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은 오늘도 소란했다. 오늘따라 더욱 발걸음이 늦는 담임 덕에 거뭇한 사내놈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목소리를 키웠다. 학연은 손에 쥐고 있던 펜을 돌렸다. 이내 앞에 놓인 순백의 노트는 의미 없는 낙서들로 채워졌다. 손을 끊임없이 움직이면서도 눈으로는 창밖을 좇았다. 운동장은 한산했다. 볼 것도 없는 그 공백을 학연의 새카만 눈은 참, 끈질기게도 담아냈다.
조례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야 담임은 모습을 드러냈다. 어슬렁거리며 교실 안을 돌아다니던 놈들이 그제서야 느릿한 움직임으로 제 자리를 찾아 착석했다. 출석 부른다. 여즉 잠이 덜 깬 목소리가 잠잠하기 그지 없는 고요를 깨웠다. 그럼에도 여전히 운동장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따분했다. 뭐든 간에.
뒷목이 쓰라렸다. 그새 멍이 든 듯싶었다. 간밤에는 그럭저럭 견딜만했던 상처들이 이제와서 아우성을 쳐대기에 학연은 곤란했다. 팔도 욱신거렸고 열 대는 족히 쳐올려졌을 법한 따귀는 말할 것도 없었다. 발갛게 달아오르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히 여겼다. 팔을 움직여 교복 바지 주머니 부근을 지분댔다. 아버지에게 맞는 것은 언제나 고역이었다. 오늘만이라도 잠을 편하게 자고 싶었기 때문에, 술을 두 병 정도 사가기로 마음 먹었다. 그러면 날아드는 손바닥을 일시적으로 잠재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긴 멍한 눈동자가 창밖을 향했다. 다시금 초점이 잡혔다. 안개가 끼인 듯 희뿌연 날씨는 기분을 한 층 더 낮게 가라앉혔다. 학연은 구름이 싫었다. 한 번 휘저으면 흩어지는 꼴이 싫어 견딜 수가 없었다. 까슬히 껍질이 일어난 입술을 두어 번 짓씹다, 그렇게 저도 모르는 새 잠이 들었다.
이마로 흘러 내린 머리칼에 온 신경이 곤두섰다. 잠결에 둔해졌던 몸이 서서히 깨어났을 때는 그로부터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였다. 무료한 분필 소리가 교실을 가득 채우고 있다. 학연은 슬쩍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저마다 고개가 꺾일 듯 잠을 청하는 모습이다. 선생은 그런 모습들이 익숙하다는 듯 홀로 수업을 진행하는 중이었다. 학연은 그들을 말없이 바라보다 습관처럼 창밖으로 시선을 두었다. 티끌 한 점 없이 고요하던 운동장 한 가운데에 짙게 깔린 한 뼘의 그림자. 무언가 있다.
억지로 눈을 찌푸려 형상을 잡아냈을 때, 그와 동시에 호흡을 집어 삼켰다. 그리고선 해그림자가 짙게 깔린 바닥을 즈려밟은 누군가와 눈을 진득이 마주한다. 깊은 심연의 바다를 마주한 것처럼.
불퉁하게 마디가 솟아 올라 있는 손가락 틈에서 희뿌연 연기가 새었다. 몹시 흐트러진 폼새이나 입고 있는 것은 분명 교복임에 틀림없었는데도 그 기다란 손가락은 지나치게 담배와 잘 어울렸다. 적어도 학연은 그렇게 생각했다. 여전히 서로에게서 시선을 한 치도 벗어나지 않은 채였다. 그는 느릿하게 담배를 입술에 물었다.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와도 같은 몸짓에 학연은 작게 몸을 떨었다. 늦잠을 잔 것일까. 어딘가에서 아무렇게나 잠을 청하고 온 것일까. 머리가 제멋대로 뻗쳐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마저도 담배 연기와 잘 어울린다고 하면, 그건 어떨까.
눈을 아무리 가늘게 떠도 얼굴은 끝내 볼 수 없었다. 그저 큰 키와 무료하게 찢어진 눈 따위만 눈치챌 수 있을 뿐이었다. 고개를 좀 더 내밀고 싶었으나,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남자는 마지막으로 피운 담배를 역시 나른한 동작으로 바닥에 짓이겨 껐다. 맹렬히 타오르던 불씨는 흙더미에 묻혀 서서히 힘을 잃어갔다.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던 학연을 향해 고개를 비딱하게 꺾은 남자가 씨익, 웃었다.
반했어?
한자 한자 끊어 움직이는 입술을 보던 학연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잘못 본 걸까. 장난기를 가득 머금은 입매는 분명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았는데. 샤프를 그러쥐고 칠판에 의미없이 나열되는 글자들을 눈에 담았다. 집중 할 수 없다. 그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을까. 여전히 이 쪽을 바라보고 있을까. 의문스러운 제 마음을 부여잡고 심호흡을 크게 해보였다. 이미 눈알은 제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이고 있는 중이었다.
아. 학연은 약간의 허탈감에 젖었다. 운동장은 고요했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이. 그림자는 물론 티끌 한 점도 없었다. 너는 헛 것을 본 거야. 누군가 저를 꾸중하는 듯한 기분에 다시금 울적해졌다. 손에 들린 샤프를 책상에 놓고서 엎드렸다. 마치 꿈처럼 눈꺼풀이 몽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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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에 이렇다 할 의지는 없었다. 먹고 살기 급급한 환경에서 자란 탓일까. 불우하기 짝이 없는 가정은 공부에 손을 담그게끔 도닥여주지 않았다. 큰아버지를 사랑한 어머니는 일찌감치 집을 나가 행방불명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동성애자의 커밍아웃과 별반 다를 것없는 고백 후 아버지에게 당하는 강도 높은 구타와 폭언을 견디지 못해 쫓기듯 도망친 것에 가까웠다. 당신은 나를 사랑하니 이런 나라도 이해해주겠지. 그런 거지? 나 당신의 형을 사랑하게 됐어. 어머니의 이기적이고도 비정상적인 고백을 아버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당연했다. 그들은 서로를 뼈저리게 이해하지 못한 채 절벽 끝으로 밀어넣었다.
당시의 나는 꽤나 어렸음에도 불구하고 무덤덤하게 모든 상황을 지켜보았다. 사춘기를 겪는 어린 여자아이처럼 방 안에 몸을 웅크리고 눈물을 흘릴 재간은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거실을 가득 채우는 비명과 욕설을 들으며 목구멍이 텁텁해졌던 이유는 하나였다. 이제 아버지라는 이름을 단 미치광이의 술주정이 온전히 제게로 향할 것을 생각하니 짜증이 났다. 어머니는 높게 일렁이는 파도를 막는 방파제였다. 그런 방파제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자 연약한 땅덩어리는 파도를 견디지 못해 으스러지고 말았다.
학연아.
나는 가끔 어머니의 꿈을 꾸곤 한다.
행복해. 뭐든 간에. 어떻게든 간에.
그것이 꿈이 아니라, 그날 밤 어머니가 도망치듯 나가기 전 마지막으로 저에게 남겼던 말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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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에 통증이 느껴졌다. 구타를 당하다 벽에 허리를 부딪친 것이 화근이었다. 학연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고서 책상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잘 뜨이지 않는 눈을 억지로 떴다. 이미 노르스름하게 물든 풍경이 스산했다. 무책임한 교정은 홀로 잠든 저를 깨우지 않았다. 차갑게 식은 책상 옆에 꿰어진 가방을 들어 매고 미련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이젠 다리마저 아파왔다. 오늘은 술을 사가야 하는데. 온몸이 지끈거리니 입술 마저 메말라왔다.
학교를 벗어나는 인적은 저 하나 뿐인 듯싶었다. 초여름의 후덥한 바람이 머리를 헤집었다. 한 걸음 한 걸음을 떼어 낼 때마다 무언가가 울컥, 하고 치솟았다. 입술을 아프게 물고서 다리를 절다시피 걷는다. 그러다, 고개를 숙이고 말없이 몸을 움직이던 학연이 별안간 걸음을 멈추었다. 땅바닥에 길게 늘어진 그림자는 낯설면서도 익숙한 것이었다. 학연은 가방끈을 고쳐 잡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안녕.”
담배를 물고 있던 남자.
“뭐하다 여태 안 나온 거야?”
“…….”
“나 꽤 오래 기다렸는데.”
누구야, 라는 말을 해야 하는데. 말라 붙기라도 했는지 쉬이 입술이 떨어지질 않았다. 가까이서 본 얼굴은 멀리서 봤을 때보다 훨씬 남자다웠다. 눈 옆으로 이어지던 굵은 선이 발끝까지 떨어져 있었다. 길게 찢어진 눈이 빈틈없이 저를 담아냈다. 손가락 끝이 저릿해지는 기분이 들었으나 내색하지는 않았다. 괜히 주먹을 쥐어본다. 저 눈 앞에 모든 것이 들킬 것만 같아서. 그런데, 무엇을 들켜? 들킬 만한 것이 없는데. 그런데도 괜히 온몸에 힘을 주었다.
“누군데 나를 기다려?”
“꼭 누구여야만 기다릴 수 있는 건가.”
제 뺨을 살짝 긁적이더니 느긋하게 물어온다. 너도 관계성 따지는 거 좋아해? 나 그런 거 설명 잘 못하는데.
“아까 운동장에서 두 눈을 지긋이 마주친 사이. 이거면 됐어?”
제멋대로 지껄이고서는 킬킬, 웃어댄다. 학연은 얼떨떨한 얼굴로 그를 멍하니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운동장 한 가운데에서 구겨진 교복을 입고 두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우고서 연기를 뿜던 남자가 지금은 눈을 휘어접으며 웃는다. 그 사이에 어떠한 간극이라도 벌어진 것인지 학연은 전혀 알지 못한다. 남자는 여전히 눈을 휘어접은 채 학연을 향해 말을 건넸다.
“피차 서로 친구도 없는 김에 같이 가.”
내가 누구든 간에. 뭐든 간에.
- 혁엔입니다. 그리 길지 않은 이야기에요! 이번에도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