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3 (BGM : July - 바람에 쓰는 편지) 길었던 밤이 끝났다. 세상이 온통 뒤집어진 지난 200여년을 지나오면서도 그 어슴푸레한 새벽의 느낌은 항상 같았다. 1년 중 밤이 가장 길다는 동지(이제 그런 풍습은 대부분 따지지 않지만)가 지난지 한달도 채 되지 않아 새벽 대여섯시쯤에도 한밤중처럼 깜깜했다. 하긴, 하늘을 뒤덮은 새까만 어둠때문에 한낮에도 어두침침했지만 말이다.
언제 폭격이 쏟아질지, 언제 핵이 터질지 모르는 전쟁의 아침은 일찍 시작된다. 야간보초가 피곤한 눈을 깜박이며 동료들을 깨우고, 몇시간밖에 눈을 붙이지 못했던 군인들은 한참을 뒤척거리다 상병이나 병장의 불호령을 듣고 그제야 하나둘씩 눈을 뜬다. 회색톤이 무겁게 내려앉은 분위기 속에서 그들은 밥을 짓고, 천막을 거두고, 가방을 싼다. 각 천막의 가장 윗대가리들은 부대장에게 오늘 일정에 관한 설명을 듣고 전달한다.
그나마 멀쩡한 마을의 부녀자들은 식량을 배급받으러 가고, 어린 소녀들은 삼삼오오 모여 물통을 달랑거리며 근처의 펌프로 물을 받으러 간다. 정치인들은 넥타이를 조이며 형식뿐인 회의를 위해 걸음을 옮기고 있을 것이고, 간이상점의 주인들은 군부대들이 지나가는 길목에 빨리 자리를 잡기 위해 서둘러 짐을 싸고 있을터였다.
어제와 다름없는 아침이었다.
그리고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한 두 사람이 그 사이에 있었다.
- "어제 처음봤던 사람이었는데... 아닌가? 혹시 예전에 봤었는데 내가 기억을 못한건가? 아닌데...그럴리가 없는데..."
낮은 모래언덕 한구석에 군용담요를 머리까지 칭칭 싸맨채 듣는 사람 하나 없는 혼잣말을 쉴새없이 중얼거리고 있는 동우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면 미친 사람이라 생각할 정도로 멍해보였다. 시선은 옆에 놓인 초콜릿(빵은 다 먹은지 오래였다)과 후레쉬를 향해 있었다.
"근데 나한테 왜 그렇게 잘해줬지? 막..막...초콜릿 입에...으악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거야!"
사실 초콜릿을 입에 넣어주는건 죄가 아니었다. 하지만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동우는 그런건 서로 좋아하는 사람들만 해주는거 아니냐며 얼굴을 또다시 빨갛게 붉히고 있었다.
"그 사람 남자잖아...게다가 어깨엔 이따만한 총도 메고 있었는데..."
어젯밤 호원의 행동은 사실 좀 웃기긴 했다. 전쟁통에 처음 본 사람과 통성명을 하질 않나, 초콜릿을 먹여주질 않나, 예쁘다는둥 어쩐다는둥 이상한 헛소리를 지껄여대지 않나...
"제일 중요한건 내 얼굴이 왜 빨개졌는지야!"
누워있던 동우가 벌떡 일어나면서 외쳤다. 아무도 없는 모래언덕에는 찬바람만 휑하니 불고 있었다. 그제야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이 상황이 얼마나 웃긴지 깨달은 동우는 쑥스럽게 웃었다(역시 아무도 없었는데 말이다). 아래의 군부대에서는 천막이 거둬지고 있었다. 여기 가만히 있어봤자 위험하기만 할뿐이라고 생각한 동우도 담요에 초콜릿과 후레쉬를 넣어 허리에 매었다. 좀전까지 몸을 따뜻하게 덮고 있던 담요를 거둬내니 찬바람이 얇은 옷 사이를 헤쳐 그 시린 기운이 그대로 느껴졌다. 오소소 돋는 소름에 팔을 문지르던 동우는 문득, 그 사람이 추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담요를 돌려줘야하겠지..."
그럼 또 볼 수 있는건가? 보고 싶었는데...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생각하던 동우가 머리를 쥐어뜯었다. 내가 진짜 왜 이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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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어이, 호이병. 뭐해?"
"너 어제부터 계속 이상해. 상사병이라도 났냐?"
"......"
"야 임마!"
"아, 어 미안. 못들었어. 뭐라고?"
"이새끼 진짜 이상해졌어."
"그니까. 엄마 보고싶니, 호애기야?"
"으악 미친! 쟤보고 호애기란 말이 나오냐?"
옆에서 동료들이 시끄럽게 떠들어댔지만, 평소같으면 무리수를 던진 동료의 말에 진저리를 치면서 냄비로 한대 내려쳐야 직성이 풀렸을 호원은 조용했다. 그제야 뭔가 이상함을 느낀 동료들이 짐짓 심각해진 표정으로 물어봤다.
"너 어디 아프냐?"
"군의관한테 가봐야되는거 아냐?"
"...아니야, 그런거. 그냥 좀 잠을 못자서 그래."
"진짜냐?"
"진짜야. 뭐 이런거 갖고 난리냐, 니들은."
"아, 뭐야. 괜히 걱정했잖아."
"호이병 이 단순한 새끼야, 좀 이따 소집령 떨어지면 정신차려라. 아까 보니까 병장 표정이 좆같더만."
"...그래, 알았다."
동료들이 소집령 전에 눈 좀 붙인다고 천막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호원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동료들은 단순한 새끼니 뭐니 했지만 사실 호원의 머릿속엔 쓰나미가 몰아치고 있었다. 어른이 되어 철없던 시절의 행동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으레 이불에 하이킥을 날리면서 후회하듯, 호원도 어젯밤 자신의 행동에 엄청난 후회를 느끼고 있었다.
도대체 내가 왜 그랬던거지? 호원은 평소 자신의 성격이 굉장히 시크하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사실 그냥 무뚝뚝하고 정이 없는 것 뿐이었지만). 학교를 다닐 때는 가장 친한 친구들조차 이 재미없는 놈아, 라며 질타를 일삼고는 했었다. 그렇던 호원이 어젯밤은 좀 달랐다. 아마 살아온 날들 중에 그렇게 많은 말을, 그것도 다정하게 남에게 건넨 날은 어제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이름이 뭐에요?"
"이름?"
"빵 사줬잖아. 알려주면 안되나?"」
처음 만난 이방인에게 이름을 물어보질 않나, 이름을 듣고는 웃어주질 않나.
「"먹을거 갖다준댔잖아요. 기다리고 있어야지 쓰러지면 어떡해."
"......"
"죽은줄 알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도대체 그 사람이 죽는거랑 자신이랑 무슨 관계가 있는건지.
「"먹을거 쥐어주니까 웃었잖아요. 웃는거 처음봐서 그랬어요."
"우..우리 한번밖에 안 만났는데 당연하죠..."
"웃는거 예쁘네요."」
웃는게 예쁘다니... 호원은 연애를 해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 그런 낮간지러운 말은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게다가 그 능청스러움까지, 누가 보면 연애 100단 고수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냥 주는대로 받아먹어요."
"..아...응..."
"잘먹네."」
으악! 호원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 막 이중인격 그런건가? 지금 생각해보면 몸서리칠 행동을 그 사람 앞에선 아무렇지도 않게 하다니. 사귀는 사이도 아니고, 게다가 남잔데(문화는 개방적으로 변한지 오래였지만) 말이다. 거기에다 다음에 만날땐 제대로 반말하기,라... 다시 만날 것을 예견이라도 한듯한 그런 말. 비록 호원의 미간은 약간 찌푸려졌지만, 그는 생각했다.
근데, 정말 또 보고 싶긴 해. 동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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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아. 저길 어떻게 들어가지?"
군부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무너진 돌더미 뒤로 한 인영이 어른거렸다. 천막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군부대 숙소 곳곳에는 군인들이 무거운 총을 메고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전쟁이 5년째에 접어들면서 군인들의 횡포가 심해져온 까닭도 있지만, 원체 군인과 총을 좋아하지 않았던 동우는 돌더미 앞쪽으로 선뜻 나서지 못하는게 당연했다. 동우의 허리엔 짙은 초록색 담요가 매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담요에 둘둘 싸인 것은 초콜릿 하나와 후레쉬. 초콜릿이야 받은 음식이니 상관없지만 후레쉬와 담요를 모두 동우에게 남기고 갔으니, 돌아가는 길이 어두워 어디 다치진 않았을까, 간밤에 추위에 떨지는 않았을까, 괜한 걱정이 들었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동우는 담요에서 초콜릿을 꺼내들어 입에 물었다. 어젯밤 배불리 먹은 덕에 배가 고프진 않았지
만 그래도 며칠동안 굶은 몸은 빵 서너개 정도로 힘이 나지 않았다. 계속 군부대 쪽을 힐끔거리며 초콜릿 하나를 해치운 동우는 잠시 시선을 내리깔았다. "좀 무서워도... 그래도 돌려줘야하지 않을까..."
마음을 굳게 먹고 어금니를 꾹 깨물었다. 총을 든 무서운 군인들은 질색이었지만, 그래도. 돌더미에 기대고 있던 등을 떼어 반바퀴 휙 돈 동우는 혹시 몰라 꽤 무게가 있는 돌 하나를 집어들고 돌더미에서 살짝 뛰어나왔다.
왜애애애애애애앵-
"으악!"
용기내어 옆으로 뛰어나온 발이 무색하게도, 갑자기 커다랗게 울리는 사이렌 소리에 동우는 다시 돌더미 뒤로 몸을 숨기고 말았다.
왜애애애애애애앵- 집합- 왜애애애애애애앵-
소집령이 떨어진 것인지, 사이렌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퍼지는 동안 군인들이 하나둘씩 천막에서 뛰어나와 한가운데 있는 가장 큰 천막으로 향했다. 동우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시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랫입술에서 비릿한 피맛이 느껴졌다.
피, 피.
다리에 힘이 풀렸다. 동우는 그만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소집령이 떨어졌으니까 군인들은 모두 그 커다란 총을 메고 한곳에 모여있을 것이다. 그리고 호원도 그 사이에 있겠지. 동우는 눈을 살포시 내리감았다. 자신은 군인을 무서워한다. 그것도 총 든 군인이면 더더욱. 커다란 소총이나 기관총을 손에 들고 자신을 매섭게 노려보는 군인들을 상상할때마다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적어도 동우에겐 군인들은 세상에 둘도 없는 나쁜 사람이었다. 그들이 화내는 모습은 끔찍할 것이고, 아마 그들이 웃는 모습조차도 동우에겐 위선적으로 보일 터였다. 동우는 호원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리고 호원도 분명, 총을 든 군인이었고 그 끔찍한 군인 무리 사이에 끼어있었다. 그런데 호원은 달랐다. 그를 처음 봤을 때 도망쳐야겠다는 생각보다는 그냥 특이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었고, 그가 어제 웃었던 모습은 위선적이라기 보다는 그냥 친절하고 다정한 웃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호원과 함께 있었던 동안은 그의 어깨에 무겁게 매달린 총이 전혀 신경쓰이지 않았었다. 전쟁이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한 사람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그 사람이 다시 보고 싶어졌다. 호원은 이상한 사람이었다. 동우는 호원이 자신에게 했던 행동들을 다시 떠올려보았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호원이는 그냥 나한테 이상하리만치 잘해준 사람, 그래서 호원이는 이상한 사람인거야. 단지 그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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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간, 호원은 줄을 맞춰 꼿꼿이 서있는 부대원들 틈새에 끼어 지루한 부대장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부대장은 무사히 식량 조달을 해낸 공로에 대해 두서없이 늘어놓고 있었고, 호원의 머리에는 딴 생각이 가득했다. 원래 군대라는 곳의 가장 작은 단위가 부대였고 그 뒤로 소대, 중대 순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전쟁이 터진 이후로 만 17세 이상의 남자가 모조리 군대에 동원되면서 오랫동안 이어져온 그 제도는 많이 바뀌었다. 소대, 중대의 개념은 사라졌고 약 100명 정도의 인원이 한 부대로 활동했다. 한 부대는 어떤 상황에서든지 갈라지지 않고 함께 움직였고, 부대의 구성원과 계급은 1년 6개월마다 바뀌었다. 호원의 18살 생일이 지나자마자 그는 군대에 입대했고, 그 때 만난게 지금의 부대원들이었다. 아직 1년이 채 되지 않았기에 부대 구성원들은 처음 그 계급 그대로 수개월동안 생사고락을 함께했다. 당연히 부대원들 사이의 유대가 끈끈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보통 군인들의 의리는 거기서 끝나지 않고 나라 전체로 나아가, 자신이 인류를 위해 싸우고 있다는 군인으로서의 자부심과 공감대를 갖게 만들었다. 5년째 지속되는 전쟁은 군인들을 철저한 집단적 이기주의로 만들었다. 군인들은 군인이 되지 못한 부녀자들과 장애인들, 그리고 전쟁터를 떠돌아다니는 민간인을 무시했다. 조국, 아니 이 세계를 위해 싸우지는 못할 망정 저렇게 지지리도 궁상맞게 살고있다는 식의 군인들의 업신여김이 민간인들을 몇년동안 짓눌러왔던 것이다. 물론 호원도 그 군인들 중 하나였고, 심하지는 않았지만 호원도 민간인을 배타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어제 만났던 동우는 누가봐도 갈 곳을 잃은 민간인이었다. 원래라면 깔보듯이 한번 슬쩍 쳐다봐주고 평소보다 더욱 굳세고 당당한 군인 특유의 걸음걸이로 스쳐가야 정상이었을 민간인에게 호원은 꽤 정을 느꼈다. 도둑질을 큰 죄라고 느끼는 그가 하염없이 착해보였고, 자신이 하는 말 족족 당황해서 얼굴을 붉히는 모습이 귀여웠다. 동우와 함께 있었던 동안은 그가 굶주려 죽어가는 불쌍한 민간인이라는 사실이 전혀 신경쓰이지 않았었다. 전쟁이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한 사람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그 사람이 다시 보고 싶어졌다. 동우는 이상한 사람이었다. 호원은 동우가 처한 상황을 다시 떠올려보았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동우는 그냥 전쟁통에서 이상하리만치 착하고 불쌍했던 사람, 그래서 동우가 이상한 사람인거야. 단지 그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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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부대장이 미친게지."
"그러게 말이야. 우린 어젯밤에 막 식량 조달을 끝낸 그냥 평범한 군인일 뿐이라고. 그런걸 제대로 할 수 있을리가 없잖아."
"잘못되기라도 하면 난 부모님 얼굴을 어찌 봐야 할까."
"아서라, 잘못되면 부모님 얼굴을 다시는 못 봐, 임마."
소집령이 해제되자마자 호원의 부대는 패닉에 빠졌다. 부대장이 식량 조달 공로에 대해 정신없이 떠들다가 갑자기 이상한 곳으로 주제를 튼 것이다. 동료들의 이야기를 말없이 듣고 있던 호원은 몇분 전 부대를 놀래켰던 부대장의 걸걸한 목소리를 떠올렸다. 식량을 보급하면서 보았듯이 이 근처 전투지역은 아군이 현저히 밀리고 있는 상황이다, 전투 중인 부대들의 부대장들이 상부에서 허락했다며 지원을 요청해왔다, 그러니 우리 부대는 오늘 밤 당장,
"아니, 갑자기 야간기습이 웬 말이냐고!"
부대장을 쉴새없이 씹어대던 동료 하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에휴- 그 소리를 들은 호원의 천막 속 군인들은 모두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군대 생활을 한지 7개월쯤 되었지만 이런 일은 한번도 한 적이 없었다. 싸움터엔 한번 뛰어들어봤지만 후방부대였을 뿐이다. 게다가 당시 적군의 전력이 극도로 약해진 상태라 전방부대의 정예대원 몇십명 정도로도 간단히 끝낼 수 있어서 호원의 부대는 저 멀리를 향해 방아쇠 몇 번 당겨본게 고작이었다. 호원의 부대는 정예요원이라고는 한명도 없는 그냥 식량 지원용 부대였던 것이다. 그리고 부대장은 그런 호원의 부대에게 야간기습을 명령했다. 그것도 오늘밤 당장. 준비는 커녕 탄환도 부족한 상황에서 말이다. 우리 부대원들을 굳게 믿고 있다는 개소리를 지껄이면서. 믿기는 개뿔, 끽하면 죽음이구만 누가 용감하게 싸우겠냐고. 동료들은 어떻게 하면 적군에게 맹렬히 총알을 쏟아부을 것인지 고민하기는 커녕, 어떻게 하면 꽉 끼는 방탄조끼 안에 자신들의 대가리를 효율적으로 구겨넣을 수 있는지 침까지 튀겨가며 떠들어댈게 분명했다. 전쟁 상황에 휴가같은건 없었고 7개월 동안 아무도 집에 다녀오지 못했다. 어서 빨리 1년 휴가를 맞아 가족들을 만나러 가야 하는데, 아직 인생은 4분의 1 정도밖에 살지 못했는데, 행복한 연애도 하고 화려하게 결혼도 해봐야 하는데 여기서 이렇게 죽으면 어떡하나. 부대원들의 얼굴엔 근심걱정이 가득했다.
"아, 담배 말린다."
조용해진 천막 안에서 누군가 중얼거렸고, 그 말에 부대원들은 주섬주섬 담배를 꺼내 하나씩 입에 물었다. 호원도 주머니에서 담배 한개피를 꺼내 불을 붙였다.
후우-
흰 연기가 한겨울 오후의 매서운 바람에 몸을 가누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보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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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저물어갔다. 기온이 뚝 떨어졌고 어둠으로 뒤덮여가는 하늘에는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몇시간 동안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있던 동우는 추워짐을 느끼고 허리에 맸던 담요를 풀어 어깨에 덮었다. 아까전 소집령이 해제된 군부대에서는 잠깐의 소란이 일더니 금새 쥐 죽은듯이 조용해졌다. 아침은 어제와 같았는데, 저녁은 어제와 다르구나. 어깨를 따스히 감싸는 느낌이었던 어제 저녁의 바람과는 다르게 오늘 몰아치는 바람은 어깨를 감싸주기는 커녕 어깨에 덮은 담요를 날려버리려고 애쓰는 듯했다. 아닌가, 바람은 똑같은데 내가 다르게 느끼는건가? 어제는 누군가가 따뜻하게 담요를 덮어주었지만 오늘은 나 혼자 시리도록 차가운 손으로 담요를 붙잡고 있어서 그런가? 소름끼치는 소리를 내며 부는 바람에 동우는 어깨를 떨었다. 불안했다. 그냥 오늘은 바람이 불안했다. 꼭 마치 무슨 일이라도 생길 것처럼 사납게, 또 무섭게, 그렇게 불었다.
"춥진 않을까, 그 사람."
작게 중얼거리던 동우는 얼어붙은 손을 녹이기 위해 입김을 불었다.
후우-
흰 입김이 한겨울 저녁의 매서운 바람에 몸을 가누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걱정되는, 사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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