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나는 학교에 몇 없는 여자 중 한명이었으니까, 생도들이 되게 잘 따른단 말이야. 그러니까 막 그런 느낌 있지. 여고에 남선생님 한명 들어가면 인기 터지는? 여고같은 곳에는 정말 잘생기지 않은 남자선생님이어도 애들이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좋아서 졸졸 쫓아다니고 그러잖아. 사실 내가 그랬었고.. 쨋든 그런 의미로 생도들이 나를 되게 좋아해주는데 그 넘치는 사랑을 받다보면 정말 엄마미소 지어질 때가 한두번이 아니야.
남자애들 무리가 모여있다보면 꼭 활발하고 튀는 애들이 몇명 있잖아. 이 학교도 예외는 아니었어. 가끔 생도들 밥먹는 시간에 밥먹으러 가면 서로 같이 먹겠다고 내가 앉아있는 테이블에 주르륵 앉고 그러거든. 그러면서 서로 안부를 먼저 묻겠다고,
"충성! 소위님, 오늘 하루 어떠셨습니까?"
"얘들아 아직 12시밖에 안됐는데? 너희는 어때, 기분 좋아보이네?"
"저야..사실, 지금까지 얘네랑 있느라 칙칙했는데 오랜만에 소위님이랑 밥 같이 먹으니 신납니다!"
점심먹으며 오늘 하루 안부를 다퉈 묻는 애들이랑, 말이라도 저렇게 예쁘게 해주는 애들이 한둘이 아니어서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종인이는 알다시피 나한테 저렇게 살갑게 할 성격이 아니라 식당에서 잠깐 마주쳐도 그냥 경례만 하고 밥 맛있게 먹으라는 말만 짧게 하거든. 가끔 찬열이랑 오는 날에는 찬열이가 종인이 끌고 내 앞에 앉으면 종인이는 못이기는척 앉는 정도? 그렇게 앉아서도 종인이는 꿋꿋하게 밥만 먹고 찬열이만 나랑 신나게 떠들고 가곤 했었어.
종인이는 성격상 다른 애들처럼 살갑게 못대하는 탓에 한번씩 질투아닌 질투를 하는데 그게 한번은 축제날이었어. 육사 축제는 굉장히 크게 열리기 때문에 생도들이 자기 여자친구를 꼭 축제에 초대하거든. 그 때가 아마 우리 학교에 민간인들이 가장 많은 때일거야. 한복이나, 치마나, 예쁘게들 차려입고 화장도 요즘애들은 어찌나 곱게하는지 다들 하나같이 예쁘거든. 나도 한번씩 이런 예쁜여자친구 두고 생도생활이 되나,하는 생각을 해.
그런데 종인이는 여자친구가 가장 가까이에 있는데도 다른 애들처럼 손잡고 생도대를 거닐거나, 예쁜 한복이라던지 사복을 차려입은 여자친구는 볼 수 없었지. 그래도 축제라고 정복 차려입고 있으라길래 불편한 정복 껴입고 축제가 한창인 강당 한켠에 자리잡았어. 사람이 많이 모이는 행사인만큼 아픈사람도 속출하는 법이거든.
"충성! 소위님, 제 여자친구가 소화가 잘 안되는 것 같습니다."
"오늘 밥이 맛있었나보네? 여자친구를 얼마나 먹인거야, 응?"
"수육이 맛있다길래 많이 퍼다줬는데, 너무 많이 먹은 것 같습니다!"
나한테 제 여자친구 아프다며 손을 꼭 붙들고 와서는 죽상인 얼굴을 하는거야. 소화불량은 그냥 소화제 한알 먹으면 해결되는데, 원래 자기 연인은 조금만 아파도 죽을 병처럼 취급하는게 풋풋한 연인의 모습이잖아. 소화제랑 물 한컵 챙겨줬더니 손수 여자친구 손에 알약 하나 쥐어주고, 물컵도 쥐어주고. 정말 귀여운 커플이었어.
그렇게 한참을 여자친구 손붙들고 신나서 돌아다니는 생도들 모습 구경하고 있는데 종인이가 소리도 없이 내 옆에 온거야.
"떡..먹을래?"
"어, 어?"
"너 인절미 좋아하잖아."
이제 아주 간도 커져서 옆에 생도들 막 지나다니는데도 조용히 반말 찍찍 내뱉는 우리 종인이. 또 내가 떡좋아한다고 강당 한켠에 마련되어있는 인절미를 종이 위에 조심조심 싸서 온거야. 종인이가 이럴 때 되게 연하같은데, 앞 뒤 안가리고 그저 내가 좋아한다면 뭐든지 다하는 그런 점? 아무 생각 없이 또 인절미 보이자마자 내가 인절미 좋아하는 거 생각해내고 천천히 주위 둘러보면서 종이 구해서는 조물조물 담아왔을거 아니야..우리 종인이 너무 예뻐서 내가 감동먹었다는 표정으로 종인이 올려다 봤어.
"종인아아.."
"얼른 먹어, 인절미 얼마 안남았길래 남은거 다 가져온거야."
"종인아..그럼 다른 애들은 뭐 먹으라고.."
"..옆에 꿀떡 먹으면 되지."
내가 진짜 삐져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막 웃으면서 이야기 했거든, 그랬더니 종인이가 민망한지 그냥 내 입에 인절미를 갖다가 쑤셔 넣어버려. 그러고선 또 목막힐까봐 물 한컵 따라서 손에 쥐어주고.
"종인이도 저렇게 손 잡고 다녔음 좋을텐데, 그치?"
"저런 거..됐어."
"왜애, 우리 종인이 저런 거 싫어해?"
"..아니, 싫은 게 아니라."
종인이가 말주변이 없어서, 내가 저렇게 몰아가면 어김없이 말문이 막히거든. 이번에도 말문이 막혔는지 제 머리 마구 헤집는데 그게 또 너무 귀여워서 나는 엄마미소 흐흐 짓
고 있었어.
"종인아 근데, 세훈이 여자친구 되게 예쁘더라."
"별로던데."
"엥? 진짜 예쁘던데! 둘이 어떻게 만난 사이야?"
"오세훈 고등학교 때 부터 사귀던 애래."
세훈이라고 종인이 고등학교 후배가 있는데, 매일 김종인 선배님!!하면서 종인이만 줄기차게 부르는 애거든. 지금 1학년인데도 여자친구가 있길래, 어디서 만났나 싶어서 물었더니 고등학교 동창이래. 나는 의자에 앉아있고 종인이는 내 옆에 서서 이런저런 얘기 하고 있는데 이제 막 행사 시작하려고 하는지 강당에서 노랫소리가 빠바밤 울리는거야. 오늘 애들 공연한다고 했는데, 흥미롭게 쳐다봤지.
진행도 얼마나 재미나게 하는지, 종인이랑 웃으면서 구경하는데 갑자기 진행하던 생도가 이 자리에서 최고 미인을 뽑는다느니 어쩌니 하는거야.
"자, 이 자리에 생도들의 많은 여자친구분들께서 참석해주셨습니다! 다들 너무 예쁘셔서 눈이 막 부실 지경입니다! 그래도 아니다! 그 중에 자기 여자친구가 제-일 예쁘다!하시는 분은 여자친구 손을 잡고 무대 위로! 올라와주시기 바랍니다!"
그 소리에 생도들 일동 술렁술렁 하더니 벌써 활발한 애들은 자기 여자친구 손 끄집고 무대위로 달려나가고 있었어. 아 귀여워, 하면서 쳐다보는데 종인이가 옆에서 같이 웃다가 뜬금없이 그러는거야.
"우리도 올라가 볼까?"
"씁, 김종인. 누가 듣는다?"
"맞잖아, 네가 여기서 제일 예쁜데."
"..하하..그건 네 눈에만 그런거야.."
종인이의 정말 연하스러운 밑도 끝도 없는 발언에 내가 민망한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웃고 있는데, 진행하던 생도가 갑자기
"아, 정말 많은 생도분들이 여자친구 손을 잡고 올라와주셨습니다-! 아, 그런데..뭔가 허전하지 않습니까?"
허전하지 않습니까?하면서 그 생도가 나랑 종인이 쪽을 턱하니 쳐다보는데, 설마 나를 보는 건가. 설마..설마 그러겠냐 싶었어.
"아- 저희 생도대에 가장 미인이신 분이 한분 계시지 말입니다! 육군 사관학교의 나이팅게일!"
"어, 어..종인아..쟤.."
"저희 학교 백의의 천사! 김소위님 앞으로 모시겠습니다~!"
정말 생각지도 못했고 애들이 나한테 귀띰을 해준 것도 아니라서 나 정말 당황스러움에 어쩔 줄 모르고 종인이 소매만 잡고 어떡해, 어떡해?하는데 종인이는 뭐가 그리 싱글벙글인지 웃고만 있는거야.
"종인아, 종인아.."
"왜 그러십니까, 맞는데. 생도대 가장 미인."
"너, 너까지 이럴거야?"
내가 발 동동 구르고 있는 사이 이미 시선은 나한테 집중되었고, 도저히 저 무대에 올라갈 수가 없어서 머리 속은 하얗게 변해버렸지.
"아~우리 김소위님, 남자친구가 없으셔서 올라오기 외로우시답니다!"
역시나 진행잘하는 우리 방송부 생도. 이 상황도 즐기는지 아주 신나게 이야기하는데 내 속은 까맣게 타들어갔어.
"또 우리 생도대의 3학년들은 김종인 생도가 김소위님의 열혈 팬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어? 나는 처음 들어보는 소리에, 의아하게 종인이를 쳐다봤는데. 종인이도 이건 예상 못했다는 듯 당황한 얼굴인거야.
"김종인 생도, 김소위님 모시고 무대위로 올라옵니다!"
아..? 종인이도 나도 당황해서 서로 얼굴 쳐다보고 눈만 데굴데굴 굴리는데, 이미 생도들은 올라와!올라와!이러면서 난리가 났고 안 올라가면 정말 안될 분위기였어.
결국 종인이가 내 어깨 붙잡고 앞으로 살짝 미는거야.
"상급자가 앞으로 가셔야하지 않습니까."
"아..종인아,"
"내가 알아서 할게."
종인이도 다른 생도들 처럼 내 손 붙잡고 올라가고 싶었겠지만, 보는 눈이 많은 지라 종인이는 내 왼쪽 뒤편에서 날 따라 올라왔어. 무대 위로 올라갔는데 쏟아지는 환호성에 고개도 못들고, 옆을 살짝 쳐다봤더니 종인이는 이미 무대 적응했는지 그냥 비실비실 웃고있어.
"아, 개인적으로 우리 김소위님이 원탑이신듯 합니다! 그럼 각자 한마디씩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뭐? 뭐..? 한마디? 나 또 당황해서 종인이 쳐다보면서 입모양으로 구조요청을 했는데, 종인이는 연신 싱글벙글인거야. 그 사이 벌써 첫번째 여자친구는 다짐을 말하기 시작했어. 다행히 나는 마지막 순번이었지..
"종인아..뭐라해?"
"제가 가장 예쁩니다, 라고 하시면 됩니다."
"말이 돼?"
"정말입니다."
"나 오늘 화장도 별로 안했는데.."
"화장 안한게 더 예쁩니다."
이 도움안되는 김종인..결국 종인이한테 얻은 것 없이 내 차례가 돌아왔어. 그래도 1년을 학교에서 함께했다고 강당 떠나가라 소리질러주는 내새끼들..떨리는 두손으로 마이크를 받아쥐고 할말도 없는 거 쥐어짜내서 더듬더듬 이야기 했지.
"하하..여기, 되게 여성분들, 어리시고, 예쁜데.."
"소위님이 제일 예쁩니다!!"
내 말 끝마다 호응해주는 우리 3학년 종인이 동기들덕분에 내 말도 몇번 끊기고.
"제가 좀..되게 민망하네요."
"아이, 우리 소위님 제일 예쁘신 것 같은데? 마지막으로 우리 생도들에게!"
"우리 생도들, 나 좀 이제 그만봐요~아프지 말구요."
내 말에 또 함성 질러주면서 넘어가는 시늉 해주는 종인이 동기들 정말 리액션이..종인이 친구라고 하면 아무도 믿지 않을거야.
그렇게 진행하던 생도가 그 분위기 그대로 이끌어서 생도들 여자친구 안고 앉았다 일어나기, 단어 맞추기 등등 게임을 재미나게 진행했어. 나랑 종인이는 신분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연인사이라는 걸 알지 못했으니까 그냥 옆에서 웃으며 구경하고 있었지. 그러다 힘든 게임이 끝나고 일등 생도는 특별외박을 상으로 얻었어.
"아, 저도 저 특별외박 정-말 얻고 싶었습니다! 자..모든 생도들 고생하셨는데, 지금까지 고생을..안하신 분이 한명 계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내 옆에 얌전히 서있던 종인이를 턱, 쳐다봐.
"자 우리 김종인 생도. 여기까지 올라오셨는데.."
"야.."
"3학년의 자랑, 김종인 생도! 소문이 났지 않습니까? 타칭 김소위님 덕후라고.."
"너, 진짜.."
당황한 우리 종인이 내 앞에선 그렇게 시크한 척 하더니 동기들 사이에선 이미 내 덕후로 소문이 났던거야? 귀까지 새빨개진 종인이가 진행하는 제 동기를 막지도 못하고 안절부절 못하는데 그게 정말 귀여워서 내 얼굴에는 이미 엄마미소 한가득이었어.
"애인도 없는 김종인 생도의 유일한 사랑, 김소위님께! 김종인 생도가 한마디 하겠습니다!"
"하.."
종인이의 짧은 탄식과 동기들의 열렬한 환호 속에 종인이 손에는 이미 마이크가 들려있었어.
"어, 김소위님. 제가.."
정말 멘트 준비가 하나도 안되있는 상태인 종인이는 첫마디부터 말문이 막혔지.
"다른 생도들도 다 하고 싶은 말일텐데, 저만 김소위님을 좋아하는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쵸! 저도 김소위님 굉장한 팬입니다!"
"네..그래서, 그냥 한마디 하자면. 다른 생도들 봐준다고 밤 새고 그러는데. 새벽에 생도들 병원 실려가서 김소위님 잠 못자고 다음날 눈 벌게져서 나타나면 3학년 생도들 난리 납니다. 다들 아플거면 낮에 아프시고."
진짜 종인이가 말 그렇게 길게 하는거 처음 본 것 같았어. 내가 신기하게 종인이 쳐다보니까 종인이 내 얼굴 한번 보더니 바로 눈 피하고 자기 할말 이어나가더라고.
"그리고..다들 김소위님 좋아한다고 주장하는데, 제가 가장 좋아합니다."
종인이가 정말 백번정도 망설인듯한 말에 강당 안은 난리가 났지. 당돌한 종인이의 고백아닌 고백이 귀엽기도 하고 또 설레기도 해서 나 혼자 속으로 좋아하고 있는데, 종인이는 그 말하고서 쑥쓰러운지 바로 마이크 넘기고 내 뒤로 자리잡고 서있어. 다들 종인이가 그저 다른 생도들이 나 좋아하듯이 좋아하는 마음을 표현한 거라고 생각했겠지만 말한 종인이나 그걸 들은 나한테는 그런 의미가 아니었단 걸 서로 알고있잖아. 정말 생도 종인이와 애인 종인이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는 고백아닌 고백이었지.
그리고 무대 밑으로 내려와서 종인이한테 "우리 종인이 생도대에서 내 덕후로 소문나써~?"하니까 고개도 제대로 못들었다는 후문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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