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지나간 자리
네 꿈에 나오는 나의 모습이 점점 선명해지다가 결국에는 네가 꿈에서 사고가 난 그날의 잔상까지 보고야 말았다. 이것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너의 기억이 곧 돌아오기라도 한다는 걸까. 솔직히 말하면 요즘 들어 너의 기억이 차라리 돌아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면 내가 너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을 들킬 일도 없을 테고, 네가 나를 미워할 일도 없을 테고, 여러모로 힘들었던 과거는 잊고 모든 걸 새로 시작할 수 있게 될 테니까. 하지만 그건 너무 이기적인 생각이었다. 그건 내가 너를 다시 만난 이후로 한 많은 이기적인 생각 중에서도 가장 못된 생각이었다. 너는 네가 잃어버린 기억들 때문에 여전히 아파하고 있었다. 알 길이 없는 그 2년간의 시간들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억들이 영영 사라진다는 건,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들이 정말 아무 의미도 없이 사라져버린다는 것을 뜻했다. 그게 행복한 기억이든, 아픈 기억이든 간에. 그건 상상만으로도 너무 끔찍한 일이었다. 지금의 내가 너의 곁에서 아무리 행복하다고 해도, 그것이 우리의 지난 시간들을 대체하진 못하는 법이었다. 그 시간들이 너에게는 결과적으로 고통이었다는 사실을 알아버렸지만, 나에게는 그 시간들이 마냥 아름답고 따뜻하기만 한 기억들로 남아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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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_불면증
- 스물둘, 8월 7일
”벌써 다 왔네.“
”그러게. 오늘도 바래다줘서 고마워. 귀찮을 텐데.“
”뭐가 귀찮아. 어차피 우리 집 여기 코앞이잖아.“
”그러니까. 이 정도 코앞은 혼자 갈 수 있는데 매번 안 심심하게 해줘서 고맙다고.“
”고맙다는 말 들으니까 괜히 쑥스럽네. 얼른 들어가 봐. 어머님 걱정하시겠다.“
”누가 보면 우리 엄마랑 아는 사이인 줄 알겠어.“
”아는 사이 아니어도 그냥 시간이 늦었으니까 그러지.“
”야, 재환아.“
”응?“
”오늘 달 엄청 예쁘게 떴네. 보름달이야.“
”그러게. 근데 너 보름달보다 초승달을 더 좋아하잖아.“
”...요즘에는 보름달도 좋아졌어. 그럼 나 진짜 들어간다!“
”...잘 들어가. 안녕.“
”......“
”...여주야.“
”응?“
”......“
”무슨 말이길래 그래. 괜찮으니까 편하게 해.“
”좋아해. 나랑 사귀자.“
”아, 뭐야.“
”거절해도 돼. 부담 주려는 게 아니라 그냥... 내 마음이 그렇다고 말해주는 거야.“
”재환아.“
”...응.“
”나도 너 좋아. 그래, 우리 사귀자.“
- 스물둘, 12월 31일
”너 지금 TV 잘 틀어놓고 있지?“
[당연하지. 나 원래 이런 거 잘 안 챙겨보는데, 너랑 2016년 같이 시작하려고 아까부터 틀어놓고 기다리고 있어. 네 덕에 별 걸 다 해본다, 진짜.]
”정말? 어어, 이제 한다.“
”3, 2, 1, 해피뉴이어!“
- 스물셋, 1월 1일
”여주야, 방금 들었어? 제야의 종소리?“
[당연히 들었지. 스물셋 축하해, 재환아.]
”너도 축하해. 새해 복 많이 받고!“
[이제 됐지? 전화 끊는다!]
”야야야 잠깐만 여주야. 한 마디만 더 하고.“
[뭔데?]
”아... 너 오글거리는 말 싫어하지?“
[응. 또 무슨 말을 하려고 그래.]
”그래도 하고 싶은 말은 할래. 내 스물둘을 함께 해줘서 고마워, 여주야.“
[...생각보다 별로 안 오글거리네. 내 스물둘이 되어줘서 나도 고마워, ##재환아.]
- 스물셋, 3월 5일
”오늘 손님이 많네. 여주야, 2번 테이블에 김밥 한 줄 가져다드려.“
”알았어, 엄마.“
”이분들 계산도 좀 도와주고!“
”알았어. 아, 주문이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죄송합니다.“
”여보, 그건 내가 할게. 당신은 잠깐 쉬고 있어.“
”어떻게 쉬어요. 손님들 많이 밀렸는데. 여주야, 계산 끝나면 주방으로 좀 와!“
”알았어. 네, 계산 도와드리겠습니다. 5번 테이블 맞으시죠?“
”손님이 많으니까 좋긴 한데 일손이 너무 부족하네. 우리도 알바 한 명 고용해야 할까 봐.“
”우리끼리 바쁘게 하면 다 할 수 있어요. 알바는 무슨 알바야. 배부른 소리 하고 있네. 여주야, 2번 테이블에 떡볶이 있잖ㅇ...“
”안녕하십니까.“
”...누구...?“
”저는 여주 남자친구 김재환이라고 합니다.“
”여주 남자친구...? 야, 이여주! 얼른 나와봐.“
”또 뭐 도와드릴 거 있어ㅇ... 재환아!“
”오늘 쉬는 날이라 손님 많을 것 같아서 도와드리려고 왔는데 정말 많네요. 벌써 이 동네에 맛있다는 소문 다 퍼졌거든요. 제가 뭘 도와드리면 될까요? 아무거나 다 시키셔도 돼요.“
”야 네가 여길 왜 와......“
”어머, 벌써 소문이 다 났다고? 어쩜 좋아. 재환 군이라고 했나? 미안한데 서빙만 좀 도와줄 수 있을까?“
”엄마, 그걸 얘한테 왜 시켜.“
”너는 가만히 있어 봐 좀. 재환 군, 내가 어떻게 부르는 게 편해요?“
”아, 그냥 편하게 재환아, 하고 부르셔도 됩니다. 저는 어머님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그럼. 당연히 되지. 우리 여주가 사람 보는 눈은 좀 있네. 참 싹싹하고 착해 보여.“
”아닙니다. 제가 복 받은 거죠. 아, 저쪽 주문 밀린 것 같은데 제가 받을까요?“
”오늘 정말 고마웠어.”
”이름이 김재환이라고 했나? 대학은 어디 다니고 있고?“
”아빠, 뭘 그런 걸 물어보고 그래. 알아서 잘 다니고 있어.“
”그래 여보. 처음 인사하러 왔는데 사람 무안하게 뭘 그런 걸 물어요.“
”...아, 그런가.”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그래, 우리 여주 힘들게 하지 말고. 또...“
”이미 나한테 너무 잘 해요. 걱정 마. 나 그럼 재환이랑 얘기 조금만 하다가 바로 들어갈게. 먼저 들어가 계세요.“
”알았어. 천천히 이야기하다 들어와. 오늘 수고 많았어, 재환아!“
”네! 안녕히 들어가세요.“
”야, 너는 연락도 없이 이렇게 불쑥 찾아오면 어떡해. 놀랐잖아.“
”놀랐어? 서프라이즈 성공이네.“
”참나. 고맙긴 한데, 다음부터는 꼭 말하고 와. 알았어?“
”흐흫. 알았어.“
”......뭘 그렇게 빤히 쳐다봐.“
쪽-
”야, 너 오늘 진짜 왜 이래? 여기 밖이야, 밖.“
”밖이면 뭐. 남자친구가 그럼 뽀뽀도 못해?“
”아니 그건 아닌데...“
쪽-
”아휴 진짜. 떨어져, 떨어져.“
”아, 큰일났다.“
”응? 또 왜.“
”어머님 아버님께 완전 중요하게 드릴 말씀이 있었는데 까먹고 그냥 와버렸어.“
”엥? 무슨 말인데?“
”너 낳아주셔서 감사하다고.“
”뭐야.“
”진짜 중요한 말이었는ㄷ...“
쪽-
”...여주야...“
”너는 누구 건데 이렇게 예쁘냐, 재환아.”
“나? 나는 우리 엄마 거지.”
“...그래. 엄마 아들 재환이는 그만 가보세요. 오늘은 진짜 고마웠어.”
“내일 또 올까? 나 내일도 시간 많은데.”
“됐어. 괜히 자주 오면 아빠한테 호구조사나 당해. 다음에 오늘처럼 바쁜 날 있으면 내가 먼저 와달라고 할게.”
“나 와달라고 한다고 아무 때나 올 수 있는 거 아닌데?”
“오면 뽀뽀해줄게.”
“네가 오라고 하면 당연히 가야지. 바쁜 날 꼭 전화해!”
“하여간 김재환, 무슨 뽀뽀귀신도 아니고. 얼른 들어가. 피곤하잖아.”
“너 들어가는 거 보고 갈게.”
“치, 알았어. 아 맞다 재환아.”
“어?”
“엄마랑 아빠 다 너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 같더라. 너 오늘 점수 좀 딴 것 같은데?”
그리고, 전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기억들로 남아있기 때문에.
하나씩 날아드는 너의 잔상을 애써 외면한 채, 자리에서 일어나 방안을 환하게 밝히던 전등의 스위치를 껐다. 불 꺼진 방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아봐도 자꾸만 떠오르는 너와의 추억들에 오늘 밤도 쉽게 잠들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 드디어 재업이 끝났습니다!!!
내일(화) 10시 50분에 앞으로의 연재 계획에 대한 공지사항을 올릴 예정이니 꼭 확인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