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랍님께서 주신 표지, 감사합니다:)
Ep. 05 우리 만난적 있나요 by 백현
BGM) 우리 만난적 있나요: 유희열
태어났을 때부터 앞이 보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였나,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교통사고가 났었다고 했다.
기억은 잘 나지 않는데, 마치 교과서에서 나오는 것처럼 골목에서 공을 주우러 뛰어가다가 오토바이와 부딪혔다고 한다.
기억이 나지 않으니까 마치 남 이야기 같아서, 그렇게 정말 정석대로 정말 다칠 수 있는 거구나- 하는 마음에 헛웃음이 났다.
넘어지면서 땅에 머리가 부딪히는 바람에 부모님이 걱정하시며 병원 응급실로 달려가셨지만
당시에는 검사 상의 큰 무리 없이 찰과상과 타박상 정도만 입고 아무렇지 않게 잘 지냈다는데, 얼마 후부터 시력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그러게 TV를 좀 멀리 떨어져서 보라고 하지 않았냐- 하고 속상해하셨지만, 백현은 안경을 쓴 제 모습이 썩 좋아보였다.
나이 차이가 좀 나던 형이 안경을 쓰고 다니는 것이 멋져보여서 형이 벗어놓은 안경을 써보기도 하고,
어머니에게 내 안경도 사달라고 조르기도 하며 은근히 부러워 했으니 철없는 마음에 이제 제 안경이 생겼다는 것이 신나기도 했다.
어머니가 더 이상 눈이 나빠지지 않게 조심하라고 온갖 잔소리를 하시며 눈에 좋다는 음식이니 약을 사다먹이셨지만 백현의 눈은 나날이 급속도로 나빠졌다.
시력검사를 하고 안경을 바꾸고 와도 금세 또 칠판 글씨나 TV가 잘 보이지 않아 다시 안경을 맞춰야 하는 일이 늘어났다.
백현이 그렇게나 부러워하던 안경이 몇 개나 생겨났다.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던 어느 날, 앞으로는 더 공부해야 할 것도 많아질텐데 벌써부터 시력이 자꾸 나빠지는 것이 이상하다며
어머니가 귀찮아하는 백현을 큰 병원으로 데려가셨고, 그 곳에서 처음 알았다.
자신의 눈이 그저 그 나이 또래 아이들이 흔히 그러하듯 점차 나빠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자신은, 시력을 잃어가고 있었다는 것을.
어릴 때 다치면서 미미하게 시신경에 손상이 생겼는데 그게 당시에는 너무 작은 정도라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어린 백현이야 제 몸에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인지, 뭐가 달라진 것인지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렇게 다친 시신경이 조금씩 조금씩- 죽어가고 있다고 했다.
'지금의 기술로는 어떤 약이나 치료법이 없습니다.
더 이상 손상이 진행되지 않게 안정시키시고 일단 조금 더 지켜보는 것이...'
멍한 표정으로 백현의 손을 잡고 병원을 나선 어머니는 집에 도착할 때까지 말이 없으셨다.
백현은 의사에게 들은 말이 얼마나 큰 문제인지,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 감이 잘 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저 조용히 어머니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어머니는 다른 말씀 없이, 얼른 씻고 저녁 먹자- 라며 평소처럼 담담히 부엌으로 들어가셨다.
부엌에서는 보글보글 된장찌개가 끓는 소리가 났고, 늘 그렇듯 씻고 나온 백현이 식탁에 수저와 젓가락을 놓았다.
출장가신 아버지와 독서실에서 늦게까지 공부하고 들어오는 형이 없는 저녁식사.
그런 날이면 항상 어머니가 아버지 대신 식사 전 기도를 하셨기 때문에 백현은 조용히 앉아 어머니가 기도를 하시길 손을 꼼지락대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 들었다.
어머니의 숨죽인 흐느낌 소리를.
어머니는, 아무 말도 없이 조용히 울고 계셨다.
입술을 꼭 깨문 채, 아들에게 울음 소리를 들려주고 싶지 않으신 듯 숨죽여 울고 계셨다.
식탁 위에는 짝이 서로 다른 젓가락 두 쌍이 오도카니 놓여있었다.
보글거리던 찌개조차 숨을 죽이고 잦아들 때까지, 그렇게 어머니는 우셨다.
백현은 생각보다 담담했다.
갑자기 눈이 보이지 않았다면 좀 더 사태의 심각성을 더 느낄 수 있었을까.
점차적으로 조금씩 조금씩 갉아들어가듯 사라지는 시력은 아직 어리던 사춘기의 백현에게 큰 문제가 되지 않는 듯 보였다.
오히려 백현에게는 시력이 나빠지면서 친구들과 쉬는 시간에 같이 놀 때 좀 불편했고, 체육시간에 전처럼 축구나 야구에 마음껏 낄 수 없다는 것이 조금 짜증났으며
칠판이 잘 안 보여 자신이 좋아하던 창문 옆 뒷자리에서 맨 앞으로 옮겨야한다는 점이 살짝 싫었다.
하지만 여전히 백현은 점심 시간이면 친구들과 어제 본 TV 얘기를 하고, 다른 녀석이 짝사랑한다는 옆 반 여자아이에 대한 평으로 정신없이 웃고 즐기는-
그냥 여전히 평범한 학생이었다.
그렇게 큰 변화없이 생활하는 동안에도 백현의 시력은 급격히 나빠져갔고, 점차 시야도 좁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백현은 늘 다니던 길을 따라 아무렇지 않게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늘 지나던 대로 별 생각없이 신호등이 없는 건널목을 건너려는 순간,
끼이이이익-
빵빵빵-!!!
제 바로 옆 귓가에서 엄청난 소리와 함께 귀가 터질듯한 경적이 울려왔다.
"야, 이 미친 새끼야!! 너 죽고 싶어?!!!"
차를 급정거시킨 차주인이 창문을 열고 마구 고함을 질렀지만 백현은 그 자리에 못 박은 듯 멈춰서서 한 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온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려왔다.
갑자기 들려온 큰 소리와 욕설, 다칠 수도 있는 순간을 넘긴 사람에게 몰려오는 안도감 같은 것 때문만이 아니었다.
분명 자신은 주변을 확인하고 건넜던 것 같은데.
분명 건널목에 발을 들여놓을 때, 제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는데...
그 순간 하얗게 비워진 백현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만이 떠올랐다.
아.
내가 정말 눈이 안 보이는구나.
나, 더 이상 예전처럼은 살 수 없는 거구나.
그 후로는 방황의 시간이었다.
백현은 학교에 나가길 거부하고 방 안에서 나오지 않았다.
침대 밖으로 나오는 것이 점점 무서웠다.
아니, 그보다도 더 무서운 것은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이었다.
그리고 더 무서운 것은 매 순간 매 순간 한 번씩 눈을 깜빡이고 뜨는 그 순간들-
지금 한 번 눈을 깜빡이고 나면-
다시 눈을 떴을 때 세상이 온통 불이 꺼진 방처럼 암흑에 휩싸일지 모른다.
그제서야 실감이 났다.
난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거지.
내가 좀 더 나이가 많았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이렇게 지옥같이 살아야 하는 시간이 조금은 짧아졌을텐데.
왜 이렇게 어린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난거지. 내가 뭘 잘못했나?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거지.
난 파일럿도 되고 싶었고, 의사도 되고 싶었고, 경찰도 되고 싶었는데
누가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운전하는 비행기를 타고,
누가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한테 수술을 받고,
어떤 범인이 눈도 보이지 않는 사람한테 잡힐까.
생각하고 고민할수록 답도, 해결책도 보이지 않는 긴 어둠 속을 걷는다는 것은 차라리 정말 아예 눈이 보이지 않게 되는 그 순간을 맞이하는 것보다 더 두려웠다.
언제 어떻게 무엇이 변할지조차 알 수 없는 그 막막하고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백현은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죽음을 떠올렸다.
평소에는 장난삼아 말하고 심심하면 바뀌던 꿈들이 그 순간 너무나 간절해졌다.
그리고 그런 꿈들이 점점 드리워오는 어둠에 가려졌을 때, 죽음과 같은 절망과 우울만이 남았다.
무뚝뚝하지만 정 많으신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를 꼭 닮은 형은 종종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있는 백현의 머리맡에 앉아 이불 밑에 숨은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고 가시곤 했다.
그리고 어머니는, 방 안에 틀어박힌 채 나오지 않으려고 하는 백현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어머니만 보자면 마치 아무 문제도 없는 평화로운 집안 같았다.
종종 거실에서 아버지와 어머니, 형이 모여 제 얘기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백현이를 저대로 둘 수는 없다, 더 병원을 찾아보는 것이 어떻겠냐- 이제는 대책을 세워야한다, 평생 저렇게 아이를 집 안에만 두고 살 수는 없다-
앞으로 백현이 학교는 어떻게 할 것인가...
모두 자신을 걱정하며 저를 이 암흑 속에서 벗어나게 해주려 한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백현은 그런 배려마저 속이 상했다.
누군가에게 동정받는다는 것은 마치 자기 자신을 부정당하는 것과 같이 느껴졌다.
그것이 심지어 가족이라고 할지라도,
세상 한가운데에 홀로 버려진 듯한 백현의 마음은 모든 것에 닫혀있는 듯 했다.
그리고- 어머니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백현이 마음이 좀 더 정리되면, 그 때 백현이랑 같이 얘기해봐요.'
그런 어머니의 모습이 사실 백현을 더 힘들게 했다.
제 마음이 정리되는 때? 그런 때는 오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어머니가 제 앞에서 울부짖고 힘들어하셨다면 같이 억울해하고 누군가를 탓하며 울 수라도 있을텐데.
억울하고 두렵고 무섭고- 그리고 또 정체모를 미안함을 쏟아내버리기라도 할텐데.
실은 어머니가 백현의 앞에서 좌절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아들을 위해 강해지고자 안간힘을 쓰고 계신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어머니는 늘 그런 분이셨으니까.
하지만 마음 가득 대상을 알 수 없는 미움이 가득 차 견딜 수가 없을 때,
그 마음은 세상 마지막 순간까지 오롯이 제 편이 되어줄 사람. 자신이 어떤 잘못을 하든 제 손을 잡아줄 사람.
어머니에게 향했다.
늘 그래왔듯 다정하게 '백현아, 오늘 저녁은 뭐 먹고 싶어? 불고기 먹을까?' 하며 방문 밖에서 물어오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소름이 끼치도록 싫었고,그런 제 자신이 죽이고 싶을만큼 미웠다.
죄 없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원망스러웠던 나날들.
발을 내딛는 곳마다, 들이쉬는 공기 한모금 한모금마다 온통 슬픔과 분노, 절망만이 가득했던 순간들.
그리고 어느 날.
잠에서 깨 눈을 떴을 때,거짓말처럼- 마치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던 것처럼,
눈 앞에는 온통 새까만 암흑만이 가득했다.
귓가에 들리는 아침 나절 짹짹대는 새소리만이 백현에게 새로운 하루가 시작됐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
.
.
끼익- 철컹
고요한 정적이 돌던 골목길에 대문이 열고 닫히는 작은 소음이 울렸다.
아직 어둠이 다 걷히지 않은 파르스름한 새벽 골목길, 그 가운데에서 백현이 바싹 얼어붙은 채 서있었다.
달려나온 것도 아닌데 그 정적만으로도 숨이 찼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온 몸을 싸고 도는 싸늘한 새벽의 공기, 그리고 정적.
그 차갑고 냉혹한 새벽녘의 냉기가 마치 자신을 둘러싼 세상과 같았다.
정말 오랜만에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백현은 제 방을 나왔다.오랜 시간 살아오던 집이니 눈이 보이지 않아도 집 구조는 대강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막상 한밤중에 목이 말라 불도 켜지 않은 채 어둠을 더듬고 부엌으로 가던, 그 때와는 모든 것이 달랐다.
아무리 벽을 더듬고 스위치를 켠다한들, 이제 이 어둠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백현은 아주 조금씩, 아주 조금씩 천천히-
혹시나 무언가에 부딪히는 소음에 가족들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주변을 더듬고 발을 질질 끌며 간신히 집을 벗어났다.
학교에 가는 날 아침, 늦잠을 자는 바람에 어머니가 구워주신 토스트 한 조각을 입에 물고 후다닥 달려나왔던,
그만큼의 거리를 마치 걸음마를 처음 하는 아기처럼 천천히, 아주 천천히 온 사방을 더듬어가며 간신히 지나왔다.
현관문 앞에 다다랐을 때는 이미 온 몸이 지쳐있었다.
바닥을 더듬어 대충 아무 것이나 잡히는대로 신었다.
아마 형이 집 앞 가게나 근처에 잠시 나갈 때 신는 슬리퍼 같았다.
철컥-
차가운 아침 공기가 묻어나는 현관문을 조용히 열고 밖으로 벗어나자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익숙한 집 앞 현관이었지만 한 발짝 한 발짝 딛는 발걸음은 조심스러웠고, 또 떨렸다.
그렇게 상상하고 또 상상하며 괴로워했던, 정말 앞이 보이지 않는 그 날이 막상 현실로 다가오자 생각보다 자신이 굉장히 차분하다고 백현은 생각했다.
눈을 떴을 때, 조금씩 보이던 아스라한 빛조차 보이지 않았을 때-
무언가 쿵- 하고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혹여나 내가 아직 눈을 감고 있는 것은 아닐까, 조심스레 손을 들어 자신의 눈을 더듬어 보았을 때-
깜빡이는 제 두 눈이 손 끝에 만져지는 그 순간-
그렇게 가슴 속으로 떨어진 무언가는 미동도 없이 그 자리에서 가만히 백현에게 말을 걸었다.
...이제 포기하자.
겁이 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생각보다 백현은 담담했다.
그리고 조용히 집을 나서는 길이었다.
백현은, 그렇게 삶을 포기하자 마음을 먹고 있었다.
오랜 시간을 들여 집을 나섰지만, 막상 나오고 나니 모든 것이 막막했다.
죽음을 결심한 사람 주제에 우습게도 자신은 겁을 잔뜩 집어먹고 뭐든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있었다.
발 끝에 무언가 하나 채이기만 해도 소스라치게 놀라 온 몸이 바싹 얼어붙었다.
앞이 보이지 않으니 자연스레 온 몸의 다른 감각들이 놀랄만큼 날카로워졌다.
바람만 스쳐도 잔뜩 긴장한 어깨가 흠칫하니 오그라들었다.
어떻게든 집을 벗어나고 나니 이제 그 다음도 문제였다.
...어떻게 해야 죽을 수 있지.
책이나 드라마, 뉴스에서나 보아왔던 갖가지 죽음을 선택하는 방법을 서투르게 떠올려보았지만,
지금 이렇게 골목 한 가운데에서 앞으로도 뒤로도 가지 못하고 서있는 자신이 선택할 수 있을만한 방법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미 집 문을 벗어나서 서 있는 동안 방향감각조차 서서히 잃고 있었다.
이제는 당장 집으로 들어갈 현관문도 더듬어서 한참을 찾아야 할 판.
...눈이 안 보이면 죽는 것도 맘대로 할 수 없는걸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제 스스로의 모습이 어딘가 우스워서-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났다.
아직도 나에게 웃음이라는 것이 남아있었구나- 싶어 조금은 놀랍기도 했다.
결국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서 있던 백현은 조용히 그 자리에 쪼그리고 앉았다.
아무 것도, 정말 아무 것도-
심지어 제 죽음을 스스로 선택하는 것조차 할 수 없다는 무력감과 허무함이 몰려들었다.
난, 무엇을 위해서 태어난걸까.
아무 의미도 없이 세상에 태어나는 사람도 있긴 한걸까.
이제 자신은 가족들에게는 짐 같은 존재가 될 것이다.
친구들에게도... 아니, 친구들이 있긴 할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더 이상 살아야 할 가치를 찾을 수 없다는 절망감이 몰려와 백현은 주저앉은 채로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아도, 떠도 달라지지 않는 시야가 백현의 목을 조르듯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그 때였다.
"저기... 야. 괜찮냐?"
비어있는 조용한 골목 저 편 어디부턴가 타닥타닥,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려온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알아서 비켜가겠지. 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사실은 지나갈 수 없다고 자신에게 시비를 걸어온다고 한들 무어라 대답할 기운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그저 그냥 이 세상에 자신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게- 그렇게 사라져버리고 싶은 마음 뿐.
그러나 발소리의 주인공은 백현이 바랬던 것처럼 그렇게 백현을 지나치지 않았다.
"..."
"어이- 이봐- 저기요~? 내 말 안들려? 어디 아파?"
"..."
"어디 진짜 아픈가보네, 얼굴도 허여멀건게... 너, 집이 어디야? 병원 데려다줄까?"
막 변성기가 지난 듯한, 아직은 어린 제 나이 또래 남자아이의 목소리.
몇 번 물어보고 대답이 없으면 그저 내버려두고 제 갈 길 가면 될 것을, 계속해서 제 앞을 알짱거리고 있다.
그래도 가겠지- 눈치보고 알아서 가겠지- 하고 대꾸조차 하지 않던 백현이, 그가 자신의 한쪽 팔을 잡아 끌었을 때 드디어 폭발했다.
"...꺼져"
"오오.. 말했다, 말했다. 아픈 건 아닌거지? 바닥에 이러고 있는 애를 어떻게 냅두고 꺼지냐?"
모르는 사람에게 이런 식으로 말해본 것이 처음이었지만, 지금은 제 스스로가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상태라 누군가를 배려할 정도의 여유가 없다.
하지만 상대도 만만치 않았다.
조금도 상처받지 않은 유들유들한 목소리로 대꾸하더니 심지어 '끙차-'하는 소리를 내며 백현의 곁에 자리잡고 앉는 듯 했다.
"이 형아가 평소 같으면 바쁘신 분인데- 오늘로 이 동네도 마지막이니까, 기념으로 같이 좀 있어주마.
왜- 엄마한테 혼났냐? 아니면, 침대에 쉬라도 한거야?"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며 낄낄대고 웃는 그 목소리에 백현은 슬슬 어이가 없어졌다.
누군가는 세상 모든 일이 이렇게 그저 우습고 재미있는데,
왜. 왜? 왜 나한테만 이렇게 냉혹한걸까.
모든 것을 포기하자고 마음 먹은 순간 공허하게 비워버렸던 마음 속으로, 꾹꾹 억누르고 내버리기 위해 노력했던 분노와 원망이 다시금 차올랐다.
왜. 왜- 왜 나한테... 왜..?
"뭐야, 진짜야?
너네 엄마도 키 씌우고 소금 받아오라고 그러시냐? 우리 엄마도 나 어릴 때 그랬는데-
근데 그건 쫌 많이 옛날 일이긴 한데...
큭큭큭, 짜식-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지, 뭘 그런 걸로 이 꼭두새벽에 이러고 있냐?"
"꺼지라고!!"
이 녀석이 누구든 알 바 아니였다.
그저 제 옆에서 실실대며 시덥잖은 소리를 하는 것이 화가 나고 분했다.
왜. 왜. 왜 나는 이렇게 비참해야 해. 왜. 왜 내가?
"야, 임마! 동네 사람들 다 깨겠네! 조용히 좀 해라- 쯧"
녀석은 끈질겼다.
이쯤 되면 눈치를 봐서, 뻘쭘해서라도 슬그머니 자리를 피할 법 한데
그러거나 말거나 시덥잖은 땡깡 넘기듯 하는 반응에 백현은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왜. 왜 나한테- 왜-
"얌마- 뭐가 문제인지 나야 모르겠지만, 아침저녁으론 영 쌀쌀한데 이러고 있지 말고 들어가지?"
"아무 것도 모르면.. 그냥 꺼져, 제발.."
제발 사라져버려.
나 좀 혼자 내버려둬.
더 이상은- 더 이상은 견딜 수가 없어.
세상이, 내 자신이 너무 비참하고 미워서 내가 먹혀버릴 것만 같아.
"나도 쫌 그러고 싶긴 한데- 이 형아가 쫌 착한 사람이라 그렇게는 못하겠다.
우리 엄마가 착하게 살아야 복이 온댔어-
누가 아냐, 나중에 니가 은혜 갚은 제비처럼 나한테 호박씨인지 수박씨인지 물어다줄지."
제 반응 따윈 아랑곳없이 오히려 어깨에 팔까지 척 두르며 머리를 마구 헝크러뜨리는,
그 무심한 손길에 백현이 순간 폭발했다.
"꺼지라고!!! 남의 일에 참견하지 말고 제발 꺼-!!!"
"히에에에엑!!! 야아아아!!! 지금이 몇 신줄이나 알아?!! 아예 동네 사람들 다 깨워라! "
순간 제 입을 틀어막아오는 손은- 생각보다 부드러웠다.
소리를 죽이며 백현의 귀에 대고 속삭이는 바람에 백현의 귓가에 따스한 숨결이 닿았다.
백현은 답답하게 제 입과 코까지 다 틀어막은 그 손을 애써 떨쳐냈다.
이렇게 소리를 질러본 것이 얼마만일까.
가슴을 가득 메우고도 모자라 목구멍까지 올라와있던 무언가가 내뱉어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와 동시에, 눈가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가슴이 불에 데인 듯 뜨거워지며 울렁이더니 무언가 울컥울컥 목구멍을 지나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흐어어엉-"
처음이었다.
점차 제 시력이 나빠져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이후, 처음으로 백현은 목놓아 울었다.
제 옆에서 안절부절 못하며 "야- 야! 쉿!! "하고 속삭이던 녀석은 이내 한숨을 폭 쉬며 백현의 어깨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제 딴에는 위로하려는 몸짓이었는지, 아니면 골목에 울리는 백현의 울음소리를 막아볼 참이였는지-
백현은 그렇게 처음 보는 녀석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채 한참을 펑펑 울었다.
처음 내뱉은 백현의 비명 같은 울음소리가 녀석의 가슴 속으로 묻혀들어갔다.
.
.
.
"다 울었냐?"
코를 훌쩍이느라 들썩이는 백현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떼어낸 녀석이 조용히 물어왔다.
제 서럽고 억울하고 분하고, 또 두려운 마음을 모두 털어내려면 몇날 며칠을 울어도 모자랄 것 같았는데-
울음은 어느 순간 또 그렇게 잦아들었다.
남은 여운에 아직도 훌쩍이고 있는 백현의 양 뺨을 부드러운 손이 조심스럽게 훑었다.
"..."
막상 울고나니 속이 좀 후련했다.
하지만 이 뻘쭘해진 분위기는 어찌 할 수가 없었다.
눈치빠른 녀석이라면 이런 제 자신을 좀 알아주고 그냥 조용히 가버리면 좋을텐데,
그럴 녀석이었다면 아까 백현이 소리를 버럭 질렀을 때 이미 떠났겠지.
"사내자식이- 쯧. 속이 좀 시원하냐?"
"..."
가만히 코를 훌쩍이는 백현의 앞에서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물어오는 녀석의 말 끝에는 보이지 않지만 미소가 묻어나는 듯 했다.
"키는 콩알만한 게... 뭐가 그렇게 힘들다고 이 꼭두새벽에 그렇게 울고 난리야-
너 땜에 동네사람들 깰까봐 내가 얼마나 식겁했는지 아냐?"
"..."
"으에에- 덕분에 내 옷 다 젖었다.
봐봐- 완전 눈물콧물 범벅이구만."
"......여."
"뭐?"
"...안 보인다구."
"...뭐가?"
녀석의 아방한 물음에 더 이상 화를 낼 기운조차 남아있지 않다.
그 동안 밥도 잘 챙겨먹지 않고 거의 움직이지도 않고 지낸데다가 몸에 남은 수분 한방울까지 모조리 짜내듯 울어댔으니,
온 몸에 힘이 빠져 손 끝 하나 까딱하기 싫었다.
"...아무것도 안 보인다고. 나, 아무 것도 안 보인다고."
"...엥?"
"...눈 병신이라고, 이 새끼야."
"...진짜?"
....이게 장난하나.
남은 심각해 죽겠는데 거기다 대고 진짜냐는 소리가 나오냐.
"..."
"헐..."
무심하다못해 어이가 없는 녀석의 반응에 욱해서 또 한 소리 하려던 백현이 순간 멈칫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진짜 헐스러운 상황인데, 그럼 이 녀석한테 뭐라고 얘기를 해야 하나.
이 녀석이 자신을 보고 뭐 진심으로 애도를 표한다고라도 해주길 바라는건가?
아니면, 자신을 가엾어서 미치겠다는 듯 대해주기라도 바라는건가?
나 대신 울어주기라도 바라는건가?
동정해주기라도?
그렇게 누군가에게 동정받고 싶어하지 않았던 것은 정작 나 자신이었는데-
"..."
"..."
잠시 둘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그래서, 여긴 왜 나와서 이러고 있는건데?"
그 물음에 백현은 잠시 멈칫했다.
그러게.
나 왜 여기서 이러고 있었더라.
...아, 맞다. 나 그래서 나왔었지.나 때문에 누가 울거나, 날 누군가 불쌍해하거나 가엾어하거나, 그런 눈초리로 바라보는 게 싫어서-
누군가 나 때문에 짐스러워하는 게 싫어서-
"...죽으려고."
"..................헐?"
막상 입 밖으로 내뱉고보니 앞에서 골때리는 소리나 내뱉고 있는 녀석보다 제 자신이 더 어이없어졌다.
뭐냐, 나-...
더 이상 백현과 녀석 사이에는 아무 대화도 오고 가지 않았다.
다시 골목은 정적에 휩싸였다.
새벽공기를 가르고 들리는 것이라고는 골목 골목 드러난 나무 사이를 날아다니며 바쁘게 아침을 여는 새 소리 뿐이었다.
자신이 그렇게 펑펑 울어대는데도 아무도 깨지 않은 듯, 아직 사람들의 아침은 시작되지 않은 것 같았다.
"...일어나봐."
"...?"
한참을 그렇게 멍하니 앉아있던 중, 녀석이 먼저 침묵을 깨고 말을 꺼냈다.
이 놈이 또 무슨 소리를 하는가- 싶은 백현이 대답할 생각도, 되물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가만히 앉아만 있는데 무언가 따스한 것이 백현의 어깨 위를 덮어왔다.
코 끝으로 새로 한 빨래에서 나는 보송보송한 면 특유의 향이 잔잔히 피어올랐다.
"자아- 아직 아침저녁으로 쌀쌀하니까, 이거라도 일단 걸치고.
어제 빨아서 오늘 아침에 막 입은 거니까 깨끗한거다!"
멍하니 앉아있는 백현의 팔을 들어 이리 저리 끼워넣고 지퍼까지 쓱 끌어올린 녀석이 백현을 잡아끌었다.
멋모르고 따라 일어난 백현의 엉덩이를 탈탈 털어준 녀석이 백현의 양 볼을 다시 한 번 쓱쓱 문질러 닦아주었다.
그저 잡아끄는대로, 백현은 어리둥절한 채 가만히 녀석이 하는대로 서있을 뿐이었다.
"오케이. 이제 가자."
".......어딜?"
몇 년이 넘게 살던 집을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이미 녹초가 되었던 백현이다.
이 상황에 어딜 더 가자는거야.
백현의 얼굴에 어이없는 의문이 떠올랐다.
"산책하러."
"뭐?"
"너, 눈 병신이라며.
눈만 안 보이는거지?
못 걷는 거 아니잖아."
"..."
이번에야말로 백현 자신이 '헐...'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자기 입으로 말해놓고도 흠칫했던 말을 아무렇지 않게 꺼내며 제 팔을 잡는 녀석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담담해서-
마치 매일 만나오던 죽마고우 친구에게 '야, 피씨방 가서 게임 한 판 하자'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자, 내 팔 잡고- 뭐 있으면 내가 말해줄테니까.
그냥 똑같이 평소처럼 걸으면 돼."
너무나 당연하게 제 팔을 잡아끄는 녀석의 손길에 멋모르고 한발짝을 뗀 백현의 몸이 또다시 얼어붙었다.
늘상 아무렇지 않게 걸어다니던 골목길.
하지만 그 한발짝 앞에 무엇이 있을지, 깊이가 어떤지, 아무 것도 알 수 없이 한 발 한 발 내딛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큰 공포감을 주었다.
바싹 얼어붙은 백현의 두 다리를 눈치챈 듯 녀석이 가만히 손을 잡아끌었다.
"자. 나 꼭 잡아.
내가 바닥에 뒹구는 한이 있어도 너 하나는 지켜줄테니까-"
백현에게 제 옷을 입혀준 채 반팔 티셔츠 하나만 남은 듯, 드러난 팔에서 느껴지는 체온은 너무나도 따뜻해서-
두려움에 굳어있던 백현은 저도 모르게 녀석의 팔을 가득 끌어안아 제 품으로 당겼다.
와들와들 떨리는 백현의 몸을 느낀 녀석이 피식 웃는 것이 느껴졌다.
"이렇게까진 안 잡아도 돼-
그럼 더 걷기가 힘들잖아, 이 바보야."
부드럽고 조심스러운 손길로 녀석은 제 팔을 옭아맨 백현을 떼어내었다.
그리고 백현의 떨리는 손을 꼭 잡았다.
차분하고 담담한 목소리와는 달리 자신의 손을 힘껏 잡아오는 손에서 온기가 전해져
두려움과 공포에 떨리던 백현의 몸도 서서히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
"자, 천천히 걸어봐.
넘어질 것 같으면 내가 잡아줄 거니까 겁내지 말고."
'날 믿어.'
녀석은, 온 몸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따스한 체온과 꼭 잡은 손, 그리고 침착한 목소리가 백현에게 괜찮다고, 조용히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
그렇게 한 발 한 발-
처음 보는, 무심하지만 따뜻한 녀석의 손을 잡고 백현은 정적이 내려앉은 서늘한 새벽길을 걸었다.
여전히 아침을 맞이하는 새 소리가 귓가에 울렸고-
백현은 처음으로 '아침의 냄새'가 무엇인지를 느꼈다.
.
.
.
"백현아!!!"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비록 제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는 몰랐지만,몇 번을 비틀거리고 넘어질 뻔한 것을 녀석이 붙잡아주고 이끌어주며 꽤 오랜 시간을 걸었던 것 같았다.
이른 아침의 공기 중에 조금씩 따스한 햇볕의 기운이 느껴질 때쯤,
누군가 자신을 부르며 달려오는 소리에 백현이 문뜩 걸음을 멈췄다.
"엄마..."
"백현아!!! 너, 어디 가있었어!! 엄마아빠가 얼마나 찾았는지 알아?!"
어머니였다.
자신을 와락 끌어당기는 품에 안기자 백현의 손을 맞잡고 있던 따스한 손이 사라졌다.
손바닥에 느껴지는 촉촉한 땀이 아침 공기와 맞부딪혀 서늘하게 식어갔다.
조금은 아쉬운 기분이었을까.
저도 몰래 주먹을 꼭 쥐던 백현이 문뜩 제 어깨가 촉촉히 젖어가는 것을 느끼고 번뜩 정신을 차렸다.
"엄마..."
"백현아.. 백현아.."
"찾았으니까 됐어- 됐다, 그럼 됐어. 들어가자."
옆에서 느껴지는 아버지의 덤덤한, 그러나 숨이 찬 듯 헐떡이는 목소리와 형의 긴 한숨소리에 갑자기 온 몸의 긴장이 풀리는 것 같았다.
꽤나 바싹 긴장을 하고 걸은 듯- 그저 걷기만 했을 뿐인데 그제서야 온 몸이 다 쑤시고 아파왔다.
"엄마."
"응...?"
정체모를 녀석의 손을 잡고 한 발짝 한 발짝 걸으면서 백현은 생각했다.
자신은 이제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아무 것도 제 손으로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 아직 살아있구나.
눈이 보이지 않을 뿐,
나 아직 살아있구나.
걸을 수도 있고- 익숙해지면 언젠가는 뛸 수도 있지 않을까.
새 소리도 들을 수 있고, 누군가의 손을 잡을 수도 있고, 아침 해가 떠오르는 모습을 볼 수 없을 뿐, 피부로 해가 떠오르는 것을 느낄 수도 있고,
이른 아침의 공기에서는 어떤 냄새가 나는지도 맡을 수 있구나.
나, 아직 살아있었구나.
그리고 그렇게 공허하던 마음이 아침의 공기를 들이마시며 서서히 차오르자 그제서야 제 주변이 생각났다.
말 주변 없는 자신 때문에 혹여나 아들이 상처입을까, 그저 몇 번이고 이불 위를 쓰다듬던 조심스러운 아버지의 손.말이 없어 제 목소리 몇 번 내본 적이 없던 형이, 백현이를 저렇게 둘 수 없다며 몇 번이고 거실에서 큰 소리를 냈었다.
무뚝뚝한 사내녀석이라 간지러운 소리는 못했지만 엄마 아버지가 안 데려 가신다고 하면 내가 업고라도 병원에 가야겠다던 형의 목소리 끝에
울음이 묻어있었던 것을 안다.
그리고...
"엄마... 나... 이제 아무 것도 안 보여."
".........뭐?"
밖으로 나오지도 않고, 밥도 먹지 않고, 살아는 있는지 알 수도 없을만큼 절망에 빠져 방 안에 숨어버린 아들.
조용히 제 책상 위에 늘 하루 세 끼 꼬박꼬박- 따뜻하게 새로 지은 밥과 백현이 좋아하는 반찬들을 새로 만들어 올려두고 나가셨던 어머니.
점차 앞이 보이지 않고 모든 것이 뿌옇게 되면서 백현은 더 이상 그 위에 올라온 것이 무슨 반찬인지조차 눈으로 알 수 없게 되었다.
몇 번은 잘 보이지 않아 엎어버리기도 했고, 또 그 사실에 좌절해 몇 번은 식사가 올려진 쟁반을 집어던지기도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더럽혀진 백현의 방을 닦아주고 깨진 접시들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치우셨다.
혹여나 남은 유리조각에 백현이 다치기라도 할까-
그것이, 백현을 포기하고 내버려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백현도 알고 있었다.
단지 어머니는 이미 백현보다 한발짝 앞서 나가 백현의 손을 이끌어주실 준비를 하고 계셨다.좌절할 아들을 일으켜주고 옆에서 부축해주려면 어머니가 먼저 기운을 잃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다.
백현이 자라나면서 어느새 키가 백현과 점점 비슷해지신 제 어머니.
그렇게 아담한 체구의 어머니는 말없이 아들의 손을 잡고 앞으로 나아갈 준비를 하고 계셨다.
"나, 아무 것도 안 보여."
"..."
"...미안해, 엄마."
"아...아니야, 백현아. 아니야- 아니야-"
"미안해... 이러기 전에 엄마 얼굴 더 많이 봐둘 걸..."
바보같이 방에 틀어박혀 있지 말고, 더 많이 봐둘 걸.
늘 다정한 엄마 얼굴, 무뚝뚝해보여도 인자한 아버지 얼굴, 말이 없어도 나이 차이 많이 나는 동생이 귀여워 어쩔 줄을 모르던 형 얼굴-
후회는 왜 늘 뒤늦게 하게 되는 것일까.
진작에 알았으면 좋았을텐데.
백현의 팔을 잡고 서 있던 어머니의 손이 점점 떨리기 시작했다.
제 앞에서 들리는 어머니의 신음소리 같은 울음에 깜빡깜빡- 그러나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백현의 눈에서도 어느새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억눌린 아버지와 형의 흐느낌이 나지막하게 공기를 타고 전해졌다.
그렇게, 처음으로 가족이 빈 골목길에 서서 함께 울었다.
늘 그러했던 것처럼, 아침 햇살이 따스하게 떠오르던 그런 아침이었다.
.
.
.
그 날부터 백현은 점자를 배우기 시작했다.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형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기에 생각보다 백현은 잘 적응해나가고 있었다.
다니던 대학까지 한 학기 휴학한 형은 백현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도와주었고,
어머니와 아버지 역시 집안의 가구들을 모두 백현이 다치지 않도록 고치고 또 위치를 옮기며 몇 번을 고심하고 또 고민하셨다.
어느새 백현은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집안의 막내다운 애교도 부리고 장난도 치며 제 모습을 찾아갔다.
그리고, 다시 학교도 다니기 시작했다.
그냥 집에서 좀 더 밖으로 나갈 준비를 하고 나중에 검정고시를 보는 것이 어떻겠냐 하는 아버지와 형과는 달리,
의외로 어머니가 강하게 학교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셨다.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학교에서는 백현을 따스하게 받아들였다.
어느새 팔불출이 다 되어 어머니에게 브라더 콤플렉스 환자라며 놀림받던 형은 누군가 혹시 백현을 괴롭힐까, 아침 저녁으로 학교를 쫓아다니며 챙기고 들었지만,
친구들은 돌아온 백현을 처음에만 조금 대하기 어려워했을 뿐- 이내 평소처럼 받아들였다.
처음엔 어떻게 백현을 대해야할지 몰라 조금 겁을 내긴 했지만, 오히려 먼저 '어떻게 도와주면 되겠냐?'고 물어오며 백현의 곁으로 다가왔다.
고마운 녀석들이었다.
그리고-
그 녀석은 다시 만날 수 없었다.
가족 모두가 부둥켜안고 펑펑 울던 그 날 아침, 뒤늦게 정신을 차린 백현이 녀석을 찾았지만 그 사이 녀석은 사라지고 없었다.
백현에게 입혀주었던 트레이닝복 상의만 덩그라니 남았다.
백현에게 얘기를 들은 어머니가 정말 고마운 아이라며 수소문을 해서 녀석에 대해 알아냈을 때, 녀석은 이사를 갔다고 했다.
백현과 만난 그 날이 바로 녀석의 집이 이사를 가는 날이었다고.
그 사실을 알려준 아주머니가 녀석의 가족이 어디로 갔는지, 그 집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도 기억해내지 못하셔서
결국 녀석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다.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내가, 그 녀석이라는 걸 알아챌 수 있을까.
만일 그럴 수 있다면.
그 때 돌려줘야지.
백현은 그렇게 다짐하며 녀석의 트레이닝복을 제 방 옷장 한 구석에 잘 보관해두었다.
그리고 그렇게 온 가족이 함께 보낸 노력의 시간이 지나- 수능을 무사히 치르고 백현은 원하던 대학에 입학했다.
형이 다녔던 대학이었다.
백현이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은 온 가족이 기쁨에 날뛰었다.그렇게 무뚝뚝했으면서 어느새 눈물만 많아지신 아버지를 어머니가 울보가 다 됐다며 놀려대셨다.
입학식을 치르고, 온 가족이 함께 앞으로 백현이 학교를 다니는 동안 생길 문제는 없을지 꼼꼼히 알아보며 온 학교를 샅샅이 돌아다녔다.
그리고 어느 봄날-
따뜻한 봄볕이 내리쬐던 어느 날 아침,
백현은 학교에서 앞으로 제 수업을 도와줄 시각장애학생 도우미를 만났다.
"안녕하세요, 저는 김준면입니다."
"아..."
...녀석이었다.
백현은 스스로도 놀랄만큼 단번에 녀석을 알아챘다.
긴가민가한 것도 아니었다.
분명, 그 녀석이었다.
예상치도 못한 만남에 당황하기도 하고 어안이 벙벙한 백현이 제 소개도, 아는 척도 하지 못하고 멍하게 서 있었을 때,
녀석이- 어딘가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우리... 만난 적 있지 않나요?"
.
.
.
그렇게 우리는 처음 만났었고, 재회했다.
내 가장 친한 친구.
내 가장 소중한 친구.
내가 가장 사랑하는-....... 친구.
「우리, 만난 적.... 있나요?」
+ 주저리주저리
자아아...이건 뭔가요....... 제목은 찬백이었는데 찬열 군의 코빼기도 안 비치는 찬백 편;;ㅋㅋㅋ
만일 저였다면 이런 뒤죽박죽인 전개...멘붕에 빠졌을 듯;;ㅋㅋ 사실은 제목에 [준백]이라고 해야 하나 말아야하나 한참 망설이긴 했습니다;;;
아이고;; 오늘따라 왜 이렇게 줄간격 조절이 엉망으로 되는지 모르겠어요ㅠㅠ 평소 집에서 쓰던 컴퓨터가 아니라 자리를 옮겼더니 이 모양이네요;;;
집에 가서 다시 수정을 해봐야할 듯 하네요ㅠㅠㅠ
이미 다들 눈치채셨겠지만, 백현이가 제라늄을 가져다주러 가던 사람은 준면군이었죠-
백현이 입장에서 준면이는 어쩌면 자기를 구해준 생명의 은인일지도 모르겠어요.
가장 힘든 순간, 내 주변의 그 어떤 사람에게도, 내 지인이기 때문에 기댈 수 없을 때-
아무 조건도, 이유도 없이 누군가 손을 잡아준다면- 그 사람 참 좋은 사람 아닐까요:)
그래서, 준면이는 백현이에게 특별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이들의 이야기는 [찬백]으로 올렸습니다. 왜일까~요~? (....;;;)
찬백 편에서 얼굴 한 번 못 비춘 가엾은 찬열 군은 다음 편에서 등장해주시겠습니다-
오늘도 참 소소합니다- 그쵸-?ㅠ
그치만, 이 편을 쓰기 위해서 나름대로 책도 찾아보고 좀 고민을 해보았는데...
사실 그 입장이 되어보지 않은 제가 함부로 이렇게 글을 쓴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어쩌면 참- 뭐랄까- 그럴 수 있겠다 싶은 생각에 조심스러워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다만, 이 편을 쓰기 위해 이것저것 알아보는 동안 제 스스로는 너무 좋은 경험을 해서, 이렇게 한 편 한 편 쓸 수 있는 힘을 주시는 분들께 더 감사한 기분이에요-
시각장애와 관련된 전공서적도 찾아보고, 영화도 찾아보고, 다큐도 보면서-
처음 시작은 좀 더 디테일한 부분에 신경을 쓰고 싶은 마음도 있고 해서 찾아본건데 결국 세세한 부분들은 그냥- 그냥, 제 느낌으로 조심스럽게 썼습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구요- (핑계인가요-ㅁ-;;)
어떻게 제가 그 심정을- 무려 그것도 그냥 글만 읽어서, 다 알 수 있을까요.
다만 오히려 이런 과정을 통해 저 스스로는 뭔가 제 삶에 감사하는 마음도 많이 생겼고- 특히 예전에 휴먼다큐 사랑 편에 나오셨던 틴틴파이브 이동우 씨가 쓰신 에세이집을 보면서 울기도 많이 울고 한편으로는 너무 행복했던 시간이었어요:)
책 맨 앞 머릿말에 써있는 한 줄이 정말 크게 와닿았습니다.
-6년 전 병을 진단받고 엎드려 평펑 울던 그 책상 앞에서,
이 동 우.-
불행을 딛고 일어서서 다른 사람들에게 희망과 가르침을 주는 사람들이란- 정말 감사하고 좋으신 분들 같아요.
제 스스로를 돌아보고 또 한편으로 위로를 받은, 좋은 경험이었던 것 같습니다.
앞으로 사과를 쭉 써가면서 뭔가 저는 점점 더 많은 행복과 위로를 받을 것 같은데.. 그만큼 제가 표현할 수 있을까 모르겠네요ㅠ
읽어주신 여러분께 늘- 감사드리는 거.. 아시죠? 또, 또 한 분!!! 생각지도 못한 예쁘고 멋진 표지를 그려주신 서랍님!!
정말 말로는 다 표현 못하는 감사란 이런거군요ㅠㅠㅠ 서랍님이 올려주신 표지를 보고 딩굴거리다 벌떡 앉아서 정자세로 5편을 쓰기 시작했습니다;;ㅋㅋㅋ 제가 보답하는 길이 이런 것 밖에 없네요ㅠㅠㅠㅠ 너무 감사한 마음에 올려도 된다는 허락말씀 없이 맨 앞에 살짝 올려버렸는데... 괘...괜찮나요ㅠㅠㅠ 제가 컴퓨터에 영 익숙하지 못해서 제대로 올라갔는지 모르겠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확인'키는 이제 다섯번째 누르지만, 누를 때마다 항상 긴장되고 떨리네요;;
다음 편에서 또 뵐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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