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was that for?
그건 무엇을 위한 것이었지?
What was that for?
무엇을 위해서?
I'd be all of that.
나는 모든 것이 되고픈데.
모든 것을 떠안고 살아가야 하는 기구한 운명이 있다.
"응 그래. 시간이 아깝지 않냐고."
그 기구한 운명은 주위를 돌아볼 만한 여유가 없다. 눈곱 만큼도.
"나한테 이럴 시간에 부모님한테나 좀 잘 해보라니까. 네 부모님은 네가 물티슈 쪼가리 하나를 드려도 감격에 겨워 하실 텐데."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 잊지 않고 냅다 갖다 붙인 뒷말에 곱상한 미간이 찌푸려진다. 저거 인상 찌그러질 때마다 드는 묘한 쾌감이 이루 말할 수 없다. 냉담한 것 같기도 하고 매끈한 것 같기도 한 눈매가 번쩍 섬광을 치더니 기구한 나를 내려본다. 내가 내려다 볼 만한 존만이는 아닌데. 이 새끼는 중졸 주제에 뭘 처먹고 이렇게 덩치가 산만한 지 알 수가 없다.
이 망할 동네에는 예쁜 여자애가 한 명도 없나. 잘 나면 잘 났지 못난 구석 없는 고딩이 왜 허구헌날 이 시커먼 20대 중후반 아저씨만 찾아대는 건지. 동네 수준이 안 봐도 뻔했다. 상심에 입술을 축이고 조심스레 눈치를 살폈다. 여전히 미간을 찌푸리고 있다. 요망한 새끼가 요즘 한동안 안 오더니 왜 또.
"택운아. 형이 근래 많이 힘들다. 지쳤어."
"왜요."
"왜긴 왜야. 알바에 찌들어 사는데 안 지치면 그게 고철덩이 아니고 사람이야? 근데 근 이삼 주 동안 니가 안 와서 조금 살 맛 났거든. 왜 또 왔어?"
"방학 끝났어요."
너무 돌직구였나 싶었는데 오산도 이런 오산이 없다. 그래 방학이 끝났구나. 존나게 처 놀다가 방학 끝나고 심심하니 개학 첫 날부터 학교를 째고 나를 찾아오다니. 헛웃음이 터져 푸 하고 입술을 털었다. 이쯤 되면 얘가 욕구불만이 다른 쪽으로 비뚤어졌나. 성 정체성이 아직 확립이 안 된 건가 싶기도 하다. 남녀 공학 다닌다더니 여자애나 꼬시지. 왜 서른 다 되어 가는 불쌍한 놈을 꼬시려 드냐는 말이지. 부모 멀쩡히 있고 부유한 재력을 소유한 고딩을 보고 있자니 한없이 초라해지는 삶이 꽤나 힘겹다. 넌 왜 그렇게 사니.
부모가 늘그막에 이혼 도장을 꽝하고 찍을 때 고졸을 앞두고 있던 나는 일찌감치 짐을 쌌다. 지 생각 밖에 안 하는 엄마 아빠 중 누구 하나 나를 맡지 않으려 들 게 뻔했기 때문이다. 양육권 싸움인가. 서로 애 맡으려고 하는 뭐 그런 것도 있다던데 서글프게도 우리 집은 서로 안 맡으려 싸웠다. 참으로 아이러니 하지 않을 수 없다. 짐을 싸는데 눈물도 안 나왔다. 차라리 이 편이 낫지. 부모 이혼에 밥줄이 끊겨 당장 해지될 지도 모르는 폰을 켜서 키패드를 갈겼다. 신호음이 길게 이어졌다.
어 왜.
형 나 학연이.
학연인 거 아는데 왜.
나 좀 재워줘.
뭐?
나 갈 데 없어. 부모님 이혼 서류 가지고 난리 쳤거든. 법원도 갔다 오던데. 나 형 밖에 없는 거 알잖아.
뻔뻔스럽게 이어지는 인생 푸념에 상대는 할 말을 잃었다. 아 이거 어쩐다. 진짜 이 형 없으면 노숙해야 할 팔자인데. 고생길을 너무 일찍 여는 건 아닌지 진지하게 내 인생이 불쌍해졌다. 이래서 잉태도 운이라니까. 누구한테 배이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져요.
별로 달갑지 않은 회상을 접고 정택운을 흘겨봤다. 학교를 째긴 왜 째. 인생 조지려고 환장을 하네. 부모님 속 문드러지는 것도 모르고.
"부모님이 뭐라고 안 하시냐?"
하긴 내가 이 놈 부모님 걱정하는 게 웃기긴 하는군.
"남이사."
그건 그래. 누가 누구한테 쿠사리 먹이는 건지. 난 학교는 안 쨌지만 집을 째고 나왔으니. 근데 더 웃긴 건 난 부모님 속 문드러지게 한 적은 없다는 거지. 내가 짐싸서 제 발로 기어 나갔을 때 최소 찾아다니진 않으셨을 것 같은데. 우리 학연이가 제 발로 나갔구나 하며 쫑파티나 안 벌였으면 다행이었다.
"택운아."
"오늘따라 왜 자꾸 불러요. 인생 다 산 노인네처럼."
"예쁜 모양의 주둥이에서 튀어나오는 말 치고는 버릇이 없네."
"형이 나한테 충고할 입장은 아니잖아요."
"그렇긴 한데 너 나 언제까지 따라다닐 거냐고. 솔직히 말하면 지금 너 있잖아. 저기 저 큰 도로에 밀어버리고 싶은 심정이거든. 아주 힘들어. 애새끼 놀음에 장단 맞춰줄 속이 아니란 말이지. 알바 끝나고 오후까지 퍼질러 자야 심신이 조금이라도 편해지는데 너는 왜 그마저 방해하냐."
이 애는 잘못이 없다. 나도 그걸 잘 알고 있다.
"좋아하는데 이유가 있나. 형은 조건 자격 다 따져가면서 좋아해요? 하긴 그런 사람 많긴 한데 형은 아닐 줄 알았지."
말 수가 별로 없는 주제에 내 앞에서만 주구장창 입을 놀려대는, 게다가 퍽이나 순수한 말을 지껄이는 이 아이가 어느 날의 누군가와 너무도 겹쳐보였다. 실은 그래서 힘들었다. 육체적으로 힘든 게 아니라 심적으로다가 죽을 것 같았다. 고딩 때 첫사랑을 쫓아다니며 버릇없이 굴었던, 심지어 남자를 좋아하는 것마저 똑같았다. 빙빙 돌려 말하지 않고 정확히 말하자면 나를 닮았다 이거지. 공부 해야지 학생인데. 공부해서 성공하면 그 때 만나줄게 라는 말을 하고 싶은데 어쩐지 죽어도 못하겠다. 그건 너무 양심이 없지 않나. '성공하면' 만나 주겠다니. '성공한 뒤에'는 나 말고 다른 년놈을 사랑하는 게 득이 된다는 걸 잘 알아버릴 텐데. 어느새 앞에 서 있는 어린 순정남으로 머릿속이 꽉 채워진 나를 발견한다. 그리고 또 한 번 상심한다.
정택운은 나와 달리 부족함 없이 자랐다. 앞으로도 아마 부족함 없이 자랄 것이다. 벌써 몇 개월 째 나를 따라다니는 와중 이 놈의 인생은 하락세를 치고 있었다. 공부도 안 하고 미래 개척도 안 하고 효도도 안 하고. 이러다간 정말.
"택운아."
"또 왜요."
나처럼 될 지도 모르지. 너 나랑 정말 똑같다. 돈 많은 거 빼고.
"너는 나처럼 안 살았으면 좋겠어."
도태에 대한 부정
作 소리꾼
알바하고 알바하고 알바하고. 신물이 났지만 끊을 수는 없다. 몸뚱이가 부서져라 일해도 밑빠진 독에 물붓기니 희한할 노릇이다. 그래도 예전에 입시무용 비스무리 한 걸 가르칠 땐 편하기라도 했다. 고기 접시 나르느라 양 발에 불이 나도록 뛰어다니진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못하면 혼내고, 대신 돈줄 끊기지 않게 적당히 혼내야 했는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요즘 애들은 버르장머리가 없다. 못해서 혼내는데 뭐가 그리 억울한지 주먹을 꼭 쥐고 한 대 칠 기세로 박차고 나간다. 그러면 다음 날 휴대폰에 날벼락 치듯 도착한 문자메세지 내용은, 우리 애 교습 끊습니다. 그 쯤 되니 현타가 왔다. 때려치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당 최저임금 받아가며 죽상인 얼굴로 폰가게를 지나치는데 흥겨운 힙합이 둥둥대며 길을 막는다. 이 리듬에 따라 차도에 뛰어들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그래봤자 진짜 그러진 못하겠지만. 나 죽으면 울어줄 사람이 있을까? 정택운은 울어줄까? 이 타이밍에서 왜 그 꼬마가 생각나는 건지 전혀 모르겠다. 이래서 새벽 감수성이 무섭다더라니. 새벽도 아닌데 왜 이 지랄인지.
터덜터덜 오르막길을 오른다. 양 손에는 깡깡대며 소주잔들이 부딪쳤다. 오늘도 참 보람없는 나날을 보낸 기념이었다. 야밤에 나홀로 소주를 까고 병나발을 불게 된 건 아주 오래된 나의 버릇이었다.
"얼굴 죽상이네요."
깜짝이야. 간이 졸여 바닥에 처박았던 고개를 들자 커다란 인영이 보였다. 정택운이네.
"여기서 뭐하냐. 야밤에."
"알면서 물어보는 거에요? 형 기다린 거지 아니면 내가 여기 왜 와요."
"도련님이 후진 동네 자꾸 찾아오고 그러면 안 돼. 삥 뜯기기 십상이다."
어영부영 말을 돌리자 일시적으로 대화가 끊겼다. 오늘은 기분이 매우 안 좋았다. 원래 늘 안 좋았지만 오늘은 더했다. 빨리 깡소주를 들이 붓고 싶은데 앞길을 가로막으니 신경질이 났다. 짜증스레 비키라 종용했는데도 안 비킨다.
"오르막길 올라서 힘들다."
"오르막길이요?"
"여기 경사 장난 아니야. 허리도 쑤시고 어깨도 쑤신다고. 그러니까 비켜라."
"여기 오르막길 아니에요."
한숨이 나왔다. 그게 무슨 말이니 택운아. 뒷머리를 벅벅 긁자 요망한 놈이 입을 열었다. 형 뒤돌아봐요. 뜬금없는 요청에 또 짜증이 났다.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전혀 알 수가 없으니 답답하면서도 궁금하다.
"봐요. 내리막길이죠."
"……."
"올라가려고 하면 오르막길이고 내려가려고 하면 내리막길인 거에요."
"짜증난다."
"형은 늘 뭐든 오르막이라고 생각하더라."
어린애의 예리함에 움찔했다.
"술 마시게요?"
"보면 모르냐."
"데려다줄게요."
그래도 닭살 돋는 소리는 안 한다. 예를 들어 마시지 마요. 숙취 때문에 내일 고생하려구요, 라던지. 성큼성큼 앞장 서서 걷는 등이 왠지 밉지 않다. 목구멍으로 치미는 걸 애써 무시하려 했는데 오늘따라 그게 안 된다. 나이 먹을 대로 먹어서 가관일 테지만 묻고 싶긴 했다. 어둠을 빌어 곰살맞은 혀를 굴렸다. 너는 나이 먹을 대로 먹은 아저씨가 왜 좋냐. 늘 그랬던 것처럼 무시하고 걸을 줄 알았는데 예상을 깨고 자리에서 멈춘다. 진지한 질문은 아니었는데. 아니지. 진지한 질문이 아닌 척 했는데. 녀석에게는 아니었던 걸까.
"그 질문 몇번 째인 줄 알아요?"
"그랬나."
"볼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어 보이고. 그래서 불쌍해서요."
"……."
"이렇게 말하면 삐질 거면서."
역시 예리하군.
"자꾸 본인 불쌍한 거 티내지 마세요."
나는 이 꼬맹이를 너무 우습게 봤던 것 같다.
"안 그래도 충분히 불쌍해요."
"말하는 본새가 너무하네."
"형이 이런 말 듣고 싶어하는 것 같길래요."
"난 마조 아니야. 세상에 그런 말 듣고 싶어하는 병신이 어딨어."
"근데 사실이에요. 형 불쌍한 거."
어쩐 일인지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좆고딩인 네 눈에도 불쌍하게 보이긴 하는구나. 역시 20대 후반 아저씨 차학연의 인생은 기구하기 짝이 없는 건가.
"근데 불쌍해도 나름의 매력이 있어요."
……아닌 건가.
어색함에 눈만 굴리고 있을 무렵 때맞춰 폰 벨이 울린다. 촌스러울 정도로 기본인 벨소리는 그마저도 아저씨다워서 더욱 쪽팔려졌다. 나중에 당장 최신곡 후렴구로 바꿔놔야겠다. 액정도 안 본 채로 폰을 귀에 갖다 댔다.
"여보세요."
여보 아닌데요.
구린 옛날 개그를 쳐대는 걸 보아하니 내 또래거나 연상이구나 싶다. 불길한 예감에 밭은 숨을 내쉬었다.
"전화 잘못 거셨습니다."
잘못 걸긴 뭘 잘못 걸어. 내 돈 언제 갚을 거야.
"아 진작 말하지."
정택운이 옆에서 소곤댄다. 누구에요? 차마 돈 빌려줬던 형이라는 말은 하기가 싫어 얼버무렸다. 그런 게 있어 임마. 그리고는 손을 휘휘 저어 정택운을 쫓아냈다. 전화 너머 독촉을 받아내랴 정택운을 돌려보내랴 바쁜 와중에 억지 웃음을 겨우 지었다. 형 곧 갚을게. 보름만 기다려주라. 우여곡절 끝에 전화를 끊고 욕지기를 뱉는데 설마하며 뒤돌아보니 정택운이 아직도 버티고 서있다. 눈초리가 전과 다르게 더욱 날카롭다. 왠지 긴장되는 마음에 뭐, 뭐. 말까지 더듬었다.
"애인이에요?"
그건 전혀 다른 차원의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뭐라는 거야 얘는.
"너는 애인 번호도 저장 안 해놓냐? 내가 애인한테 전화 잘못 거셨습니다 그러겠냐?"
"아."
그제서야 슬슬 뒤돌아 길을 나선다. 애새끼 귀엽긴. 애인 아니라고 하니 금방 간다. 정택운에게 있어 나의 인간관계는 늘 그랬다. 애인인 사람, 애인 아닌 사람. 사실 나는 애인을 사귄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정택운은 그걸 몰랐다.
나는 정택운이 완전히 사라지고 난 후에야 다시 걸었다. 술병이 짤랑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