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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XX/한상혁/컴백기념글] 맞닿은 너의 온기 | 인스티즈





지겹다. 빨리 끝났으면 좋으련만-. 포스트잇 한쪽 귀퉁이에 네 얼굴을 그려넣고, 나는 미간을 좁혔다. 하나도 안 똑같잖아, 짜증나. 신경질만 남은 창작물을 한 손으로 구기곤, 책상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네 웃는 얼굴을 본지도 꽤 오래되었다. 서로 마주하는 시간이 줄어든 건 순전히 너보다 조금 일찍 사회생활을 하게 되버린 나 때문이었다. 일 때문에 항상 귀가가 늦어지는 나를 기다리며 잠든 네 얼굴은 눈에 익어, 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선명하게 그려진다. 소파 한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누워있는 너. 덩치에 안 맞게 두 주먹을 가슴께에 꽉 모아쥐고 자는 게 퍽- 귀여워, 나는 고개를 숙여 네 머리칼을 한 번 쓸어올려본다. 길게 쭉 뻗은 속눈썹이 움찔움찔하더니 눈가에 살짝 주름이 진다. 손을 들어 미간을 꾹 눌러주자, 이내 뒤척이다 더듬더듬 거리며 내 손을 잡는다. 그리고는 채 뜨지 못한 눈으로 '왔어?' 하며 어물어물 중얼거리는 너. 그런 니가 나는 참 안쓰럽고, 좋았다. 아닌 척 하면서도 나를 생각해주는 네가. 아, 생각하니까 더 보고싶어졌다.






"자, 입가 한번 씰룩여도 보고~ 큐울. 한번 더 !"







머뭇거리는 한 남자에게 얼굴을 들이밀며, 저처럼 갖가지 표정을 지어보라는 감독의 말소리가 들려온다. 또, 뭔가 제 마음에 안 들었던 모양이다. 낮은 한숨을 푹 쉬곤 엎드린 채로 눈만 살짝 들어올리니, 낯선 얼굴이 보인다. 이국적인 외모와 탄탄한 몸매. 유독 입체적인 코가 눈에 들어온다. 이번 광고에 쓸 유명 모델이라고 들었던 것 같다. 패션업계에서는 꽤나 유명하다나 뭐라나. '아 그래? 관심이 없어서 몰랐네' 너와 찍은 사진을 하나하나 넘겨보며 눈을 핸드폰 화면에 고정시키며 내가 그랬더랬다. 그러자 내 동기에게, 광고일한다는 애가 그래서 되겠냐, 너 또 그러고 앉았냐는 둥- 온갖 잔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아. 지면 촬영이 오늘이었던가? 








"아~ 영 아닌데? 재환씨 몸을 좀 더 써봐요. 허리를 좀 바짝 땡겨도 보고"








꽤나 답답한지 감독이 손에 쥔 카메라를 슬몃 내려놓으며 인상을 찌푸린다. 그리곤 남자에게 다가가 어깨를 눌러 구부리곤 팔을 바지춤에 꽂게 했다. 유명모델이라더니 왜 이렇게 허둥댄담. 아직도 어색함이 가시질 않았는지 어정쩡한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이래서야 오늘도 집에 일찍가긴 또 글렀구나. 젠장. 






"아니지- 엉덩이를 뒤로 좀 빼보고. 아~ 그게 아니라니깐?"







그쪽에서도 꽤나 입지굵은 비싼 몸일테지만, 광고는 처음인지 갈피 못잡고 쭈뼛대는 게.... 이건 영 못쓰겠다 싶다. 그냥 지금 보내버리고 다른 사람 쓰는 게 좋을 것 같다. 얼마 안가 감독의 성질머리가 그 빛을 발할테니. 시야에 저벅저벅 걸어오는 한 중년의 모습이 보인다. 왕년에 씨름이라도 좀 했을 법한 체격의 남자는 감독에게 손을 들어보인다. 예상외로 내 귀가는 조금 더 빨라질지 모르겠다.






"이감독. 오랜만이야~"
"대표님. 오셨습니까"
"하하. 그래, 이 녀석은 잘 하고 있나?"
"생각보다 좀 실망스럽더군요. 대표님이 추천하신다기에 모델로 고르긴 했지만....."
"흐음....그래? 저, 이감독... 내 입으로 말 안할려고 했는데...... 
사실은, 우리 재환이가 좀 컨디션이 안 좋다네. LA서 찍은 화보때문에 몇일 밤을 좀 샜거든. 지금 시차적응도 안 됐고~"
"아. 그렇습니까"
"그럼 그럼~ 평소엔 이런 애가 아닌데... 이감독이 조금 이해해주길 바래. 내 말 무슨뜻인지 알겠지?"







여러 의미로 힘 있는 모델인 모양이었다. 소속사 대표라는 중년의 남자가 이감독에게 가벼운 어투로 부탁하네- 라는 말에, 감독은 그 자리에서 얼어버렸다. 그리곤 '좀 쉬다하지' 한마디만 뱉고선 황급히 자리를 떠 버린다. 당분간은 내가 일어날 일은 없을 것 같아, 조금만 더 누워있자 싶어 다시 책상으로 얼굴을 묻었다. 살풋 잠이 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든 순간, 내 팔을 톡톡 두드리는 손길이 있다. 아, 귀찮게. 행여 감독일까 싶어 얼굴을 들고 보니, 그 이국적으로 생긴 모델이었다. 







"또 주무시게요?"
"네. 뭐 필요하신 거라도?"







손질이 필요하다면 전속 스타일리스트 정도는 있을테니, 나한테 올린 없고. 일단은 나도 현장 스텝이긴 하니까 말을 걸었겠지 싶어, 그에게 즉각 답변을 해주었다. 촬영하는 동안엔 전혀 볼 수 없었던 그의 미소가 입가에 걸린다. 겉으로 보면 이탈리아 마피아이라고 해도 믿겠다 싶은데, 웃는 것 보니 어릴적 집에서 키우던 우리 백구와도 조금 닮은 것 같다. 하얗고 순해보이는 게.






"아뇨. 혹시 저 모르세요?"
"네"
"아, 그러셨구나 하핫"
"꼭 알아야 되나요?"
"아..아니요! 저.. 아직까지 인지도가 많이 부족하다 싶어서요."






머리를 긁적이며 수줍게 웃어보이는 이탈리아산 백구. 대표의 말대로 LA서 밤을 새고오기라도 한건지 백구의 눈 밑에는 채 지워지지 않은 다크써클이 보인다. 
다른 여직원들이 흘긴눈으로 내쪽을 주시하는 걸 보면 인기는 있는 모양인데, 그런것치고는 참 겸손하다 싶다. 







"아..네. 열심히하세요"
"다음엔 꼭 알아봐주세요. 제 이름 이재환입니다."
"그럴게요. 그럼 전 이만 좀 자도 될까요?"
"흠흠. 저......주무시기 전에 한마디만 하겠습니다."
"뭔데요?"
"그쪽 번호주세요"







순전히 제 능력이 부족해서 혼난 걸 나한테 화풀이 하려고 하는 건가. 감독이 신명나게 털어댈 때 내가 좀 엎드려 있었기로서니, 그게 좀 고까워서 그런가 싶어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자 이탈리아 흰둥이는 '아, 별 뜻은 없구요. 아...아예 없는 건 아닌가' 하며 혼자 뭔가를 중얼중얼 거리더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네"
"그 쪽이 마음에 듭니다"
"왜요?"
"자고 있는 모습이 예뻐서요"
"꽤나 변태적인 취향이시네요"
"저도 제가 이런 모습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습니다. 그래서 좀 긴장했나 봅니다. 몸이 자꾸 뻣뻣하게 굳어버리더군요."
"굳이 뭐 변명하지 않으셔도.."
"아뇨. 진짜. 진짭니다. 못 믿으시면 뭐... 가족이라도 걸어야 하나...."







혼자 심각하게 자신만의 세계에 갇힌 이탈리아 흰둥이는 다시금 중얼중얼 거린다. 입버릇처럼. 나는 그가 하는 말을 한 박자 느리게 이해했고, 속으로 웃음이 터져버렸다. 아, 완전 웃긴다. 이거 한상혁이 들으면 진짜 배잡고 뒤로 넘어갈거야. 나 아직 안죽었다고, 너 조금은 긴장해야 될껄? 그러니까 빨리 질투해줘, 한상혁. 집에 가자마자 곧장 너 붙잡고 자랑할꺼니까. 프흐. 난생 처음 겪어본 난감하고 즐거운 상황에, 나는 질투로 울그락 풀그락 해질 상혁일 상상하며 그만 웃어버렸다. 그런 내모습을 본 그는 내가 저 때문에 웃은 줄 알았는지 굳은 얼굴로,








"이래뵈도 저 진지합니다"
"아, 그쪽보고 웃은거 아니에요. 그리고 저 남자친구 있어요"
"친구부터는 어떻습니까?"
"아니, 그쪽이 절 언제봤다고..."
"그 쪽이 아니라, 이재환입니다."
"그래요. 이재환씨. 전 모르는 사람이랑 친구든 뭐든 해 볼 생각 없어요. 이왕이면 지금 찍는 광고에 좀 충실해주시죠. 그게 이재환씨가 지금 할 일인거 같네요"








그는 나에게 충분히 즐거울만한 거리를 제공한 것은 분명하지만, 어디까지나 나와 한상혁에게만 즐거운 일일뿐. 나는 그럴 마음이 추어도 없다. 언제까지고 그럴일은 없을거다. 평생. 모델이면 자기 하는 일이나 잘할 것이지. 이렇게 아무나 붙잡고 하는 말이 얼마나 진실될지도 모르는 일이고. 애초에 그가 본분에 충실했다면 나는 이른 귀가를 했을 것이며, 곧장 한상혁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나에게 모진 말을 들을 이유쯤은 된다고 생각한다. 가시돋친 내 말에 이재환은 꽤나 정곡을 찔린 듯한 표정을 짓더니, 대번에 얼굴을 굳히고선 한다는 얘기가,






"1시간안에 끝내겠습니다. 그럼 그땐, 이름이랑 번호 알려주세요"







울컥해서 아무말이나 뱉는다고 그게 다 될말인가. 지금까지 안 되던게 자기가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해낼수 있다는 듯이 말하는 이재환. 그의 터무니 없는 자신감에 경의를 표하며, 나는 어깨를 으쓱하곤 '오케이나 받고 오세요' 하고 덧붙였다. 잘 하면 나야 좋지. 광고 매출에 도움되면 감독이 나한테 괜히 성질 낼 일도 없고. 더불어 야근도 줄어들고, 나쁠 것 없지. 해낼 수만 있으면. 내 대답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건지, 이재환은 다시금 백구같은 얼굴로 웃어보인다. 이내, 감독이 자리로 돌아와 다시 촬영이 시작되었다.



'찰칵 찰칵. 차라라락'





고요한 가운데 연속으로 터져대는 셔터소리만 장내를 울리고 있다. 좀 전 대표님의 언급 때문인지 별 디렉팅 없이 찍어대는 이감독. 그리고 아까와는 다른 표정을 지으며 여유를 부리는 이재환. 허둥지둥대던 모습은 어디간건지, 한순간에 사람이 바뀐것 마냥 '컷' 소리를 얻어낸다. 근거 없는 자신감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모든 이들이 변화를 감지하고, 그를 뚫어져라 열렬한 시선으로 쳐다본다. 감독 또한 한쪽 입가에 미소를 걸치며 '이게 본모습인 모양이네, 좋아. 지금껏도 좋은데 몇 컷만 더.' 하고 신명나게 셔터를 눌린다. 이렇게 되면... 조금 귀찮아질지도 모르겠다. 






"수고하셨습니다!"
"이재환씨, 여태 내숭떤거야? 허- 참. 다음에도 꼭 같이 작업함세~"
"네. 감사합니다, 감독님"





딱히 지금 가고 싶진 않지만, 화장실에라도 가야되나. 저벅저벅 내 쪽을 향해 산뜻한 걸음으로 걸어오는 이재환의 모습을 보며 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금새 눈앞으로 다가온 그는 입모양으로 '약속 지켜요' 하더니, 제 핸드폰을 내민다. 아, 몰라. 설마 먼저 연락오겠어?... 이런거 보고 한상혁이 질투해주면 난 더 고맙겠지만. 그가 내민 핸드폰을 잡아채어, 나는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기곤 저장을 눌리고 이재환의 눈 앞에 내밀었다. 이탈리아 백구는 화면을 보며, 하얀 이를 다 드러내고 활짝 웃는다.






"김별빛씨. 이제 우리 친구맞죠?"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하핫. 연락하면 무시하진 말아주세요. 상처받을지도 몰라요."








너털웃음을 지어보이며 환하게 웃는 이재환을 보고 있으려니, 괜시리 얽히게 될 것 같아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수고하셨어요'라며 의례적인 한마디를 남기고 나는, 가지고 온 내 짐을 가지고 발걸음을 옮겼다. 한 두어발치 떨어진 곳에서 큰소리로 '별빛씨, 잘가요!' 라며 손을 번쩍 들어 흔들어보이는 이재환. 그의 모습 위로 매일 아침 졸린눈을 비비며, 내 머리를 쓰다듬는 한상혁의 모습이 겹친다. 현관을 나서는 나에게 다녀와- 라며 손을 흔들며 베실- 웃어보이는 그의 모습이.



 





***





"상혁아- 나 왔어. 또 자고 있는 거야?"





적막한 거실에는 그 어떤 미동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역시, 그럴줄 알았어. 나는 여지없이 니가 누워있을 소파 곁으로 간다. 그 끄트머리 쯤에 허리를 걸치고, 나는 잠든 네 얼굴을 보며 '오늘 나 무슨일 있었는줄 알아?' 하고 묻는다. 새근새근 잠든 그의 숨소리만 조용히 전해질 뿐. 이건 니가 꼭 들었으면 좋겠는데.....쳇.. 








"나 왠 남자한테 고백받았어. 그것도 잘생긴 이탈리아산 백구같이 생긴 사람한테. 
이번 광고 모델인데 나한테 한다는 말이 번호를 달라지 뭐야. 내가 자는 얼굴을 보고 반했다나 어쨌다나. 풉. 완전 웃기지 않아?"








잠결이라도 내 목소리를 들었으면 좋겠다. 분명, 너는 '보나마나 어디 정신머리 흘리고 다니는 남자겠지' 하고 핀잔을 주며, 내 머리를 콩- 쥐어박고선 '그래서. 고백받으니까 좋았어?' 라며 귀여운 질투를 할테니까.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걸린다. 빨리 네가 일어나서 내 얘길 들어줬으면 좋겠어. 항상 그러던 것처럼, 오늘도 수고했다며 내 입술에 키스해주기를. 요즈음 눈만 감으면 금새 잠들어 버리는 게 습관이라도 된건지, 금새 졸음이 몰려온다. 나는 웅크린 네 옆을 비집고 들어가 누워버렸다. 귓가에 네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래서. 고백받으니까 좋았어?"






역시, 너다. 쌍커풀이 없는 긴 눈매를 살짝 들어 뾰루퉁한 얼굴을 해보이는 너. 넌 정말 내가 바라는 대로의 반응을 해주는 구나. 진짜 너무 귀엽게도 말야. 






"뭐... 나쁘진 않았어~"
"그럼 그냥 받아줘 버리던가"
"뭐야, 한상혁. 삐졌어? 푸흡. 나 좀 기분 좋아질려구 해"
"아 몰라. 저리가"






발로 내 허벅지를 살짝 밀어내는 한상혁. 그리곤 내 얼굴이 보이지 않는 반대편으로 돌아누워 버린다. 입을 꾹 다물고는 곧장 자는 척을 할 셈인지







"나 잘꺼니까, 말걸지마"
"아~ 왜에. 상혁아, 누나 못믿어?"
"누가 누나야. 생일은 내가 더 빠른데."
"그런 세세한 건 좀 넘어가주시구요~ 아, 상혁아아~"









애교랍시고 콧소리를 내며 그에게 들러붙었던 게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킨 건지.. 그의 팔을 부여잡고 내 쪽으로 끙끙대며 흔들어대는데도, 그는 꿈쩍도 않는다. 돌아누워있는 널 억지로 힘을 써가며, 마주보게 하려고 하니 이것도 꽤 벅차다. 하긴 그가 아무리 말랐다고 한들, 그래뵈도 180은 훌쩍 넘어버리는 장신의 남자. 쳇. 짜증이 울컥 솟아와서 그의 팔을 팩 놓아버렸다. 그제서야 고개를 뒤로 하곤 눈을 맞춰오는 너.






"힘자랑은 끝났냐"
"너랑 안놀아. 나 잘거야"






이번엔 정말 내 쪽에서 토라져버려서 여전히 소파에서 뒹구는 너를 내버려두고 침실로 향하려는데, 그가 내 허리를 잡아챈다. 그리고는 도로 소파에 앉히곤 '오늘도 수고했어' 하며 다정한 키스를 퍼붓는다. 아, 역시 너다. 내가 사랑할 수 밖에 없는 너. 그리고 앞으로도 여전히 사랑할 한상혁.









**






여전히 꿈속에서 뒹굴고 있는지 도통 일어날 생각이 없어보이는 너. 졸업반이 되고 부터는 과제고 논문이고 뭐고- 해서 꽤 바쁘게 지내는 듯 했다. 때문에 아침마다 힘겨워 하는 널 차마 깨울 순 없었다. 거실 현관문 앞 문간에 서자, 여린 주홍빛 전등이 들어온다.





"다녀올게"







문 밖을 나서니 익숙한 풍경이 펼쳐진다. 아침마다 입에 토스트를 물고 허겁지겁 버스정류장으로 뛰어가는 나에게, 쯧쯧 혀를 차며 바라보는 한상혁. 부모님께 한바탕 혼이 난 후, 집 앞 놀이터 그네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노라면, '넌 갈 곳이 여기밖에 없냐, 창의성을 좀 길러봐' 하곤 빈 그네에 털썩 앉는 한상혁. 겨울만 되면 유독 손발이 차가워지는 내 손에 손바닥 만한 핫팩을 쥐어주며, 빨리 집에 들어가라고 핀잔을 주는 한상혁. 그런 니가 나는 좋아질 수 밖에 없었다. 무심한 듯 다정한 너. 함께 있는 시간만큼 마음은 커져갔고, 그해 겨울 나는 널 집앞 공원으로 불러냈다. 그리곤 결국 입밖으로 내버렸다.








'나 너 좋아해. 친구가 아니라 이성적으로.. 넌 몰랐겠지만'
'진작에 알고 있었거든'
'야!! 사람 민망하게.. 나 지금 고백하는 중이잖아!'
'그러니까 누가 먼저 하래'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판다. 왜!!!'







내 말에 피식 웃어보이는 너. 하아- 하곤 기지개를 한번 쓱 펴더니, '춥다. 집에 가자' 하고는 내 손을 이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이런걸 모른척 하나 싶어, 나는 금새 눈가가 시큰해졌다. 그 자리에서 꿈쩍않고 눈가에 차오르는 방울을 들키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려버리자, 동그란 눈으로 시선을 맞춰오는 한상혁. 







'왜 울어. 넌 사귀자마자 날 나쁜놈 만드냐'



내 귀를 의심하며 저를 올려다보는 나를 보며, 그는 손으로 맺힌 눈물을 닦아준다. 



'울지마. 난 너 우는거 싫어.' 







익숙해진 만큼 우리는 서로에게 소중한 한 켠을 이미 내어주고 있었다. 네 자리는 여기야. 그날 니가 해준 말도 아닌데, 네 눈이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손바닥이 솥뚜껑만하다며 놀리는 내게 주먹으로 다시금 콩- 쥐어박으며, 내 손을 잡아 깍지를 끼여오는 너였다. 그 체온이 너무도 따뜻해서 아무리 추운날이라도, 너를 만나는 날엔 절대 장갑을 끼지 않게 되었다. 습관적으로. 출근길엔 어김없이 너와 함께 했던 장소들을 지나쳐 간다. 그 어느곳에건 니가 있다. 그러니, 나에겐 겨울이 절대 오지 않을 것이다.









**






포스터가 나온 모양이었다. 이전에 지면촬영할 땐 눈동냥으로 봐서 그런지 대충 윤곽만 잡혔었는데, 실제로 나온 결과물은 꽤나 그럴싸했다. 아, 들린다. 들려. 매출올라가는 소리가-. 그러고보니, 오늘 나온 작업본을 확인하러 회사에 잠깐 이재환이 들렸다는 모양이었다. 번호를 준 이후로 몇번이고 문자가 온적이 있었다. '날이 따뜻해서 너무 졸리네요', '밥은 먹었어요?', '답장 좀 해주지..' 와 같은 시시콜콜한 얘기들. 상혁이가 내게 물었다면, 나는 곧장 보내기 버튼에 손부터 올라갔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의 연락을 모조리 무시했다. 행여 그와 마주치기 전에, 혼자 피신이라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여기, 귀밝은 호랑이는 남의 속마음까지 읽는 줄은 몰랐지만.







"나 진짜 상처받았는데. 별빛씨, 내 문자 못봤어요?"







어깨를 추욱 늘어뜨리며 말을 걸어오는 이재환에게 나는 조금 섬뜩한 느낌마저 들었다. 타이밍 참 미저리 같네. 난감할 땐 피하는 게 상책인데. 이렇게 대놓고 들이닥쳐오면 피할 수가 없잖아. 







"봤어요"
"애태우려고 일부러 답장 안한거에요? 기다리다 정말 속이 타들어가는 줄 알았는데"
"굳이 답장해야 할 필요성을 못 느껴서요"
"부담스러워요 나?"
"뭐, 그런편이죠. 그러니까 답장 강요하지 마세요. 전 이만 가볼께요"









이정도면 아무리 저라도 내가 하는 말의 의미는 충분히 알아들었을 거다. 조금은 충격을 먹은 모양인지 제 곁을 지나치는 내게 이재환은 더 이상 말을 건네지는 않았다. 직접적으로 말하는 게 확실히 효과가 있었나보다. 나는 미동도 없는 그를 지나쳐 복도를 성큼성큼 걸어간다. 뭔가 허벅지쪽에서 느낌 아닌 느낌이 온다.








[정택운]






주머니 속에서 작게 떨리는 핸드폰을 들어 보니 화면에 그의 이름이 찍힌다. 내 오랜친구 정택운. 그에게 연락이 온건 꽤 오랜만이었다. 
음.. 1년만인가? 정택운도 상혁이랑 같이 학교다니느라 나랑 못만난지가 그즈음 되었던 것 같다.






"응. 택운아"
[너 오늘 올거 아니지?]
"내가 왜안가. 우리 한상혁이 생일인데"
[하...너 아직도 생일 타령이냐. 어머니가 제발 좀 너 오지 말라고 하셔]
"왜? 어머닌 나 되게 예뻐하시는데?"
[김별빛. 지금 그걸 몰라서 물어?]







알면 성질 더러운 네놈한테 묻겠냐. 도로 물어보고 싶은 것을 내가 한번 꾹 눌러담는다. 
얘랑 말하면 100% 질거 뻔하고, 괜히 시비걸었다가 되려 제쪽이 삐져서 나한테 말 안 걸테지. 에라이 속좁은 정택운.








"암튼 나 갈거야. 아참, 너 요즘 어떻게 지내! 연락이 좀 뜸하다?"
[어떻긴. 회사의 노예로 살고 있지]
"어? 너 언제 취업했어? 왜 나한테 말도 없이!! 축하턱 안낼려고!!"
[....................말했어. 분명히]
"야, 내가 들은 기억이 없는데. 그리구 너 한학기 더 남은거 아냐? 휴학 한번 했었잖어"
[.....김별빛. 지금이 몇년도야]


갑자기 왠 연도 타령이람. 괜시리 시큰시큰해지는 손목을 주물럭 거리며,



"뭘 그런걸 물어. 아, 아무튼 어머님네 가서 보자. 오랜만에 모여서 맥주한잔씩 하면서-"
[너 오면 안돼. 오지마]
"야! 정택운. 왜 자꾸 못되게 심술부리는데"
[오지말라면 좀. 말 좀 들어. 제발]
"아, 몰라. 나 퇴근하면 곧장 그리고 갈테니까 끊자~"







항상 상혁이 생일날에는 친구들끼리 모여 조촐한 파티를 하곤 했다. 뭐, 이런걸 해. 진짜 나이가 몇갠데. 하며 입을 삐죽 내밀고 중얼거리면서도 초가 켜진 촛불을 입으로 후- 불때 살짝 입가에 미소가 걸린다는 걸 나는 잘 안다. 그리곤 뻔뻔하게 선물내놔- 하면서 큰 손을 내미는 것이다. 올해는 미리 니가 갖고싶어하던 게임기를 사뒀다. 아무것도 안 사온척 네 손에 들려주면 넌 내 머리통을 껴안고 '아, 진짜 난 너밖에 없어' 라며 정수리에 쪽쪽- 하고 뽀뽀를 해줄거야. 어서 빨리 니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







"이제 그만 들어들 가지."






하루 종일 기다리던 말이 귓가에 들렸다. 팀장님, 오늘 왠일이시지? 칼퇴근도 시켜주시구. 나 지금 좀 신난것 같아. 오늘만은 내 사랑을 나눠주고 싶은 팀장님께 급하게 목례를 한 후, 나는 정류장으로 달려갔다. 제일 빨리 오는거. 제일 빨리 오는거. 어머님 집으로 가는 101번. 음... 30분후 도착. 아, 기다리는 시간도 아까워... 정말.. 출근 전에 쇼퍼백에 상혁이에게 줄 선물을 넣어오길 잘한 것 같다. 집에 한번 들렸더라면 분명, 또 혼자서 징징댔을 테니까.



 



"아, 왜이렇게 안오지"
"별빛씨. 어느 쪽으로 가세요? 같은 방향이면 타고 가시죠"









내겐 구세주나 다름 없는 말이지만, 내뱉은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자 나는 선뜻 그러겠다고 할 수 없었다. 
좀 전까지만 하더라도 내 공격적인 태도에 상처를 받았던 모습이 역력했는데, 금새 또 빙긋 웃으며 말을 거는 이재환. 이 사람도 참 끈질기다.






"괜찮아요"
"오늘 민방위 훈련해서 버스 금방 안올거에요. 바빠보이시는데... 
뭐. 정 불편하시면, 제 차를 택시라고 생각하세요"








하필이면 이런날 민방위 훈련이 다 뭐람. 빨리 가야하는데... 이래서야 한시간은 훌쩍 넘겠다 싶어 나는 못 이긴척 이재환의 옆좌석에 올라탔다. 
나에게는 일각을 다툴만큼 중요한 일이고, 굳이 저가 태워주겠다는 데 거절할 이유가 뭐가 있겠냐 싶어 되려 나는 뻔뻔하게







"자양동으로 가주세요"








이재환을 택시 기사처럼 취급했다. 그는 별 말없이 피식 웃곤 엑셀을 밟는다. 꽤나 스피드를 즐기는 사람인건지, 밟아내는 폼이 예사롭지 않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제가 먼저 이렇게 달려준다면 나야 고맙지. 정류장에서 하릴없이 전광판만 쳐다봤을 30분이 금새 지나갔고, 상혁이네 집 문앞에 도착했다. 이재환에게 태워다줘서 고맙다며 꾸벅 인사를 하고, 벨을 누르려고 문앞으로 다가갔다. 내 손이 벨에 닿기 직전, 미리 와 있던 건지 그 앞에는 택운이가 정장차림으로 입구를 막고 서 있다. 짜식, 취업했다더니 이제 좀 사회인 냄새가 나는데. 








"또 왜 왔는데"
"야~ 너 친구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야~ 상혁이도 먼저 와 있어?"
"제발... 그만 좀 해"
"뭐야. 정택운. 나한테 화난거 있어? 왜그래?"
"니가 이러는 거... 다른 사람들 한테도 너한테도 정말 못할 짓이야. 그러니까 제발 돌아가"
"아, 왜이러는데 진짜. 내가 뭘? 말을 해줘야 알거 아냐."







화가 난 것 같기도 혹은 울먹이는 것 같기도 한 정택운과 입씨름을 하고 있는 동안, 철제 문이 쇤 소리를 내면서 바깥쪽으로 열린다. 초췌한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는 상혁이네 어머님. 반가운 마음에 왜 이리 마르셨냐며- 재촉하려던 내 손을 먼저 부여잡은 건 어머니다. 한참을 말없이 내 손을 부여잡고 주무르시는 모습이 전에도 이랬던 적이 있었던 것처럼 익숙하다.







"별빛아"
"네. 어머니"
"이젠... 안 와도 돼. 아니, 오지 말아줘"
"혹시 어머니도 저한테 화난거 있으세요? 그런게 있으심 말해주시면 안되요? 고칠게요. 제가. 네?"
"난 네가 니 인생을 살았으면 좋겠어"









정택운의 전화를 받았을 때 부터 시큰거리기 시작한 손목이 다시금 아려온다. 어머니는 잡고 있던 손을 놓고선, 내가 아린 고통을 느껴오는 부위를 지긋이 쳐다보신다. 그리고는 다시 내게 눈을 맞춘다. 마치 네가 너무 안됐다는 듯이, 아프지? 하고 물어보는 것도 같은 눈. 








"4년이나 됐구나. 니가 상혁이 생일날만 되면 우리집에 매년 들리게 된게"









무슨 말을 하시려는 진 모르겠지만, 나는 왠지 듣고 싶지 않아졌다. 그녀의 입에서 나올 말들이 나에겐 조금 아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번도 내게 나쁜 소리를 한 적이 없는 어머님인데도, 나는 그래도 무서웠다.








"그리고 매년 오늘, 여기 이 자리에서 어김없이 니가 응급실에 실려갔어. 이제... 이제 그만하자 별빛아. 응? 이젠 제발 놓아줘. 그러자. 응?"
"어머니, 무슨 말씀 하시는 건지... 저는... 도통..."








뿌옇게 흐려지는 눈으로 어머니를 바라보다, 나는 도망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여기 있으면 안돼. 너는 지금 모든 걸 알게 될거야. 그러니까 어서 빨리 피해. 상혁이의 곁으로.







"이미 죽은애 생일은 그만 챙겨도 돼. 너 이러는 거 보면 분명 상혁이가 날 먼저 다그칠거야. 그러니까 별빛아. 제발. 이제는 여기 오면 안돼."







의식이 흐려지는 것 같다. 이 말을 또 듣고야 말았다. 나는 다시금 어머니를 괴롭힐 생각은 아니었다. 나는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다. 상혁이는 이미 죽었다는 걸. 세상에서 내가 제일 사랑한 사람은 이미 4년전에 내 곁을 떠났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모른척 해왔다. 나의 시간은 그가 존재했던 그 때에 멈춰버렸다. 








***








원인은 교통사고였다. 밤새 뜬 눈으로 작업한 논문을 기한 내로 제출해야 한다며 부랴부랴 간단한 책가지만 챙겨 나간다고 했다. 마침 그날이 상혁이 생일이기도 했고, 일부러 휴가를 그 날에 맞춰서 잡았기 때문에 나는 회사에 나가지 않았다.








'나 간다'
'응. 오늘 어머니네 가서 파티하는 거 알지?'
'당연하지.'
'그래, 갔다와'
'다녀올게. 얌전히 기다려'







여느때와 같이 제 큰 손으로 내 머리를 헤집어 놓으며 인사를 하는 한상혁. 그것이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생각보다 차가 밀리는지 몇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는 그를 기다렸지만, 정작 내게 돌아온건 너의 사망소식을 알리는 전화였다. 믿을 수 없었다. 아직 나에게는 니가 준 온기가 남아있는데... 하염없이 쏟아지는 눈물을 채 닦아내지도 못하고 병원으로 향했다. 정택운은 그날도 나보다 먼저 와 있었다. 시뻘개진 눈을 하늘로 들었다가 내리기도 했다가 하면서 소리 없이 울고만 있었다. 아니야. 이건 네가 아니야. 어딨어. 어딨어 상혁아.








'택운아. 우리 상혁이 어딨어?'
'김별빛...'
'병원에서 자꾸 날 찾잖아. 상혁이가 자꾸 여기있다는 거야. 근데 없어. 운아. 우리 상혁이가 없어.'
'니 앞에 있잖아'








침대 한켠에 하얀 천을 덮고 누워있는 사람이 상혁이라고 한다. 아니, 아닐거야. 내가 확인해야 겠어. 내 눈으로 똑똑히 봐야돼. 덜덜 떨리는 손을 부여잡고 천을 들어 그 사람의 얼굴에서 상혁이를 찾아보았다. 여전히 곱고 단정한 얼굴. 볼을 쓰다듬자 아직 온기가 남아있다. 손도 한번 잡아보니 아직 따뜻하다. 내 손을 잡아주던 그 체온 그대로다. 살아있구나. 우리 상혁인. 근데 왜 계속 잠만 자. 눈 좀 떠봐. 나 좀 바라봐줘. 응?







'택운아. 상혁이가 자꾸 잠만 자. 요 몇일 밤을 좀 샜거든. 논문때문에. 근데 내가 왔는데도 눈을 안떠. 좀 깨워줘.'
'죽은 애를 어떻게 깨워'







아니다. 정택운. 니가 틀린거다. 그럴리가 없다. 아, 갑자기  머리가, 머리가 너무 아프다. 깨질 것 같다. 나 많이 아파 상혁아. 빨리 나 좀 데리고 가줘. 머리를 깨부술 듯 조여오는 고통에 순간 숨이 턱 막혀 나는 그 자리에 주저 앉고 말았다. 그리고 내가 깨어났을 땐 이미 상혁이의 장례는 치뤄진 후였고, 나는 그가 죽기 전의 시간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리고 나는 매년 상혁이의 생일날 그의 집을 찾아가 진실을 듣고, 마음 한구석에 묻어버리는 것이다. 어머님은 그런 나를 안고서 그저 눈물만 뚝뚝 흘리실 뿐. 네가 너무 가여워. 제발... 우리애는 이제 좀 놓아주자고. 절대로 그를 놓을 수 없는 나는, 그가 죽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그것이 진실이었다.









**








자꾸만 아려오는 손목이 너무 아파 한손으로 부여잡고, 나는 숨죽여 울어버렸다. 시야에 들어오는 건, 손목위로 새겨진 선연한 세 개의 칼자욱. 매년 이 곳에서 쓰러져 며칠만에 제 정신을 차릴때마다, 나는 매번 손목을 그었다. 어딜봐도 니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너와 함께 손을 잡고 거닐던 거리, 입맛이 까다로운 네가 유독 좋아하던 곱창집, 자주가던 카페. 그 어디에도 니가 없다. 나에게 네가 없는 세상은 고통스러웠고, 하루하루 지옥같은 나날들이었다.








"어머니......저요. 사는게 사는 것 같지 않았어요... 그래서 하루 빨리 상혁이에게로 가고 싶어서 노력도 많이 했어요...근데요. 그럴때마다 자꾸 상혁이가 꿈에 날 찾아와요. 그러지 말라고. 근데 그 꿈을 꾸면 나는 하루를 더 살수 있었어요... 런 상혁이 모습을 꿈에서라도 볼 수 있다는 게 전 너무 기뻤어요..."








좋아하는 것을 하면 자연스럽게 늘어나게 되고, 잘하게 된다고 했다. 눈을 감으면 니가 보인다. 여전히 나를 향해 웃어주는 한상혁. 잘못한 일이 있으면 논리적으로 다그치는 한상혁. 내가 시무룩해져있으면 뒤에서 허리를 살짝 안아주는 한상혁. 겨울에 장갑을 안 끼는 나에게 혼을 내는 한상혁. 너 때문에 안 끼는게 습관됐다는 내 말에, 말없이 내 손을 잡아 자신의 주머니로 넣어버리는 한상혁. 이 모든 너의 모습들을 꿈을 통해서만 볼 수 있었다. 눈을 뜨면 너는 어디에도 없다. 그렇게 나는 너와 만나기 위해 잠을 자는 시간을 늘려갔다.









"근데, 그걸 알면서도 도저히 놓을 수가 없어요. 어머니..... 상혁이는 저한테 그래요. 평생 그럴거에요 아마.... 
내일 또 눈을 뜨게되면 전 4년전 그날로 돌아갈지도 몰라요... 하지만 어머니를 다시 상처입히고 싶지는 않아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눈물로 범벅진 얼굴로 연신 어머니께 죄송하다는 말만을 반복했다. 점점 의식이 흐려진다. 이번에도 니가 찾아와 줄까. 나는 또 어머니의 가슴에 대못을 박게 되는 걸까. 모르겠다. 아직 널 놓을 준비가 안 되있어. 상혁아. 미안. 미안해..





**






발 밑에 쌓인 소복한 눈을 밟을 때마다 뽀도독 소리가 나서, 그게 꼭 방귀소리 같아 참 웃기더라고 그랬었다. 
지금 네 손을 맞잡고 거니는 이 길에서도 널 웃음짓게 하는 눈 소리가 난다. 






'너무 두렵고 끔찍한 꿈을 꿨어'
'어떤꿈인데?'
'네가 나를 막 떠나갔어. 영원히'
'개꿈이네'
'네가 들어도 말 안되는 꿈이지. 널 내가 잃을 리가 없어'
'쓸데없긴'








혼자 상념에 잠겨있는 나에게 자신의 어깨를 내어주는 너. 나는 그 넓은 어깨에 기대어 다시금 눈을 감는다.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은데도 심장 소리가 들린다. 두근, 두근. 일정한 간격으로. 아아, 너는 아직 내 옆에 있어. 여전히.








'네가 떠난 내 모습은 꿈 속이라도 싫어 난. 네가 내 곁에만 있다면 악몽이라도 좋을거야'
'참나. 생각하는 거 하곤'
'1분 1초도 떨어지지마. 아니, 내가 너 안 놓을게. 내가 다 받아줄거야'








그러니까-. 뒷말을 덧붙이려던 나의 입은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갑자기 흐려지는 네모습.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다시 눈을 감았다가 들어올린다. 
사라진 너, 찰나의 꿈. 눈을 뜨면 네가 다시 보일 것도 같은데, 잔인한 밤은 끝없이 나를 찾아온다.






****









"이제 좀 정신이 들어요?"








물 한잔을 건네며 물어오는 한 남자.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탓인지 갈증이 난 나는, 그의 손의 들린 종이컵을 건네받아 벌컥벌컥 마셨다. 목으로 넘어가는 물줄기는 미적지근했지만, 손에 닿은 컵의 온기는 봄볕처럼 따스했다. 마치, 한상혁처럼. 그의 체온을 닮은 이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다. 부은 눈을 비비곤, 완전히 떠지지는 않는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본다. 아, 저 눈에 띄는 큰 코. 껄끄럽기 그지 없는 저 코. 저것만 봐도 누군지 알것 같다. 







"여긴 어떻게 알고.."
"그날 별빛씨 옆에 왠 남자가 있길래, 그 남자친군가 해서 견제 좀 해볼려고 했는데... 그게 보다보니까...다 ...봐버렸어요.. 미안해요."
"이젠 스토킹까지 하는군요"
"그게... 진짜 그럴려고 그런게 아닌데. 아무튼, 몸은 좀 어때요, 괜찮아요?"
"네. 괜찮아요"
"아....다행이다. 걱정 많이했어요. 저"








내 눈치를 보는 듯 머쓱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이는 이재환. 나는 그의 모습에서 너를 찾아본다. 쌍커풀진 큰 눈,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오똑한 코. 두꺼운 입술. 완전히 다르다. 너와는. 아마 닮은 건 그 따스한 온기를 가졌을 손 뿐이겠지. 게다가 저 남자는 내 이상형도 아니고, 쓸데없이 다정하기만 해. 부담스러울 정도로. 






'게다가 코가 너무 커'






분명히 넌 내게 이렇게 덧붙였을거야. 그 옆에서 난 맞장구를 치며 네 허벅지를 두드리겠지. 맞아. 정말, 너무 커. 하고는 네 어깨에 기대어 웃어버렸을 거야.









"회사에는 제가 대신 말해놨어요. 당분간은 좀 쉴 수 있을거에요"
"오지랖까지 넓으시네요"
"별빛씨, 덕분이죠. 하하"








눈을 감지 않아도 들리는 것 같은 네 목소리에 나는 또 대답을 하고 만다. 저것봐. 저남자 게다가 느끼하기까지 해. 
후라이팬이 있다면 이 남자를 올려보고 싶어. 분명 이남자를 녹이면 버터 덩어리째로 나올거야. 





'그래. 나같이 담백한 남자 만나기 어디 쉬운 줄 아냐'






네 말이 맞아. 상혁아. 그래서 난 너 없으면 안돼. 







"당분간은 아무것도 하지말고 푹 쉬어요."
"네. 이제 볼일 끝나셨음 가보세요"
"아니......무슨 사람이 이렇게 매정해요?"








아직 당신에게는 내 곁을 내어줄 생각이 없거든요. 봤지. 상혁아. 나에겐 니가 아닌 남자는 다 필요없어. 내말 들려? 그럼 대답좀 해줘. 응?
돌아올리 없는 대답을 바라고선 나는 머릿속으로 그의 대답을 떠올려보지만, 이번엔 선뜻 네가 할만한 말이 떠오르질 않는다. 





[난 네가 행복하길 바래. 내가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항상 먼저 떠나는 쪽은 너인가보다. 내 머릿속에서만 들려야 할 네 목소리가 분명히 귀에 닿아온다. 
이건 진짜 네 목소리. 내가 아는 한상혁. 이번엔 정말 네가 날 떠나려고 하나보다. 
안돼. 난 아직 준비가 안됐단 말야. 상혁아. 지금처럼만. 제발.







[괜찮아. 다 괜찮아 질거야. 그러니까 울지마]






다정한 너의 말에 나는 끝내 목놓아 울고 말았다. 이젠 꿈속에서도 널 만날수 없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내 턱선을 따라 떨어지는 물방울들은 한데 모여, 덮고 있던 이불을 금새 적셔버렸다.  







"어...지금 우는 거에요?...어...어떡하지"







당황한 그가 눈앞을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면서 뭘 찾는건지, 두리번거리는 것이 보인다. 
흐린 시야 속으로도 그가 여전히 허둥대는 모습은 또렷하다. 그리곤 자꾸만 말을 걸어댄다.
 




"아, 휴지! 휴지는 ...어...아까봤는데..." 
"혹시 아파요? 어디 아픈거에요? 간호사라도 불러줄까요?"
"대답 좀 해주면 안돼요? 너무 아파서 말도 못하는 거에요?"







그래. 상혁아. 이사람은 너와 너무나도 달라. 내가 울고 있을때면 말없이 어깨를 안아주던 능숙한 너와는. 행여 내가 다른 사람을 만나길 바란다면, 난 아마 너의 체온을 닮은 이사람을 만나게 될거야. 너와 닮은 점을 찾아가면서, 그가 조금은 좋아지게 될지도 몰라. 하지만 난 평생 널 그리워 하면서 살게 될거야. 널 대신할 사람은 이 세상엔 아무도 없어. 그 어디에도. 







"저기, 간호사누나!! 여기 빨리좀 와주세요!! 급해요, 급해!! 진짜.. 울다가 죽을지도 몰라요!!"








비상벨을 다급하게 누르며 부산을 떨어대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너의 목소리를 보내주었다. 아마 다시는 네가 먼저 날 찾아오는 일은 없겠지. 행여 꿈에서라도. 그래도 한번쯤은, 내가 너무 그리워지면 네가 찾으러 와줘. 내 꿈속으로. 이번엔 네가 먼저. 오늘 배웅은 내가 할 차례야. 
잘가. 상혁아, 그리고 기다릴게. 다시금 내게 기적처럼 돌아올 너를.




더보기

수정하다가 더보기 글이 지워진 모양이네요. 

어쩐지 안열리더라; 


 

이미 유추하셨다시피, 이번 앨범을 들으면서 생각한 스토리에요. 

기적은 들으면 들을 수록 슬픈것 같아요.  

가사를 곱씹으며 들을수록 더 그렇게 느껴지네요. 

듣다가 자꾸 눈물이 나서 ㅋㅋㅋㅋㅋ아우...주책맞네 


 


 

오픈엔딩 스럽게 마무리를 지었는데요. 

사실 딱히 오픈엔딩도, 새드엔딩도 아닙니다.  

누군가에게는 재환이와의 연애를 기대하는 엔딩일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혁이를 가슴에 품고사는 여주의 새드엔딩일 수도 있어요. 


 

다만, 확실히 말하고 싶은건 여주인 별빛의 심경입니다.  

그가 자신이 행복하기만을 바라기 때문에, 이젠 내가 상혁이를 놓아줘야겠다고 다짐하는 것. 

하지만 나는 여전히 너에 대한 마음을 버릴 수 없기 때문에, 기적처럼 니가 살아돌아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린다고. 

그녀는 더이상 스스로 눈을 감지는 않을 겁니다. 그가 찾아와주기 전까지는요. 


 


 

앨범듣다 필받아서 훅훅 써내려갔네요.  

장편은... 차후에 올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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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왜이런글에 댓글이앖어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엉어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ㅍ상혁아ㅠㅠㅠㅠㅠㅠㅠㅍ퓨ㅁ너무승프다 물쌍해서오또케.ㅠㅠㅠㅠㅠㅍㅍㅍㅍㅍㅍㅍ감정이입해서봤어요 취향저격이네요 정말
10년 전
핫바디우니
첫댓고마워요!
기적 듣자마자 상혁이를 염두로 쓴 글이에요ㅎㅎㅎ
사실 쓰다가 몇번 울컥했다는건 안 비밀.

10년 전
독자1
와.... 미쳤다 역대 최고 금손......이때까지 본 것 중에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소오오오오오오름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작가님... 오늘 신알신이고 뭐고 다하고 가겠습니다 존경합니다 사랑합니다
10년 전
핫바디우니
옴마야.. 몸둘바를 모르겠네요ㅎㅎㅎ과분한 칭찬 감사히 받을게요. 저도 사랑해요♥
10년 전
독자2
으아ㅠㅠㅠㅠㅠㅠㅠㅠㅠ기다리고있었는데ㅠㅠㅠㅠㅠㅠㅠㅠ대박......진짜대박..........
10년 전
핫바디우니
왠지 누군지 알것같아요!
제 글에 자주 댓글 달아주시는 쨍이시죠??ㅎㅎㅎㅎ
이번에도 좋은 평 해주셔서 감사해용!

10년 전
독자3
헐 작가님 저 꽃게랑ㅇ이에요 기억하시나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헝 ㅠㅠㅠㅠㅠ오랜만이에여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너무 바빴는ㄴ데 짱좋다 하악...
10년 전
핫바디우니
당연히 기억하고 있죠ㅎㅎㅎ
항상 열렬하게 반응해주시는 내사랑 꽃게랑님!
오늘도 와줘서 고마워요♥

10년 전
독자4
헐 대바구ㅜㅜㅜㅡㅜㅜㅜㅜㅜㅜ 반전도 이런반전이 ㅜㅜㅜㅡ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
10년 전
핫바디우니
나름 복선을 깔긴 했는데...요렇게 알아봐주시니 기쁘네요ㅎㅎㅎㅎㅎ
10년 전
독자5
와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진짜 작가님 최고에요... 제가 지금까지 봤던 글중에 제일 좋은것같아요ㅜㅜㅜㅜㅜㅜㅜㅜㅜ
10년 전
핫바디우니
아우...후한 칭찬 감사합니다!! 몸둘바를 모르겠네요 ㅠㅠ
10년 전
독자6
상혁이랑너무어울리는글ㅠㅠㅠㅠㅠㅠㅠㅠ기적들을때마다 생각날거같아요ㅠㅠㅠㅠㅠ
10년 전
핫바디우니
제가 정말 그런 상태랍니다 ㅠㅠㅠ 헤어나올수 없어요...ㅠㅠ
10년 전
독자7
글 진짜 잘 쓰시는 것 같아요
보면서 정말 몰입하면서 봤어요~!!

10년 전
독자8
ㅇㅏㅠㅜㅠㅠㅠㅠㅠ한상혁ㅠㅠㅠ이렇게 멋있어도 되냐며ㅠㅠㅠ이렇게 아련해도 되냐며ㅠㅠㅠ명불허전 한상혁오빠ㅠㅠㅠㅡ어빠!!!!!!ㅠㅠㅠ작가님 제대로 취저ㅠㅠㅠ
10년 전
독자9
ㅠㅠㅠㅠ읽다가 울어버렸네요ㅠㅠㅠㅠㅠ너무도 불쌍해서...ㅠㅠㅠㅠㅠㅠ
10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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