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손으로 턱을 괴고, 지긋이 눈을 맞춰오는 생기어린 눈동자. 사각 사각- 빠르게 써내려간 공식을 눈으로 다시 한번 훑는 나를 보며, 제 입에 걸린 헤벌쭉한 웃음을 감출 생각 따윈 없어보인다. 부담스런 시선에 고개를 들어보이자, 채 젖살이 빠지지 않은 오동통한 볼이 눈에 들어온다. 괸 턱을 요리조리 돌려가며, 헤실헤실 웃고 있는 놈의 손에서 필기구가 돌아가고 있다. 머리가 좋은 편이라, 생각보다 가르치는 재미가 있는 녀석이었다. '아, 진짜 얼굴은 내 스타일인데-'. 한 시간 내내 남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이렇게 제 취향을 드러내는 것만 빼면. 나는 이내 놈의 이마에다 딱밤을 날려버렸다. 따악- 놈의 이마에서 호두깨는 소리가 났다.
"아!!! 쌤!!! 아프잖아요!!!!"
"집중"
벌겋게 흉이 진 이마를 부여잡고, 아아. 나 죽네- 하며 엄살을 피우는 놈을 보며, 한쪽 입가에 웃음이 엷게 새어버렸다.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놈은 그 사이에 이미 들썩여버린 내 입매를 캐치한 듯, 금새 소란스럽게 '어? 쌤 웃었죠! 우와~ 대박!' 하고서 함박웃음을 짓는다. 그리곤 제 얼굴을 들이밀곤 '한번만 더! 한번만 더 웃어봐요!' 하고 이미 굳어버린 내 얼굴을 마주하며 재촉해 댄다. 언짢아진 나는 미간을 찌푸리고 놈을 쏘아보자 놈은 꼬리를 내리는 듯 하다가, 내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금새 쉴새없이 조잘거려댄다.
"아~~웃는거 진짜 이쁜데!! 아깝다! 진짜 아까워~"
"문제 안 푸냐"
"할거에요....!! 그니까 때리지만 마요. 진짜 아파"
놈은 제 손바닥으로 입을 감싸 호호-하곤 입김을 모으더니, 붉어진 이마로 가져간다. 그리곤 혓바닥을 내밀어 침을 손가락으로 묻히고, 덴 부위에 살살 바르기도 한다. 가지가지 하는구나.
"쌤! 물어볼게 있는데요~"
"쓸데없는 거면 죽는다"
"..와...겁나 잔인해...."
"잔말말고 풀어"
"쳇..... 쌤은 누구 사귀어본적 없죠? 성격이 이래놔서!"
이 놈한테 빈틈을 보이는 게 아니었다. 아직 붉은색이 가시지 않은 이마에 나는 다시 손을 갖다댄다. 그리고는 좀 전보다 더 힘을 주어, 놈에게 딱밤을 먹였다. '악!!!!!' 즉각적인 반응을 예상한 나는 소음을 막고자, 미리 귀를 막았다. 고막이 다 울린다.
"와~ 진짜 이건..과외폭력이에요!!! 부당해!!"
"그런 것도 있냐"
"있어요..!! 아무튼. 쌤이 자꾸 나 때리면......엄마한테 이를거에요! 나 때린거 알면 쌤 바로 짤릴걸요!!우리엄마가 한마디만 하면 쌤 우리동네엔 얼씬도 못할지도~!"
제 허리에 손을 얹으며 콧대를 들어 눈을 치켜뜨는 놈. 조금은 귀엽다고 생각했던 놈이였다. 나를 보며 잔망스런 얼굴도 치대오는 게, 귀찮기도 했지만 아주 조금은 즐겁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역시 있는 집 놈들은 생각하는 게 다 이따윈지. 불리하다는 판단이 들면 엄마라는 절대적인 방패를 들이미는 것. 제 놈들의 어미가 돈 좀 있기로서니, 이 놈까지 나를 '을' 의 관계로 치부하는 건 배알이 꼴린다. 이내, 놈에 대한 얕은 상념은 금새 공중으로 흩어졌다.
"홍빈학생~ 오늘은 조금 더 넣었어. 계좌 확인해보고 담주에 봐~"
검정색 긴 롱 드레스 차림으로 내게 웃어보이는 중년의 여자. 팽팽하게 당겨진 얼굴이 제 딴엔 웃는다고 지어보인 미소를 더욱 인위적으로 만든다. 나는 그녀에게 곧장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 겹겹이 쌓인 방문을 몇개쯤 열고 나간다. 대체 문을 몇개나 달아 논건지, 있는 놈들의 창의적 돈지랄 정신은 참.. 높게 사고 싶다. 처음 이 집에 왔을 땐, 출입구를 찾지 못해 한참을 헤매었더랬다. 주말에만 들리는 곳이었지만 대략적인 집안 구조 정도는 눈에 익혀두었다. 앞치마를 입고 문간에 선 입주 가정부가 웃으며 가는 길을 배웅한다. 학생, 살펴가요-
**
"아. 덥다-"
왼쪽 주머니를 더듬어 담배갑을 꺼내 장초에 불을 붙이곤, 후끈한 시멘트 바닥위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를 보며 한모금 깊게 들이마셨다. 후우- 내뿜은 연기가 달궈진 바닥을 타고 올라 공중에 잠시 머무른다. 바람 한 점 없는 후덥지근한 날씨가 계속되고 있었다. 그 일이 있고 부터 벌써 몇 달이 지났다.
"....정택운..."
떠올리는 것 만으로도 온몸에 털이 곤두서는 듯한 그 이름을 곱씹으며, 나는 곧장 학과의 입을 자처하는 놈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한동안 '야. 니네 그거 아냐' 로 시작해서 '씨발. 존나 웃겨' 로 끝나는 격 떨어지는 놈들의 고막테러를 듣고 있자니, 여간 짜증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방학내내 놈들이 배출하는 쓰레기를 묵묵히 감내했지만, 정택운에 대해서는 별다른 수확이 없었다. 이미 내가 알고 있는 사실들 뿐. 뭐, 이름만 대도 알만한 대형병원 병원장 아들이란 것과, 그와 5분이상 대화를 해 본 이가 아무도 없다는 것. 행사치례처럼 한달에 한 번 이상은 고백을 받고, 매번 미안하다는 말로 차버린다는 것. 그나마 건질만한 건 걔 중엔 남자놈들도 더러 있더라는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뒷담화를 하는 놈이 아무도 없다는 아이러니한 결론에 이르기까지.
"증거..증거라"
뭐. 전혀 수확이 없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것 하나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놈이 상당히 밝히는 놈이라는 것. 제 몸에 같은 걸 달고 다니는 놈들이 정택운의 뒷구멍에 보내는 적나라한 시선을 모를리가 없다. 제 놈이 그런 시선을 받는 그 자체를 즐기는 걸 테지. 뭐, 지금도 그 얄쌍한 얼굴로 눈을 흘기며 다른 놈들에게 뒤를 뚫리며 발정난 개처럼 울어댈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아무런 물증도 없이, 단지 추측에 불과한 것만으로는 아직은 실행에 옮길 단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별다른 방법을 찾지 못한 채 시간은 흘러흘러 개강주에 접어 들게 되었고, 이전보다 더 빡빡해진 스케줄의 압박을 받고 있던 터였다. 손에 들린 담배필터가 붉은 빛을 내며 운동화 끝에 살짝 내리더니, 이내 재가 되어버린다.
"홍빈님. 저도 한모금 하겠나이다~"
어울리지도 않는 존칭을 써가며 내 쪽으로 달려온 한상혁이, 손에 들린 담배를 뺏으며 자연스레 어깨에 팔을 걸친다. 도톰한 입술을 뻐끔거리며 연기를 한번 베어물고, 다시 내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워준다. 나는 어깨위로 닿은 꺼림칙한 놈의 손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내뱉었다.
"한상혁. 좋은 말할때 놔라."
"거 참 빡빡하시네. 밤마다 보는 사인데~♥"
"적당히해라"
목을 한번 까딱이며 물씬 풍겨나는 내 진심어린 대답에, 놈이 재빨리 양손을 들어올려 보이며 자신의 양쪽 어깨를 콩콩 두드린다. 유난스런 제스쳐를 취하며 시계방향으로 목을 두어번 돌리더니, '어후~ 어깨가 왜이리 뻐근하지~?'하며 내 눈치를 살피는 한상혁. 항상 제가 먼저 치근덕대오는 걸 내가 매번 쳐내는 걸 알면서도 그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했다. 딱히 내 비위를 거스를만한 행동을 하는 것도 아니거니와, 그의 꾸준하고도 성실한 어택에 나는 제지하는 일 마저 귀찮아져 그냥 내버려두게 되었다. 뭐, 불과 몇달 전만 하더라도 밤마다 이불속에 머리를 묻고 엉엉 울면서, 내가 유급이라니- 따윌 지껄이며 내 숙면을 방해하긴 했지만. 그게 제 딴엔 꽤나 충격적이었던지 머리에 꽃만 안 달았을 뿐, 초점이 사라진 눈으로며칠간 머리도 감지 않고, 그 정신나간 꼴로 학교를 배회하고 다녔더랬다. 그리곤 사흘밤낮을 해당 과목 교수를 따라다니며 손발이 닳도록 빌어, 겨우 복학할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그 조건으로 학기내내 30장 이내의 논문을 매주 하나씩 갖다 바쳐야 한다며, 닭똥같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종일 자판을 두들기던 기상천외한 놈.
"진짜... 나 그래도 이렇게 너랑 학교다니는 게 꿈만 같아.. 크흑"
왠만한 여자발보다 큼지막한 제 손으로 코를 잡곤 눈물겨운 연기를 해보이는 한상혁. 그래. 나도 꿈만 같다. 이번학기에도 네 놈의 징징거림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이. 옆에서 자전기적 감동사를 읉어대는 놈에게 시선을 돌리고, 다 타버린 담배를 바닥으로 던졌다. 갓 태어난 새끼마냥 내 뒤를 졸졸 따라오는 놈과 함께 나는 강의관으로 발을 옮겼다. 본격적인 실습을 하게 되는 본과 3학년이 되기까지는 채 반년도 남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정택운과 마주할 일이 더욱 줄어들게 되겠지. 그동안 어떻게서든 결판을 내야한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어? 페로몬 떴다!!"
"..어디"
"뭐야, 이홍빈. 너도 쟤한테 관심있어?"
"죽고 싶냐"
"그럴리가~! 난 장수로 기네스기록을 꿈꾸는 남자라구ㅡwㅡ 근데 너 다른사람한테 관심가지는 거 처음봤다야~ 크... 역시 마성의 정택운...!!"
관심이라. 뭐 맞는 말이다. 필요에 의한 관심이라도 내가 정택운의 흔적을 쫓고 있다는 거, 그건 사실이니까. '쟨 맨날 저 시꺼먼 애랑 다니더라. 우리과는 아니던데-' 어쩌면 놈에 대한 단서가 될 지도 모를 옆의 까무잡잡한 인물에 대해 떠들어대는 한상혁. 녀석의 시선을 따라가보니 빈틈없이 썬팅된 검은색 차량 뒷 자석에서 발을 내딛는 정택운이 보인다. 여전히 창백한 얼굴과 속 쌍커풀이 옅게 진 눈, 색기어린 작고 붉은 입술. 확실히 객관적으로 보자면 놈들이 미치는 요소를 다 갖고 있긴 했다. 뭐, 내게는 여전히 구역질 나는 얼굴일 뿐이지만. 놈과 같은 차를 타고 왔던지, 먼저 내린 걸로 보이는 시꺼먼 녀석이 정택운의 손목을 잡아 이끈다. 옆의 녀석에게 잡혀 질질 끌려나오는 정택운의 하얀 손목을 바라보며,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저만한 덩치를 해가지곤 힘없이 끌려나오는 놈이나, 정택운에게 서스럼 없이 손을 대는 저 시꺼먼 놈이나. 역겨운 새끼들.
"와~ 병원장 아들은 클라스가 다르구만~ "
"별게 다."
"너 설마... 저걸 못알아 보는 건 아니지? 저거... 벤츠 신상이잖아. SL55 AMG!!! 전세계 딱 한대 밖에 없는 거!!!"
"그러냐"
"헐...진짜 몰랐냐... 대박..!! 야, 아무리 나라도 쟤가 입고 다니는 게 명품이란 거 정돈 안다~"
"관심이 없어서"
있는 대로 입을 벌려 경악한 얼굴을 해보이는 한상혁. 놈을 뒤로 한채, 내 시선은 아직 시꺼먼 놈에게 붙들린 정택운의 손목에 그대로 고정되어 있었다. 언제까지고 놓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 새까만 놈과 마찬가지로 억지로 빼낼 생각따윈 없어보이는 정택운. 분명 멀쩡한 사내새끼들끼리 할 법한 행동은 아니다. 한낱 추측에 불과했던 것들을 마주하자, 내 머릿속은 이내 놈들의 지저분한 행각으로 얼룩져버린다. 퍽- 짜증이 밀려온다. 제 놈들 때문에 더러운 상상에 얽혀버린 나와는 달리, 조금 다른 방향으로 생각의 물꼬를 틀어버린 한상혁은 '흐음. 사람들이 왜 라인을 잘 타야한댔는지, 이제 알것 같군.' 하곤 고개를 두어번 끄덕인다. 뭔 개소린가 싶어 놈을 쳐다보려던 나는 금새 입을 다물었다. 놈은 이 쪽으로 걸어오는 정택운을 향해 제 손을 세차게 흔들어 보이며, 쓸데없는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택운아! 정택운!!"
"......?"
"오랜만이다~! 방학 잘 보냈어~?"
"아.. 응. 넌?"
"나야 뭐~ 유급할 뻔 했는데 어찌저찌 이렇게 잘 다니고 있지~~!!"
"..그렇구나"
저 오지랖 넓은 새끼. 묻지도 않은 제 근황에 대해 나불거리는 한상혁과 별말없이 고개만 살짝 끄덕이는 정택운. 옆에선 시꺼먼 놈이 '우리 운이랑 같은 과 친구구나! 반가워~' 하며, 한상혁의 손을 붙들고 아래 위로 흔들어 댄다. 지금껏 놈에게 잡혀있던 정택운의 손이, 그 결에 제 허벅지 께로 떨어진다. 이내 정택운은 풀려진 제 손을 한참 바라보더니, 시선을 들어 나와 눈을 마주한다. 아무것도 담지 않는 감흥없는 눈으로, 내게 어떤 적의도 감정도 보이지 않는 그를 나는 세차게 쏘아본다. 더러운 새끼. 뭘봐, 호모새끼야. 피하려는 기색도 없는 정택운을 보고 있자니 꾹꾹 눌려둔 화가 다시 치미는 것 같아, 나는 한상혁을 내버려둔 채 강의관으로 발길을 돌렸다. 주머니 속 이미 비어버린 담배갑을 뒤지다 한손으로 이내 구겨버렸다. 하루빨리 저걸 내 눈앞에서 치워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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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상혁이를 구상했을 땐, 별로 중요한 인물은 아니었어요. 그냥 과 동기들 중 하나였는데... 내용을 수정하다보니 꼭 필요한 캐릭터가 상혁이가 되버리더군요. 게다가 쓰는데 너무 귀여워서 (끙끙) 아직까지는 계획의 진전이 없어보이는 콩이네요- 급전개는 어려워요........! 콩택이라 쓰고 택총이라 읽는 의홍고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