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아(Messiah)
봉봉&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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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성야동]메시아(Messiah) w.봉봉&천월 - 41 (BGM : KiSH - 비오는 날이면...) - 오랫동안 내리던 비가 그쳤다. 세상의 모든 죄악이 씻겨 내려간듯 그저 청명하게 빛나는 하늘에서 한 마리 하얀 나비가 날아 내려왔다. 새하얗게 씻긴 작은 날개를 움직이며 땅 밑 내려앉을 곳을 찾던 나비는 곧이어 채 마르지 않은 흙더미 한가운데 작게 솟아오른 풀 한 포기에 지친 몸을 앉혔다. "...나비다." 바닥에 주저앉아 하릴없이 하늘만 쳐다보던 동우가 중얼거렸고, 주위를 돌아다니며 흙을 정리하던 호원이 조용히 동우 쪽으로 다가왔다. "그러네..." 봉긋하게 솟아오른 흙더미를 훑어본 호원이 손을 탁탁 털며 동우의 옆에 주저앉았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흙더미에는 방금 마악 쌓아올린 땅 속 깊은 흙 냄새가 가득 배여있었다. "다 끝난거야?" "...응." 흙더미는 우현과 성규의 무덤이었다. 비록 묻을거리는 없었지만 키스트가 있던 곳 근처 떡갈나무 몇그루가 위치하는 작은 숲 한가운데에 우현과 성규의 무덤을 만들어주었다. 죽기 전 우현의 마지막 말 대로 그 두 사람의 반지도 묻어야했지만 작게 반짝이는 반지를 묻으면 우현과 성규에 대한 기억도 묻혀버릴 것 같아 차마 그러지 못해 무덤 앞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정부가 반정부연합군에 완전한 항복을 선언한지 정확히 일주일이 지났다. 5년 동안 이어졌던 전쟁이 순식간에 끝나버리자 나라는 온통 혼란에 빠져버렸다. 그러나 그 속에 조용히 숨어있던 몇몇 사람들이 등장해 갈팡질팡하는 사람들을 통솔하고 또 어지러운 상황을 정비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부를 무너뜨리는데 함께했던 메시아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7개월 가량 함께 해온 사람들은 죽고 살고 울고 웃었던 기억을 공유한 서로를 떠나면서 뜻밖에도 담담한 모습이었다. 모든 것의 마지막에 큰 충격을 남겼던 우현의 죽음, 그리고 그것에 한참 오열하던 그들은 정부의 항복에 기뻐하고 나서 묵묵히 서로를 안아주고 조용히 헤어졌을 뿐이었다. 그 동안 누구보다 큰 감정의 변화를 겪어왔던 동우 또한 마찬가지였다. 동우는 성종과 명수,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한번씩 꼭 끌어안고는 언젠가는 다시 만나자는 말을 남긴채 호원의 손을 잡고 전쟁에 불타버린 평야로 걸어나갔다. 일주일 동안을 그렇게 돌아다녔다. 전쟁이 끝나고 잃어버린 가족들을 추억하고 또 애도하며 천천히 웃음을 되찾아가기 시작하는 사람들을 둘러보고, 하루가 갈수록 옅어지는 피비린내 속에 섞여드는 상쾌한 바람을 온몸으로 느꼈다. 동우의 집이 있었던 곳을 어찌어찌 찾아가 한참을 앉아있기도 했고, 부산까지 내려가서 호원의 집에 들려 안부를 전하기도 했다. 물론 우현과 성규의 반지는 품 안에 꼭 간직한 채였다. 그리고 돌아온 곳이 바로 이 곳, 7개월 동안 늘 키스트 창 밖으로 바라보며 포근함을 느꼈던 떡갈나무 숲이었다. 서로간에 오가는 대화는 없었다. 아무런 말 없이도 모든 뜻이 전달되었다. 조용히 무덤을 쌓아올리고 그 앞에 반지 두 개를 나란히 내려놓았다. 한동안 반지를 쳐다보며 동우는 일주일만에 눈물을 흘렸다. 호원도 마찬가지였다. 너무나 예쁘게, 또 슬프게 사랑했던 둘을 추억하는 눈물은 반지 위에 뚝뚝 떨어졌다. 녹슬고 거친 동전 반지는 눈물과 햇빛에 젖어 마지막으로 밝게 빛났다. 눈물을 닦아내고 무덤 근처의 흙을 깨끗이 정리해나갔다. 어느 하나의 손길도 허투루 하지 않았다. 우현을 향했던 성규의 마음만큼, 성규를 보았던 우현의 시선만큼 조심스럽게 덮여진 흙들은 천천히 불어오는 바람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우현과 성규를 저들이 영원히 지켜주겠다는듯 그렇게 하늘을 보며 단단히 굳어져갔다. 작은 풀에 지친 날개를 쉬게 했던 나비는 그 앞에 앉은 호원과 동우를 빤히 바라보는듯 앉아있다가 다시금 천천히 날아올랐다. 마지막 싸움에서 메시아들에게 용기를 북돋아주었던 나비는 우현과 성규의 기억이 묻힌 무덤 위를 작게 맴돌고 하늘 높이 올라가버렸다. 나비가 사라진 하늘에는 오랜만에 밝게 떠오른 해와 걷힌 안개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시리게 푸른 하늘이 그들을 내려보고 있었다. 그 장면을 묵묵히 응시하던 동우는 문득 무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피어있는 민들레 한 송이를 발견했다. "어? 저거..." "...민들레네." 초록빛이라 해도 전쟁통에 간신히 살아남았던 덕에 탁한 빛을 띄고 있었던 숲 한 구석에 이질적으로 피어있는 샛노란 꽃은 주의깊게 찾아보지 않으면 발견하기 힘들 정도로 조그마했다. 얇고 작은 꽃잎 하나하나가 바람에 흔들리는걸 쳐다보던 동우는 기억 저편에서 아스라히 떠오르는 엄마의 모습에 눈을 내리깔았다. "우리 엄마...민들레 참 좋아했었는데..." "니가 해줬던 얘기 기억하고 있어. 그...날에도 민들레를 가지고 놀고 계셨다고..." 호원이 말하는 그 날이란건, 아마도 동우의 가족이 죽었던 날을 가리키는 단어일 것이었다. 말을 꺼내고 동우의 눈치를 살피는 호원을 향해 조용히 웃어준 동우는 자신은 괜찮다는 손짓을 하며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아무리 척박한 환경이어도 뿌리를 내릴 곳만 있다면 민들레는 자라나. 그래서 이때까지 살아남은 몇 안되는 꽃들 중 하나에 들 수 있었던거고. 우리 엄마가 민들레를 참 좋아했던 이유가 바로 그거야." "......" "항상 나한테 그러셨었어. 콘크리트며 시멘트에서도 자라나는 민들레처럼 우리도 언젠가는 이 세상에 활짝 피어날 수 있을거라고, 그 땐 동우 네가 새로운 세상을 열어달라고. 엄마는 네 손으로 여는 따뜻한 세상을 똑똑히 지켜보고 싶다고." "......" "우리...그 소원 이뤄드린거 맞지?" "...당연하지. 이제 춥고 어두운 세상은 지나갔어. 네 손으로 직접 따뜻한 세상을 연거야." "내 손이 아니라, 우리의 손이지." 동우가 자신의 손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고개를 살짝 끄덕이긴 했지만 그래도 동우의 눈에 아른거리는건 작은 불안감이었다. 그 불안감을 눈치챈 호원은 동우를 바라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왜 그래? 뭐 걸리는 거라도 있어?" "난...난 아직 우리가 성공한게 맞는건지 회의감이 들어." "......" "썩을대로 썩어버린 정부는 마침내 부수었고, 또 전쟁을 끝냈는데. 근데 그건 대한민국 내에서만 국한된 문제이기도 하고..." "......" "무엇보다 이 힘겨운 세상은 아직 끝나지 않았잖아. 우린 아직 헤쳐나가야할 것들이 너무 많아." 동우의 말에 호원이 동의하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해. "호원아... 이 세상을 바꾸겠다 큰 소리 쳤던 우린, 성공한게 맞을까?" 문득 떠오르는건 7개월 전의 기억이었다. 한참을 헤메다 겨우 도착한 키스트에서 처음 만났던 이방인들, 그리고 그들에게 호원과 동우가 두서없이 내뱉었던 말들. 「잘 들어. 우린 정부를 부술거다.」 「우린 이 썩어빠진 정부를 부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거야. 설령 쉽게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죽을 때까지 노력할거다.」 「제아무리 진실을 쫓는게 힘들어보이고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진실을 찾아가는게 옳은거에요. 그래요, 우리가 세상을 바꾼다 어쩐다 하는거, 다 거짓으로 보이겠죠. 하지만 그게 진실이에요! 썩어빠진 정부를 쳐야하는게 진실이라고요!」 가진 것 하나 없이 오직 굳은 마음만으로 명수와 우현, 성규를 설득시키려 애를 썼던 그 날이 떠올라 괜히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그 근거없이 당당한 말을 들은 성규가 뭐라고 했었더라. 「난 믿겨. 낯선 사람들이지만, 방금 저 친구가 한 말 가슴 속에 뭔가 불을 지핀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내가 보기엔 저 둘, 되게 예쁜 사랑을 하고 있거든. 사랑하는 사람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 허황된 약속도 하지 않고. 명수야, 내가 장담하는데. 저 두사람 말은 믿어도 돼.」 그 말을 떠올린 호원의 마음에는 하나의 확신이 생겼다. 옆에 앉은 동우의 손을 꼭 잡은채로 호원이 동우의 말에 대답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세상에 사랑을 꽃피웠어. 이것만으로도 우리는 이 세상의 구원자인거야." 우린, 세상을 사랑으로 밝게 물들인 메시아잖아. - 1년이란 시간이 흘러갔다. 혼란의 끝을 달렸던 2199년은 새로운 2200년, 23세기로 넘어와 천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호원과 동우는 부산으로 내려와 작은 고아원을 세웠다. 전쟁 중에 가족을 잃고 홀로 떠돌아다니는 어린 아이들을 데려다가 길러주는 것이 고아원의 일이었다. 전쟁이 시작되던 해 15살의 어린 동우에게 일어났던 가슴 아픈 기억이 수없이 반복되었던 5년간 큰 상처를 받아온 아이들을 따뜻하게 돌보는 날들은 고되지만 기분좋은 시간이었다. 2200년 12월 31일. 마지막 싸움에서부터 꼭 1년이 되는 날이었다. 매서웠던 작년 겨울에 비해 비교적 포근한 날씨는 연말을 맞이해 꼬마 천사들에게 줄 선물을 사러가는 동우와 호원의 기분을 덩달아 좋아지게 했다. "우림이는 인형 갖고 싶댔지? 여진이는 로보트랬나? 고 녀석은 여자애면서 취향이 참 웃기다니까. 흐흐." "그러게. 민주는 책이래. 아마 커서 똑똑해질거야." "자동차 달라던 애가 영훈이였지?" 크리스마스 카드에다가 갖고 싶은 선물을 한자 한자 꼼꼼히 적던 아이들의 고사리손을 생각하며 동우가 기분좋게 웃었다. 그 때 호원이 동우의 팔을 급히 끌어당겼다. "조심해!" 동우가 비틀거리며 호원 쪽으로 기대자마자 동우의 옆으로 자동차 한 대가 빠른 속도로 지나쳐갔다. "으어...죽을뻔 했다..." "이런데서 저렇게 운전하면 어쩌자는거야..." 뒤도 안 돌아보고 쌩하니 달려가는 자동차를 쳐다보며 호원이 씩씩거렸다. 자기는 괜찮다며 호원을 다독인 동우가 다시 걸음을 재촉하며 문득 말을 꺼냈다. "저 차 보니까 유천이형 생각난다..." "어?" "처음 만났던 날에 그...풍력 자동차 있잖아. 엄청 빨랐던거." 아아- 호원이 기억 저 편에서 스물스물 떠오르는 유천의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 타고 죽을뻔 했던 그거. "근데 너 그 때 잡혀가서 내가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알긴 해?" "이호원 너 그 얘기 한번만 더 하면 오백번째는 될걸." 화약고 폭파 때 잠깐 떨어진 사이 동우가 정부군에게 잡혀갔었던 끔찍한 기억을 되살리며 호원이 미간을 있는대로 찌푸렸다. 동우는 그런 호원의 우스꽝스러운 얼굴을 보며 그런 일 다시는 있을리 없다며 미소지었다. 신설 대형 상점은 전쟁이 끝난 후 사라진 간이 상점들을 통합해 세워진 옛날 백화점 모습의 상가였다. 부족해진 생필품들과 다시 삶의 여유를 되찾기 위한 다양한 물건들을 주로 판매하는 곳으로, 물가가 치솟았던 전쟁때에 비해 저렴한 가격으로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었다. 오늘 호원과 동우도 고아원 아이들의 선물을 사기 위해 이 곳을 방문했다. 정부의 항복 이후 뿔뿔이 흩어졌을 땐 수중에 한푼어치의 돈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곳저곳 다니다 돌아갔던 호원의 집에서 도움을 받고 있었을 때, 호원과 동우의 이름으로 된 전자 카드 두개가 부산으로 도착했다. 그 안에는 고아원을 세우고도 남을만한 많은 양의 돈이 들어있었다. 보낸 사람에 대한 정보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지만 호원과 동우는 반란 내내 금전적으로 그들에게 힘이 되주었던 한일이 보낸 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받았던 돈으로 작은 고아원을 세우고 남은 돈을 아끼고 또 틈틈이 벌어가며 살아온 1년, 나이가 적게는 두어살에서 많게는 둘과 거의 비슷한 아이들을 돌봐오면서 호원과 동우는 열아홉 철없던 청춘에서 벗어나 스무살 어엿한 어른이 되었다. 물론 사랑도 더 깊어졌고 말이다. "얼른 사고 가자. 애들 기다릴라." 상점에 들어서자마자 호원이 동우의 팔을 잡아끌었다. 어린이용 장난감들이 가득 진열된 코너에는 부모님과 함께 선물을 사러온 꼬마 아이들로 가득했다. "저기 인형 있다! 완전 귀엽다. 막 저절로 움직여!" "뭘로 사갈래? 토끼 인형? 고양이 인형?" "이거 고양이 인형 고장난거 같은데...잘 안 움직여." "그럼 토끼로 사가면 되지." 그 때 저쪽에서 무언가를 발견한 동우가 쪼르르 달려갔다. 토끼 인형을 카트에 담던 호원이 사라진 동우를 쫓아간 곳에는 반짝이는 보석 요술봉들이 놓여져 있었다. "이쁘다..." "여자애도 아니고 이런거 보고 좋아하냐!" 호원이 눈을 빛내는 동우의 머리를 장난스럽게 쓰다듬었다. "에이, 시대가 어떤 시댄데 여자애 타령이야! 이런거 보면 막 동심으로 돌아간 느낌 나고 그렇지 않아? 너무 귀엽고 이쁜거 같아!" 동우가 에메랄드가 박힌 요술봉을 집어들고 마구 휘둘렀다. 옆에 선 호원도 쭉 둘러보더니 하늘색과 파란색을 띤 요술봉 두개를 집어들었다. "이 두개가 제일 예쁜거 같은데?" "이거 아마 토파즈랑 아쿠아마린일거야. 그치?" 동우가 호원을 보며 헤헤 웃었다. 덩달아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인 호원이 얼른 책 사러가자며 동우를 다시 잡아끌었다. 책 코너로 가는 길엔 대형 장난감이 늘어서 있었다. "어? 저거 봐, 신기하다." 그 중 한가운데 놓인 지하 기지 만들기 세트 박스를 보며 동우가 또다시 눈을 빛냈다. 대충 보아 커다란 통에 흙을 담아 설명서대로 따르면 멋진 지하 기지가 완성된다는 얘기 같았다. 박스 겉면에 붙여진 완성 사진을 보자 장난감 주제에 정말 실제 지하 기지처럼 웅장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되게 진짜 같다... 막 안에 장로님 계시는거 아냐?" "들어가는 입구는 건물 속 깊이 숨겨져 있고." 실없는 농담에 푸스스 웃고는 다시 책 코너로 향할 때였다. 별안간 창문 밖으로 보이는 바깥에서 눈발이 폴폴 날리기 시작했다. "어, 눈온다. 걸어가야되는데." "택시 탈래? 호원아, 예전처럼 니가 돈 다 내줘." "웃기시네. 서울까지 올려보내기 전에 조용히 하고 책이나 사." 1년하고도 8개월 전, 부산으로 내려가는 택시비를 혼자 몽땅 내야했던 호원의 부르르 떨리던 손을 기억하던 동우가 신나게 웃어댔다. "왜! 그 때 뭐랬더라? 내가 돈 많이 든다고 안 내려간다 하니까... 니 돈은 안 들잖아, 이랬지 않아? 돈까지 내가면서 나랑 같이 가고 싶었던 거야, 우리 호야?" "시끄러워. 택시같은거 안 태워줄거야." 처음 만났을때 쑥맥이었던 것쯤 없었던 일로 치부하듯 능글능글 장난을 쳐대는 동우때문에 호원은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모를 기분이 되었다. 고개를 휘휘 저어가며 저쪽으로 피해가며 동화책을 살펴보는 호원의 뒤를 따라가며 동우는 아까보다 훨씬 크게 웃었다. 아이들의 선물을 모두 사고 나서 식료품 코너를 둘러보기 시작한 동우의 눈에 익숙한 무언가가 들어왔다. "어! 초콜릿이다!" 단 음식을 좋아하는 동우가 손에 든 짐을 덜렁거리며 초콜릿 진열대로 다가갔다. "호야, 호야! 나 초콜릿 먹을래!" "으이구...어린애같기는...알았어. 하나 사자." "빨리 먹고 싶다..." 동우의 중얼거림에 꼬마가 따로 없다며 어깨를 으쓱인 호원이 옆에 서있던 직원에게 카드를 내밀고 초콜릿을 먼저 계산해서 동우의 손에 넘겨주었다. 실없이 웃으며 초콜릿을 받아들고 포장지를 까기 시작하는 동우의 손에 들려있던 짐은 이미 땅바닥에 내려놓은지 오래였다. "어, 이거 왜 안 까지지..." "바보, 이리 줘 봐." 포장지 하나 제대로 못 뜯고 낑낑대는 동우의 손에서 다시 초콜릿을 뺏어간 호원이 단단히 밀봉된 포장지를 뜯어 초콜릿을 떼어냈다. "아-" "어?" "어가 아니라 아. 입 벌려봐." 초콜릿 조각을 동우의 입 앞에 들이댄 호원이 동우의 입술을 툭툭 건드렸다. 동우가 살짝 입을 벌린 틈 안으로 초콜릿 조각을 넣어준 호원이 엄마같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냥 내가 먹어도 되는데." "주는대로 받아먹어." "...치." "잘 먹네." 호원이 동우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자 동우가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이게 뭐야!" "뭐긴 뭐야. 애정행각이지." 능글맞은 호원의 말에 끊임없이 웃어대는 동우를 빤히 바라보던 호원이 문득 말을 꺼냈다. "웃는거 예쁘네." "...어?" "항상 예뻤어." "......" "얼른 먹고 가자." 낯뜨거운 말을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휘적휘적 걸어가는 호원의 뒤에서 초콜릿을 입에 한가득 문채 서있는 동우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한참을 그렇게 멍하니 서있다가 멀어지는 호원의 모습에 정신을 차린 동우가 내려놓았던 짐을 챙기고 허겁지겁 호원을 뒤쫓아갔다. "야! 먼저 가지 마!" 소리를 지르며 호원을 쫓아 달려가던 동우가 갑자기 멈춰선 호원의 등에 쿵 부딪혔다. "악! 뭐야, 왜 갑자기 멈춰..." "쉿, 저기 봐봐." 호원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은 빵집이었다. 정확히는 노릇노릇한 빵들이 가득한 진열대 앞에 서있는 작은 꼬마 아이. "어? 쟤..." 꼬마 아이는 빵집 주인의 눈치를 보며 가까이 놓인 빵으로 손을 뻗고 있었다. 차림새가 허름한 것으로 보아 떠돌이 고아인듯 했다. 돈이 없어 빵을 훔치려는 꼬마의 모습에 동우가 어찌해야할지 호원의 눈치를 보던 중 갑자기 호원이 꼬마 아이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호원아..." 어쩌려고- 입술을 잘근잘근 씹는 동우의 부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꼬마에게로 걸어간 호원은 꼬마가 손을 뻗은 쪽의 빵을 휙 집어가 계산대 쪽으로 향했다. 다가온 호원의 모습이 깜짝 놀라 진열대 밑으로 몸을 숙인 꼬마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이거 계산해주세요." 카드를 내민 호원이 동우를 향해 뒤돌아 살짝 윙크했다. 아, 호원의 뜻을 알아들은 동우가 도망가려는 꼬마 아이의 앞을 가로막았다. "잠깐만!" "죄, 죄송해요...그러려던게 아니고..." 많아봤자 열살 정도로 보이는 아이가 우물쭈물하며 동우의 시선을 피하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동우는 어쩔줄 몰라하며 울먹거리는 꼬마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마침 빵을 사서 이쪽으로 다가온 호원이 피식 웃으며 꼬마에게 빵을 건넸다. "자, 먹어." "...에?" "이거 먹고 싶었던거 아니야?" "그렇긴 한데..." "그럼 이거 받아." "근데 이거...아저씨 돈으로 산거잖아요..." "엄청 배고파보이거든? 그리고 나 아저씨 아니야. 형이라고 해." 툴툴거리는 호원의 말에 옆에 서있던 동우가 푸스스 웃었다. 주저하며 빵을 받아든 꼬마가 빵을 한입 베어무는 사이 꼬마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동우가 말을 걸었다. "왜이렇게 머뭇거렸어. 가져갈거면 확 가져가지!" "......" "보는데 형이 다 답답하더라!" "그래도...훔치면 주인 아줌마한테 미안해요...열심히 만든 빵일텐데..." 꼬마의 말을 듣고 호원과 동우는 서로를 마주보며 빙긋 웃었다. 꼭 너를 보는거 같아, 호원의 중얼거림에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인 동우가 꼬마에게 다시 물었다. "부모님은 어디 계셔?" "...모르겠어요. 못 본지 세달이 넘었어요..." "그럼 혼자서 내내 돌아다닌거야?" "......"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꼬마를 보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직 세상이 이렇게 어린 아이한테 큰 고통을 주는 현실이 너무나도 가슴 아팠다. 빵을 계속 베어무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던 동우가 다시 아이에게 물었다. "형들이랑 같이 갈래?" "...네?" "너처럼 부모님없이 혼자 있던 아이들이 다같이 모여서 즐겁게 사는 곳이야. 거기서 기다리다보면 부모님들이 꼭 오실거야." "정말요?" "당연하지! 오늘도 이렇게 친구들 선물 사가는데...이름이 뭐야?" "...승훈이요..." "그럼 승훈이도 갖고 싶은 선물 하나 사서 형들이랑 같이 가자." 아이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와, 저 그럼 로보트 사주세요!" "그래, 알았어. 이쪽으로 와." 승훈이의 왼손은 동우가, 오른손은 호원이 잡아주었다. 입 안에 든 빵을 오물거리며 신나게 장난감 코너로 달려가는 승훈이의 모습을 보며, 동우는 지독한 현실이 여전히 남아있는 세상이라도 그 속에 반짝이는 빛들은 점점 커지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동우와 호원이 승훈의 뒤를 따라 달려가는 길에는 작은 로봇 하나가 서있었다. 로봇의 가슴께에 적힌 '또봇'이라는 글자가 밝게 빛났다. 또봇은 장난감 코너를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작은 어린이들을 보며 즐겁게 말하고 있었다. [우리 지구는 정말 살기 좋은 곳이야, 행복과 사랑이 넘쳐난단다...] - 고아원에 돌아오자마자 선물을 받기 위해 우르르 몰려든 아이들 틈새에서 잠시 고전하던 호원과 동우가 마침내 한가한 시간을 가지게 된건 밤 11시가 넘어서였다. 거실에 놓인 푹신한 의자에 눌러앉은 동우의 표정은 피곤하지만 행복해 보였다. "이제 한시간만 있으면 2201년 새해네." "그러게, 올 한해 아무 일 없이 행복하게 지나가서 너무 다행이야." 다시는 예전같이 끔찍한 일은 없어야할텐데- 슬픈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동우의 품에는 고아원 막내 두살배기 지윤이 안겨 있었다. "아까까지도 칭얼대더니 이제 푹 자네. 안아줘야 자고. 하여튼 손은 무지하게 탄다니까." "...너 그런 말하니까 되게 엄마같은거 알아?" "말도 마. 안 그래도 요녀석이 요즘 말 배우면서 엄마라고 불러대서 난리라니까." 동우가 품에 안긴 지윤을 무섭지 않게 노려보며 툴툴댔다. 옆에서 웃음이 빵 터져버린 호원을 보며 동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나보고 엄마고 너보고 아빠래잖아. 난 여자가 아니란 말이야!" "엄마래, 엄마. 크흐흐..." "웃지마!" 빽 소리를 지른 동우가 뒤척거리는 지윤을 보고 흡하고 입을 다물었다. 깨면 또 엄청나게 시끄러울텐데. 뒤척이던 지윤이 다시 색색 숨소리를 내뱉으며 깊게 잠들자 동우는 더듬거리며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생각 하나를 꺼내놓았다. "사실...지윤이가 엄마 엄마 하는거 들을 때마다 성규형이 생각나...아주 많이..." "......" "아직 너무 생생하게 기억나. 그래서 매일 꿈을 꿔. 정말 짧은 시간이었지만 목숨을 걸고 우리와 함께 했던 네 사람이 나오는 꿈." 시선을 내리깔고 속삭이듯 얘기하는 동우의 말은 호원의 마음을 이리저리 쿡쿡 찔러대었다. "우현이 형이랑 명수 형이 티격태격대는 모습을 지켜보는 성규 형, 해맑게 웃는 성종이. 그리고 한번도 얼굴을 보지는 못했지만, 명수 형의 아픈 기억 속 그 사람까지. 모두들 내 꿈 속에서 생생하게 내게 웃어줘." "......" "그래서, 그래서 말이야. 가끔은 그 사람들이 아직도 내 곁에서 살아숨쉬는 것 같아." 1년 동안 밖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항상 마음 속에 갖고 있었던 생각이었다. 내뱉으면 그리움이, 또 슬픔이 더욱 커질 것만 같아 꾹꾹 눌러왔던 말들은 그 동안 동우를 더욱 괴롭게 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은 동우뿐 아니라 호원도 마찬가지였다. 7개월쯤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진정한 생사고락을 함께 하며 서로 의지했던 사람들이었던만큼 보고 싶고 또 만나고 싶은 마음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지금은 어디서 뭘하고 있을지, 살아는 있는건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지만 그들이 있어서 행복했고 또 힘이 되었던 날들이었다. "명수형과 성종이는 똑똑하니까 이 세상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겠지. 조만간 소식도 들을 수 있을지도 몰라." "...그렇겠지." "그리고 나에게 언제나 친절하게 대해줬던 성규형. 처음 만났을때 긴장을 풀어줬던 서글서글한 우현이형. 예쁜 사랑을 하고 싶다고 했던 그 둘이었던만큼 꿈속에선 진짜 예쁘고 행복하게 웃어. 아, 모르겠다. 그 둘, 어쩌면 살아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동우의 말에 순간 가슴이 아릿하게 저려왔다. 불 속에서 죽어간 성규와 우현. 우현이 죽은 날엔 비가, 성규가 죽은 날엔 눈이 왔었다. 그리고 지금 밖에는 눈인지 비인지 알 수 없는 것들이 길바닥을 흠뻑 적셔내고 있었다. 아마 이건 성규와 우현이 하늘에서 만났기 때문에 내리는 눈비일거다, 라고 호원은 생각했다. "물론...당연히 아니겠지만 말이야. 이 세상 어딘가 살아있을 것 같다는... 그런 생각이 자꾸 든다. 하하. 너무 보고 싶어서, 다시 한번만 얼굴 마주보고 얘기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커서 그런거겠지. 꿈에 자주 나오니까 그런가봐." "......" "...아무것도 아니야. 괜히 쓸데없는 얘기해서..." "아니야, 그런거. 미안해할 필요 없어." 동우는 여전히 많은 것들을 미안해하고 있었다. 2199년 1월의 어느 날이 떠올라 호원은 작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구름이 가득 껴 어두워진 하늘만큼이나 동우의 표정도 굳어 있었다. "나도 그런 생각 자주 해. 쓸데없는 얘기 같은거 아니야, 동우야." "......" "너무도 갑작스레 헤어진거라서, 죽을 때 모습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못해서...그래서 그들이 살아있다는 생각을 하는걸지도 몰라. 이 세상에, 그리고 우리 근처에 그 두 사람이 머물고 있는 것 같아." "......" "...그냥...하늘에서 우릴 보고 있는거겠지. 우리 마음속에서 잊혀지질 않으니 주위에 있다고 느껴지는거고. 그렇게 생각하자, 우리." 창 밖으로 보이는 하늘이 흐릿해졌다. 눈에 고인 눈물때문인지 자꾸만 성규와 우현의 잔상이 아른거렸다. 성규가 살아있었다면 고아원에서 함께 아이들을 돌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규형은 아이를 참 좋아했으니까. 억지로 아이를 낳고, 또 그 아이를 하나하나 빼앗겨가며 힘들고 고통스럽게 살아와야했을 성규의 인생은 끝내 빛을 보지 못했다. 고아원에서 예쁜 천사들과 함께 웃고 뛰어놀 행복한 순간을 맞이하지 못했다. 그래서 더욱 안쓰럽고 슬펐다. 그리고 남우현. 우현의 생각만 하면 항상 가슴이 아팠다. 2200년 1월 1일 새벽 정부의 항복을 받아내고 비로소 반란에 성공했을 때 우현은 함께하지 못했다. 그 누구보다 열심이었고, 반란군에게 언제나 큰 힘이 되주었던 우현이 단 몇시간만 더 살아있었다면 세상이 밝게 개이는 그 찬란한 모습을 볼 수 있었을텐데. 누구보다 성규를 사랑했었던 우현이었기에 성규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죽음을 선택했을 것이다. 세상과 사랑을 맞바꿨던 그는 지금 하늘에서 성규와 행복할까. 그들이 죽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불가피한 진실은 인정하지 않는다해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기에 오늘도 그들 생각에 밤을 지새워야했다. "우리...내일은 서울 올라가자. 2201년 새해 첫날이니까, 성규형하고 우현이형한테 인사라도 하고 오자." "...그래, 그러자." 품 안에 안긴 지윤이 작게 뒤척이며 엄마-하고 옹알거렸다. 눈과 비가 그치고 하늘이 개였다. 창밖에서 달이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똑딱이던 시계바늘이 자정을 지나갔다. 또다시 1년이 지났다. 앞으로 이어질 수많은 1년도 이렇게, 밝은 달을 함께 바라보며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늦어서 죄송해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
진짜 너무 늦었네요ㅠㅠㅠㅠㅠㅠㅠ고작 22킬바짜리 한편이 뭐라고 이렇게 늦었을까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많이 기다리셨죠 엉엉ㅇ엉 죄송해요ㅠㅠㅠㅠㅠ무릎꿇고 빌게요 엉엉엉ㅇㅇ엉 그대들 용서해줘요ㅠ_ㅠ 흡헙ㄱ겋ㅁㄱ벟.........................이제 메시아 홀수편이 끝났어요...42편만 올라오면 완결입니다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텍파 수정 작업을 거친 후 공유글로 찾아오겠어요 ㅇ_< 사랑해요 그대들!!! 항상 기다려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