금 남는 데가 없어서 여기서 풀어야겠네. 미안해서 어쩌나.”
“괜찮아요.”
“착하네. 이해해줘서 고마워요. 그럼 풀고 있어요.”
선생님은 무슨 프린트를 챙겨서 다시 쏜살 같이 나간 후 가방을 풀어 필통을 꺼내는데 문득 드는 생각. 설마 이거 다 풀라는 건 아니겠지? 아니, 이거 다 풀면 족히 2시간이 넘는데? 에이, 설마. 아닐 거야. 지금 저녁도 못 먹었는데 얼른 집에 가서 밥 먹어야지.
“응, 태형아. 풀이한 거, 여기. 오답은 해왔어?”
“흐흥, 한 번만 봐주세요. 내일 해올게요.”
“너 이렇게 밀리기 시작하면 끝도 없어. 오늘 다 하고 가.”
“아.. 쌤...”
뭘 먼저 풀지 쓸데없는 고민을 하고 있는데 밖에서 들리는 대화 소리. 그 남자애 인상은 무척이나 도도한데 말투에는 다소 애교가 섞여있었다. 그러다 잠깐 멍때리는데 눈에 들어온 벽 시계. 5시 17분. 이거 영어 하나 끝나면 6시는 넘겠네. 근데 정국이는 학원을 매일 다니나? 이따 오는 건가? 정호석이라는 애는 잘 모르겠고 정국이는 자습 조금 하다가 학교에서 석식 먹고 맨날 어디 가는 것 같던데. 오늘 왔으면 좋겠다.
아, 진짜 이러다 눈알이 빠지는 신세계를 경험하겠다. 혹시나 정국이를 볼 수 있을까, 영어를 초스피드로 다 풀고 보니 이제 6시를 막 넘어가는 시각. 혼신의 힘을 다해 일단 영어를 물리쳤는데 날 비웃듯이 아직 눈앞에 남아있는 수학. 이 역경을 또 어떻게 헤쳐나가나 숨 돌릴 틈도 없이 실의에 빠져있는데 문을 열고 들어오는 반가운 얼굴. 수업이 끝났는지 밖이 시끌시끌하다.
“풀고 있어?”
“네. 아직이요.”
“영어는 다 풀었네. 빨리 푸는구나.”
네. 이건 저도 신기록이에요.
“그럼 채점 먼저 해볼까.”
네? 제 눈앞에서 채점이요? 너무 잔인한 거 아닙니까..! 소리 없는 포효를 하고 있는데 아무렇지 않게 색연필을 들고 오는 선생님. 그 자리에서 문제를 바로바로 풀면서 채점하신다. 선생님들은 진짜 이럴 때가 제일 멋있는 것 같다. 방금 내 수험생활의 위기감을 느꼈던 것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선생님이 만드는 연속되는 동그라미들에 황홀했다.
“잘하네. 두 개 틀렸어. 어려운 편이었는데.”
“...”
“태형이랑 같은 학교라고 했지?”
“네?”
“아, 모르는구나. 그러면 정국이는 아니? 전정국. 같은 문과인데.”
“네. 알아요.”
아유, 그럼요.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정국이 사생활 빼고 다 알아요. 채점한 시험지를 제대로 접어 정리하던 쌤이 혼자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이어 말하신다.
“같은 학교면 어차피 수학도 좀 하겠네. 그럼 우리 학원 다니는 걸로 할래?”
“네, 네!”
“깜짝이야. 원래 다니고 싶었어?”
“저.. 그. 네.”
선생님은 내 수학 실력을 간과하여 합격시켜주셨고 난 놀랄 만큼 기뻐했다. 내 갑작스런 표정 변화에 당황한 듯 보인 선생님은 하하, 웃으며 날 귀엽게 봐주시는 듯 했고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평정을 찾는 척 했지만 사실 내 심장은 아직 한창 나대고 있었다. 대박이다. 진짜 내가 이 학원을 다니게 됐다.
“그러면 일단 학원이 어떻게 운영되는지 설명해줄게.”
“네.”
아직 웃음기가 남아있는 얼굴로 옆에서 의자를 끌어온 선생님이 내 옆에 앉으셨다. 책상 위 파일 더미들 사이로 꽂혀있는 A4 용지를 꺼내 펜으로 써주시면서 설명해주시는데 귀에 쏙쏙 들어오는 내용과 발성이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 선생님은 빼박 1타겠구나.
“첫 번째로 우리 학원은 수학이랑 영어를 가르쳐. 어제는 두 과목 다 수강한다고 들었는데, 맞니?”
“네, 네.”
“그러면 일단 네 시간표는 평일 5일 내내, 수업은 다 7시 이후로 있을 거야. 7시부터 10시까지 영어랑 수학 순서로.”
“네.”
“먼저 영어는 너희 학교 학생들끼리만 묶어서 하는 거고, 수학은 다른 학교 문과 친구들이랑 섞여서 같이 하게 될 거야. 옆에 여고 알지?”
“네.”
“수학은 거기 애들이랑 같이 들을 거야. 그리고 혹시 독서실 다니니?”
“네. 근데 평일에는 석식 먹으려고 10시까지는 학교에서 하다가 와요.”
“그러면 7시 수업이니까 석식 먹고 학원차 타고 오면 딱 되겠다. 저녁 6시부터 먹는 거 맞지?”
“네. 근데 학원차도 있었어요?”
“그럼. 밤길 위험하니까. 음.. 내가 알기론 너네 학교에 학원차가... 6시 40분쯤에 오는 걸로 알고 있는데. 기사님께 확실히 여쭤보고 내일 문자해줄게.”
“네. 감사합니다.”
“그래. 오랜만에 새로운 학생 보니 반갑고 좋다. 잘 지내보자.”
“네, 선생님.”
조목조목이 핵심만 간추려서 설명해주시는 선생님의 얘기를 열심히 귀 담아 들었다. 요약해주시며 종이에 적으신 ‘영어는 같은 학교끼리’, ‘수학은 다른 학교와’, ‘학원차 6시 40분?’을 봤다. 내가 다닐 학원의 핵심 세 가지였다. 정국이, 정국이, 정국이. 얘기를 들으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 올라가는 광대에 표정 관리가 안 됐나 본데 그런 내 얼굴을 보고 좋아서 그런가보다, 느끼시며 따뜻하게 반겨주시는 선생님에 덩달아 진짜 기분이 좋아졌다. 선생님도 좋은 분 같고 상황도 너무 좋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오늘 나와 같이 조퇴하고 싶다며 꾀병을 부리고 신나게 집으로 간 나영이와 통화 중이다.
“야, 나 진짜 다닌다!”
"뭐?? 진짜로?? 꺄아아아!"
"대박이지? 대박이지? 나 대박이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진행형으로 말투가 격앙되어 이 기쁜 소식을 전하는데 핸드폰 너머의 음성이 나보다 더한 반응을 보인다. 내 말을 듣고 집이 떠나가라 비명을 질러 같이 좋아해주는 나영이에 마음은 더 들떴다. 그러다 이내 마음을 조금은 가라앉히고 진지한 말투로 내게 말한다.
"너 정말로, 진짜로 멋있다. 너무 찌질하게 좋아해서 내가 다 안쓰러웠는데.."
"야.. 난 그게 내 딴에는 적극적인 거였다고.."
"진짜 너~무 축하해. 그러니까 이제 좀 짝사랑 같은 짝사랑을 좀 해봐. 먼저 고백도 하고! 어?"
"몰라.. 하여튼 진짜 대박이지? 빨리 알려주려고 학원 나오자마자 전화했어!"
..찌질하다니. 내 딴엔 지금껏 해온 것들이 최대치로 용감한 행동들이었는데.. 작은 해명을 하고서 관계 발전을 응원하는 나영이 말을 쉽게 각설해주고 주체 안 되게 계속 떠있는 마음을 내뿜었다. 기분도 좋은데 내일 나영이 아이스크림 사줘야겠다, 생각하며 핸드폰이 뜨거워질 때까지 통화하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일찍 일어난 아침. 오늘은 학원 첫 날이니 불굴의 의지로 평소보다 훨씬 이르게 눈을 떠 목욕재계를 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 있으므로 절대 부정타면 안되는 날이니까. 내가 뭐, 학원에서 넘어진다거나 방귀를 뀐다거나.. 반드시 불상사가 없어야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씻고 나온 뒤 경건하게 머리를 빗고 말렸다. 원래 선풍기로 머리 말리는 시간엔 잠이 쏟아져 꾸벅꾸벅 졸았지만 오늘만큼은 누구보다 말똥말똥했다. 머리를 보송하게 다 말리고 나서 학교에서 먹을 과자랑 나영이 아이스크림 사줄 돈도 좀 챙겼고, 학원 교재도 이미 나한테 있는 책이라 단단히 챙겼다. 웬일로 아침도 먹고 나왔고 오늘따라 운동화도 더 하얘보여 발걸음이 붕 떴다. 인도 블럭 모양도 요리조리 각진 게 오늘따라 재밌었고 이제 곧 여름이 오려는지 이슬이 앉은 아침 냄새에 기분 또한 좋아졌다.
"나 오늘 좀 평소보다 나아?"
"뭔 개솔. 존똑."
"히힛. 응."
오전 수업 때는 시간에 추를 단 듯 분침이 깨작깨작 갔지만 밥을 먹고서부터는 시침에 바퀴를 달았는지 순삭이었다. 그 덕에 지금은 6교시 쉬는 시간. 곧 있을 7교시는 수업이 아니라 전교생이 참여하는 화재 예방 훈련이었기 때문에 지금은 일사불란하게 반별로 줄을 서 운동장으로 내려가는 중이었다. 불이 났는데 매번 무슨 정신으로 신발을 갈아신으라는 건진 이해불가였지만 그래도 벌점 때문에 얌전히 말을 들었다. 밖으로 나와 까끌한 운동장 흙바닥을 밟는데 오늘따라 흙 알갱이들이 작고 부드러운 것 같다. 왠지 모르게 또 기분이 좋아져 나도 모르게 헛소리를 좀 했는데 단박에 2절을 블락하는 나영이에 슬쩍 웃었다. 평소 같았으면 아까 아이스크림도 사줬는데 너무하네, 했을 텐데 지금은 전혀. 띠꺼운 나영이 말투는 안중에도 없었기에 웃으며 수긍하고서 우리 반 줄에 두 줄로 서는데 조회대의 거대한 스피커에서 나오는 목소리에 귀가 찢어질 뻔 했다.
"반별로 줄을 서주세요. 가장 늦게 서는 반은 뒷정리하고 갑니다."
아휴, 그 놈의 뒷정리. 오늘은 소방차도 오고, 그 언제나 하는 드럼통에 불 붙여놓고 불 끄기 퍼포먼스 하는 거라 위험해서 정리랄 것도 없을 텐데. 지레 겁부터 줘서 교통정리하려는 속이 뻔히 보이는 부장쌤 말이었지만 오늘만큼은 참 현명해보였다. 그래, 저렇게 얘기해야 상황이 정리되지. 우리는 선생님들이 지도하는 열에 맞춰 가운데 반경을 아주 넓게 잡아놓고 철푸덕 앉았다. 차근차근 정돈되는 운동장에 저쪽에서 대기 중이던 소방차와 드럼통이 이쪽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생각없이 퍼포먼스가 준비되기를 가만히 기다리는데 관대함으로 하루를 대하고 있던 것도 잠시, 쨍쨍한 햇볕 아래에 전교생이 다닥다닥 붙어있으니 점점 더워지는 탓에 불쾌지수가 금방 고개를 내밀려고 하고 있었다. 오늘 좋은 날인 건 맞지만 사실 더운 건 더운 거였으니까. 짜증이 솟구칠 것 같아서 내 활력소를 찾아 힘을 얻어보려 했지만 아무리 두리번거려도 4반은 어디로 간 건지 보이지 않았다. 낙담을 하는 사이 드럼통 퍼포먼스가 시작될 기미가 보여 시선을 돌렸다. 드럼통 안에 있는 기름을 묻힌 장작은 활활 타기 시작했고 뒤에 있던 소방관 분들이 와서 물을 뿌렸다. 그리고 시작된 썸머 스플래쉬. 하늘을 향해 뿌려지는 어마어마한 물방울들은 보슬비 내리듯 떨어져 전교생들의 더위를 식혀줬다. 다들 신이 나 얼굴에 웃음꽃이 폈고 나도 그들 중 하나였다. 그래, 이게 여름의 낙이지. 물놀이 같은 거 하면서 열 날려버리는 거. 올 여름방학엔 오랜만에 꼭 물놀이를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온몸으로 떨어지는 물방울들을 즐겼다. 그때 어느 한 쪽에서 우와 우와, 거리는 소리가 퍼지기 시작했고 전교생들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와. 무지개다."
모두의 눈길을 따라 인상을 쓰고 쏟아지는 햇빛 쪽을 바라보는데 기분 좋게 내리는 보슬비에 조심스레 자리잡은 무지개가 보였다. 그림 같은 상황과 노곤한 분위기가 연출된 것처럼 낭만적이어서 멍하니 그쪽에 시선을 그대로 묶어두었다. 이런 예쁜 장면을 또 언제 볼까 싶어 목이 아플 정도로 계속 눈에 담아두는데 강렬한 자외선이 내 고개를 누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보다가는 금방 실명이라도 할 것 같아 내 남은 삶을 위해 잠깐 고개를 숙이려는데, 생각지 못한 곳에서 딱 발견한 4반의 어떤 애. 이름은 모르지만 일본어 수업할 때 봤던 것 같아서 얼른 그 주위를 살피는데,
"꺄힉!!"
그와 동시에 귀에 파고든 높은 남자 목소리의 감탄사와 함께 찾은 정국이. 옆에 정호석은 입이 찢어져라 박수를 치며 좋아하고 있었고 머리가 살짝 젖은 정국이 또한 재밌는 듯 활짝 웃고 있었다. 예쁜 장면엔 너도 포함이었던 거다. 네 웃는 모습을 가만히 멀리서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지고 저절로 머리가 가벼워졌다. 그냥 아무 생각이 안 들었다고 해야 할까. 이대로 시간이 멈추기를 바라던 그때 그 순간. 유일하게 아쉬웠던 게 있었다면 그건 멀리 있는 정국이를 완전히 담기엔 부족한 내 시력뿐, 그 순간엔 모든 게 완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