二. 미파국의 황자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나를 바라보던 황자가 쉿, 하며 입에 손을 갖다대더니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떨결에 같이 따라 일어나자 황자가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이 여인은 아무래도 내 황후인 것 같소!"
궁 내 모든 사람들이 내게 머리를 숙이고 나서야 나는 겨우 방 안에 들어올 수 있었다. 이건 도대체 무슨 전개란 말인가. 갑자기 여름에서 겨울로 떨어졌는데, 여기가 개원의 도래국이고, 나는 도래국의 황후라고? 내가? 김여주가?
"으아아악!!"
머리를 쾅 테이블에 박았다. 아이씨…. 꿈은 아닌데.
머리를 부여잡고 끙끙 거리고 있으니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소원이 들어왔다. 맞다, 아직 얘기를 다 못들었었지. 내게 다가온 소원은 머리가 아프십니까? 하고 안절부절 못했다. 손사래를 치며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하며 빨리 이야기를 해달라고 재촉했다. 개원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야했다. 그래야 내가 황후라는 말도 안되는 사실을 이해하지!
급한 성격의 솔라국의 황자. 왠지 예상이 가는 듯 했다. 사진에서 본 그...
표준시가 이 곳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이 곳은 정녕 판타지 세계란말인가. 우리나라 조상님들이 이렇게 센 사람들이었단 말인가....
"잠깐만, 내가 고3이에요?"
내가 지옥의 고삼이라는 것을 자각하는 순간 몸이 저절로 테이블을 박차고 일어났다. 아씨, 이러시면 안됩니다! 소원이 내 팔을 다급하게 잡았지만 고삼의 눈에 보이는 것은 없었다. 개원이고 뭐고 돌아가야했다. 여기서 이렇게 희희덕대고 있을 게 아니라 집에 가서 수학 문제집을 하나 더 풀어야 하는거 아니냐고!
수능을 약 100여일 남겨두고 있는 고삼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오직 책상에 올려져 있을 수능특강만 눈에 아른거릴 뿐이다. 한국의 고삼은, 아무도 막지 못하는거다.
소원은 뜬금없이 의원을 불렀다.
내가 날뛰는 것이 이 곳에 적응하지 못해 생긴 일시적인 병이라나, 소원과 의원은 힘을 합쳐 나를 꽁꽁 묶어두고는 방문을 닫고 나갔다. 아니, 내가 황후라며. 황후를 이렇게 막 다뤄도 되는건가? 여기는? 입을 꾹 다물고 가만히 누워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데, 진짜 아닌데. 내가 차라리 긴 꿈을 꾸고 있는거라면 좋으련만, 긴 꿈이라면 적어도 돌아갈 수는 있다는거잖아? 근데 이게 꿈이 아니고 내가 진짜 개원에 떨어진거라면, 나는 어떻게 돌아가야하는거지?
이렇게 가만히 묶여있을 수는 없었다. 황자님, 저를 살려주신 것은 감사하지만 이대로는 못 있겠습니다. 전 진짜 집에 가야해요.
대한민국 고삼이라면 못 할 것이 없다. 벽만 봐도 재밌고, 숨 쉬는 것을 나노단위로 세어도 재밌다. 그런 고삼이 묶인 밧줄 하나 못 풀겠는가. 밧줄에 묶인 팔목에 빨갛게 줄이 그어졌다. 누가 보면 좀 이상할 것 같으니 얼른 한복 소매를 내려 팔목을 감췄다. 이제 어떻게 빠져나가는가가 관건인데, 창문을 열고 뛰어내리기엔 내 다리가 그 전에 부러져 아무 것도 못할 것 같고. 문으로 조용히 빠져나가야했다. 하지만 문 밖은 소원과 다른 궁녀들이 지키고 있을테고.
그래, 일단 앉아서 생각해보자. 앉아서, 침착하게. 창문 밖을 내다보니 벌써 어두워져 달빛이 내리고 있었다. 소원이 해가 지고나서 풀어준다고 하였으니 시간이 없다. 그냥 창문으로 뛰어내리는 수 밖에. 창문 쪽으로 가기 위해 발걸음을 뗐다.
창문으로 뛰어내리기 위해 다가간 창틀에, 낮에 보았던 사진 필름이 떨어져있었다. 이건 분명히 내가 교복 주머니에 넣어두었는데? 이상한 마음에 필름을 손에 집으니 또 무언가가 현상되기 시작한다.
"또 다른 사진이란 말이야..?"
얼른 필름을 뒤로 뒤집으니, 또 내용이 적혀있다.
『 개원 17년, 그 곳에는 네 개의 나라가 존재했다. 땅을 다스리며 섬기는 도래국, 물을 다스리며 섬기는 미파국, 불을 다스리며 섬기는 , 빛을 다스리며 섬기는 . 』
또 다른 필름인지, 아니면 아까 내가 잘 숨겨둔 필름이 여기로 떨어진건지. 뒷 내용이 분명히 있었던 것 같은데 사라진 글씨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뭐야, 이거?! 내가 진짜 꿈을 꾸고 있는건가. 눈을 열심히 비비고 다시 확인해봐도 내용의 뒷 부분이 사라져있었다. 생겨난 건, 미파국이라는 글자가 생긴 것. 이게 뭐야, 진짜. 말도 안되는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필름을 이리저리 돌려보고, 흔들어봐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손을 덜덜 떨며 다시 필름의 앞 장을 돌려보니, 한 남자의 사진과 함께 위에 쓰여있는 글씨들.
'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도, 들키지도 말 것.'
' 언젠간 때가 올 것입니다. 그 때까지는 아무것도 말하지 마십시오. 사진도, 그대도. '
' 또, 절대, 빠져들지 마십시오. 어디든지. '
그 때, 방 밖에서 소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씨,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시간이 없다. 일단 사진은 빠져나간 뒤에 다시 살펴보기로 하고, 방에 있던 아무 책의 빈 페이지 하나를 찢어 급하게 가지고 있던 펜으로 글씨를 휘갈겨 썼다. 혹시 몰라 손에 들고 있던 사진도 아무렇게나 옷 속에 구겨넣었다.
그리고, 창문으로 뛰어내렸다.
소원이 의심 가득한 표정으로 여주의 방문을 열었을 때, 창은 활짝 열려있었고 달빛이 내리는 그 바닥엔 종이 하나가 떨어져있었다. 소원은 그것을 집어들었다.
' 황자님께는 미안하지만, 저는 꼭 돌아가야한다고 전해주세요.'
' 언젠간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감사했습니다. - 김여주 '
정신없이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어디가 부러지거나 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아프긴 정말 아팠다. 앓는 소리를 내며 천천히 몸을 일으키다 병사들이 줄을 지어 이동하는 것을 보고 놀라 까무러칠 뻔했다. 행동력 하나는 정말 빠르네, 벌써 나를 찾고 있단 말이야? 걸리면 정말 끝장이라는 생각에 일단 숨부터 참았다. 시험지를 찍을 때보다 더 높은 집중력으로 한발자국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래, 일단 아까 들어온 곳으로 가면 되는거야. 하늘은 어두웠다. 병사들이 비추는 불빛에만 들키지 않으면 됐다.
인기스타같네, 하하하. 바로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들에 또 한번 숨을 참았다. 최대한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향해야했다. 물론 나를 찾기 위해 아마 궁 전체가 난리가 났을 테지만, 그래도 최대한 사람이 없는 곳으로. 정적을 따라 간 곳은 달빛이 비추고 있는 연못가였다. 그리고 그 연못가에 누군가가 서있었다. 황자의 옷을 입고 있어 급하게 나무 뒤로 몸을 숨기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금빛 옷이 아니었다.
파란빛의 옷을 입은 남자가 뒷짐을 지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입꼬리는 궁금한 듯한 미소가 가득했다. 앞에 서있는 신하는 어쩔 줄을 몰라하고, 파란 옷의 남자가 조용히 웃으며 알겠으니 가보라고 손짓하자 금세 궁 쪽으로 달려가버렸다. 도래국에 찾아온 손님인가? 아까 최승철과 비슷한 옷을 입은 것을 보니 저 사람도 왠지 4황자 중 한 사람일 것 같아유심히 그 모습을 관찰하고 있었다. 한참을 느린 걸음으로 연못가를 맴돌던 남자는 문득 고개를 돌렸다. 무섭게도 시선은 나를 향해있었다.
남자는 분명 나를 보고 있었다. 그가 손가락을 한번 튕기자 내 얼굴에 작은 물방울이 튀었다. 물, 물이 튀었다. 그렇다면 저 사람은…
미파국의 황자가 분명했다. 개원의 4황자들은 정말 땅,물,불,빛을 다스리는게 맞았나보다. 손짓 하나에 물이 튀고, 말 하나에 내 발이 저절로 이끌리는 것을 보면. 어느새 내 발걸음은 미파국 황자의 앞에 멈춰섰고, 미파국의 황자는 씩 웃으며 나를 내려다 보았다. 그대는, 누구입니까?
살짝 코를 찡그리며 내게 씩 웃으며 장난 가득한 표정으로 물은 미파국의 황자는 내게 좀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주변인들은 모두 고개를 피했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인데!
내가 그의 앞에서 안절부절 못하자 미파국의 황자는 턱 끝을 손가락으로 쓸며 고민하는 표정을 보였다. 물론 모든게 다 장난같았지만. 마음이 급했던 나는 계속 뒤쪽을 돌아보며 눈치를 보고 있고, 이 쓸데없이 느긋한 황자는 그대를 어찌해야할까, 하고 날 놀리고 있고. 그 때였다. 연못가로 병사들이 몰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혹시나 잘못된다면 연못으로 뛰어들 셈이었다.
끝끝내 나를 놓아주지 않는 황자를 밀치고 연못에 뛰어들려던 참이었다. 미파국의 황자는 내 팔목을 잡아 끌고 자신이 두르고 있던 푸른 색의 옷 속으로 나를 감추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무심하게 고개를 돌렸고, 병사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쓸데없이 이런 생각이 들었다. 미파국 황자의 옷에서는 동백꽃 냄새가 나네.
정말 능글맞다. 도래국의 황자도 저렇게 능글맞지는 않았는데! 뒷짐을 지고 허리를 숙여 고개를 살짝 틀곤 내게 장난스럽게 묻는 투가 정말이지 능글맞았다. 미파국의 황자는 점잖고 문학을 좋아한다더니, 순 개뻥이잖아!
부채를 펼쳐 달빛을 가린 미파국의 황자가 앞장 서 걷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그의 병사들이 나를 숨겨 그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도,도망쳐 나오긴 했는데, 분명 내 목적은 다시 내가 살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는데 왜 나는 지금 미파국으로 가고 있냐고!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황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졸졸 따라가고 있으니, 황자가 발걸음을 멈춰섰다. 그와 동시에 그의 주변인들 또한 모두 걸음을 멈췄다. 와, 신기해.
동쪽에는 도래국이, 서쪽에는 미파국이 있다고 했다. 가깝지는 않은 거리에 슬슬 다리가 아파올 때 쯤 내 앞엔 커다란 바다 하나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응, 우리한테는 배가 없을텐데. 왜 이 곳으로 온거지? 고개를 쭉 내밀고 앞장 선 황자를 지켜보았다. 그는 푸른 바다 앞에 서 있었다. 만약 지금이 낮이라면 정말 예뻤겠지만, 어두운 밤이라 그런지 바닷바람도 매섭고, 바다도 깜깜한게 조금은 무서운 분위기였다. 황자는 물가 앞에 한 쪽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그리고 손에서 꽃잎을 날려보내는 듯이 가볍게 바람을 불었다. 그리자 아주 기이한 광경이 펼쳐졌다.
황자가 손 끝으로 바람을 불자 바다가 갈라지며 길이 생겼다. 이,이게 그건가? 모세의 기적? 말도 안되는 광경에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 바라만 보고 있으니 황자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바닷길을, 함께 걸을까요. 황자는 웃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얼떨결에 잡아버린 손, 거짓말처럼 생겨버린 바닷길을 나란히 걸으며 나는 계속 옆이 신경쓰였다. 바닷물이 벽처럼 생겨났다. 심지어 그 안에는 물고기들이 헤엄치고 있었다. 혹여 물이 넘쳐 길을 다시 없애버리면 어떻게 하지, 하는 마음으로 걷는 내내 표정이 좋지 않았는데, 그것을 또 황자는 눈치를 챈 것이다.
황자는 팔을 뻗어 나를 제 옆으로 아주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렇게 딱 붙어서 우리는 걷기 시작했다. 와, 차라리 그냥 물이 쏟아져버렸으면. 경직된 모습으로 로봇 마냥 뚜벅뚜벅 걸으니 그 모습을 알아챈 황자가 웃음을 숨기지 못하고 입꼬리가 귀에 걸리기 시작했다. 다른 한 손으로 부채를 피고 입을 가리기는 했지만, 날 보고 웃는 모습이 너무나도 뚜렷하게 보여 입을 꾹 다물었다.
확- 하며 그 푸른 빛의 옷으로 내 시야를 가리는 탓에 나는 깜짝 놀라 주저앉을 뻔 했다. 또 그 능글맞은 눈빛과 입꼬리로 팔을 내리며 날 바라보는 황자. 물과 기름은 상극이라더니, 능글능글한 황자의 성격과는 상극이 아닌건가. 그래도 진짜 물을 다스리는 황자다보니 혹여 떨어져 걸으면 정말 해코지라도 당할까 최대한 떨어져 그의 옷자락을 잡으며 걷기 시작했다. 제 옷자락을 잡는 날 보며 황자는 의아한 듯 씩 웃더니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래, 차라리 이게 낫다.
바다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 멀리 화려한 궁궐이 보였다. 저 곳이, 미파국의 입구이려나. ..그럼 미파국에 들어오려면 맨날 이렇게 바다를 건너야 해?
황자는 또 씩 웃더니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뭔가 또 말려들은 기분.
기분이 좋은 듯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궁 앞에 도달한 푸른 옷의 황자는 가볍게 뒤를 돌아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정중한 목소리로 -어울리지는 않았다, 절대.- 내게 말을 건넸다. 미파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귀여운 아가씨. 황자는 내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덩달아 나도 90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를 받았다. 황자는 그 모습을 보고 씩 웃더니 궁의 중앙으로 향했다. 따라오시지요, 그의 주변인의 안내에 따라 황자의 뒤를 따랐다. 정말 사극에서 보던 왕의 자리마냥, 황자의 자리가 존재했다. 황자는 그 자리에 앉아 나를 내려다보며,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나를 바라보았다.
황자는 사람을 불러 내게 아주 큰 의자 하나를 가져다주었다. 나를 그 곳에 앉힌 황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해보라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이거 참,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하는건지. 분명, 도래국에 있을 때 봤던 쪽지에서, 절대 아무것도 이야기해서는 안된다는 내용이 있었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고개를 계속 갸웃거리며 고민하는 표정을 지으니 황자의 웃음이 터졌다.
턱을 괴고 삐딱한 자세로 나를 내려다보는 그 쪽의 얼굴이 더 사람을 잘 홀릴 것 같은데요. 나도 모르게 붉어지는 얼굴을 급하게 머리카락으로 숨겼다. 그,그저 생각할 것이 좀 있어서 그런겁니다. 당황한 투가 그대로 말에 배어나왔다. 황자는 흥미롭다는 듯 나를 기다렸다.
도래국에서 내가 한 일이라, 우선 숲에서 깽판을 좀 치고, 방에 들어와 깽판을 치고, 깽판을 치다가 도망을 치고, 미파국의 황자에게 잡혔다. 아, 그리고 내가 도래국의 황후라 했다.
잠시 넋이 나간 듯 가만히 앉아있던 황자는 이내 실소를 터트렸다. 하얀 손가락 끝을 톡톡 두드리면서 아무 말이 없던 황자는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방금 전 능글거리던 모습은 어디가고, 무언가 큰 고민이 생긴 듯 했다. 혹시 황후 때문인가? 아니면 황제? 도래국의 소원은 내게 절대 4황자들 앞에서 '황제'라는 단어를 꺼내지말라고 당부했다. 혹시 거기에 황후도 포함이 되어있던건가?
황자는 내 목소리에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고개를 저으며 아니라고 답했다. 그저, 잠시 일이 생겼을 뿐이니 그대는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황자는 잠시 자리를 비워도 되겠냐고 물었다. 물어볼 것이 많지만, 우선은 나중에 이야기하자고. 얼떨결에 알겠다고 답했다. 내 대답을 듣자마자 황자는 자리에서 뛰어내려 급하게 다른 곳으로 향했다. 요동치는 푸른 빛의 옷이 마치 바닷 속 파도같아 그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미파국의 궁녀는 나를 또 다른 방으로 안내했다. 뭔가 도래국의 상황과 비슷한 기분이었다.
갑자기 피곤함이 몰려들어 나도 모르게 침대에 풀썩 뛰어들었다. 아이고, 삭신이야. 분명 이 곳엔 낮에 온 것 같은데, 뭘 했다고 벌써 새벽인지. 그리고 나는 도대체 집에 언제 돌아가는지. 나 공부 해야 하는데, 빨리 집에 가서 수능특강 풀고…, 인강 듣고…, 밥 먹어야 되는데…
궁녀는 조심스럽게 방 문을 열었다. 조금은 이상한 자세로 침대에 엎어져 잠들어있는 귀인을 보며 궁녀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참았다. 물 한 잔을 옆에 내려놓고 궁녀는 조심스럽게 여주에게 이불을 덮어주었다. 간단하게 방을 정리하고, 여주의 물건인듯 한 이상한 종이도 옆에 조심스럽게 올려두었다. 호기심이 불어 종이를 조심스럽게 한 장 집어드니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은 빈 종이였다. 궁녀가 아리송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때 뒤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눈을 찡긋 해 보인 황자의 능글맞음에 궁녀는 얼굴을 붉히며 빠르게 방을 빠져나갔다. 곤히 잠들어있는 여주를 아무 표정 없이 바라보던 황자는 한숨을 크게 쉬며 그 옆에 걸터앉았다. 말 없이 얼굴을 천천히 뜯어보던 황자의 눈이 여주의 입술에 멈췄다. 황자는 기가 찬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원우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제 황후가 될 여인의 머리칼을 가볍게 쓸어넘겼다. 그대가 황후라면, 더욱이 내가 그들에게 당신을 빼앗기면 안되겠군요.
*
번쩍, 눈이 떠졌다. 한국에서는 듣지 못했던 짹짹거리는 새소리가 너무 시끄러워서였나. 익숙하지 않은 공기에 번쩍 눈을 뜨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니, 내 옆에 누군가가 앉은 채로 팔을 베고 누워있다. 놀라 소리를 지를 뻔 한 것을 겨우 입을 틀어막아 참았다. 사실, 눈을 떴을 때엔 우리집이었으면 했다. 내 방이었으면 정말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아직 이 곳에 있고,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것은 미파국의 황자였다.
미파국의 황자는 미동도 없이 잠들어 있었다. 아니 근데, 황자가 원래 이렇게 자고 있어도 되는건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최대한 황자가 깨지 않도록 움직였다. 아주 조용히 움직이느라 숨까지 참았다. 시선은 계속 황자의 얼굴에 고정, 입을 앙다물고 겨우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답답한 기분에 창문을 열고 싶어 손을 위로 들었다. 손을 위로 들자 한복의 소매가 뒤로 젖혀졌고, 내 손목이 드러났다. 눈을 의심했다.
어젯 밤, 도래국에서 묶여있었던 밧줄 탓에 빨간 줄이 그어졌던 손목자국이 선명했다. 잠이 덜 깨서 그런가, 다시 확인해보아도 빨간 줄은 선명했다. 밧줄이 너무 세게 묶여있었나? 아니다, 세게 묶여있었다면 내가 그 밧줄을 풀지도 못했을것이다.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붉은 그 자국에 손을 대었다. 씁, 따가운 느낌에 나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살이 약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아주 크게 자극을 받은 것도 아니고, 무언가 위험한 느낌이 들었다.
창문을 열고 밖을 바라보았다. 햇빛을 받은 빨간 줄은 더욱 선명해졌다. 이런건 예상하지도 못했는데. 문질러봐도 따갑고 아프기만 할 뿐 점점 더 자국은 선명해졌다. 일단 소매로 자국을 감추었다. 아주 조용한 발걸음으로 방을 둘러보다, 곤히 잠들어있는 황자에게 시선이 멈추었다. 마음이 약해진 나는 결국 작은 담요 같은 것 하나를 찾았다. 설마 밤새 이러고 잠을 잔건가 싶어 얼른 황자에게 담요를 덮어주었다. 의자 하나를 끌고 그 옆에 조심스럽게 앉아 황자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분명히, 내가 역사책에서 본 얼굴들 중 한 사람이 맞다. 이 사람은 미파국의 황자다.
복잡한 마음에 머리를 마구 헝클였다. 여기는 미파국이고, 여기서 또 도망치려면…, 바다를 건너야 하나. 도래국보다 더 상황이 꼬인 기분에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을 내쉬고 답답한 기분에 고개를 돌렸다. 침대 옆 테이블에는 나와 꽤 끈질긴 인연이 될 듯한 필름이 놓여있었다. 벌떡 일어나 필름을 집어 들었다. 너 이 자식, 분명 너 때문에 내가 이 곳으로 오게 된거야!
현상된 필름을 유심히 들여다보니, 미파국의 황자가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소름이 돋아 손에서 필름을 놓쳐버렸다. 팔랑,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진 종이가 뒤집어졌다. 말도 안되는 기분에 입을 닫지도 못하고 한참을 생각하다 떨어진 필름으로 고개를 돌리니, 뒤에 무엇인가가 또 적혀있었다. 얼른 허리를 숙여 필름을 주웠다. 말도 안된다, 진짜 말도 안돼.
『 각각의 나라에는 황자가 존재했으며, 그들의 황후를 맞아야지만 개원 최후의 황제가 될 수 있었다. 』
이, 이런 내용 없었는데. 어디서 또 생긴거야.
"황후? 나?"
말도 안된다는 생각에 필름을 다시 뒤집었다. 어이없게도 미파국의 황자는 여전히 해맑게 웃고 있었다. 이게 말이 되는건가? 사람이 살아가면서 이런 일을 겪어도 되는건가? 내가 혹시 한국을 뒤흔들 히어로? 역사의 한 획을 그을 엄청난 사람? 그것도 아닌데 왜 나는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냐고! 혹시나 미파국의 황자가 깰까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한숨 소리만 방에 가득했다. 혹시 눈이라도 세게 감았다 뜨면 다시 내 방 침대일까 싶어 별의 별 짓을 다 해봐도 보이는 것은 곤히 잠들어있는 황자 뿐이었다. 반 쯤 포기 상태로 다시 필름을 숨기기 위해 집어들었다.
분명히 한 장이었던 필름은 두 장이 되어 있었다. 놀란 나는 그만 의자에서 넘어지고 말았다.
쿠당탕, 넘어지는 소리가 났지만 다행히 황자는 깨지 않았다. 얼마나 깊게 잠들었으면 내가 옆에서 이런 생난리를 치고 있어도 알아채지 못하는 지. 자빠진 상태로, 덜덜 떨리는 손과 함께 같이 떨어진 또 다른 필름을 집었다. 차마 확인할 수가 없었다. 이건 진짜 어떻게 설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나 혹시 마술사인가?
저 필름에는 또 무슨 황당한 내용이 적혀있을지, 어떤 내용으로 내 뒷통수를 칠 지. 무섭고, 두렵고, 짜증까지 난다. 이 지긋지긋한 필름, 만약 한국으로 돌아간다면 제일 먼저 내 책상에 놓여져있을 폴라로이드 사진기와 필름을 불태워버리겠다. 그 와중에도 팔목의 상처가 소매에 쓸려 따끔한 고통을 주었다. 아으씨, 아파. 침을 꿀꺽 삼키고 사진을 확인했다.
' 개원에서, 당신이 해를 당할 경우 그 고통은 영원히 지속될 것입니다. '
' 고통을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자, 빛을 다스리는 자. '
' 미파국의 황자는 늑대이니 조심할 것. '
망할 개원, 사진을 보는게 아니었다.
괴상한 내용의 필름들을 보며 한숨을 쉬던 중, 황자가 뒤척이기 시작했다. 급하게 필름을 옷 속에 숨기고 나는 얼른 모르는 척을 했다. 황자는 몸을 일으키더니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직은 잠이 덜 깬 얼굴로 푸스스 웃으며 내게 이렇게 말 하더이다.
나의 말에 황자는 또 한번 웃고는 기지개를 켰다. 왜 도망가지 않았습니까? 도래국에서는 그렇게 도망치려하더니. 황자는 눈을 살짝 비비곤 내게 물었다. 그러게, 제가 왜 도망가지 않았을까요. 이 능글맞은 황자라면 더더욱 도망쳤어야했을텐데. 그리고 방금 내가 본 쪽지에, 당신이 늑대라던데. 속으로 모든 말을 다 삼키고 억지 웃음으로 답하였다. 황자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씩 웃었다. 그리고 내 손을 덥썩 잡고 방을 나가기 시작했다.
너무 빠른 발걸음에 휘둘려 황자를 거의 뛰듯이 따라가야만 했다. 그 와중에도 황자가 지나가는 모든 길목에서 사람들의 인사를 받으니 그야말로 레드카펫이었다. 어디든지 오기만 하면 나는 황자들 덕분에 인기스타. 이걸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황자는 주변 사람들이 보이지않자 가히 경이로운 속도로 궁을 빠져나왔다. 설마 아까 그 괴상한 쪽지의 늑대 이야기가 진짜 이 황자가 동물 늑대라는 얘기였나. 그만큼 빠른 속도에 나는 꿈을 꾸는 듯 했다. 사람이라면 절대 이렇게 뛸 수가 없는 걸.
어질한 머리에 황자가 멈춰서자마자 휘청거렸다. 황자는 나를 단단히 잡아주고는 내게 말했다. 우리, 산책을 갑시다.
바다라는 말에 황자의 눈이 반짝인다. 물을 다스리는 황자라 그런가, 물만 보면 환장 하는 듯 했다.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나는 물을 무서워한다. 그니까 이 황자하고 나는 완전 상극이라는 말.
나의 말에 황자의 발걸음이 멈췄다. 옆에서 얼굴을 살피니 단단히 충격을 먹은 모양이다. 물을 다스리는 황자 앞에서 물을 무서워한다고 말을 했으니, 충격 먹을 만도 하다. 갑자기 헛기침을 하기 시작하더니. 무,물을 싫어하신다고요.
아차, 여기는 개원이구나. 해운대라고 하면 당연히 못 알아 들으실 텐ㄷ…
황자의 표정은 너무나도 진지했다. 농담을 저렇게 진지하게 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황자는 전혀 농담이 아니었다고 후에 내게 말했다. 당황한 나는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냐며 황자의 팔목을 급하게 잡았다. 황자의 태도는 결연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 꼭 해운대의 물을 말라 비틀어 버리겠다, 라는 굳건한 의지?
내가 급하게 말리자 황자는 금세 시들었다. 내 손을 꼭 잡으며 혼난 강아지 마냥 나를 바라보는 탓에 고개를 저으며 괜찮다고 말했다. 그, 들어가는 건 안되지만 걷는 건 괜찮아요, 갈게요! 이건 뭐 어린 애를 달래는 것도 아니고, 걸을 수는 있다는 말에 황자의 얼굴이 활짝 핀다. 내 그 곳의 물들에게 단단히 일러놓겠소! 절대 그대를 건드리지 말라고. 황자는 내 눈을 마주보고 또 활짝 웃었다. 그렇게 좋은가.
황자와 나란히 걸어 얕은 해변가에 도착을 했다. 도래국이 봄이라면 이 곳은 여름인가, 내가 만약 한국에서 여름 휴가를 보낸다면 꼭 이 곳이 생각날 것만 같았다. 정말 푸른 바다와 반짝거리는 모래들이 꼭 만화에서만 볼 수 있던 이상적인 해변이었다. 눈을 떼지 못하고 발만 살짝 담가보며 물을 찰박거리니 황자가 뒤에서 한복 치마를 잡아주었다. 멋쩍은 기분에 헤헤, 거리며 시원한 기분을 즐기고 있으니 황자가 내게 물었다.
내 말에 황자가 푸스스 웃어버린다. 한 쪽 무릎을 굽혀 앉더니 하얗고 긴 손가락으로 물을 살짝 튕긴다.
얼굴이 붉어진다. 그렇게 앉아서 그런 얼굴로 저를 바라보시면, 이 구역 얼빠는 좋아서 죽을지도 모릅니다 황자님. 붉어진 얼굴을 숨기려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저 쪽에서 꽤 많아보이는 사람들이 오고 있었다. 황자님, 사람들이 옵니다. 눈부신 햇살에 살짝 얼굴을 찌푸리고 그들을 관찰했다. 그들은 이 쪽으로 오고있었다.
"..."
황자는 나의 말에 일어나 그 쪽을 바라보더니, 굳어진 얼굴로 나를 제 뒤에 숨겼다. 그리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잠시만 이러고 있으시지요. 별 일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