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훈씨가 원한다면요.”
입술을 할짝이며 유권이 윙크했다.
호감을 갖고 유권이 장난삼아 말한 건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런 말투는 잔뜩 굶주려 민감해 있는 뱀파이어 한 마리를 자극하기 충분했다. 지훈은 어이없다는 듯 한쪽 입 꼬리를 쓱 올리다가 유권의 멱살을 잡고 후미진 곳으로 긴 다리를 성큼성큼 움직였다. 졸지에 개처럼 끌리게 된 유권은 바싹 잡아당긴 옷자락 때문에 목이 졸려야 했다.
“이, 이것 좀 놓고 말……!”
유권이 뭐라 덧붙이기도 전에 팔뚝으로부터 싸한 기류가 몰려왔다. 지훈이 유권의 팔을 들고 날카로운 송곳니를 푹 찌른 채 언질도 없이 피를 꿀꺽 들이켠 것이다. 다행히 멱살을 잡았던 손은 풀려서 숨통은 트였다만 이런 급 전개는 유권이 원하던 바가 아니었다. 천천히 해도 좋은데. 유권은 실컷 피로 배 채우기 정신없는 지훈을 대신에 여기저기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인적은 없는 것 같았다.
“아.”
유권은 눈동자를 내리 깔며 무표정으로 피를 마시는 지훈을 응시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뱀파이어에게 피를 대주는 유권에게 있어서도 지훈은 특별했다. 외모도 외모지만 지훈은 뱀파이어 특유의 기질이 잘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피를 먹는 것도 그렇다. 생명적 본능에 의한 행위, 흡혈도 배설과 다름없다는 듯 무덤덤하게 최대한 빠르고 신속하게 끝낸다.
“보통 흡혈은 오르가즘보다도 더 쾌락적이라던데.”
한 번에 피가 몽땅 빠져나간 탓에 희미한 빈혈을 느끼며 유권이 말했다. 대충 배는 채웠는지 한참동안 유권의 팔에 붙어있던 지훈이 떨어졌다. 입 주변에 피 한 한 방울도 묻히지 않는 철저한 모습이 오히려 더 오싹하고 매력적이었다.
“지훈씨 보면 모르겠단 말이죠. 다른 뱀파이어들은…….”
흡혈과 섹스를 다 같이 하거든요. 잘못 개겼다가 호흡 곤란을 일으킬 번한 유권이기에 뒷말은 알아서 생략해줬다. 지훈은 침으로 입안에 남아있는 피를 씻다가 유권을 사납게 노려봤다.
“넌 뱀파이어가 놀이로 보여?”
“네?”
“하, 니들이 식인종 심정 따위를 아는 게 더 이상하겠지. 됐고.”
지훈은 뒷주머니에 쑤셔 놓았던 콜롬보 지갑을 꺼내서 오 만원 지폐를 닥치는 대로 집어서 유권에게 내밀었다. 몇 장인지 제대로 세지도 않고 돈을 건네는 지훈을 유권은 말똥말똥 바라봤다.
“팔 아파. 받아.”
“정말 알수록 신기하신 분이네요, 지훈씨는.”
돈을 받은 유권이 어깨를 으쓱했다. 손가락 사이로 잡히는 두께가 상당히 두텁다. 유권은 미리 가방에 챙겨왔던 간단한 의료도구로 약을 바른 뒤 능숙하게 팔에 붕대를 감았다. 돈을 물 흐르듯 쓰는 지훈을 보면 어디 철없는 졸부 집 아들인가 싶다가도 육감으로 느껴지는 압도감에 분명히 범상치 않은 사내라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유권은 저릿저릿한 팔을 주무르다가 번뜩 고개를 들었다.
“칫. 말도 없이 가기는.”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진 지훈에 유권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벌써 만난 지 한 달이 훌쩍 넘었는데도 고운 정은커녕 미운 정도 안 들었다는 듯 무심하기가 국보급인 지훈의 태도에 괜히 이쪽이 열 받는다. 이렇게 건조해서야 대인 관계야 불 보듯 뻔하다.
완전 히키코모리라니까? 차가운 벽에 머리를 붙이고 눈을 감은 유권의 입술에 맺힌 핏방울이 흐른다.
한편 제대로 된 인사도 없이 골목길에서 빠져나온 지훈은 굶주림을 해결했는데도 여전히 인상이 어두웠다. 깐죽대는 김유권 탓도 있지만 지훈이 흡혈 자체를 싫어하기 때문이었다. 생존을 위해 일주일에 두세 번 섭취해주지만 할 때마다 연쇄 살인범이라도 된 듯 기분이 더럽기 짝이 없다. 헌혈 팩을 통해 간접적으로 피를 얻을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기록이 남는데다가 신선도가 나빠서 자주 마셔 줘야하는 단점이 있었다. 맛도 매우 별로고.
뱀파이어가 유전적인 건지 단순한 유전자 결함에 의한 돌연변이인지 아직 정확하게 밝혀진 바는 없다. 다만 현대의 의학 기술로는 치료는 꿈도 못 꾼다는 것과 피를 마시지 않게 되면 심각한 금단증상이 뒤따른다는 것은 분명했다. 혈관이 피부 위로 붉어져 올라오고 이성이 새까맣게 마비된다. 중력보다 더 강력한 갈증이 찾아오게 되면 뱀파이어는 총으로 쏴 죽이지 않는 이상 아무도 말릴 수 없다. 그 일련의 변화가 얼마나 끔찍한지 누구보다 더 잘 아는 지훈은 꽉 주먹을 쥐었다.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기억.
“이제 집을 알아봐야하나.”
발걸음 멎은 지훈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허름한 옥탑방을 내다보며 탄식했다.
§
“우지호, 오늘도 수고했다. 집에 얼른 들어가서 푹 쉬고 꼭 약국에 들려서 약 사는 거 잊지마?”
“네, 형. 먼저 들어갈게요.”
“대답은 잘하지. 꼭 약 챙겨 먹는 거다?”
“벌써 그 소리 열 번도 넘었어요. 알았다니까요. 태일이 형 꼼꼼한 건 알아줘야 돼.”
지호는 킥킥 웃으며 손을 흔들려고 했지만 웃음소리는 곧 이어진 기침 소리로 이상하게 변질되고 말았다. 태일의 걱정을 뒤로한 지호는 고물 자전거를 이끌고 시내로 나왔다. 오후 일곱 시가 넘으면 지호는 퇴근이었다. 가게는 아홉시에 클로즈 했어도 그 뒤로는 손님이 뜸하기에 태일 혼자서도 충분했던 것이다.
지호의 집안 사정을 속속들이 알지 못하는 태일은 지호가 이제 집으로 돌아가 발 뻗고 푹 쉴 거라 믿었지만 그건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였다. 예비 가장 지호는 쓰리잡, 포잡으로 아르바이트를 뛰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도 빠듯한 생계였는데 지훈이란 군식구가 늘어나면서 더 버거워졌다. 학비도 모자라서 휴학 한 상태인데 다시 다닐 수나 있을지 불투명하기만 하다.
“지호 왔니? 얼른 와서 3번 테이블 좀 치워줘.”
지금부터 열한시 반까지, 늦으면 열두시까지 지호는 제법 유명한 돼지곱창집에서 일했다. 아르바이트 중에서 제일 고된 시간이었지만 단 시간에 벌어들이는 수입치고는 꽤 짭짤해서 절대 포기할 수 없기도 했다. 막 손님이 밀리기 시작할 때라서 지호는 제대로 인사할 틈도 없이 손만 씻은 뒤 부지런히 상을 치우고 음식을 날라야했다. 하루하루 쉴 틈 없이 빡빡하게 몰려있는 지호의 스케쥴은, 아파서는 안됐고 아플 시간도 없었다.
‘아, 자꾸 왜 이래…….’
한 달 동안 하루도 거스르지 않고 죽어라 뛰어 다녔더니 확실히 체력에 무리가 느껴졌다. 지호는 열 나는 이마를 손등으로 꾹꾹 누르며 가게 아주머니 대신 밀린 설거지를 해치웠다. 목 안이 퉁퉁 부운 것 같고 시야도 자꾸 초점이 빗나간다. 편의점에서 삼각 김밥 사온다는 걸 깜빡했더니 저녁도 못 먹고 계속 이런 개 같은 상태다. 위가 아주 위액으로 떡칠 돼있을 거라면서 지호는 끙끙댔다.
“지호야. 11번 테이블에 불판 좀 갈아줘라.”
“네에.”
재빨리 고무장갑을 벗고 집게를 챙겨 11번 테이블로 달려갔다. 마음은 급하고 몸 상태는 개떡이라 오다가 그만 삐끗 넘어질 뻔 했다. 인근 대학교에서 온 모양인 듯 대학생 무리들이 모여 북적북적 떠들고 있었다. 지호는 조금 부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살림만 좀 나았다면 지호도 아마 그 무리에 끼여 술이나 마신 채 걱정 없이 웃고 떠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불판 갈겠습니다.”
“어? 너 지호아냐? 우지호! 그치, 지호 맞지?”
이러다 미련 생기겠다며 후딱 해치우려던 지호는 친근한 목소리에 홱 고개를 돌렸다. 왕방울만한 눈에 파마를 했는지 복슬복슬한 머릿결이 꼭 귀여운 강아지가 떠오른다. 지호는 뜻밖의 인물에 맥이 빠져서 웅얼거렸다.
“박…경?”
“그래, 이 자식아! 갑자기 휴학하고 연락 한 번 없더니 이런데서 알바 중이었냐?”
박경이 반갑다는 표시로 지호의 등짝을 세게 후려치는 덕에 지호는 경이 손님인 것도 망각하고 쌍욕을 지껄일 뻔 했다. 안 그래도 컨디션 꽝인데 이 새끼가.
“너 근데 얼굴이 왜 그러냐?”
“뭐. 나 바쁘거든? 일단 불판 좀 갈고 얘기하자.”
“오냐. 불판 갈러 다녀서 그런 건가? 얼굴이 빨갛네. 누가 보면 안면 홍조증인 줄 알겠다.”
그 뒤로도 계속 이리저리 불려 다니는 탓에 좀처럼 시간이 나지 않았던 지호는 한참 만에 잠깐의 틈이 생기자 숨 고를 새도 없이 박경에게 다가갔다. 이런 장소에서 만난 게 달갑진 않았지만 그래도 고등학교 때부터 친하게 지내온 놈이기에 기쁜 마음이 먼저였던 것이다.
“너 진짜 바쁘게 산다. 알바라면 지긋지긋하겠네.”
대충 지호의 형편을 아는 박경이 불쌍하다는 듯 측은하게 말했다.
“동정 하냐?”
“허, 너한테 줄 동정이 어디 있다고. 밥도 못 먹고 죽어가는 기아가 삼십초 당 한명이란다. 네 놈한테 줄 건 없어.”
퉁명스러운 경의 답변에 지호가 피식 웃으며 옆자리에 앉았다. 아, 이제 좀 살 거 같네. 계속 서있었더니 다리도 그렇고 허리도 그렇고 도무지 안 쑤신 데가 없었다.
“학교는 언제 나올 건데?”
“몰라. 상황 좀 나아지면?”
물론 그 상황이 나아지기는 개뿔 갈수록 악화 된다는 게 문제긴 하지만 말이다. 피곤한 지호의 얼굴을 힐끗 보던 경은 먹다 남은 곱창을 집어 지호의 입안으로 골인시켰다.
“그래. 아참 이번 주 목요일 날 고등학교 동창회 하는데 알고 있었어? 1시에 역 건너 설렁탕집에서 모이기로 했는데.”
“전혀.”
“역시 그럴 줄 알았다. 참나 21세기에 아직도 휴대폰을 안가지고 다니는 놈이 세상에 어디 있냐, 진짜. 쪽 팔려서 말도 못 섞겠다.”
우물우물 곱창을 씹던 지호가 또르르 눈동자를 굴렸다.
“박경. 너 몰랐어?”
“뭐를?”
“휴대폰 쓰면 암 생기는 거. 뇌암.”
“……에에엥?”
유언비어 퍼뜨리지 말라는 듯 눈가에 힘을 빡 준 박경에게 대놓고 비웃음을 날린 지호는 곱창을 하나 더 집어먹으며 대답했다.
“전자파 때문에 암 생긴다더라. 작작 써라. 좋은 휴대폰.”
이제 더 농땡이 피우다간 주인 아주머니께 눈총 받게 생겼다. 지호는 툭툭 자리에서 털고 일어나 멘탈붕괴에 빠진 박경을 뒤로 하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잠깐 쉬었다고 산을 이루는 그릇 더미에 망연자실해 있던 지호는 억지로 힘을 끌어내며 트리오를 퐁퐁 짰다.
“피곤해.”
왜 하루는 25시간이 아니라 24시간인 거냐. 지호는 반쯤 졸음에 취해 설거지를 하며 불만을 터뜨렸다.
돼지곱창집 알바가 끝나도 지호는 당장 집으로 갈 수 없었다. 최종 관문인 전단지를 돌려야 하기 때문이다. 장당 50원도 안 되는 전단지 300장을 붙여야 하루일과 끝, 그제야 달콤하게 눈을 붙일 수 있다. 지호는 반쯤 졸면서 붙이느라 평소보다도 사십 분이나 더 늦게 집으로 들어 왔다. 열은 뜨겁다 못해 절절 끓고 있었고 입에서 저도 모르는 사이 끙끙 앓는 소리가 나왔다. 피곤해 죽는다는 게 딱 이런 느낌일까?
“오늘 왜 이렇게 늦게 왔어?”
불도 안 켜고 자리에 눕는데 표지훈이 득달같이 지호 옆으로 다가와 물었다. 귀찮아. 피곤해. 졸려. 지호는 비몽사몽인 채로 말도 못하고 고개만 좌우로 흔들었다.
“우지호, 너 왜 그래? 몸이 이상하잖아.”
평소와 다른 지호의 상태를 눈치 챘는지 표지훈이 목소리를 높였다. 걱정과 화가 묘하게 뒤섞인 말투였지만 지호는 저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상태였다. 시끄럽게…… 피곤하다니까…….
“뭐야, 너 이지경이 되도록 바깥에서 일하다 온 거야?”
지훈은 서둘러 지호의 몸 이곳저곳을 더듬으며 온도를 쟀다. 데일 듯이 손이 뜨거웠다. 어쩐지 아침에 지호를 배웅하면서 걱정스럽더니만 결국 우려하던 사태가 터지고 말았다. 미치겠네. 비상약도 없는 거 같은데 이 상태로 뭘…….
지호의 고개가 옆으로 숙여진 채 그대로 철푸덕 바닥에 쓰러졌다. 지호가 바닥으로 넘어가기까지의 일련의 몸짓이 왜 지훈의 눈에는 그렇게 느리게 잡히는지. 쿵, 쿵, 쿵. 불쾌할 만큼 빠르게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핏기 하나 없이 입술이 메마른 지호가 동공에 덜컥 걸린다. 지훈은 백지장처럼 창백하게 질려 옆집에 끼칠 소음공해도 신경 쓰지 않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무섬증이 표상한다.
“우지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