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사귀 전 애인 갑을로 재회하는 썰 7
낭만적인 어른이 되어서
w. 랑데부
36.
"...하"
생각보다 이 짧은 동거는 매우 불편했다. 헤어진 사람과 마주 보고 밥 먹기 만랩도 아니고 말이야. 영현은 아무 말이 없었다, ㅇㅇ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불편한 것은 젓가락질이었다. 에휴 시발 안 해 안 할 거야 안 먹어. 반찬이 집히긴 커녕 그릇만 툭툭 멀어지는 것이 계속 하고 있기에 모양 빠지고 쪽팔렸다.
"..먹어"
툭툭 밀려나는 접시를 영현이 잡아 주었다. ..집으라고. 그래 이건 좀 고마웠다. ㅇㅇ는 조용히 반찬을 입으로 넣었다. 이거 다시 한 번 먹었다간 다 체하겠는걸? 그 후로도 헛도는 젓가락질에 영현은 그릇을 하나하나 잡아 주었다. 매우 불편한 식사였다.
식사만 불편하면 딱인데, 계속 강영현 옷 입고 돌아다니는 것도 불편했다. 우선 내 집이 아니었고, 그러다보니 아주 생필품도 다 집에 있으니 그리고 여긴 강영현 집이다. 차라리 상사의 집에서 지내는 게, 아니 거기서 거기겠네. ㅇㅇ는 소매를 수백번 올리며 책장을 넘겼다. 안 되겠다, 기초적인 물건만 가져오기로 마음 먹은 ㅇㅇ는 휴대폰을 챙겼다.
아. 근데 어떻게 가냐,, 분명 아무 일도 없을 거를 잘 알고 있는데 괜시리 소름이 돋았다. 가? 그냥 말아, ㅇㅇ가 휴대폰을 들고 현관을 한참 배회했다.
"뭐해?"
"아 깜짝이야"
"..아 미안"
샤워를 하고 나온 건지 영현은 상의를 탈의한 상태였다. 그리고 상체의 물기를 닦다 급하게 티셔츠를 끼워 입었다. 식사할 때보다 더한 정적과 어색함이 도드라졌다, 모든 공기가 어색함이라 식량을 주워 먹은 모양이었다.
"어디 나가게?"
영현은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물었다. 이 차림으로 어디 나가는 건 오바지 않을까. ㅇㅇ는 괜히 휴대폰만 쥐었다 폈다하며 입술을 물었다.
"...아, 집에 놓고 온 물건이 있어서.."
"아,"
근데 왜 안가? 영현이 눈치로 물었다. 나이 먹고 겁 먹어서 못 나가고 있다고 어떻게 말해, ㅇㅇ는 어색하게 아, 어만 반복하다 문꼬리를 쥐었다. 별 일이야 있겠어. ㅇㅇ는 그대로 문을 열고 나갔다. 하 딱 오분, 오분 안에 나오자. ㅇㅇ는 눈을 질끈 감고 마주쳤던 그 시선을 지우기 위해 애썼다. 아니 그 사람 경찰서에 있을텐데, 무슨 일이야 있겠어?
"..뭐야?"
"편의점 가려고"
엘레베이터에 불쑥 탄 인영에 무엇인가 했더니 영현이었다. 야 너 머리나 좀 말리고 나오지. 순간적으로 걱정 어린 말이 튀어나왔다. 응? 뭐? 나 뭐라고 했어 지금? 영현도 조금 놀란 눈치였다. ...아, 어. 좀 늦게 나오지 ㅇㅇ는 영현 몰래 눈을 다시 질끈 감았다. 어색해 죽겠는데 아오.
"편의점 간다며"
"문 밖에 있을게. 챙겨서 나와"
편의점은 오른쪽인데, ㅇㅇ를 따라 횡단보도를 건너는 영현에 물음표를 달았다. 영현은 짧은 시간에 겁 먹은 눈치를 읽어내 따라 나섰던 거였다. 차라리 얘 끼고 가는 게 나을까, ㅇㅇ는 더 반문 없이 그냥 함께 오피스텔로 들어갔다. 주말이라 못 고친다쳤는데 수요일이나 되서야 고칠 수 있다니, ㅇㅇ는 조심스럽게 들어간 집 안에서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백팩에 블라우스와 치마, 스타킹을 집어 넣었다. 파우치도 쓸고 칫솔도 챙겼다. 노트북를 안고 더이상 손이 없어 이어폰은 입으로 물었다.
"줘"
겨우 문을 여니 영현은 우선 입에 문 이어폰과 아슬하게 껴안은 노트북을 받았다. 아, 어 고마워. 영현은 ㅇㅇ가 아닌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가자
37.
"우욱"
미치겠다. 덜 익었던 건지 자리가 불편했던 건지, 저녁이 그대로 계속 입으로 밀고 나왔다. 아 진짜. ㅇㅇ는 한참을 변기를 잡고 토했다 정말 아주 오랫동안. 여전히 속은 메스꺼웠고 목은 매우 따가웠다. 우욱, 더 나올 것이 없으니 이젠 위액까지 토해냈다.
"...으, 하"
"잠깐만, 고개만 들어줘. 응?"
영현은 계속 ㅇㅇ의 등을 두들겨 주었다. 너무 오랫동안 토하느라 ㅇㅇ는 기진맥진했다, 더불어 식은땀이 온통 몸에서 흘러 내리니 위액까지 전부 쏟아내고 나서야 떨어져 나가다시피 쓰러져버리는 ㅇㅇ를 안아 살폈다. 입 헹구고 싶어, 영현은 곧바로 물을 떠 ㅇㅇ의 입에 컵을 대 주었다. 괜찮아? 입을 수차례 헹구고 나서야 정말 ㅇㅇ는 온몸에 힘이 빠져 나갔다.
"잠깐만, 응?"
영현은 축 늘어져 기댄 ㅇㅇ의 입가를 닦아주었다. 죽을 거 같아, 영현아. 대답할 기운도, 뭘 더 할 기운도 없었다. 흠뻑 땀으로 젖어 숨만 일정하게 쉬었다, ㅇㅇ를 안고 영현은 소매로 흐른 땀만 훔쳤다. 병원을 데려가도 조금은 재우고 데려가는 게 맞을 거 같았다. 금방 품에 지쳐 잠든 ㅇㅇ를 조심히 안아 일어섰다. ㅇㅇ가 아플 때면 영현은 정말 온신경을 쏟았다. 미친듯이 걱정했고, 한참에서야 안겨 나온 ㅇㅇ를 보고 원필 역시 의자에 조금 편히 앉았다.
"그 자리에 꾸역꾸역 앉아 있었냐, 으유"
"..어쩔 수 없잖아"
"힘들면 좀, 괜찮대?"
"깨면 병원 데려가야지"
야 너도 좀 앉아 쉬어. ㅇㅇ를 침대에 눕히고 나온 영현 역시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아, 이불. 영현은 다시 들어가 담요를 ㅇㅇ에게 덮어주고 이마에 조심스럽게 손을 대었다.
"야"
"왜"
"...열 나는데"
하씨 기집애. 내가 업고 내려갈게, 너 시동 걸어. 영현은 차키를 받아 들고 신발을 구겨 신었다. 그러게 내가 불편하면 가지 말라고 했잖아, 원필은 걱정과 화가 반쯤 섞인 혼잣말을 내뱉고 잠든 ㅇㅇ를 업었다. 아오 기집애, 야 너 운전 천천히 해. 이러다 쟤도 쓰러지는 거 아니야? 원필은 운전대를 잡은 영현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결국 응급실에서 링거 조치를 받았다. 영현은 얇다 못해 부러질 것만 같은 팔에 링거 바늘이 들어갈때 한숨을 크게 쉬며 눈을 가렸다.
"야 너도 좀 앉아, 애 깰 때까지 서 있을 순 없잖아"
영현은 원필의 말이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으유 등신, 앉으라고. 결국엔 원필이 영현을 끌어 앉혔다. 정신 좀 차려, ㅇㅇ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영현에 원필은 물이라도 떠 내밀었다.
"괜찮을거래잖아. 애 죽어?"
"야"
"그 얼굴 ㅇㅇㅇ가 보면 퍽이나 좋아하겠다"
냉수 먹고 속 차려라.
*
"수고 하셨습니다"
빡센 하루였다. 진짜 알바는 할 게 못 돼, 아 강영현 보고 싶다. ㅇㅇ는 유니폼을 벗으며 휴대폰을 확인했다. 너무 늦었나. 한창 작업할 시간이다. ㅇㅇ는 고개를 젓고 코트를 껴입고 목도리를 매었다. 아 추워, 봄이 오긴 하는 건가. 이월의 끝자락이었다. 막판 추위가 아주 기승이었다. ㅇㅇ는 얼어 버릴 것만 같은 손을 주머니에 처박았다.
- "어디야?"
"응? 나 집 가는 중이지"
"여기?"
아씨 깜짝이야. ㅇㅇ는 퍼뜩 놀라 휴대폰을 떨궈 버렸다. 야! 뒤엔 영현이 웃으며 서 있었다, 너 죽을래? 황천길 한번에 갈 뻔했네. ㅇㅇ는 영현을 못나게 올려다 보고 어깨를 툭 쳤다. 아 아파, 그러면서 손은 왜 잡냐.
"놀랬어?"
"당연하지"
근데 좋아. ㅇㅇ가 툭 친 어깨를 아프다고 오버액션 하다가도 웃으며 내려다 보는 영현에게 ㅇㅇ는 폭 안겼다. 보고싶었어. 삼일만이었다, 방학 중 몰아서 하는 알바이기도 했고 영현 역시 글을 쓰느라 여념 없었다. 영현이 무슨 말을 하든 ㅇㅇ는 영현을 끌어 안고 한참 놓아 주지 않았다. 좀 이해해, 많이 보고 싶었거든.
"왜 데리러 왔어?"
"같이 갈 곳 있어서"
"이 시간에?"
"응"
영현은 ㅇㅇ의 손을 잡아 제 코트 주머니에 쏙 넣었다. 아 이래서 손이 따뜻했구나. 만나자마자 잡은 손이 따뜻한 이유는 영현이 ㅇㅇ가 나올 때까지 핫팩을 꼭 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참 일하고 차가울까봐. 근데 어디 가는데? 열 두시를 향해 가는 시간에 문을 연 곳은 당연지사 없었다. 여기 공원인데?
"눈 감고 십초만 있어봐"
"뜨면?"
ㅇㅇ가 모은 손가락의 간격을 살짝 벌려 빼꼼 올려다 보았다. 야, 그 얼굴에 조심히 입술을 맞추는 영현에 확 고개를 들어 올려다 보니 영현은 ㅇㅇ의 머리를 흩뜨렸다.
"계속 입 맞춰주지 뭐"
"아 알겠어"
딱 십초야. ㅇㅇ는 군말없이 눈을 꼭 감았다, 십초 세도 돼? 응 세도 돼. 공원 한 가운데서 이게 뭐하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우선 ㅇㅇ는 영현을 따르기로 했다. ㅇㅇ는 작게 입으로 십초를 거꾸로 외웠다. 사 삼 이 일,
"생일 축하해"
"...아"
그새 ㅇㅇ의 앞에 내밀어 있는 건 작은 케이크였다. 야 강영현. 빨리 불어. 놀라고 감동할 것도 없이 우선 촛불을 불고 손을 모았다. 나 생일인지도 몰랐는데, 우선 올해도 강영현 건강하게 해주세요. ㅇㅇ가 눈을 꼭 감고 기도를 하는 동안 케잌을 들고 선 영현은 그 모습이 너무 아이처럼 맑아 차마 미소를 지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눈을 떠 마구 울리는 휴대폰을 들어 확인하니 딱 열두시를 가르켰다 일분이 지나고 쏟아지는 생일 메시지들이었다. 아,
"생일 축하해"
"..생일인지도 몰랐어"
"그럴 거 같았어. 계속 바빴잖아"
가장 먼저 축하해주고 싶었어, 영현은 나지막히 이야기했다. 성공한 거 같은데, 그치. ㅇㅇ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 완전 성공했어.
"너 좋았음 됐어"
그게 가장 중요해.
그 날 벤치 위 온기는 무척 따스했다, 그 어느 겨울이 아니었다.
38.
아 진짜 열 받네. ㅇㅇ는 이불을 발로 걷어 찼다, 지금 복수하는 거지? 아예 전화기를 꺼버렸다. 연결이 되지 않아 소리샘으로.. 소리샘 말고 강영현한테 연결 하라고. ㅇㅇ는 열이 머리 끝까지 뻗쳤다.
"야, 야 나와. 얘기 좀 하자구!"
"미친, 야야 조용히 해. 강영현 여기 없거든?"
아니 강영현 나오라니까 네가 왜 나와. 김원필 너 안 비켜? 안에 있는 거 다 알아. ㅇㅇ는 너무나 쉽게 원필을 뒤로 밀어내고 올라갔다. 만나줘야 사과를 하든 싸우든 할 거 아니야. ㅇㅇ는 꾹꾹 비밀번호를 눌렀다, 틀렸습니다. 틀렸다고? 야 비밀번호도 바꿨어? ㅇㅇ는 이번엔 꾹꾹 초인종을 눌러댔다.
"들어와"
퍽, 문이 열렸다. 싸늘하다 못해 영현 역시 열이 뻗칠대로 뻗친 상태였다. 머리를 한번 쓸어 올리곤 문이 쾅하고 닫혔다.
"전화 안 받아?"
"할 말 없어"
"내가 잘못한 거 아는데, 네가 그렇게 잠수타면 어떡해? 내 생각은 안 해?"
"넌,"
"넌 내 생각했어?"
애초부터 영현도 ㅇㅇ도 언성을 높였다. 사건은 이러했다, 정말 어쩔수 없이 자릿수 채우려 간 미팅을 걸렸다. 아니 걸린 것도 아니다, 길에서 만났다. 길에서 만나는 확률은 또 뭐야 제길. 그리고 해명할 기회도 주지 않고 강영현은 돌아서 걸었다. 그리고 나흘째 문도 안 열어주고 전화기도 꺼 버렸다. 수업이 끝나기 오분전에 나가 들어오지도 않았다.
"내 생각하고 행동한 거야?"
"미안하다고 설명하려 했는데 네가 씹었잖아"
"최소한 내가 널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은 줘야지. 그리고 얘길 하지"
"그래서 없는 사람처럼 투명인간 취급하고? 그게 이해하는 거야?"
둘다 물러설 기미도 가라 앉을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이러다 신고 들어오면 어떡하지, 아 될대로 되라지. 나 지금 엄청 화났어.
"그래서 그게 기분이 나빴어? 그건 정말 미안한데"
"너한테 실망했거든"
아, 이 말은 좀 타격이 크다. 정말 어쩔수 없었다고 상황을 설명하려는 순간 푹 꽂힌 말이 너무 아팠다. 나오려는 말이 입안으로 꼴깍 삼켜 들어가 버렸다. ㅇㅇ는 영현을 뚫을듯 노려보다 금방 그 눈망울에 눈물이 차올랐다. 아씨, 하려던 말이 안 나온다. 내가 분명 잘못한 건데. ㅇㅇ는 그 큰 눈에 고인 눈물이 툭 떨어지는줄도 몰랐다.
"..뭘 잘했다고 울어"
나 잘 한 거 없거든?
"네가"
영현의 한숨소리가 연달아 꽂힌 상처에 박혔다. 미안,
"..이리와"
어? 다음 상황은 예기치 못한 행동이었다. 아프지 않게 ㅇㅇ의 손목을 쥐고 당겨 안아 주었다. 진짜 미안해, ㅇㅇ는 영현의 옷자락을 쥐고 엉엉 울었다. 미안하다는 말만 거듭하며 엉엉 우는 ㅇㅇ를 영현은 꼭 안았다. 저도 모르게 홧김에 나간 말이었다, 사실 더 미안했는데 이렇게 우니까 마음이 시렸다.
"...미안해"
"아ㄴ,니 끅, 흐어, 내가, 끅"
영현의 티셔츠가 눈물로 번지고 번졌다. ..그만 울어, 영현은 ㅇㅇ의 머리를 쓸어 주었다. 나도 사과할 기회를 좀 줘.
"홧김에 나온 말이었어. 미안해, 응?"
눈물에 엉망이 된 ㅇㅇ를 꼭 바라보고 말했다. 정말 미안해. ㅇㅇ는 아니라며 도리질치며 더 울었다. 이러라고 말한 게 아닌데. 한참을 그렇게 울며 미안하다고 웅얼거리고 나서야 ㅇㅇ는 영현에게서 떨어졌다.
"갈게"
"아니야 이따 가"
"..늦었어"
"위험해. 이따 데려다 줄게 ㅇㅇ야"
사실 영현의 얼굴을 보기 어려워서 가려는 거였다. 사과해도 당장 마음은 무거웠다, ㅇㅇ의 손목을 붙잡은 영현은 허리를 숙여 ㅇㅇ의 눈을 맞추었다.
"...눈 다 부었네"
"..하지마"
"보여?"
"야"
보이거든? ㅇㅇ가 발끈해 영현의 눈을 바라보자 그제서야 영현은 한결 풀린 얼굴로 웃었다.
"조금 이따가 가. 응?"
사실 몇 번이고 언제는 같은 이유로 또 다른 이유로 싸웠다. 당연했다, 아무리 사랑해도 처음부터 다른 두 사람이 함께 한다는 건 그만큼의 '다름'도 인정하는 과정이 포함 되어 있는 거니까. 끝내 서로 잘못을 인정하고 이해했으나 ㅇㅇ는 일종의 죄책감에서 벗어나는 것을 조금 어려워했다. 아무리 영현이 괜찮다고 해도 영현에게 준 상처에 대해 마주하는 것을 어려워했다.
"..알겠어"
"고마워"
영현은 그런 ㅇㅇ를 기다리고 달래주었다. 이렇게 서로를 한 번 더 이해하고 같이 산을 넘었다, 절대 혼자 두고 가는 법은 없었다. 사랑하는만큼 받는 상처에 대해 그것 역시 사랑이 치유해주는 것은 분명했다. 적어도 두 사람은 그렇게 생각했다.
*
"보라색으로 하자"
"싫어 분홍색"
"이게 더 깔끔해"
"내가 사는 거거든?"
"내 아빠거든?"
내가 이겼지 그치? 결국 영현은 알겠다며 꽃을 계산했다. 너는 나 못 이겨. 옷 매무새를 확인하는 영현을 ㅇㅇ는 돌려 세워 자신이 대신 확인해주었다. 아무리 봐도 잘났어, 뭐? 너 잘생겼다고. 영현은 검은 넥타이를 다시 조이다 웃음이 터졌다.
"긴장하지마"
"안 해"
"한 거 다 티나거든?"
가자. ㅇㅇ는 영현의 손을 잡고 꽃집을 나섰다. 강영현 춥겠다, 그러게 좀 두껍게 입지. 안 추워, 목도리 다시 매자 봐봐. 가파르고 긴 길이었다, 혼자 올 때는 그렇게 멀고 숨만 차고 그랬는데 영현과 함께 오니 그 길이 길었었는지 짧았었는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항상 도착지점이 가까워지면 마음이 저절로 땅으로 가라 앉았다.
"한번 안고 가"
"뭘, 갑자기?"
"이리와"
영현은 ㅇㅇ를 품에 끌어 안았다. 네가 그러면, 조금 진정되긴 하네. ㅇㅇ는 영현의 허리를 꼭 껴안았다. 영현은 ㅇㅇ의 앞머리를 살짝 옆으로 넘기고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가자"
ㅇㅇ는 익숙하게 레버를 돌렸다. 됐다, ㅇㅇ는 조심히 기계를 사다리에 내려 두었다.
"나왔어"
"아빠"
오늘 데려왔어, 맨날 말만 하다가 그치. 딱 술 먼저 하자고 할 거 같아서 소주도 사왔다? 아빠가 좋아하는 거 참이슬 빨간거. ㅇㅇ는 아무렇지 않게 소주를 까 종이컵에 담았다. 얜 술 아빠보단 못해, 아빠가 이해해.
ㅇㅇ가 종이컵을 앞에 내려두고 영현도 사다리에 올라 한쪽 무릎을 꿇고 유리판을 확인했다. 정말 똑같은 얼굴이었다, 어쩌다 취해 나온 말은 항상 밉다 밉다 하면서 빼다 박은 얼굴이라고 혼자 꺄르르 웃곤 했다.
"왜, 아빠랑 얘기하게 내려가 있어줄까?"
"그럴래?"
"뭐야 진짜?"
그럼 잠시만 내려가 있어, 잠깐이면 돼. 영현은 ㅇㅇ의 머리를 흩뜨리고 웃으며 부탁했다. 나 들으면 안 돼? 응. 치, 알겠어. ㅇㅇ는 사다리에서 내려와 조금 멀리 발걸음을 옮겼다.
"..ㅇㅇ가 너무 밝고, 또 맑게 자랐습니다"
"사람들한테 사랑받고 예쁘게요,"
"끝까지 놓지 않고 사랑해주고 싶습니다, 나중에 뵈었을 때 그때도 웃으며 ㅇㅇ가 뵐 수 있게요"
"...감사합니다"
영현은 한참 앞에서 하고 싶은 말이 많았으나 나머진 삼켰다. 저만 보았던 ㅇㅇ의 너무 사랑스럽고 예쁜 모습들을 하나하나 이야기 하고 싶었으나, 영현은 따라 놓았던 술을 버리고 앞에서 다시 따라 올린 뒤 사다리에서 내려왔다.
"가자"
"아 추워, 무슨 얘길 그렇게 했어"
"비밀이야"
"참내"
ㅇㅇ는 영현에게 달려와 붙었다. 둘만 알겠다 이거지? 알겠어 이번은 봐준다. ㅇㅇ는 영현이 산 꽃을 올려두고 맑게 손을 흔들었다. 또 올게, 아빠. 다음에도 얘랑 온다?
사랑해 아빠.
39.
"새댁이야? 어머 둘이 너무 잘 어울린다"
"헤어졌는데요"
갑자기 분위기 싸해지고요, 덩달아 tmi도 뱉었네. 아 내가 왜 얘랑 마트를 와가지고. 저 소리만 세번째였다, 즉슨 이 tmi도 세번째였다. 영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야 니가 해. 먹금이야. 뭐래, 신조어 쓰지마.
"우유 왜 넣어? 우유 안 먹잖아"
"너 먹잖아"
입맛은 비슷했으나 의외로 흔한 몇 가지는 맞지 않았다. 그러니까 내가 먹을 걸 네가 왜 사. 또 씹는다, 나 껌이냐 질겅질겅 씹게? ㅇㅇ는 영현을 노려 보면서 요플레를 카트에 담았다.
"너 안 먹잖아"
"너 먹..,"
아. 네가 왜 말 안 했는지 알겠다. ㅇㅇ는 말 없이 카트를 밀었다, 차라리 장 따로 볼 껄. 이게 뭐하는 짓이람. ㅇㅇ는 마른 세수를 하고 저만치 가버린 영현을 뒤쫓아 걸었다. 하여튼 걸음은 드럽게 빨라요. 아마 서로 같은 생각으로 씹고 있지 않았을까, 결국은 사고 살 꺼면서.
"줘"
"아냐 무거워, 내가 들어도 돼"
"너 다쳤잖아. 줘"
그렇게 산 짐들은 영현의 손에 넘어갔다. 집안일은 잘 시키면서 이건 네가 드냐, 엿을 먹일 거면 좀 동일하게 먹여 이랬다 저랬다 뭐하냐. ㅇㅇ는 영현을 무심한 눈초리로 올려다 보았다가 다시 저만치 걸어가는 영현을 쫓았다. 대화도 없었다, 서로 그리 할 말이 많은 사이는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다툼은 좀 덜 해진 거 같은데, 아니 엿 맥이는 거 빼고.
"야"
"왜"
"너 지렁이"
"아씨!! 야!"
뭔가 물컹하다했더니 미친 이게 진짜. 냅다 뛰어간 강영현을 쫓아 달리는데 숨이 차 죽는 줄 알았다. 아오 저거 때릴 수도 없고, 화병으로 돌아가시겠네. 지렁이보다 화나는 건 강영현의 비웃음이었다. 저 승자의 비웃음 아 저거 진짜. 지금 여자친구한테 저런 모습을 보여줘야돼, 뭐 초딩이야? 아 강영현 진짜. ㅇㅇ는 영현을 팩 째려 올려다보았다. 알바야, 영현은 아무렇지 않게 비웃었다. 저 진짜,
*
아 자야 하는데, 지금 안 자면 지각인데. ㅇㅇ는 침대를 베베 굴러 다녔다. 오늘따라 잠이 안 온다, 미치겠다. 커피 한 잔 마시지 않았는데 왜 이리도 잠이 오지 않는 건지. 영화라도 한 편 보고 잘까 해서 ㅇㅇ는 거실에 둔 노트북을 가지러 문을 벌컥 열었다.
"..안 잤어?"
"어? ㅇ,어"
거실 소파에 영현이 앉아 있었다. 영화 채널을 틀어 놓은 걸 보니 쟤도 어지간히 잠이 안 오나보다. 지금 시간에 틀어주는 영화라곤 호러나, 뭐 그런 종류 아니면 19금인데. 다행이 호러였다, 어색한 거리만큼 떨어져 앉아 어쩌다보니 영화를 같이 보는 꼴이 되었다. 아 휴대폰도 침실에 두고 왔어 아. 영화는 생각보다 재밌었다, 아니 무서웠다,
"아,"
"아!"
동시에 흠칫 놀라 작은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서로를 보고 더 놀랬다, 역시 겁 많은 건 어디 안 가는구나 너도. 그와중에 서로를 보고 놀란 게 웃겨서 아니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터졌다. 뭐하니 우리 지금.
"..야"
"어?"
"좀 걸을래?
"이 영화보단 좀 낫지 않을까"
그럴수도, 결국 티비를 끄고 새벽 한 시에 나와 근처 공원을 걸었다, 아까는 더웠는데 또 춥네. 날씨도 미치고 나도 미치고, 참 제대로 된 세상이다. 영현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설렁설렁 걸었다. 걸음 되게 빠르네, ㅇㅇ는 영현의 걸음에 맞추면 뒤처지고 또 뒤처졌다. 그리고 결국 백색소음 속 꺼낸 이야기는 별 거 없었다. 근데 또 그게 어이가 없어서 퍽 웃고, 다시 웃었다. 내가 널 보고 웃는 날이 있긴 하구나.
그리 오래 걸은 건 아니었다. 그냥 공원 두세바퀴 돌고 돌아왔다. 살짝 피곤한 거 같기도 하고,
"..잘자"
"...너도"
잘자라 강영현.
40.
내가 미쳤지. 아니, 돌았지.
ㅇㅇ는 외근을 적고 빠르게 택시를 잡았다. ㅁㅁ동 사거리요, 네 거기서 그냥 세워 주세요. ㅇㅇ는 흥분된 마음을 가라 앉히려 애썼으나 좀처럼 마음이 진정 되질 않았다. 넌 애초에 내가 퇴사하길 바란 거구나, 시발. ㅇㅇ는 잔돈도 받지 않고 택시 문을 부서져라 닫았다. 힘껏 쥔 손목이 아직 덜 붙어 아팠으나 그건 아픈 것의 축도 못 꼈다.
"너 뭐야? 출근한..,"
"닥쳐"
ㅇㅇ는 비밀번호를 탕탕 치고 들어가 짧게 영현의 말을 잘랐다. 그렇게 침실로 들어가 백팩을 꺼내 옷가지를 쑤셔 박았다, 파우치도 그냥 열려 있는 그 상태로 쓸어 집어 넣었다. 그리고 영문을 모르고 서 있는 영현을 지나 작업실에서 노트북과 수첩을 백팩에 구겨 넣었다.
"너 뭐하..,"
이번에도 영현의 말은 끊겼다. ㅇㅇ의 말 대신,
"재밌니?"
ㅇㅇ가 냅다 집어던진 종이 뭉치에 얼굴을 제대로 맞았다. 내가 너 언젠가 친다 했는데 그게 오늘이었네. 영현의 얼굴을 강타하고 나풀나풀 떨어진 종이들을 내려다 보고 영현은 싸늘한 시선으로 ㅇㅇ를 바라 보았다. 뭐하는 거야? 뭐하는 걸로 보이는데. 그 싸늘한 시선에 맞받아친 ㅇㅇ의 시선 또한 날카롭다 못해 가시가 돋혀 있었다, 그러나 그 눈엔 눈물이 고여 있었다.
"넌 재밌어? 이게?"
"뭐하는 거냐고"
"네가 계약 안 깨면 내가 나가. 그게 네 목적이지? 그래 관둘게, 더러워서"
"야!"
"놔!"
ㅇㅇ는 영현을 강하게 뿌리쳤다. 정말 강하게 내치고 돌아서 영현을 올려다 보았다. ..거지 같은 새끼. 무섭게 올려다 본 눈에서 결국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애초에 이건 말도 안 되는 거였어. ㅇㅇ는 영현을 그렇게 돌아서 노려보다 문을 쾅 닫아 버렸다.
다들 그래. 영화 찍을 땐 주인공도 하고 아니면 뭐 어떤 역할 하나쯤은 해. 근데 영화 5년, 6년 찍어봐라? 시간도 없고 돈도 없고 무엇보다 애정이 떨어져서 결국 급하게 종영하는 거지. 연애는 그런 거야,
그랬던 거야.
- 원필과 ㅇㅇ의 대화 중 'Man in a movi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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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굵은 숫자 - 과거 시점
연애를 하다보면 싸우기도 하고 그 누구보다 기대기도 하죠, 두 사람은 정말 그런 연애를 했던 거 같습니다,,
이번 화는 어떻게 다가오셨을지, 혹시 재미가 없진 않을까 걱정으로 올려 봅니다. 하루하루 좋은 일, 무엇보다 건강한 하루 보내세요. 다음 화에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