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 듣고 한 번 더 자고 일어났더니 까진 손에 메디폼이 붙여져 있더라구.
나한테 배신감 크게 느꼈을텐데...전정국은 또 어떤 말을 했을지....
"짐 챙겨요. 기사 온대"
"다 챙겼어요. 나갈까요?"
"그래요"
내가 가정배경을 무시하지 못한다고 하는 이유는 엄청 사소한 습관들에서 시작되는데, 그 사소한 상황이 지금 일어나고 있어.
보통 매너남 하면 여자 가방도 들어주고 하는 남자들을 말하지?
나는 내 짐은 고사하고 김태형씨 노트북에 양복 마이까지 다 내가 들고 가지.
차에 탔는데 아까 좀 많이 잤는지 잠이 하나도 안오길래 멀뚱멀뚱 앉아있었지.
"김태형씨..."
"왜요"
"전정국이랑 진짜 아무것도 없었어요.."
"알고 싶지 않은데"
"그냥...미안해서 그래요"
"미안하면 앞으로 잘해요."
"네..."
"다시한번 말하지만 전정국 조심해요. 그 날 늦은거 정국이 때문이었죠?"
"....네"
"나랑 같은 학교 다닐 거라는 얘기만 들었는데 진짜 올 줄이야. 외국 그렇게 좋아하는 놈이"
"절대로 한눈팔지 않을게요. 꼭. 약속할게요"
"당연하지. 솔직히 나를 두고 한눈을 어떻게 팔아?"
"미안해요..."
"정국이네 회사랑 우리 회사랑 사업 관련해서 많이 엮여있어요. 물론 그쪽은 원래부터 재벌가 사람 아니었기 때문에 이런거 몰라도 부모님들이 시키신대로 나랑 결혼해서 한눈만 안팔면 되지만. 아무튼 앞으로 조심하세요"
다행히도 나의 일탈은 김태형씨가 너그러이 봐주면서 끝났어.
사람은 참 좋아. 비주얼도 상큼하고.
예비 와이프에 대해 일절 배려 없는게 흠이지만 뭐 괜찮아.
난 다짐했지.
절대로 일탈은 없을거라고.
근데....왜 자꾸 불길한 예감이 들지?
"김태형씨 일어나세요."
"아...나 시차적응 안돼요...누구때문에 하루 더있다 와서 완전 미국시간에 적응해버렸나봐"
"일주일이나 지났거든요. 미국다녀온지"
"그래도...졸려요..."
"그럼 나 먼저 갈게요! 나 동아리 가야돼요 오늘 연극부 새 단원들이랑 첫 만남이란 말이예요!"
"으음...아...아!!!!!!나도 오늘 동아리 모임이다!!!! 몇시예요????"
완전 늦었다면서 내가 주는 옷 부리나케 입고 헐레벌떡 나갔어.
아니 치사하게 이왕이면 나도 같이 차 태워주던가.
지가 흘려놓은 옷들 다 치우고 나가니까 이미 기사아저씨가 김태형씨만 태우고 학교갔어.
"안녕하십니까. 15학번 연극과 ㅁㅁㅁ입니다!"
"안녕하십니까. 15학번 무용과 ㅇㅇㅇ입니다!"
우린 단원 면접을 3학년들이 보거든. 그리고 알게모르게 연영과들이 좀 더 극단 안에서 권력이 있는편이라서 아마 연영과 3학년 선배님들이 뽑은 애들일거야.
그래서 나랑 동기들은 오늘 새내기들 처음보는데 다들 예쁘고 잘생기고 키크고 늘씬하고해서 아 올해 비주얼 대박이구나...이러고 있었어.
그런데....
"안녕하십니까. 15학번 경영학과 전정국입니다."
"....."
"잘부탁드립니다"
"신입맞아? 왜 이렇게 잘생겼어?"
"신입이니까 풋풋해서 그런 거 아니고?"
"야. 그냥 잘생겼다고"
남자 선배님들은 질투하고, 여자선배님들은 잘생겼다고 좋아하고....
나는 혹시 무슨 일 있을까봐 전전긍긍...
"야. 너 뭐 약속있어? 왜이렇게 안절부절못해?"
"예..? 아..아닙니다!"
"다들 잘생겼다는데, 넌 구경 안해?"
"아...전 남자친구 있어서.."
"뭐야? 너 남자친구 있었어???"
아...순식간에 관심 나한테 쏠렸어...
전정국이랑 눈도 마주쳤어...
"그래 특별히 나갔다와라 30분 내로 복귀해"
군대다녀온 3학년 복학생 선배님이 다행히 숨통을 트여줘서 잠시 커피사러 나갔다왔어.
선배님들은 총 14명. 동기들은 6명. 새내기들은 10명.
30명치 커피를 다 사긴 좀 그런데...
나와서 다시 들어가지도 못하겠고, 30분 안에 들어가긴 해야되는데 전정국 순서가 지났는지도 모르겠고, 안절부절 못하면서 별관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어.
"뭐하는거예요?"
김태형씨가 왜 여기있나 고민하다가 김태형씨 댄스동아리였고, 댄스동아리 연습실 또한 이 별관에 있음을 알아채고 나서 나도 모르게 아~이랬어.
"왜 아~라고 해요?"
"잠깐 김태형씨가 왜 여기있는지 생각하다가 답을 찾아서요"
"ㅋㅋㅋㅋ 왜 여기있어요?"
사실대로 말할까. 말하지 말까..고민하다가 결국 말해버렸지.
"연극부에 전정국이 들어왔어요."
"하..지금 뭐라 그랬어요? 전정국이 극단에 들어갔다구요?"
"네..."
"극단 나와요."
"예...?"
"극단 나오라구요. 전정국 있는 곳에 그쪽 못 놔둬요"
"그건 안돼요..."
"왜 안돼요? 아직도 마음이 있는거야?"
"그게 아니잖아요..."
"그럼 뭐야?"
"난 김태형씨랑 결혼하려고 무용도 포기했고, 알바도 억지로 포기했어요. 근데 연극까지 포기하면 난 하고싶은걸 어디서 어떻게 하라구요?"
너무 억울해서, 전정국때문에 못한다는게 너무 분해서 얼굴도 빨개지고 눈물도 고이고..
"그럼 전정국을 내보내요"
"제가 어떻게 내보내요...저 진짜 전정국이랑 안부딪힐게요. 제대로 활동하는 동아리라고는 이거 하나뿐인데..."
내 동아리활동을 허락받아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사실 좀 아이러니하기도 했지만, 일단 내 전적이 있고, 김태형씨가 반대하는 이유도 뭔지 충분히 알기 때문에 싹싹비는 수 밖에 없지..
"일단 들어가요. 오늘 대면식이라며"
나는 들어갔고, 이미 대충 자기소개들은 끝난 것 같았어. 한 세명정도는 모르지만 나중에 차차 알겠지.
"오늘 회식 콜?"
"콜!!!!"
다들 바로 회식 가겠다면서 난리법석이었고, 동기들이랑 언니들은 전정국한테 가서 벌써 번호따고 있었어...
나는 이때다 싶어 그냥 튀려고 했는데...
"선배님"
누가 부르는데....그 누구가 누구겠니...
"저 선배보러 여기 들어왔는데....그냥 가시게요?"
이 새끼가...
"ㄴ...나요?"
"네"
"음...미안하지만 나 약속이 있어서...선배님들 저 가보겠습니다! 나 갈게!!"
절대로 부딪히지 않을 거라고 나 자신한테 약속한거니까 난 무조건 지킬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