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그락거리며 그릇 부딪히는 소리 사이로 울음소리와 물소리가 섞여들었다. 여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주방을 울렸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설거지를 하던 경수가 분홍색 고무장갑을 벗고는 헐레벌떡 방으로 들어갔다. 분유냄새가 진동하는 방에 들어간 경수가 익숙하게 아기침대 위에 눕혀져 있던 아기를 품에 안았다. 아이고, 우리 태영왕자님. 누가 깨웠어? 익숙하게 태영을 어르던 경수가 안방 화장실에서 수건 한 장을 하반신에 두르고 나오는 종인을 노려보았다.
“애 좀 보고 있으라니까, 그걸 못 참고 씻으러 들어가냐?”
“아니, 자고 있길래…”
“됐어, 너 믿은 내가 바보천지지.”
아이 형. 나름 애교랍시고 경수의 허리를 껴안은 종인이 경수의 등에 얼굴을 비볐다. 저리 치우라며 어깨를 들썩거리던 경수가 종인의 품에 태영을 넘겼다. 나 설거지 하고 올 동안만 울리지 말고 잘 보고 있어. 찬 공기가 들어가지 않게 문을 꼭 닫은 경수가 주방으로 돌아와 다시 분홍색 고무장갑을 꼈다. 뽀득뽀득 소리가 나게 그릇을 씻은 뒤, 건조기에 넣은 경수가 건조기 작동 버튼을 누르고 방으로 들어왔다. 옷도 입지 못하고 몸에 걸친 거라곤 수건 한 장 뿐인 종인이 태영을 내려놓으려다 울먹거리는 표정을 보고 급하게 다시 안아들었다. 그 모습에 피식 웃은 경수가 태영의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넣어 종인에게서 옮겨왔다. 그제야 서랍을 뒤적거리며 속옷과 반팔티, 반바지를 꺼낸 종인이 하나씩 차례로 꿰어 입었다.
벌써 돌이 다돼가는 태영은 보기보다 힘이 셌다. 가끔 작정하고 몸을 흔들거리면 경수가 따라 흔들릴 정도였으니. 바닥에 떨어져 있는 아기 띠를 허리에 찬 경수가 태영을 업고는 다시 주방으로 향했다. 밥솥을 열어 밥을 푼 뒤 식탁에 내려두곤, 냉장고에서 반찬을 여러 개 꺼냈다. 따로 만들어둔 태영의 이유식도 꺼내들었다. 여보, 밥 먹어. 안방에서 나온 종인이 식탁에 앉고, 아기 의자에 태영을 내린 경수도 종인의 반대편에 앉았다. 소고기와 여러 야채를 다져 넣은 이유식을 태영은 따박따박 잘 받아먹었다. 태영을 챙기느라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는 경수의 입에 종인은 제때제때 밥을 넣어주었다. 콜록. 목이 매였는지 기침을 하는 태영에게 빨대가 달린 물병을 내밀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물병을 잡은 태영이 빨대에 입을 대고 쪽쪽 물을 빨아드렸다. 그렇게 밥을 다 먹은 태영을 잠시 의자에 앉혀두고 경수와 종인이 빠르게 밥을 먹어치웠다. 종인이 식탁 위를 치울 동안 경수는 태영의 손을 붙들고 걸음마연습을 시키고 있었다. 넘어질까 경수 손을 꽉 잡은 태영이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 마다 경수의 입 꼬리가 조금씩 올라갔다. 거실 쇼파까지 도착하자 경수가 태영을 안아들고 쪽쪽쪽 입을 맞췄다.
“오구 내새끼. 걸음마도 잘하네!!”
까르르 웃으며 경수의 얼굴을 잡은 태영이 중심을 잃고 경수의 어깨에 이마를 쿵 박았다. 깜짝 놀란 경수는 손으로 태영의 호-우리 태영이 안 아프다! 라며 이마를 쓸어주었다. 울상을 지었다 금새 밝게 웃은 태영이 경수의 손에다 얼굴을 비볐다. 기저귀를 차고 있는 엉덩이를 툭툭 두드린 경수가 바닥에 태영을 내려두곤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익숙한 연결음이 끊기고 반대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다 죽어가는 목소리에 놀란 경수가 괜찮냐며 물었다.
“백현이 자…왜 전화했냐.”
“찬열이냐?”
“어…”
평소에도 낮은 목소리가 더 가라앉아 있었다. 아니 어딘가 꽉 막혀 있는 목소리였다. 아니 저녁에 어디서 볼까하고. 저녁약속장소를 위해 전화를 했지만, 상태를 보아하니 오후가 되어서야 정상적인 통화를 하겠다 싶은 경수가 일단 쉬라며 전화를 끊었다. 옷에 물 묻은 손을 슥슥 닦으며 거실로 온 종인이 찬열이 형이에요? 라고 물어왔다. 고개를 끄덕인 경수가 쇼파에 벌러덩 누웠다. 태영은 혼자 바닥에 깔린 뽀로로 매트에 누워 이리 뒹굴 저리 뒹굴 거리고 있었다.
“종인아.”
“네?”
“우리 태영이 이렇게 보니까 되게 착한 거 같아.”
“왜요?”
“찬열이 목소리 들어보니까 수진이 때문에 못 잔 거 같아.”
잠이 많은 태영에 비해 수진-찬열과 백현의 딸-은 잠이 없었다. 정확히는 밤잠이 없었다. 백현의 품이나 찬열의 품이 아니며 하루 종일 울어 백현을 도와주러 백현의 집에 왔던 백현의 엄마도 설거지나 집안일을 해 줄뿐 수진을 돌봐줄 수 없었다. 거기다 평일에는 찬열까지 집을 비웠으니 백현은 이미 줄넘기를 해도 될 정도의 다크써클이 눈가에 자리하고 있었다. 4개월 된 수진은 한시라도 엄마나 아빠의 품을 벗어나려하지 않았고 강제로 떼어놓으면 집이 떠나갈아 울어재꼈다. 한 번은 버릇을 고쳐야 된다며 30분 동안 수진이 울어도 가만히 뒀다가 그 다음날 심하게 앓았던 적도 있었다.
그에 반해 태영은 엄청 순한 편이었다. 해가 짐과 동시에 눈에 졸음을 잔뜩 달고는 잠투정도 거의 하지 않았다. 보통 9시가 좀 넘으면 잠이 들어 아침 8시까지 절대 깨지 않았다. 가끔가다 새벽에 배가고파 깨면 으앵소리를 내다가 젖병을 물려주면 그새 울음을 그치고 분유를 쭉쭉 빨아먹었다. 트림을 시키기도 전에 잠이 들어버려 고생한 적은 있었다. 장난감 하나를 던져주면 3시간은 편안했고 3시간 뒤에 다른 장난감을 던져주면 또 다시 3시간가량 조용했다. 백현은 그런 태영을 보며 부러워 죽으려했다. 그래도 어쩌겠냐, 미우나 고우나 내새끼인 것을 이라며 한숨을 내쉬는 건 이제 예삿일이었다.
그새 잠이 온 것인지 태영은 입에 검지손가락 하나를 물고는 잠이 들었다. 으휴, 우리 잠꾸러기 왕자님, 방에 가서 주무십시다. 경수가 태영을 안아들고 방에 들어가 아기침대에 태영을 눕혔다. 잠시 몸을 뒤척이더니 다시 가만히 잠이 들었고 조심스레 물고 있는 손가락을 빼낸 경수가 이불을 덮어주고는 거실로 나왔다. 쇼파에 슬라이딩하듯 엎드리고 눕자 앉아있던 종인이 경수의 허리를 베고 누웠다. 더듬더듬 리모컨을 찾은 뒤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 요리프로에서 채널이 멈췄다. 경수는 아기 이유식에 관한 프로를 유심히 보고 있었고, 종인은 그런 경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벌떡 일어난 경수 때문에 목이 꺾일 뻔한 종인이 목을 매만졌다. 경수가 후다닥 달려가 거실장에서 메모지와 볼펜을 꺼내오더니 무언가를 끄적끄적거렸다.
[유기농 아기치즈 1장 멸치가루 10g 밥 300g 김 그 외 야채 조금 참기름 조금]
이유식 재료였다. 우리 형 완전 아줌마 다 됐다. 그 소리에 경수가 종인을 노려보며 팔꿈치로 배를 한 대 쳤다. 죽어. 배를 쓰다듬으며 멋쩍은 웃음소리를 낸 종인이 다시 경수의 무릎을 배고 누웠다. 경수가 손바닥에 올려두었던 메모지를 종인의 이마에 올려두고 TV에서 나오는 레시피를 적었다. 방송이 끝나고 경수는 메모지를 떼어 냉장고 위에 붙여두었다. 무료한 주말 오전을 청소로 보내자며 청소기를 끌고 나온 경수가 종인에게 청소기를 건넸다. 익숙하게 청소기를 받아든 종인이 전기코드를 연결시키고 이 방 저 방을 윙-소리 나는 청소기와 함께 돌아다녔다. 시끄러운 소리에도 태영은 절대 깨지 않았다.
으아아아앙-
찬녈아아, 여보오-! 수진이 좀 봐아-잠든지 채 두 시간도 되지 않아 울어재끼는 수진을 보던 백현이 베개에 얼굴을 묻으며 찬열에게 소리쳤다. 이불에 파묻혀 있던 찬열이 좀비처럼 엉금엉금 기어 나와 눕혀져 있던 수진을 안아들었다. 공주님, 아빠 잠 좀 자자…조금 더 주무세요오…낮게 가라앉다 못해 바닥을 파고들어갈 듯한 높이의 목소리로 찬열이 중얼거렸다. 눈도 채 다 뜨지 못하고 반쯤 뜬 채 수진을 어르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꽤 지나자 손가락을 입에 문 수진의 눈가가 발갰다. 손으로 눈가를 쓱쓱 닦아 준 뒤 수진을 눕힌 찬열이 백현이 누워있는 이불 사이를 파고들어 백현을 꼭 끌어안고는 바로 기절하듯 잠들었다. 그렇게 오후 4시쯤 되자 엉금엉금 일어난 두 사람이 거실로 기어 나왔다. 아, 경수…. 오늘 저녁에 잡은 약속이 생각났는지 핸드폰을 들고 와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아까 전화했다며?”
“백현이?”
“응.”
그렇게 7시에 식당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잡고, 집을 대충 정리하고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다행히 수진은 여전히 손가락을 입에 문 채로 잠들어 있었고, 옷을 다 갈아입은 백현이 주섬주섬 수진의 옷을 꺼내와 갈아입혔다. 으엥. 누가 자기를 건드리는 게 싫은지 울음소리를 내는 수진을 안고 어르며 재빠르게 옷을 갈아입혔다. 그렇게 잠시 칭얼거리던 수진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백현의 볼을 주물럭거렸다. 그게 또 귀여운지 백현은 수진의 입술에도 쪽쪽 뽀뽀를 해댔다. 슬슬 갈까? 허리에 아기띠를 두른 백현이 수진을 고쳐 안으면 말했다. 기저귀, 물병, 분유와 분유통 등이 담긴 가방을 찬열에게 주며 말했다. 찬열이 차키를 챙기고 가방을 울러 매고 집을 나섰고, 백현도 따라 나섰다.
경수도 잠에서 깨 장난감을 가지고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고 있는 태영을 일으켜 옷을 갈아입혔다. 조금씩 말이 트기 시작한 태영이 싫다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시져, 시져. 어허, 태영왕자님. 옷 입어야 돼요. 경수의 말에 입술을 쭉 내밀며 부-소리를 낸 태영이 또 가만히 경수의 손에 붇들려 있었다. 점점 쌀쌀해져 가는 날씨에 내복을 벗기지 않고 위에 옷을 껴입힌 경수가 다시 장난감을 손에 쥐어주곤 방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가방에 태영의 기저귀, 간식, 물병등을 챙긴 경수가 태영을 안고 종인과 함께 집을 나섰다.
우연히 식당 주차장에서 만난 두 가족이 서로 반가워했다. 초췌해 보이는 백현과 찬열에 반해 경수와 종인은 매우 깔끔해보였다. 경수가 안고 있던 태영을 내려주자 뒤뚱뒤뚱 백현에게 걸어가 백현의 다리를 붙잡았다.
“수지니, 태영이도 수지니!”
“수진이 볼 거야?”
백현이 살짝 몸을 낮춰주었다. 해맑게 웃으며 태영이 수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수지니 기엽따! 까르르 웃는 태영의 모습에 네 사람도 모두 웃음이 터졌다. 식당으로 들어온 뒤 수진을 내려놓자 수진이 엉금엉금 기어 백현의 무릎에 올라가려 낑낑거렸다. 아직 걸음이 익숙치 않은 태영도 엉금엉금 기어 백현에게 달라붙었다. 백현이 수진을 들어 무릎에 앉히고 태영도 들어 올리려 하자 수진이 빽-소리를 내며 울어버렸다. 깜짝 놀란 태영이 그대로 뒤로 나자빠져 머리를 바닥에 박고 울음을 터뜨렸다. 경수도 놀라 태영을 안아 머리를 쓰다듬으며 괜찮다고 어르기 바빴고, 백현도 울음이 터진 수진을 어르고 있었다. 금새 울음을 그친 태영에 반해, 수진은 여전히 울고 있었다. 결국 찬열이 수진을 안고 밖으로 나가버렸고 그제야 방 안은 조용해 졌다.
“백현이 형, 엄청 힘들겠네요.”
“죽을 거 같다.”
백현이 상 위에 퍽 엎어져버렸다. 시킨 고기가 나오고 집게를 든 경수가 고기를 구웠다. 고기가 거의 다 익을 쯤 들어온 찬열이 자리에 앉고 수진을 무릎 위에 앉혔다. 이것저것 손을 뻗으려는 수진 때문에 뒤로 물러난 찬열이 수진의 손에 숟가락 하나를 쥐어주었다. 이리저리 숟가락을 휘두르던 수진이 잉?하는 소리를 내자 찬열이 수진을 쳐다보았다. 아야야. 종인이 숟가락을 들고 있었고 이마를 슬슬 문지르고 있었다. 푸핫. 넷 모두 웃음 터졌다. 아마 수진이 휘두르다 날아간 숟가락이 종인의 이마를 때린 모양이었다. 조용히 밥을 받아먹던 태영도 같이 따라 웃었다. 밥을 거의 다 먹고 찬열이 계산하러 수진을 안고 밖으로 나가고 종인도 태영을 안고 밖으로 나갔다. 조금 뒤 경수와 백현이 슬금슬금 걸어 주차장 쪽으로 향했다.
“백현아.”
“왜.”
“안 힘드냐.”
“힘들어 죽겠다. 근데 어쩌겠냐 미우나 고우나 내새끼인걸.”
“그건 그래.”
두 사람이 서로 마주보며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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