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킷 리스트
Written by.비얀코
*
사람의 일은 한치 앞도 알 수 없다고 했다. 한창 주가를 날리고 있던 4집 가수 도경수가 자신의 자리에서 내려와야만 했다.
휴식기에 제대로 쉬었어야 했는데, 매일을 동료가수들과 술을 마시고 몽롱한 새벽에 어김없이 작업실에 앉아 곡을 썼다.
머릿속이 텅 비어있을 때 가장 독창적인 곡이 써지곤 했다.
지치고 빠듯한 일상에 짓눌려 정신적인 문제로 잠시 휴식기간을 가졌다. 쉬는 기간에도 그를 따라다니는 파파라치들과 팬들. 무거웠다.
음악은 제 마음에 안정을 주었지만, 노래를 하는 일은 즐거웠지만 그에 따른 보상은 무겁기만 했다. 행복할 줄만 알았는데,
바쁜 스케줄, 그리고 시시 때도 없이 따라붙는 팬들….
항상 피곤하긴 했는데, 그게 더 짙어진 게 피로감이 쌓여서라고 만 생각했는데, 간염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어렸을 때 간염보균자라는 말을 듣긴 했었다. 피곤이 쌓여 간염이 생겼고, 또 노래하고 싶었던 경수에겐 이건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다.
새벽 내내 작업실에서 작곡 작업을 하며 멜로디를 구상하던 차에 종인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직도 작업해? 집에 안 들어와서 걱정했잖아.
다정한 종인의 말에 편안하게 들려왔다. 몽롱한 새벽의 느낌은 아득하기만 했다. 알 수 없는 통증에 오른쪽 윗배를 잡고 엎드려 끙끙 앓았다. 고통스러워….
병의 원인은 피로누적, 간이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동료 가수들과 매주에 두세 번 이상 꼭 가졌던 술자리. 암이라고 했다. 그것도 말기.
정해진 것도 없이, 5집 준비를 하던 지금 이 순간을 모두 내려 놓아야했다. 대중매체와의 모든 소통을 중단했다. 흰 벽, 흰 침대.
오로지 조용한 공간 안에 경수가 제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며칠 남지 않았다. 가수 도경수로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또 잊히는 게….
“형, 연습하느라 이제 왔네. 늦게 와서 미안해.”
고개를 들어 소리가 난 쪽을 확인하니 종인이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오고 있었다. 종인은 가수생활을 하며 알게 된 각광받는 안무가였다.
3집, 그리고 그에 실력을 깨달으면서 4집까지 타이틀곡과 후속곡까지 모두 맡겼다. 그리고…, 그러면서 알게 된 감정.
‘내 노래에 네가 춤을 추고 있을 때가 가장 기분 좋아.’
‘왜?’
‘박자에 확실하게 반응하는 춤의 정확함, 그리고 내 노래에 빠져들어 춤을 추는 네 모습.’
‘…안무가니까. 당연히.’
‘종인아, 네가 좋아.’
그의 춤을 보고 있으면 내가 쓴 멜로디는 그저 음악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의 무한한 폭을 보고 있는 듯했다.
자유로운, 경계선이 없는 그의 몸짓. 그의 춤이 더해지면서 내가 쓴 노래는 단지 음악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담아낼 수 있는 세상. 그 자체로 변하게 되었다.
사랑해, 종인아. 네 춤이 음악만큼이나, 아니 그보다도 더 좋아. 하지만 그 춤을 추고 있는 네가 제일 좋아. 종인을 바라보며 눈빛으로 그렇게 말했다.
죽음이 드리워진 문턱 앞에서 입조차 떼어지지 않았다.
의사는 그것을 실어증이라고 얘기했다. 말하고 싶어. 종인이랑 얘기하고 싶어. 경수는 조심히 손을 뻗었다.
제 얼굴은 분명 보기 싫어졌을 텐데도 불구하고 종인은 이렇게 매일같이 찾아오곤 했다. 종인아, 이리와. 입모양으로 얘기해도 내뱉을 수가 없다.
죽기 전에 너와 해보고 싶은 게 너무 많아.
“…무리하지 말고.”
“………….”
말이 안 나와. 종인이가 이렇게 내 앞에 있는데. …말이 나오질 않아. 경수는 손을 뻗어 종인의 얼굴을 매만졌다.
…땀 흘렸는데. 하고 말하는 종인의 목소리에 경수는 그저 웃음을 지었을 뿐이다.
매일 봐도 이렇게 좋은데, 네가 없는 그곳에 간다면 …나는.
“또 울려 그런다.”
“…….”
“괜찮아, 나 여기 있어.”
종인이 고개를 숙여 경수와 시선을 맞췄다. 창백하다 못해, 노랗게 변해버린 경수의 얼굴, 그리고 원래도 말랐는데 더욱 수척해진 그의 얼굴,
가는 팔목에 꽂혀있는 바늘, 아픔을 덜어주기 위한 진통제…. 모든 것이 다 거짓 같았다. 아파도, 수척해도 여전히 사랑스러운 제 연인의 푸석한 입술에 입술을 맞대었다.
그의 큰 눈망울에는 조금씩 눈물이 모여들었다. 눈물샘에 채 담아내지 못할 정도로 눈물이 가득 찼을 때에 경수의 볼에 선명하게 투명한 물줄기가 흘러내렸다.
“죽는다는 건, 끝을 의미하는 게 아냐.”
종인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귓가로 파고들었다. 음악이 끝이 있는 걸 봤어? 경계선은 없어. 음악은 언제나 무한해.
죽어서도 음악은 존재해. 그리고 …도경수도 김종인에게 영원히 존재해.
아니, 이 삶에서 김종인 옆이 아닌 도경수는 꿈꿀 수 없어. 잠시 아프고 기적처럼 다시 일어날 거야. 불안해하지 마. 형이 불안해하면 난 어떡해….
경수는 가까운 종인의 얼굴을 눈으로 모두 담아내듯 바라보았다. 깊고 또렷한 눈매, 제법 남자다운 콧날, 그리고 제게 매일 사랑을 속삭여주는 사랑스러운 그 입술….
모두 내 눈 속에 다 담겨진다. 어찌됐건 내가 얼마 살지 못한다는 건 담당의에게 들어 잘 알고 있었다. 길면 한 달이라고 했다. 짧으면 그게 언제가 될지 모른다고 했고.
항암 치료받는 걸 포기했다. 독한약물에 약한 피부가 붉게 부풀어 오르고, 토악질이 났다. 지독스럽게도 약해진 몸이 원망스러워,
생명을 연장하고 팠던 그 당시의 마음으로썬 진통제를 처방받는 것만으로 해도 절망스럽고 안타까웠다. 그럼에도 항상 종인은 경수의 옆에 있었다.
잘나가는 인기가수 도경수가 아니라, 아파서 다 죽어가는 도경수를 변함없이 사랑해주었다.
종인을 바라보고 있던 시선을 거두고 종인의 어깨를 두드렸다. 서랍을 쳐다보며 곁눈질로, 손으로 여는 제스처를 취하며 입모양으로 종이. 하고 얘기하자.
바로 알아들은 종인이 침대옆 서랍장에서 검정 스프링노트를 꺼내다주었다. 공책에 꽂혀있는 볼펜을 빼내어, 노트를 열고 무어라고 적기 시작했다.
「버킷 리스트.」
시작부터 다시 눈물이 맺혀오려는 걸 억지로 입술을 앙다물며 참으려 애썼다. 그리고 밑의 칸부터 차례대로 숫자를 적었다.
몇까지 적어야 하는 거지? 종인이 시선을 아래로 내려 그런 경수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5에서 멈춰선 펜이 다시 1로 올라간다. 적으면서 더 생각해봐야겠다.
종인의 눈에 선명하게 버킷리스트라는 글자가 들어왔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제 연인이 버킷리스트라는 걸 적고 있었다.
얼굴을 보니 애써 담담한 듯 했는데, 가끔씩 아랫입술을 깨물며 슬픈 표정을 짓는 모습이 눈에 선연하게 들어왔다. 종인은 침대의 이불을 조금 걷고 경수의 옆에 앉았다.
바로 눈앞에 버킷리스트가 보였다. 그리고 또 다시 눈물을 흘리고 마는 경수의 모습에 종인은 경수의 허리께에 손을 둘렀다.
글을 쓰는데 방해가 되고 싶지 않았지만, 이렇게라도 곁에 있는 걸 표현하고 안정을 줄 수 있다면야….
「버킷리스트
1. 5집 수록곡이 될 뻔했던 ‘내게 와줘서 고마워.’ 디지털 싱글로라도 꼭 발매하기.
2. 5집 타이틀 이였던 ‘She's my baby’ 역시 포기할 수 없어…, 이건 가이드버전으로 대충 불렀으니까,
목소리 나오게 되면 다시 제대로 녹음해서 위에 썼던 거랑 같이 발매하기.
3.종인이랑 타이틀곡 안무연습하기.
4.사비로라도 타이틀곡 뮤직비디오 찍기, 당연히 종인이는 내 바로 옆.
5.‘내게 와줘서 고마워.’ 이거 녹음 다 끝내놨는데. 아직 종인이한테 안 들려줬는데…, 목소리 나오게 되면 종인이한테 꼭 불러줘야지.
이거, 내가 너 생각하면서 쓴 거야. 알아, 종인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종인이, 작게 웃음을 머금은 경수를 한 번 보고 또 노트위에 글씨를 바라보았다.
제 작년 겨울, 3집준비로 한참 바빴던 그 때, 경수형이 내 춤을 음악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의 아름다움이라고 칭해주었었다. 하지만 나는 조금 다르게 생각되었다.
아름다운 경수형의 목소리에 맞추어 춤을 출 수 있었기에, 내 춤이 더욱 빛이 날 수 있었던 거라고…. 수척하게 마른 뺨 위로 입을 맞췄다.
아직 버킷리스트를 쓰던 노트를 채 접지 못한 채, 6번을 쓰고 망설이고 있었다.
“6번, 종인이랑 결혼하기.”
낯간지럽게 그런 말을 내뱉자, 처음으로 밝게 웃었다. 그리고 정말 그 말 곧이곧대로 노트에 옮겨 적었다.
그리고 덧붙인 말로 결혼? 하고 썼기에 종인이 웃으면서 영원함을 약속하는 게 곧 결혼이야. 하고 덧붙였다. 어디 안가도 가능해. 서로의 의지만 있다면.
그럼 이게 제일 빨리 이뤄지겠네? 역시 내가 말한 게 제일 간단하고 좋네. 나는 당연히 경수형이랑 결혼할 거니까. 형도 그럴 거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럼 하나, 벌써 끝냈네. 하며 6번이라고 써져있는 곳에, 경수의 펜을 뺏어 쥐고 멋대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경수의 정갈한 글씨와는 다르게 동그랗지 못하고 끝마무리가 양쪽으로 갈라져있는 모양 이였다. 근데 그런 대로 꽤 봐줄 만은 하네.
어느덧 눈물이 멎고 입가엔 미소만이 지어지고 있었다.
「7.생각해보니까, 5집 다 너무 아깝다. 녹음 5개나 끝내놨는데…, 될 수 있으면 5집 마무리 짓고, 정규 내고 싶다. …마지막 앨범일 텐데.
8. 바다보고 싶다. 안 본지 꽤 됐네? 더러운 바다 말고, 맑은 초록빛 바다 보고 싶다.
9. 목소리 나오면 제일 먼저 종인이에게 사랑한다고 말해야지.
10. 내가 눈을 감는 그 순간에도 네가 내 곁에 있었으면 좋겠어. 종인아.」
어쩌면 잔인한 제 욕심이 종인을 붙들고 아프게 하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앞섰지만 펜을 노트에 끼워 넣고 접는
그 순간에 자신을 꼭 안아오는 종인의 손길에 경수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아직은 이렇게 우리가 함께 할 지금이 있어. 다가올 미래와 걱정보다는
네 사랑이 나를 안정시켜주고 지금의 나를 존재하게끔 해. 넌 내게 있어 음악과도 같은 존재야. 네가 있기에 내가 있고 내 음악이 곧 너로 인해 완벽함으로 채워져.
너로 하여금 깨달았어. 사랑이 이토록 아름다운 멜로디였다는 걸.
*
담당의로부터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게 좋을 거 같다는 소릴 들었다. 혼자서 몸도 못 일으키는 경수를 휠체어에 태우고 종인은 바깥으로 나왔다.
병원 측에선 당연히 안 된다고 했다. 항암치료를 받아도 모자랄 판에 진통제만 맞고 밖에 나간다는 건 죽음을 앞당기는 일 밖에 되지 않는다고 종인에게 말했다.
매가리 없이 축 늘어진 경수를 휠체어에 태우고 밖으로 나와 제 자동차에 시동을 건 종인이 고속도로 위를 달렸다. 바다 보러가자.
조수석에 눈만 겨우 끔뻑끔뻑 감았다 뜨며, 말을 하려고 무던히 노력하던 경수에게서 드디어 한 달 만에 처음으로 입 밖으로 말이 나왔다.
“…종인아.”
예쁜 목소리일줄 알았는데, 쇳소리처럼 다 긁혀진 못난 목소리여서 경수는 눈에 절로 눈물이 맺혔다. 사랑해. 다 쉬어가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핸들을 쥐고 있던 종인의 손이 잘게 떨렸다. 오랜만에 듣는 그의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죽을 것 마냥 위태롭고 무너져 내릴 듯했다.
종인은 한 손으로 더듬더듬 경수의 머리를 매만졌다. 부드러운 머릿결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나도 사랑해.”
답을 하자, 쉰 목소리로 소리 내어 웃는 게 들렸다. 목소리가 나온 건 좋은데. 잔뜩 쉬고 갈라진 목소리여서, 경수는 아쉬움이 들어 작게 입을 매만졌다.
제가 듣기에도 매력 있던 목소리가 어느덧 이렇게 피폐하게 변해버렸다. 지금이라도 불러줘야 하는데…, MR도 없고, 목소리는 이렇게 …망가져 버렸고.
“그대를 만난 게 아직도 꿈만 같아요. 다가설수록 그대가 내 맘에 들어와, 내 모든 것이 그대가 되었죠.
사랑해요, 이 말로 내 맘을 다 표현할 순 없겠지만. 기억해줘요, 내 음악 안에 그대가 존재함을. 믿어요. 그대 역시 나와 같은 마음일 거라고.
내게 그대가 와줘서. 내 옆에 있어줘서 고마워요. 그대를 만나서 내 모든 것이 변했어요. 바쁘고 지친 일상 속에 그댄 언제나 내게 힘이 되는 사람이었죠.
언제나 변함없는 그 한 가지,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것. 언제나 그대 곁에 있고 싶어요. 그대와 함께 할 그 많은 날들이 이제 시작하려하는 걸요.
잊지 마요, 세월이 흘러도, 혹시 우리가 변한다고 해도. 내가 그대를 사랑했음을 기억해요.”
마무리가 뭐 이러나…, 경수는 미안, 목소리도 별로고 마무리도 별로네. 하고 툴툴거리듯 말했다. 아, 오랜만에 노래 불렀더니 어지럽다.
경수는 힘없이 떨어뜨리어지는 제 머리를 제 손으로 받쳤다. 여전히 달리고 있던 차가 갓길에 멈추어 섰다. 종인이 꾹 다물린 입을 떼었다.
“노래, 좋다. 데모CD, 형 녹음실에 있지?”
“…응.”
“내가 꼭 음반사에 넘길게,”
“사장님 보고 싶다….”
경수가 5집준비가 한참일 때, 벌어진 통증과 그 원인 이였던 암이라는 진단을 받고 사장님께 솔직하게 말씀을 드렸을 때,
제 어깨를 두드리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보이던 대표님. 그리고 사장님의 자리를 벗어나서 회사를 나왔을 때, 매니저와 회사관계자 사람들로부터 문자 한 통씩이 왔다.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암이 꼭 죽는 병은 아니라고. 나을 수 있을 거라고. 분명 말기라고 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문자들이 와있었다.
그리고 나중에 들은 얘긴데, 그렇게 경수가 뒤돌아서 걸어갈 때, 사장님이 눈물을 보이셨다고 했다.
누구보다 엄격했던, 또 강인했던 대표님이 저 때문에 눈물을 흘렸다니, 경수는 왠지 모르게 가슴이 저릿해왔다. 정들었던 회사사람들과도 안녕이다.
원래는 음반사로 바로 CD를 넘기는 게 아니라, 회사에 먼저 CD를 드리고 회사에서 음반사에 넘기는 게 맞는데…. 지금은 계약을 끊었다.
아팠기에, 또 돌아올 가능성이 적었기에 경수는 그렇게 하기로 했었다. 돌아올 때, 그 때의 재계약을 꿈꾸며.
“바다 다 와가. 멀리는 못가고 …강원도.”
“그래도 괜찮아.”
경수가 스스로 짚고 있던 머리를 떼어내고 말했다. 다시 한 번, 빠르게 달리는 차내에서 경수는 조용히 창가에 기대어 잠을 청했다.
졸리다. 아득하게 현실과 멀어져간다. 눈을 겨우겨우 떠 보지만, 쏟아지는 잠을 이기기엔 역부족이다. 억지로 눈을 뜨고, …또 뜨고.
바다에 다 왔다는 종인의 말이 들려왔지만, 몸을 쉽게 가눌 수 없어 축 쳐진 상태로 힘겹게 응. 짧게 대답을 했다.
보조석의 문이 열리고 종인이 의자에 늘어진 경수를 끌어안았다. 혼자 걷는 건 무리일 것 같아, 종인은 경수를 안아들었다.
힘겹게 숨을 토해내는 소리가 귓가에 닿는다. 입자가 고운 모래가 종인의 발에 닿았다. 종인이 가는 곳까지 이어지는 발자국.
너무도 가벼운 경수의 몸이 바닷바람에 미약하게 떨고 있었다. 바다의 앞에 멈춰 서서 바다 내음을 맡으며 종인은 나긋나긋이 경수의 귓가에 속삭였다.
“형이 보고 싶다던 바다야.”
“…응, 예쁘다.”
푸른 빛깔의 바다가 아니라, 꿈꿔왔던 초록빛 바다다. …예쁘다. 말을 하는 와중에도 자꾸만 잠이 쏟아졌다. 눈을 떴다. 감았다.
아직은 마지막이 되어선 안 돼. 아직, 종인의 얼굴을 바다와 함께 눈에 다 못 담았는데…. 바닷소리가 귓가에 청명하게 들려온다. 바닷새소리, 파도소리,
그리고 이곳에서 제게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종인의 목소리. 그 목소리에 거짓말처럼 스르르 잠이 들었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이승을 걸어 나갔다.
바다는 어느덧 이승과 저승의 경계선이 되었고, 경수는 물에 둥둥 떠 있었다. 멀어져가는 종인의 얼굴을 손을 뻗어 매만지고자 했지만, 결국 닿지 않았다.
멀고 먼 곳 까지 떠내려가고 나서야, 경수는 이곳이 이승이 아님을 알았다.
“…경수야, 자?”
“……….”
“자는 구나, …잘 자.”
미동조차 않는 경수의 모습에 종인이 슬프게 미소를 지었다. 핏기 없는 볼에 입을 맞췄다. …차갑다. 그 차갑게 식어가는 몸을 껴안았다.
눈물이 한 방울씩 경수에게로 떨어져 내렸다. 분명 경수의 눈물이 아님이 분명한데, 경수의 얼굴이 눈물로 가득 젖어들었다.
그리고 그 눈물의 시작점인 종인의 눈에서 반짝임이 일었다. 경수의 음악을 완성시켜주고자 하는 확고한 의지가 담겨있었다.
…아직, 버킷리스트 마무리 못 지었잖아.
*
그 언젠가 종인이 장난스럽게 애기왔어? 하고 말했던 뒤로. 내가 왜 애기야? 하고 툴툴거렸던 경수가 어느새 그런 저를 배경으로 만들었던 곡이였다.
내가 …여자로 묘사되는 게 좀 그렇긴 한데. 그래도 게이인걸 티낼 수 없잖아. 우스갯소리로 했던 그 말을 기억한다.
어느 누구보다도 다정하게 속삭여줄게 you're my baby. 후렴구가 들려왔고, 종인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직이며 제가 구상한 안무를 했다.
뮤직비디오, 찍기로 했었는데. 몸을 일으킬 힘조차 없어서 병실에 누워 씁쓸히 미소를 짓던 경수가 떠올랐다. 이건 못 하겠다.
어느새 제 공책에 X표시를 한 경수가 또 답답한지 눈물을 보였다. 되는 게 없네. 그런 경수의 옆에서 종인이 펜을 뺐어들고 X표시를 O표시로 고쳤다.
바로 위에 엑스표시가 보이지 않게끔 몇 번이나 덧대어서 동그라미를 계속 쳤다.
‘이거 내가 해줄게. 내가 꼭 해 줄 테니까. 안 될 거라 생각하지 마.’
비어있는 작업실 안에 컴퓨터 모니터 앞에 바로 데모CD가 올려져있었다. 그 데모 CD를 재생해보니, 1번 트랙인 타이틀곡 She's my baby가 들려왔다.
안무 연습실에서 몇 번이나 곡을 들으면서 안무를 짰다. 좀 더 표현이 살도록, 곡에 맞춰 사랑스러운 느낌이 살아나도록,
곡이 반복 재생될수록 안무를 표현하는 건 더욱이 힘들어졌다. 감정에 휩쓸려 춤을 추면 안 되는데, 자꾸만 노래속의 경수 목소리가 내 귓가로 깊숙이 스며들었다.
곡의 분위기는 너무도 밝은데, 거울 속 제 표정은 어둡고 침울했다. 이러면 뮤직비디오 못 만들어. 종인은 억지로 입에 미소를 지은 채로 곡에 빠져들었다.
‘다정하게 속삭여줄게. you're my baby, 너의 옆에서 내가 네 곁에.’라는 구절이 포인트 안무동작 이였다.
‘your‘ 앞으로 오른쪽 손을 내밀어 찍고, 왼쪽 손과 오른쪽 손을 교차해 위 아래로 내리는 동작, 'my baby',
그리고 ’너의 옆에서’ 오른 발을 한보 앞으로 내밀고 왼쪽, 오른쪽 고개를 돌리며 보이는 쪽 손을 가볍게 돌렸다.
‘내가 네 곁에‘ 두 바퀴 턴을 하고 옆으로 기울어 기대는 모션을 취했다. 이 비어있는 연습실에서 익숙하게 경수의 모습이 그려졌다.
제 옆에서 금방이라도 웃으며 제 안무를 따라 해보일 것 같았다.
두 번째두 번째 트랙, 수록곡을 듣고 세 번째 트랙, 네 번째 트랙을 빠짐없이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트랙의 노래는 아파서 힘도 없으면서, 쥐어짜내듯 힘겹게 불러주었던 그 노래. 겨우겨우 목소리가 나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생각해보니 그게 마지막 기적 이였던 것 같기도 하고, 또 이 노래를 소중하게 생각할 수 있게 해주어 고맙기도 하고. 복잡한 감정이 일었다.
부드러운 선율의 피아노반주가 귓가로 스며들었다. …노래 되게 좋다. 노래가 끝맺으려 할 때 마지막 트랙을 다시 재생시키려던 종인의 손이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노래에선 차 안에서 들려주지 않은 나레이션이 들어가 있었다.
‘사랑해, 종인아. 매일 말해도 모자라, 내게 와줘서 고마워.’
그 소리에 문득 참고 있었던 눈물이 단번에 맺혔다. 삽시간에 눈물이 빠르게 번졌다. 어느덧 CD는 다시 재생되어 첫 트랙을 시작하고 있었다.
정지버튼을 누르고, CD를 빼내었다. 유명음반사에 경수의 싱글앨범을 내주기로 했다. 정
규앨범은 녹음이 덜되어 있어 무리가 있었고, 곡 개수로는 싱글앨범이 딱 알맞았다. 음반사에서는 경수의 마지막 앨범을 맡게 된 것에 고마움을 표했다.
매스컴에 경수의 기사가 퍼지면서 팬들이 경수의 납골당에 찾아와 몇날며칠을 울어댔다. 울다가 실신하는 사람들도 몇 있었다.
그 정도로 경수의 인기는 대단했었다. 어느 아이돌과는 차별화되었던 경수의 실력과 또 따라주었던 외모까지 어느 것 하나 완벽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
경수의 싱글앨범이 발매되었고, 한정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음반매장에선 금방금방 동이 나듯 떨어졌다.
채워도, 채워도 금세 다 팔리고 마는 경수의 앨범은 경수의 인기를 실감하게 했다. 경수의 앨범자리가 비어있는 음반매장은 어느 곳에서나 마찬가지였다.
종인은 헤드폰을 쓰고, 경수의 앨범 수록곡만을 재생리스트에 넣어, 듣고 또 들었다. 들어도, 들어도 변함없이 듣기 좋은 아름다운 음색 이였다.
제 옆으로 지나가던 여고생들이 종인을 알아보고 먼저 말을 걸어왔다. 무어라고 말을 하는데 들리지 않아. 헤드폰을 목에 걸친 종인이 그녀들의 말을 잠잠히 들었다.
“…뮤직비디오 봤어요. 종인오빠 맞죠? 우와, 신기하다.”
“아, 디오 형 뮤직비디오 봤구나.”
“네, 3집, 4집 안무도 직접 짜셨다고 들었어요. 실제로 보니까 더 멋있어요.”
소녀들이 앞 다투어 손을 내밀어왔다. 종인은 말없이 입가에 미소를 띠운 채로 그녀들의 손을 한 번씩 잡아주었다.
악수를 했다고 좋아하는 소녀들의 모습은 또 한 번 경수를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경수는 항상 말했었다. 노래를 하는 건, 음악을 한다는 건 물론 행복한 일이라고 가끔은 공인이기에 불편하고 또 사생활을 침해받지만.
그건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고 저를 바라봐주는 팬들과 환호해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또 보는 것만으로도 기뻐 어쩔 줄 모르는 어린 학생들이 있어서.
그런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힘들었던 스케줄이 아무렇지도 않다고 웃으며 제게 얘기했었다. 그런 기분이 뭔지 몰라서, 아 그래? 형이 좋다니까 나도 좋아.
하고 그냥 얘기했었는데, 제 앞에서 수줍게 웃으며 연신 칭찬을 하는 학생들의 모습은 왠지 경수가 했던 말들을 상기시켜주었다.
“근데, 종인오빠. 그 내게 와줘서 고마워. 라는 곡이 오빠 얘기라면서요? 기사 봤어요.”
“…뭐, 나도 모르고 있었는데, 나중에 알았어. …내가 더 고마운데, 형이 고맙다고 해주니까. 기분이 묘하더라.”
“부럽다. …경수오빠, 잘 있겠죠?”
“응, 잘 있어. 어제도 오빠 꿈에 나와서 안부 전해줬어.”
아무렇지도 않게 이런 말을 나눌 수 있다는 게 조금 웃겼다. 하지만 종인은 알고 있었다. 경수의 죽음이 곧 끝이 아님을,
음악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얼마든지 경수에게 다녀올 수 있었다. 노래를 듣고 또 듣다. 지쳐서 잠이 들면 언제라도 꿈속에 나타나,
까치발을 들어 제 입술위에 입을 맞추는 경수의 모습. 그리고 입술에 닿는 선명한 감촉, 꿈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선에서 경수를 느꼈다.
그 꿈에는 항상 경수와 듣던 음악들이 흘러나왔다.
“잘 어울려요. 오빠, 항상 응원할께요. 전에 만드셨던 안무도 다 찾아봤어요. 진짜 팬이에요.”
"고마워."
"오빠, 저희 이만 가볼께요. 저희야말로 편안하게 대해주셔서 고마웠어요."
소녀들의 뒷모습이 멀어져간다. 경수와의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처음 경수를 만났을 때, 분명 인기가수임에도 불구하고 제가 먼저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해오던 경수, 조그마한 체구에 힘 있게 열심히 안무를 소화해내던 경수,
웃을 때 예쁜 경수, 내 춤을 칭찬해주던 경수, 고백하던 경수, 사귄 후에도 안무연습시간, 그리고 무대에 설 때까지도 항상 담당 댄서로써 경수의 뒤에 섰다.
그의 노래에 춤을 출 때, 나는 지금껏 내가 왜 춤을 춰왔었는지 깨달았다. 좀 더 완벽해지고, 완벽해진 뒤에야 비로소 그를 만났다.
그는 정상 이였고, 나 역시 춤 분야에서는 탑이었다. 그런 완벽함이 맞물려져 노래와 춤이 하나의 음악으로써 승화되었다.
너는 말했었다. 음악만큼이나 내가 좋다고. 아니, 그 이상이라고.
그런 네게 답하였다. 네 노래는 내게 있어, 춤으로 다 담아내기엔 너무도 큰. 광활한 세상 이였다고.
넓고 넓은 너의 음악은 네 안에 모두 담겨져 있다. 지금 눈을 떴다. 감으면 이곳은 현실이지만, 너와의 재회를 꿈꾸며 나는 매일을 잠든다.
너는 내게 있어. 음악 그자체야. 네 노래가 있어, 내 춤은 완벽해질 수 있어. 네 음악, 네 춤, 네 노래. 너의 모든 걸 사랑한다.
영원히 사랑해. 여기 이곳에 네가 존재해. 내 심장에 언제나 네가 존재해, 내 머리가 너를 기억하고. 내 사랑이 아직 네게 머물러있다.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을 이 감정이, 거리에서 흘러나오는 네 노래가 나를 살아 숨 쉬게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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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작품..뙇...어제 밤 계속 내리 잡고 있었던 작품이에요.
오전에 수정을 하는데 어찌나 마음이 착잡해지던지..ㅠㅠㅠ
.....아시겠지만 전 여린 여잡니다.ㅠㅠㅠ흡.. 또 울면서씀.ㅋ..
...되게 전 부터 쓰고 싶어했어요. My lady에 맞춰 춤을 추는 종인이의 모습을 보면서,
그걸 진지하게 바라보는 경수의 모습을 보면서, 이런 캐릭터로 잡아주고 싶었어요.
물론 절때 그 때 구상으론.. 이런 새드가 아니였지만, 어제 착잡하고 힘들었던 제 심경이.. 글을 요지경으로 만들었네요.
버킷리스트, 경수가 이뤄내지 못한 것들을 종인이가 열심히 마무리 지어준다는 구상이였어요.
다 어찌됬건 조금씩은 이뤘지만 딱 한가지, 같이 안무연습하는 건 이뤄내지 못했네요.ㅠㅠ.
뒤에 부가적인 설명을 붙이자면, 종인이 타이틀곡 안무연습을 끝마치고, 제 댄스팀 사람들과 연습을 해서 안무영상을 찍습니다.
물론 안무영상은 뮤직비디오가 아니죠. 중간중간, 노래를 하는 경수의 옛모습이 메이킹필름처럼 담깁니다.
종인이 장난스레 녹음실에 들어와, 작업중인 경수를 놀래키는 것 부터, 또 5집준비에 곡을 쓰는데 열중하는 모습을 찍는 것 부터.
물론 종인이 찍은 것이기에 영상은 흔들리고, 또 핸드폰으로 찍어서 퀄리티는 떨어지지만, 그래도 그것만으로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고 가정했습니다.
어유.. 번외라도 써야할 것 같네..ㅠㅠ분명 엄청 길게 썼는데. 다 담아내지 못해 미안할 따름입니다.
쓰라는 작품은 안쓰고... 매일 이렇게 들쑥날쑥한 작품만 꺼내는 거 같아서 죄송해요.ㅠ.ㅠㅠ
계속 일만 벌이네요...ㅠㅠ...! 그래도 봐주시는 님들 진짜 사랑합니다.
제가 댓글은 다 못달아드려도 댓글 하나하나 다 읽어봐요. 진짜, 감사합니다..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