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찬히 방을 한번 씩 둘러보려다 미련이 남아 혹여 몸은 떠나도 마음은 떠나지 못할까봐 그냥 관두었다. 그가 나간 틈을 타 방으로 들어가 옷장을 열어 가방을 꺼냈다. 챙길만한 옷들은 몇 벌 채 안 되었다. 모두 그와 함께 맞춘 옷들 뿐이라 가져가 봤자 추억을 되새김 하는 일밖에 되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가방을 들고 예전에 썼던 방으로 발을 옮겼다. 문을 열자마자 확 끼치는 한기에 들어가려던 발을 잠시 멈추었다 이내 방으로 들어갔다.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여진 다이어리를 가만히 내려보았다. 가지고 갈까. 입술을 앙다물고 잠시 생각을 하다 다이어리를 폈다. 볼펜이 끼워져 있는 다이어리 장이 펴졌고, 난 펜을 들었다.
「미안했어. 이제 다신 나에게 봄은 오지 않을 거야.」
다이어리는 가져가지 않기로 했다. 그가 이 다이어리를 보고 조금이라도 내가 그의 연인이였단 걸 생각해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이유였다.
생각 외로 눈물은 나지 않았다. 눈물이 마른 건지, 아니면 저 싫다는 사람 붙잡고 구차하게 매달렸던 일들을 이제 그만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에 후련한 건지도 모르겠다. 책상과 벽이 마주 닿는 모서리에 다이어리를 슥 밀어 넣고 방을 나왔다. 손에 들린 가방 안엔 실상 들은 건 별로 없어도 괜스레 가방이 무거웠다. 눈 앞에 보이는 거실을 눈으로 한 번 쭉 둘러보았다. 이제 이렇게 보는 것도 마지막이구나. 씁쓸하게 웃으며 고갤 숙이고 현관을 나섰다. 진짜,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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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새끼야, 정신 차려.”
진영이 선우를 한심하게 내려다보며 다그쳤다. 선우는 술병을 손에 꽉 쥐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진영의 목소리가 귀에 꽂히자 다시 고갤 들어 술을 병째로 입에 털어 넣고는 바닥으로 술병을 내던졌다. 씨발. 술병을 쥐고 있던 선우의 반댓손에 검은 다이어리가 쥐어져있었다. 진영이 그 다이어리에 손을 뻗었다. 다이어리를 선우의 손에서 빼내려고 하자 선우는 손에 힘을 잔뜩 주었다. 진영은 선우가 다이어리를 쓸만한 위인도 아니었고, 혹여 그렇다 한들 이렇게 집착하지는 않을 거라 느껴 생각했다. 이정환 다이어리구나.
“새끼야, 손 힘 빼.”
“……놔, 내꺼야.”
“병신아, 이게 왜 니꺼야? 이정환 꺼지.”
“씨발, 그니까 내꺼라고.”
진영은 당치도 않는다는 듯이 선우의 손등을 탁 치며 다이어리를 반강제로 빼앗아 들었다. 다이어리 첫 장을 피자 귀엽고 둥근 정환의 글씨체가 보였다. 연애일기였나 보네. 옆에 그새 쓰려져있는 선우를 보고 혀를 차며 한장, 한장 다이어리를 넘겼다. 몇장 넘기고 읽다가 한장을 더 넘기니 글은 그 뒤로 적혀 있지 않았다. 혹시 하고 맨 뒷장을 펴보니 역시나 조금 성숙해진 글씨의 글이 적혀 있었다.
2011년 12월 12일
「오랜 봄은 지고, 새로운 겨울이 왔다. 잘 가요, 나의 봄.」
「미안했어. 이제 다신 나에게 봄은 오지 않을 거야.」
종이가 물이 묻었다가 마른 듯 살짝 주름이 진 모양새가 아니라 원래대로 빳빳한 종이인 걸 보고 울보였던 정환이 마음을 정말 굳게 먹은 거라 생각했다. 정환이 이리 마음 아파하고 있을 때 좋다고 여자를 옆에 끼고 돌아다녔던 선우를 보자 욕을 내뱉으며 진영이 선우의 등짝을 발로 걷어차주었다. 평소 같았다면 욕을 하며 자신도 때리려 들었을 선우인데 꽤 세게 찼음에도 반응이 없는 선우를 보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씨발놈. 잠이 오냐?”
“…안 자, 씨발.”
“안 자면 일어나 봐, 좀.”
선우가 그제서야 몸을 일으켜 벽에 몸을 기대었다. 진영이 혀를 차며 선우의 흐트러진 앞머리를 뒤로 넘겨주었다. 미친, 이게 사람 얼굴이냐?
“이정환이 너 이러고 있으면 다시 온대?”
“…….”
“미친놈아, 이 상황은 너가 만든 거야.”
“…….”
“이정환은 니 여자 끼고 놀 때 마음이 어땠겠냐, 개 자식아.”
“…나도 존나 미안하다고. 미안해 뒤지겠다고!”
“어휴, 이 병신새끼가. 미안하다고 혼자 짓걸이면 이정환이 들어주냐?”
“이미 늦은 걸 나보고 어쩌라고, 씨발.”
답답한 새끼. 어디 가서 너 내 친구라고 하면 모가지다. 진영이 선우를 한심하게 내려다보고는 발로 선우를 툭툭 차댔다. 이 새끼야, 고개 들고 내 말 들어. 진영의 말에 선우는 고개를 찬찬히 들어올렸고 진영은 그 얼굴을 보며 다시 한 번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후회는 아무리 빨리 해도 늦은 거다.”
“…알아.”
“근데.”
“…….”
“늦었다고 생각했을 때가 가장 빠른 거야. 알아 들어?”
진영은 자신이 묻고 나서도 선우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등을 돌렸다. 선우는 현관 앞에서 신발을 아무렇게나 구겨 신고 문고리를 잡고서 가만히 서 있는 진영의 뒷모습을 쳐다보다 이내 슬핏 웃었다. 진영은 뒤에서 조그맣게 들려오는 선우의 웃음소리에 저도 얼굴에 한 가득 미소 지으며 선우의 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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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신 분이 있을지는 몰라도 하.. 슬럼프를 이기고 돌아왔습니다.
오랜만에 쓴 글이라 감이 안 잡혀서 약간 내용이 어설플지도 몰라요. 양해바람ㅠㅠㅠㅠㅠ
원래 이 편이 하편이여야 하는데 내용이 좀 길어질 것 같아서 중편을 나눴어요.
다음편이 中3 일지 下 일지는 저도 모름다..
너무 늦어서 댓글 안 바라요 T-T 그냥 읽어주시기만 해도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