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랑 사귀자.”
봄바람에 벚꽃 잎이 분분히 흩어지고 있었다. 놀란 듯 지호의 활짝 열린 동공으로 지훈의 달콤한 미소가 쏟아져 들어왔다. 따스한 햇볕 속에 서서 그렇게, 지훈은 지호의 대답을 기다리며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지호는 전공서적을 꽉 끌어안은 채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다시 바람을 타고 벚꽃 잎이 머리카락과 어깨로 사뿐 내렸지만 이상하게도 꽃향기가 조금도 맡아지지 않았다. 아마 너무 긴장했기 때문일 것이다. 침이 바짝 말랐다. 당신, 나 알아? 라고 물어 볼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지호의 눈앞의 그는,
지호가 바라마지 않던 꿈의 이상형이었으니까.
거칠어 보이는 회색 머리카락이라든가 밀 빛 얼굴이 꼭 마음에 들었다. 넥타이 없이 느슨하게 단추를 따고 입은 셔츠와 넓은 어깨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반듯하면서도 어딘가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는 지훈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아주 매력적이었다.
저가 게이인 걸 알고서 던진 말일까, 아니면 자기 자신을 너무 잘 알기에 던진 말일까. 지훈의 마른 눈동자를 멍하니 응시한 채 지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작정하고 고백하면 세상에 당신을 거절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야.
“……응.”
고개를 끄덕이는 지호에게 지훈이 눈웃음 쳤다. 당연한 결과였음에도 눈에 띄게 기뻐하는 그를 보며 지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가슴이 어디에 쾅 부딪힌 듯 뻐근하게 아파왔다. 별로 무겁지도 않은 책을 들고 있기가 버겁다. 그 순간 지훈이 지호에게 성큼 다가왔다. 키가 비슷했기에 눈높이도 같았다. 지호와 지훈은 약간의 간격을 두고서 서로의 눈을 똑바로 본다.
지훈의 회색 눈동자에 언뜻 붉은 빛이 반짝였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별안간 지호는 날카로운 쇠창살에 찔린 듯 쇄골에 따가움을 느꼈다. 이어서 불타는 듯한 쓰라림이 번져온다. 무슨 일인지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저의 피부에 이를 박아 넣고 흡입하는 지훈의 뒤통수가 눈에 들어왔다. 지훈의 거친 머리칼이 지호의 연한 피부위로 미끄러졌다. 아파. 지호는 눈살을 찡그렸다.
“너…… 뱀파이어였어?”
무슨 꿀단지라도 되는지 지훈은 지호의 피를 빨아 먹는데 온통 정신이 팔려있었다. 젠장. 순식간에 피를 일 리터는 비워낸 듯 아찔한 빈혈이 지호를 덮쳤다. 어쩐지 너무 완벽하다 싶다 했더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질 줄이야. 함정이 있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죽는구나 싶었다. 24년 인생 솔로로 살다가 대왕 모기한테 걸려서 피 빨려 골로 가는 구나, 우지호 이 불쌍하고 한심한 녀석아.
지호는 자기 연민을 끝으로 서서히 눈을 감았다. 그래도 아름다운 사람에게 죽임을 당해서 다행이야.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이왕이면 왕자님에게 당하는 게 훨씬 나았다. 생각보다 아프지도 않다며 지호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인생은 한순간이라더니 어른들의 말씀 틀릴 것 하나 없다. 죽기 직전의 인생의 파노라마 따윈 펼쳐지지 않았지만 지호는 저가 죽을 거라고 추호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자신은 만분의 일로 나타나는, 뱀파이어와는 절대 상성이 맞지 않기로 유명한 혈우병을 환자였으므로.
벚꽃 향기가 피에 젖고 있었다.
※ 혈우병 [명사] <의학> 조그만 상처에도 쉽게 피가 나고, 잘 멎지 아니하는 유전병. 여자에 의하여 유전되어 남자에게 나타나는 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