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을 가만히 휴대폰 액정만 바라보았다. 한숨을 쉬었다. 익숙한 글자들이 디스플레이 위에서 춤추고 있었다. 답답하고 껄끄러운 마음에 괜히 잘 정돈된 앞머리를 흐뜨렸다. 마음이 공허했다. 머리로는 익숙한 글자들이 마음으로는 여전히 낯설었다. ‘이번에는 동창회 좀 와라.’ 모두와의 접점을 끊었던 고등학교 동창 중 그나마 연락을 가끔씩 주고 받는 녀석의 문자였다. 날이 벌써 그렇게 흘렀나. 새삼 시간의 흐름에 탄복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나 흘렀다. 이렇게나. 머뭇대다 놓은 휴대폰을 다시 집어들었다. 까매진 액정을 다시 환히 밝혔다. 아득함이 몰려왔다. 충동이 아니라면 거짓말이었다. 뭉툭한 손가락 끝으로 자판을 꾹꾹 눌렀다. 혓바닥을 길게 늘어뜨린 문자들이 박혀 들었다. 또다시 아득하다. 그래 갈게. 전송. 다시 휴대폰을 던져버렸다. 동창회에 나가지 않은 것은 5년이나 된 일이었다. 교우관계가 무척이나 활발했던 아이들만 모여있던 때라 고등학교 졸업 후 그들은 한 해도 빠짐없이 동창회를 열었다. 그동안 친구들에게서 수백통의 문자가 왔다. 죄다 삭제해 저장되지 않은 번호들이었다. 나는 졸업 직후 고등학교 아이들과 연락을 완전히 두절했다. 연락 없이 어디에 틀어박혀 사냐며 핀잔을 주는 문자들을 그저 가만히 보기만 했다. 그러면서도 번호 하나하나를 눈에 새겼다. 외우기 위한 행위가 아니었다. 누군가의 번호를 찾기 위함이었다. 눈에 핏발을 세운 채로 번호들을 뒤졌으나 바라는 것은 나올 리가 없었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이재환. 그 얼굴. 지난 날의 애정. 모두 깊숙하게 잠들어 있다 되살아난다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잘 지내는 지. 밥은 잘 먹고 다니는 지. 그 얼굴 상처 하나 나지는 않았는 지. 궁금했으나 알 길이 없었다. 모두와 끝낸 그 날. 녀석과도 끝을 내버린 그 날 이후로 나는 녀석을 단 한 번도 마주할 수 없었다. 힘없이 눈을 떴다. 어두침침한 저녁 하늘이 마냥 맑게 보이지만은 않았다. 머리맡을 더듬었다. 휴대폰을 켜 시간을 확인했다. 다행히 아직 넉넉했다. 억지로 상체를 일으켜 욕실로 들어가려는데 진동이 울렸다. 확인 버튼을 눌렀다. ‘너 꼭 와야 한다. 너 온다고 녀석들한테 떵떵거렸으니까 안 오면 너 죽고 나 죽는 거야. 얼굴 좀 보자 새끼야.’ 답장 하지 않고 그대로 욕실로 기어들어갔다. 세면대 거울로 보이는 몰골이 처참했다. 거기에 그 녀석도 포함되는 건가. 내가 온다는 것을 녀석도 알고 있을까. 나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무엇을 위해. 무엇을 기대하는 걸까. 무슨 정신으로 씻었는지 모르겠다. 옷장을 열어 검은 바지와 얇은 니트를 껴입고 습관처럼 머리카락을 만지작댔다. 나는 여전히 멍했다. 영혼이 빠져 나간 느낌이었다. 모두들 다 있을까. 나를 보며 어떤 말을 할까. 생각해보면 고교 시절 나는 친구들과 두루두루 모두 친했다. 깊은 우정을 나눴던 녀석들도 꽤 있었다. 그런데 졸업 후 연락처를 바꾸고 잠적했으니 함께 시시덕거렸던 아이들의 입장에서는 나를 황당한 녀석이라 치부해버릴 가능성도 다분했다. 그러나 나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그랬어야만 했던 이유.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현관 앞에 섰다. 센서가 여러 번 깜박였다. 대학로 골목에 위치한 술집이 집합 장소였다. 나는 그곳에서 멀찍이 떨어져 숨어있었다. 시간이 흘러 약속 시간이 다가올수록 인파가 북적대며 몰렸다. 문앞에서 포옹을 하는 사람도 여럿이었다. 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서로에게 애정 섞인 주먹을 날리며 장난을 주고 받는 모습이 눈에 빼곡하게 담겼다. 반가운 마음이 없지 않았지만 달려 나갈수는 없었다. 나는 확인해야 했다. 그 녀석이 오는 지. 술집 안에 모두가 입장한 후에도 녀석은 머리털 끝 하나도 내비치지 않았다. 불안했다. 벌써 약속 시간은 5분 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다. 발을 미약하게 동동 굴렀다. 열대야의 날씨가 무색하게 나는 서늘하게 가라앉고 있었다. 어쩐지 돌아가고 싶었다. 한편으로는 다행이었고 한편으로는 절망적이었다. 녀석이 없어 다행인 마음과 녀석이 없어 절망적인 마음이 교차했다. 그 때였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등허리에 고통이 퍼졌다. 외마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놀란 눈으로 뒤돌았다. 아차 했지만 이미 상대가 나의 얼굴을 확인한 뒤였다. “차학연? 차학연 맞냐?” “아……. 어.” “너 진짜 차학연 맞냐? 귀신 아니야? 이 새끼 드디어 나타났네. 너 어디서 뭐하고 살았어. 연락 다 씹더니 이렇게 돌연 나타나는 건 어디서 배운 거야? 섭섭해서 내가 진짜.”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나와 친했던 용호였다. 녀석은 정말 섭섭한 듯 이맛살을 구기고 폭언을 퍼부었다. 나는 그것을 고스란히 맞으며 그저 머리를 긁적였다. “미안. 사정이 있어서.” “그게 나한테도 못 말하는 사정이었냐?” “…어.” “도대체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들어가자. 여기서 뭐 하고 있냐? 왔으면 빨리 들어가야지.” 용호가 어깨를 붙들고 엄청난 악력으로 이끌었다. 힘없이 덜렁이며 끌려가는 와중에도 목 끝까지 차올랐다. 혹시. 혹시 이재환도 오냐고. 아니나 다를까. 나의 등장은 동창회에서 뜨거운 감자로 올랐다. 놀란 얼굴들에 어쩐지 미안해졌다. 말을 버벅이며 내 몸을 더듬는 것도 잠시, 아이들은 욕설을 뱉으며 구타를 퍼붓기 시작했다. 아팠지만 내색할 수 없었다. “너 진짜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너 어디서 뭐 했냐? 머리 깎고 절에 수련이라도 들어갔냐고. 그깟 연락 한 번 못해?” 슬쩍 웃으며 미안하다는 말 밖에 하지 못하고 서 있자 한 아이가 중재했다. 일단 왔으니까 몰아붙이지 말고 한 번만 봐주자며. 나는 그제서야 자리를 잡고 앉을 수 있었다. 그러다 불현듯 정신이 들어 재빨리 주위를 살폈다. 두리번거리며 이 잡듯 뒤졌으나 녀석은 보이지 않았다. 오지 않는 건가. 온몸에 긴장이 풀려 앞으로 고꾸라질 것 같은 묘한 느낌이었다. 동창들의 질문은 거의 나에게로 쏟아졌다. 연락을 끊은 이유가 뭐냐며. 수다스러운 성격이 어쩌다 이렇게 조용하게 바뀌었냐며 추궁하는 목소리에 나는 제대로 된 대답 하나 못했다. 끊긴 다리 마냥 툭툭 끊어지는 내 말에 친구들은 못마땅하다는 듯 불평을 해댔다. 테이블 위에 즐비한 술들이 각자의 잔에 담겼다. 술이 들어가자 분위기가 서서히 무르익었다. 그새 결혼한 아이도 있었고 제대로 성공한 아이도 있었다. 나는 그저 술 축이는 시늉을 했다. 그들 틈에 낄 명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세 시간 쯤 흐르자 널브러지는 사람들이 속속 속출했다. 술이 센 녀석들도 분위기에 취해 정신을 못차리고 바닥을 기었다. 애초에 술이 약한 나는 시늉만 했기에 취하지 않고 홀로 우뚝 앉아있었다. 일일이 깨워 일으키고 싶었으나 여력이 되지 않을 것이 뻔했기에 그만 뒀다. 조용히 나설까. 지갑과 휴대폰을 챙겨들고 슬그머니 일어났다. 잠귀가 밝은 녀석들에게 들키면 꼼짝없이 갇혀 있어야 할 판국이었다. 나는 뒤돌았다. “…….” 뒤를 돌았는데. “…….” 언제 온 건지 녀석이. 앞에서. “…….” 나와 시선이 마주친다. “…차학연?” 설상가상으로 먼저 말을 붙여온다. 머리가 새하얗게 물들었다. 이런 식의 만남을 원한 것이 절대 아니었다. 눈을 마주칠 생각도 없었고 말을 섞고 싶은 마음은 더더욱 없었다. 그저 안부만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이재환은 나를 재차 확인하려는 듯 다시 물었다. 차학연. 차학연이지. 나는 대답을 회피하고 휘청이며 발걸음을 옮겼다. 취한 척 필사의 연기를 했다. 그러나 녀석은 멈추지 않았다. “졸업식 이후로 코빼기도 안 비치더니.” “…….” “동창회 온거냐?” 주인 잘못 만난 다리는 이재환의 음성으로 인해 바닥에 박힌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절망적이었다. 일단 자리를 옮겨야 했다. 순간 그런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무슨 용기가 생겼는지 나는 그대로 다시금 뒤돌아 이재환의 팔을 붙들었다. 그 때처럼. 녀석이 나를 뿌리쳤을 때 붙잡았던 것처럼. 아주 급박한 동작으로. 나는 슬펐다. “나가서 이야기 해.” 나는 슬펐다. 나는 졸업식 날 고백했다. 가무잡잡한 얼굴을 푹 숙이고 답지 않게 떨었던 것 같다. 그 때 만큼은 세상 누구보다 작았다. 우물쭈물대며 발만 꼼질댔다.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바닥에 처박았던 시선을 슬쩍 끌어올려 상대방의 가슴팍을 흘겼다. 명찰에 가지런히 박힌 이재환이라는 이름이 설레었다. 사춘기 소녀들처럼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나는 동성에게 고백했다. 같은 반, 같은 이야기를 나누며, 항상 함께 했던 아이였다. “이재환. 잘 들어.” 조금 더 용기를 내 얼굴을 똑바로 보았다. 이재환은 새삼스럽게 왜 불러냈냐는 얼굴이었다. 퉁명한 눈매 밑에 드리워진 다정함이 얼마나 좋았는지 모르겠다. 그게 꼭 이재환이 나를 좋아하나, 라는 착각을 불러 일으키게 만들었다. 친구 사이의 애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이재환이 답했다. 뭔데 빨리 말해. “……나.” “어.” “나 너 좋아한다.” 정적. “좋아하게 됐어. 이유는 나도 몰라.” 저질렀다. 그리고 또다시 정적. “……무슨 말을 해야할 지 모르겠다.” “…….” “장난이었으면 좋겠는데 그건 아닌 것 같아서.”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마른 세수를 해댄다. 정신을 놓고 녀석을 멍하니 지켜보는데 이재환이 뒤돌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당황스러웠다. 이대로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탁탁대며 뛰듯 걸어가 이재환의 팔을 낚아챘다. “미안하다.” 아. 뿌리쳐버리다니. 이재환은 그간 더 살이 빠진 듯했다. 애티나던 얼굴은 없고 남자다운 선이 살아있었다. 여전한 나와는 달리 너는 달라져 있었던 거다. 잘 살고 있구나, 라는 생각에 음울해졌다.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그래도 상황이 최악으로 흘러가지는 않은 것 같다. 만약 녀석이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반겼다면, 나는 그 자리에서 혀를 깨물고 싶었을 지도. “잘 지냈냐?” 녀석이 물어온다. “그럭저럭.” 나는 대답했다. “꼭 연락을 끊었어야만 했냐?” “…연락을 할 상황도 아니었으니까.” “왜?” 천진한 너의 질문을 이해할수가 없었다. 왜라니. 나는 기가 차서 조금은 상기된 목소리로 씹어뱉었다. 동성 간의 고백에 놀라서, 나를 뿌리치고 간 사람한테 연락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고. 이재환은 동의나 반대를 표하지 않고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이재환의 시선이 닿는 족족 간질거렸다. 온몸이 간질거려 참을 수가 없었다. “나도 그 땐 놀랐으니까.” “…….” “지금 여기서 그 일을 따져봤자 변하는 건 없겠지.” 이재환이 내뱉는 말들이 비수처럼 꽂혔다. 지독히도 맞는 말이었기에 화도 낼 수 없다. 모두 맞는 말이다. 나와 이재환은 끝이다. 이미 오래 전에. 여러 의미에서. 나는 물었다. “여자 친구는 있어?” 이재환은 조금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아아. 예나 지금이나 너는 표정 숨기는 법을 몰랐다. 머리를 긁적인다. 나와 똑같은 버릇. “어. 있어.” 정적. 그야말로 소름끼치는 정적이었다. “그런 표정 지을 필요 없어. 설마 내가 너를 아직도… 그럴까봐 그러는 건지 모르겠는데.” 한심하기 짝이 없다. “그런 거 아니니까 그럴 필요 없어. 연락 끊었던 것도 온전히 너 때문은 아니니까.” 온전히 너 때문 맞다. 이재환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린다. 그래. 그렇구나. 이번에는 둘 다 가만히 있다. 손을 꼼지락거렸다. 새하얀 정신은 돌아올 기미가 없었고 이재환에게 무슨 말을 지껄였는지도 잘 모르겠다. 곤혹스러웠다. 한꺼번에 태풍이 몰아친 기분이었다. 그것도 태풍의 눈이 없는, 비정상적으로 강력한 태풍.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났다. 홀가분해질 줄 알았던 마음은 여전히 무거웠기에 신경질이 났다. 나도 나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잘 지내는 듯한 이재환에게 심술이 났다는 게 맞는 표현인 것 같다. 이재환은 쭈그려 앉은 자세 그대로 나를 올려다 봤다. 그리고는 듣기 좋은 목소리로 말한다. “가게?” “…어.” “그래. 시간도 늦었으니까. 잘 가라.” 역시 잡지는 않네. 어쩐지 허탈한 기분에 그저 고개만 끄덕이며 걸었다. 다시 이재환이 옅게 소리친다. 그래도 나는 너를 원망까지 하지는 못할 것만 같다. “만나서 반가웠다. 차학연.” 만나서 반가웠다는 소리를 지껄이는 너는, 나의 소중한 첫사랑이기에. 길을 걸을 때마다 가로등이 번쩍였다. 어두운 새벽이었다. 눈앞에 어른거리는 누군가의 잔상을 지우려 애써 발을 세게 굴리며 걸었다. 나는 알고 있다. 여전히 나는 이재환을 좋아하고 있다. 그것이 케케 묵은 감정이 아니라 5년 전 그 날처럼 갓 익어 풋풋한 향을 지니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리고 오늘처럼 밤이 새까맣게 물들었을 때. 가끔 너를 미치도록 안고 싶어질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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