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자신으로 불어오는 바람을 맞던 학연은 다리에 힘이 빠졌고 그렇게 그는 바다를 세차게 끌어안았다.
“사내놈은 오랜만이야.”
메아리 울리 듯 퍼지는 목소리가 학연의 귀를 한껏 괴롭혔다. 꼭 감은 눈을 조심스럽게 뜬 학연의 앞으로 숨 막힐 정도로 푸른빛이 펼쳐졌다. 현실성 전혀 없는 상황이었지만 학연은 이곳이 바다 속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학연은 목소리의 주인을 찾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가 고개를 살며시 돌릴 때 마다 작은 기포방울의 소리가 간지럽게 터졌다. 학연이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곳엔 자신의 또래처럼 보이는 한 사내가 있었다. 두꺼운 양장본의 책을 천천히 넘기는 모습이 퍽 고풍스러운, 하지만 책을 거꾸로 들고 있다는 점에서 약간은 의심스러운 그런 사내는 학연에게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저것들은 말려도 지치기 전까지는 멈추지 않아.”
학연은 그제야 주변을 채우는 노랫소리를 들었다. 높으면서도 편안하게 울리는 인어들의 목소리는 지금까지 그가 들어본 어떤 소리보다도 아름다웠다.
“여기는……,”
학연이 목소리를 내어도 사내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거꾸로 든 책에서 무얼 보겠다는 것인지, 소년은 조용히 책장을 넘길 뿐이었다. 학연은 그런 사내에게로 다가갔다. 사내가 보고 있는 책의 딱딱한 표지에는 필요 이상으로 크게 이름이 적혀있었다. ‘정택운’. 학연은 소리 내어 이름을 불렀다. 그제야 소년은 고개를 들어 학연을 반듯이 쳐다보았다.
“항상 파랗니?”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넘길 책장이 없을 때까지 세워두기만 할 것 같아 학연은 혀에 담은 말을 급하게 뱉어냈다. 그러자 소년, 그러니까 택운은 입가로 자잘한 기포를 만들어내며 작게 웃어보였다. 비웃음인지 정말로 웃겨서 웃은 건지, 학연은 알 수 없었다. 택운은 손가락을 뻗어 위를 가리켰다.
“저기는 항상 다르고.”
그런 다음 책을 덮어 손에 들더니 아래를 가리켰다.
“저기는 항상 똑같고.”
택운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기던 학연은 택운이 손가락을 거두자 눈길을 잃고 얼떨떨하게 택운에게로 초점을 맞췄다. 그게 끝? 학연은 뭔가 아쉬웠다. 이대로 대화가 중단된 것 같아 새로운 대화를 이끌어야 한다는 게 꽤 힘이 들었다. 오늘 처음 본 사이인데다가 현실감이라곤 전혀 존재하지 않는 이 상황에서 학연은 벗어나는 것 보다 이 신비함에 익숙해지기를 원했다. 두 팔과 다리를 움직일 때마다 물이 밀려나는 것도, 말하거나 웃음을 낼 때 작은 기포가 귀 간지러운 소리를 내며 터지는 것도 전부 익숙해지기를 원했다. 그렇기에 학연은 택운이 좀 더 자신과 가까워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보러 가면 안 돼? 저기랑 저기.”
학연은 택운이 했던 것처럼 위와 아래를 번갈아 가리켰다. 그러자 택운은 학연을 팔을 잡고 더 아래로, 더 깊은 바다 속으로 이끌었다.
주변이 어두워지고 학연을 누르는 수압이 조금 더 강해짐을 느꼈다. 택운도 느꼈는지 더 이상 내려가지는 않았다. 단지 학연의 팔을 놓고 가만히 있었다. 잘 구경하라는 듯이. 학연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이곳저곳을 살폈지만 빛이 없는 어둠일 뿐, 별 것은 없었다. 오히려 깜깜해지는 시야에 학연은 두려움을 느꼈다. 택운은 자신의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하기 위해 학연의 팔을 잠시 놓았고 학연은 다급히 택운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그리고 살짝 위로 끌었다. 이제 위로 가자. 택운은 잠시 학연을 보는가 싶더니 다시금 학연의 팔을 붙잡고 다리를 움직였다.
물빛이 밝아지자 작은 어류들이 택운과 학연 사이를 자유롭게 헤엄쳤다. 인어들은 끊임없이 노래하고 햇빛이 드리운 바닷물은 영롱하게 빛났다. 아, 이거구나. 학연은 생각했다. 아름다움은 여기 있구나. 어느새 택운과 학연은 해수면 가까운 곳까지 올라와 있었다.
“아침이면 푸르고, 오후가 되면 새파랗게 되고. 저녁이 되면 주황빛. 밤이 되면 고요하게 검어.”
학연은 위를 보았다. 전에는 몰랐던 아름다움, 그것이 바로 이 위에 있었다.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의 움직임이 자유롭고 숨 쉴 때마다 공기가 제 속을 휘젓던 그 곳으로. 발을 한번 굴리기만 하면 될 것 같은 학연을 붙잡는 건 다름 아닌 택운의 손이었다. 여전히 학연의 팔을 단단히 쥐고 있는 택운은 가만히 자신의 손에 잡힌 학연의 팔목을 바라볼 뿐이었다. 학연은 택운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포개었다.
“할 수 있다면……, 더 위로 가도 될까?”
택운은 자신의 손에 힘을 주었다가 이내 곧 풀었다. 그리고 학연의 팔을 놓았다. 너는, 너는 돼. 택운은 등 뒤로 자신의 손목을 잡은 채로 천천히 가라앉았다. 학연은 택운을 바라보았다. 그가 점점 멀어져 보이지 않을 때 까지. 그리고 조금의 아쉬움을 털어내고 발을 굴렸다. 부재로 깨달은 아름다움이 학연의 눈앞으로 다가왔다.
택운은 천천히 학연과 멀어졌다. 이렇게 보내는 거구나. 전엔 알 수 없던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물의 울렁임과 섞인 노랫소리를 지나 점점 더 어두운 곳으로 가라앉았다. 택운은 어떠한 헤엄도 없이 아래로, 더 아래로 내려갔다. 가까이 할 수 없는 운명이라면, 가는 길 심심하지 않게. 그대여, 나를 울게 하소서. 그대의 잊히는 여러 산물과 함께하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