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추석이었지?
여긴 제사를 지내는 집안이어서 제대로 추석 첫 신고식을 마쳤어.
갖가지로 명절음식, 차례음식을 만들고, 손님을 맞았지.
친족만큼 사업상손님들도 아버님을 뵈러 굉장히 많이 오시더라고.
"아가야. 여기 산적 더 올려라"
"예"
"아가야. 설거지 해놓거라. 점점 쌓이고 있네"
"네!"
여기저기 불려다니며 인사하고, 음식 나르고, 설거지하고, 그러면서도 김태형씨 옆을 졸졸 따라다니며 거의 시중들듯이 대기하고 있었어야했어.
"물 좀."
"여기요"
"냅킨"
"네"
"그릇 좀 치워줘요"
"예"
"방에서 업무봐야 하니까 어른들이 부르시면 데리러 와요"
"네. 들어가세요"
한동안 김태형씨가 좋은 남편이 될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던 나는 그 생각이 틀렸다는 걸 이번에 확실히 알았지...
가정환경이란건 무시할 수가 없어.
나랑 큰어머님이랑 어머님도 마찬가지로 회장님과 아버님을 챙겼고, 손님들께 인사드리고, 하루종일 일하셨어.
큰어머님같은 경우에 정말 오랫동안 이 일을 하셨을텐데....저게 곧 나의 미래겠지?
굉장히 현대사회에 살고 있다고 생각은 했지만 아직도 이렇게 엄격한 집안은 엄격한가봐.
"연휴 마지막날인데 어디 안나가세요?"
"일이 바빠서."
"아..저는 나갔다 올게요"
"이 밤중에 어딜 나가게요?"
"친구랑..."
"함부로 행동하지 말랬죠"
"이게 왜 함부로.."
"여자예요 남자예요"
무심하게 핵직구날리는 너란 남자...
그래 나는 오래된 친구 호석이를 만나러 가려고 했다.
오랜만에 상경한다길래 반가운 마음에 이번에 시간을 낸건데...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예요.."
"남자잖아요."
"애인은 아니잖아요"
"애인은 있나보죠?"
"그런거 아니란거 알잖아요"
"나는 모르겠는데?"
"만나고 오면 안돼요?"
"예비 남편한테 남자친구 만나고 오겠다고 하는 꼴이란"
비꼬기의 신이라고 할 수 있어. 저 자식은.
그냥 어렸을 때 알고 지냈던 친구 만나는게 뭐가 문제라고.
게다가 정호석이는 나 따윈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엄청난 미모의 여자친구도 있다고....
"알겠어요....안가면 되잖아요.."
내가 괜히 더 시무룩하게 있자, 김태형씨가 나가자며 나를 끌고 내려와서 차를 태웠어.
"어디예요.만나기로 한 데가"
"가는 거예요...?"
"더블데이트해요. 이젠 됐어요?"
"정말????"
"빨리 그쪽의 남.자.친.구한테 연락이나 해요 애인 데려오라고"
바로 연락을 했는데, 혼자 잠깐 온거라서 여자친구는 같이 안왔대.
"원래 알고 있었죠? 혼자왔다는거?"
"그게...."
"그럴 줄 알았어"
"당연히 지방에서 상경했다니까 혼자 왔겠거니 하고 생각했죠...."
"다시 집으로 돌아가요"
"왜요"
"더블데이트가 안되잖아요!!!"
"그냥 놀아요..."
"내가 왜?"
"그럼 왜 따라왔어요?"
"외간남자랑 놀아나서 그사람 따라 야반도주할까봐"
"제시간에 집에 돌아갈테니까 나 여기서 내려주고 집에 가 계세요"
그다음엔 대답없이 김태형씨가 차를 몰고 약속장소인 카페에 도착했어.
"여어~ 오랜만이다"
"정호석 좀 잘생겨졌다?"
"이 미모 어디가겠나"
"잘난척은..."
"옆엔..누구?"
"안녕하십니까. 김태형이라고 합니다"
"어? 그...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
"아 우리 옆집사는 아줌마 아들 닮았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얼마나 웃기던지.
대놓고 웃다가 너무 많이 웃어가지고 마지막엔 좀 민망한 정도...?
"뭐하고 놀래?"
"영화볼래?"
"콜? 나 아직 송혜교 나오는거 못봤는데"
"강동원 보고 싶다! 보러가자 그거"
"그쪽은...."
"가요 가"
화났나....? 왠지....삘이다...
호석이가 대신 계산하기로 하고, 나는 김태형씨랑 같이 차에 탔어.
"화났어요..?"
"아니요."
"화난거 같은데..."
"아니라니까요"
"진짜요?"
내가 김태형씨 어깨를 잡고 눈을 마주치면서 다시 얘기했어.
나중에 뒤끝으로 인해 화를 보지 않으려면 이렇게 해야될거 같았거든.
김태형씨가 잠깐.....멈칫하더니
"나한테 하는거랑 그 자식한테 하는거랑 다르잖아요"
헐....이 남자 대기업 총수후계자 맞아?
"내가 뭘...."
"그냥 그 놈이랑 결혼하지"
"정호석은 엄청~~~예쁜 여자친구가 있어서 나같은거 눈에 안들어와요"
"근데 왜 만나요"
"우린 그냥 친구라니까?"
"알았어요."
다행히 삐진건지 화난건지 했던게 다 풀렸나봐.
정호석이 우리 차 뒷좌석에 타고 우리는 근처 영화관으로 갔어.
"아....어떡하지..."
"뭘 어떡해요. 따로 봐요"
그 영화가 진짜 인기가 좋을 때 우리가 간 건가봐. 자리가 거의 안남아서 정호석이 당황해하고 있었는데.
"됐어요. 그쪽은 F열 8번. 우린 맨 뒤"
김태형씨가 나랑 김태형씨 앉을 자리는 스윗박스로, 정호석은 일반석 하나 남은걸로 표 끊어다주더라 ㅋㅋㅋ
"이따봐..."
정호석이 앞좌석으로 내려가고, 우리는 스윗박스에 앉았지.
처음 앉아보는곳이라서 그런건지 뭔가 새로운 느낌.
근데 영화가 시작되고, 나는 급격히 불안해졌어.
왜냐하면....
"흡....흑...크흡...."
눈물이 마구마구 나잖아.....저 소리는 다 내가 코를 들이마시는 소리라고...
나는 슬픈 책을 읽거나 영화,드라마,다큐같은 영상보면 진짜 얼굴이 망가지도록 우는데...아직 김태형씨한텐 그정도 우는거까진 안보여줬단 말이야...
끝나자마자 바로 화장실로 튀어야겠다.
"끝났다"
라는 김태형씨의 말과 함께 난 미친듯이 아래로 뛰어내려갔어. 중간에 샌들이 벗겨질뻔했지만 그에 굴하지 않고 파.워.퇴.장.에 성공했지.
"뭘 그렇게 빨리 나갔어요"
"딱봐도 울었네. 망가진 거 남자친구한테 보이긴 싫다 이거냐?"
정호석이 깐족거리는데 한대 확 쥐어박고 싶지만, 옛날 내 모습을 보여주긴 조금 그래....ㅋㅋㅋ
"아니거든...."
"맞네맞아. 너 원래 영화보고 울면 코 밑에 헐잖아"
정호석이 특급기밀을 털어버렸다. 이 개자식..
"진짜?"
"그런거 아니예요..."
그렇게 좀 어색하게 영화관 나와서 정호석은 터미널 갔고, 우린 차타고 집으로 갔어.
"저 원래 영화볼 때 잘 안우는데 오늘 본 영화가 유독 슬퍼서..."
"그런거 있으면 바로 말해줘요. 나한테 바로바로. 다른 사람한테 듣게 하지 말고"
"진짜 아닌데..."
"배고프네. 저녁은 간소하게 먹을거니까 챙겨와요"
"네"
바로 저녁챙기러 내려왔지.
"얘야. 오늘 어디다녀왔니?"
"오늘 김태형씨랑 같이 외출을 하고 왔어요 어머니"
"아~ 그 남자가 태형이었니?"
"네..?"
"남자랑 돌아다녔다는 제보가 들어와서 말이야"
"어머니..."
"아무데나 싸돌아다녀서 의심을 살 행동은 하지 말거라"
"...."
"대답은 안하니?"
"어머니....제가....뭘 했다고.."
나 너무 억울해서 눈물이 나려고 하는데 어머니가 그냥 부엌에서 나가셨어.
내가 뭘 했는데 다른 남자랑 오해를 살만한 행동을 한다는거야...
서러워서 눈물이 나는데 일단 저녁을 해가야되긴 하니까 빵은 굽고 야채를 썰었지.
"드세요. 전 먼저 씻을ㄱ..."
김태형씨 보니까 눈물이 쏟아지려고 해서 바로 화장실로 들어가버렸어.
싹 다 씻고 가운을 걸친 다음에 조심스럽게 나오니까
"왜 그래요...무슨 일 있어요?"
그냥 난 지금 김태형씨한테도 속상하고 어머니한테도 속상해서 침대에 누웠어.
한참 훌쩍이다가 어느덧 숨이 막혀서 이불을 살짝 걷으니까
이런 얼굴의 김태형씨를 보는데 또 잘생겼어...말도 못하게...
근데 말을 못하겠어서 그냥 다시 이불 뒤집어쓰고 자버렸어.
내가 너무 세상물정모르는, 시월드에 제대로 찾아온 여자인건가봐...
-----------------------------------------------------------------------------------------------------------
너무 오랜만에 찾아왔어요 ㅠㅠㅠㅠㅠㅠㅠㅠ 대신 쵸큼 길게 썼는데 봐주세요....ㅎㅎ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