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김태형씨에게 그 날 들은 이야기는 많진 않았지만 가슴을 울렸어.
나처럼 무용을 했었고, 동생이 너무 예뻐서 초등학교 5학년 때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말에 김태형씨가 쫓아가서 헤어지라고 했었다고도 했고,
수술 때문에 동생이 머리를 삭발한 날, 자신도 삭발을 했었고, 동생이 죽기 2주전부터 학교도 안가고 내내 붙어있었고, 죽어가는 동생이 가여워서 맨날 울었고,
그래도 동생이 불러주는 노래가 너무 좋아서 웃었고, 동생이 죽은 후 너무 많이 울어서 실신해서 이틀 뒤에 깨어나 장례는 마지막날에 치르고 발인을 함께 했으며,
시간이 날 때마다 이 곳에 찾아와서 청소도 하고, 유골함 들고 산책도 하고, 얘기도 많이 한다고 했다.
"나는 왜 동생이 죽고 난 후에야 소중함을 알았고, 이렇게 나 혼자만 더 친해진걸까요...."
동생이 불렀다는 노래를 녹음했었다는 김태형씨는 이어폰을 꽂아 한쪽은 나를 꽂아주고 한쪽은 김태형씨가 꽂은 채 노래를 들려줬어.
'산골소년의 사랑이야기'였는데, 너무 청아한 목소리로 불러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또르르 흐르더라구.
"이 음악파일을 잊어버린다면, 나는 죽을거예요. 근데 난 죽기 싫어서 내가 가진 모든 전자기기에 다 이 노래를 옮겨놨고, CD로도 10장이나 구워서 보관했어요."
"그 CD 저 한 장 주세요. 아가씨가 목소리가 너무 예쁘고 노래도 너무 잘해서 계속 듣고 싶어요"
"특별히 한 장 줄게요. 이 노래가 너무 좋아서 난 태린이 죽고나서 하루에 한 번 이상은 들어요."
그렇게 서로 아련한 마음을 아로새긴 채 다시 서울로 돌아왔지.
"뭐 먹을래요? 나 오늘이 올해의 마지막 휴가예요. 제대로 가지고 놀아야할걸?"
"저도 오늘만 혼나야죠~ 아가씨를 만나게 해 준 대가로 동아리실 청소 안한 벌은 너무 약소한걸요"
"오늘...우리 제대로 놀래요?"
"콜!!!!"
우리 오늘 대박이었어.
노래방도 가고 식당도 가고 영화관도 가고 심지어....클럽도 갔어!!!!
당연히 칵테일만 홀짝이고 춤추는 사람들 구경만 하다가 나왔지만 말이야.....
암튼 자정까지 완벽하게 놀고 집에 들어갔지.
잊지 못할 하루가 될 것 같아.
"자꾸 이럴래요?"
"네...?"
"옷을 챙겨놓을거면 주머니안에 들은 것도 옮겨놓으라고요. 내가 한두번 말해요? 안그래도 피곤한데 그쪽까지 자꾸 나 피곤하게 할거예요?"
"죄송해요...."
휴가 다음날부터 스케줄이 고되었는지 나한테 짜증을 많이 냈는데 나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이해를 했어.
그도그럴게 집에 들어오는게 새벽 3시, 출근 준비하려고 일어나는게 새벽 5시.
하루에 2시간씩 자면서 강행군을 하는 모습이 딱해서 난 요즘 왠만한 짜증은 다 받아주고 있지.
"똑바로 해요. 자꾸 거슬리게 하지말고. 우리집에서 산 거 한두달 아니잖아요."
"미안해요..."
"나는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일을 잘 못하면 정떨어지는 스타일이예요."
그러고 출근해버렸어. 김태형씨....
갑자기 왜이렇게 싸늘해진걸까 싶기도 하고 나한테 짜증낼만큼 바쁜 것 같아서 불쌍하기도 하고...
"아가야~"
"네 어머니!"
"태형이한테 이것 좀 전해주고 오렴."
서류봉투 하나가 나한테 주어졌고, 나는 행여나 또 늦어서 김태형씨 심기를 건드릴까봐 급히 출발했어.
다행히 회사에 금세 도착했고, 김태형씨 사무실은 진작에 가봐서 알고 있었기 때문에 냉큼 찾아갔지.
아직 어리고 정직원이 아니라서 그런지 비서는 없더라구.
똑똑-
"들어오세요"
"어머니께서 가져다드리라고해서 왔어요...."
요즘 김태형씨한테 많이 혼나서 좀 의기소침해져 있어...ㅠㅠㅠㅠㅠㅠㅠ기구한 내 운명 ㅠㅠㅠㅠㅠ
"두고 가요"
뭔가를 열심히 읽고 있는 김태형씨 옆에 더 있으면 거슬릴 것 같아서 인사도 못하고 나와버렸네.
근데 확실히 대한민국1기업이라는 소리가 절로 나올만큼 회사가 어마무지하게 컸어.
이왕 온 김에 회사나 구경하고 가자 싶은 마음에 김태형씨 사무실이 있는 층만 둘러봤는데 정말 경관도 좋고, 시설도 좋고 직원분들도 엄청 열심히 일하시는 모습이 보기좋았어. 언젠가 나도 피터지게 공부해서 이분들과 같이 일하겠지만!
"어머니, 김태형씨한테 전해드리고 왔어요"
"얘 이리 좀 와보렴"
어머니가 부르시니 괜히 움찔해졌지만, 오늘은 어머니 기분이 좋아보였기 때문에 혼날 일은 아니라는 것은 확실했어.
"공부는 열심히 하고 있는거니?"
"네 어머니"
"원래 너희 집과 약속하기를 너 대학은 졸업시키고 결혼을 시키기로 했다만, 네 시아버지께서 너 이렇게 집에 들일 바에는 차라리 그냥 결혼을 하는게 좋겠다고 하시는데. 어떻게 생각하니?"
세상에나. 이제 겨우 스무살인데 난.
"어머니....그건 좀..."
"아무래도 결혼은 너희 대학 졸업 후에 하는게 낫겠지?"
"그럴 것 같아요"
웃음을 지어보이긴 했는데 아버님이 말씀하신 일이라니까 괜히 내가 거부하는게 아닌가 싶어서 걱정되기도 하고...
"혹시 어머니한테 얘기 들으셨어요? 우리 결혼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일단 저는 ㄱ...."
"잠이나 자요"
이렇게까지 말한 적은 없었는데...
너무 속상하고 이렇게 갑자기 태도가 바뀐 이유도 모르겠고 여러모로 혼란스러워서 침대에 눕긴 누웠어.
이렇게까지 차가운 이유가 뭘까.
눈물난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