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랍님께서 주신 표지, 감사합니다:)
표지 주신 이후로 찬백편만 쓰고 있는 센스..;;ㅋㅋ
이 모습은 다음 편에서 보여드릴게요(_ _);;
Ep 06. Love of my life by 찬열
BGM) Love of my life: 정성하
전날 밤, 예상치도 못하게 비가 많이 내렸다.
한 번 잠들면 집이 무너져도 모를만큼 무신경한 찬열이지만 한밤중 하늘에서 울리는 천둥 소리에 눈이 번쩍 뜨였다.
정신이 다 돌아오지 않아 눈을 깜빡깜빡 하고 있는데 다시 한 번 우르릉-하는 소리가 저 멀리에서 울려 잠이 확 깼다.
마구 들이치는 빗물을 막으려고 서둘러 유리창을 닫는데 창밖으로 보이는 집 앞 나무들이 후두둑 떨어지는 거센 빗줄기를 고스란히 맞고 있었다.
"...꽃..."
애플제라늄이라는 이름이 입에 익지 않아 그 날 심은 것은 찬열에게 그저 꽃이 되었다.
그 날을 기점으로 몇 번 그 자리에 되돌아가서 살펴보곤 했다.
그냥 어디 잠깐 나갔다 오는 길에도, 집에서 뒹굴거리다가 몸이 찌뿌둥하다는 생각이 들어서도 괜시리 밖을 얼쩡거리다가 공원에 들러보았다.
살던 곳이 바뀌었는데도 녀석은 생각보다 파릇파릇하게 잘 자라는 것처럼 보였다.
깨진 화분에 깔려 부러졌던 줄기 몇 개가 노랗게 죽긴 했지만 그 사이로 연두빛 새 잎이 돋아났다.
자잘한 흰 꽃도 몇 송이 더 피었다.
꽃이 작아서 그런가 어쩐지 더 여려보이는 녀석이 낯선 곳에서 꿋꿋하게 자라나는 모습은 기특하기도 하고, 마음이 뿌듯하기도 했다.
제법 큰 나뭇잎들도 세찬 빗속에서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와중에 꽃은 잘 버티고 있을까.
볕이 잘 들어오는 곳에 둔다고 일부러 주변에 방패막이 되어줄 나무 하나 없는 곳에 심었는데.
여리여리한 줄기와 애처로울만치 작은 꽃잎들이 생각나 안절부절 못하며 침대에 누웠다 앉았다 하다보니 어느새 비가 그치고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어머, 너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니?"
아침을 준비 중이시던 어머니가 방문을 벌컥 열고 나오는 찬열을 보고 깜짝 놀라 물었지만
'운동!!!'하고 대충 말을 흘린 찬열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후다닥 밖으로 달려나갔다.
그리고 밤새 내린 비로 생긴 물웅덩이들을 펄쩍펄쩍 피하며 도착한 공원에서, 며칠째 길에서 저도 몰래 찾게 되던 그 뒷모습을 보았다.
아.
그 사람이다.
비구름이 개이고 말갛게 빛이 드는 이른 아침의 공원에 백현이 서 있었다.
뒷모습만으로도 단번에 그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저기."
"어...?"
"...안녕하세요."
혹여나 갑자기 말을 걸면 놀랄까 싶어 몇 번을 주춤주춤 망설이던 찬열이 최대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을 때,
갸웃갸웃하며 서 있던 동그란 그의 뒷통수가 반짝 들렸다.
"어! 찬열이다!"
그저 한 번, 그것도 잠시 만났을 뿐인데 목소리만으로 자신을 알아보고 심지어 이렇게나 반가워하다니.
왠지 기분이 조금은 으쓱해지는 것만 같다.
"어떻게 아셨어요?"
"목소리가 너무 좋아서 안 잊어버렸어."
방글방글 웃으며 제 낯이 부끄러워지는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한다.
그 때부터 느꼈지만, 참 구김살 없이 마냥 밝고 솔직한 사람이다.
돌려말하는 것도 없이 던진 제 칭찬에 직격타를 맞으니 쿨럭, 괜히 기침이 날 것 같아 얼른 목을 가다듬었다.
"크흠... 여..여기서 뭐하세요, 근데? 아침 일찍인데.."
오는 길에 여기저기 물 웅덩이도 많아서 오기 힘들었을텐데- 하고 보니 역시나, 그의 흰 컨버스화 여기저기 흙탕물이 이리저리 튀었다.
그 위로 자리한 연한 하늘빛 바지에도 물자국이 선명했다.
"밤에 비가 많이 와서- 그 때 심은 제라늄이 괜찮은지 궁금하기도 하고.. 아침에 일어나니까 비냄새도 좋길래 산책 나왔어."
아마 신발 안에도 물이 차 척척할텐데, 아랑곳하지 않는 듯 어린 아이처럼 웃는 백현의 모습에 찬열도 괜히 웃음이 났다.
뽀얗게 드러난 백현의 뺨에 밤새 내린 빗물을 머금고 한껏 빛나는 아침 햇볕이 비추고 있었다.
...예쁘다.
저도 모르게 제 입에서 툭 튀어나올 뻔한 말을 억지로 억지로 꾹꾹 눌러넣은 찬열이 괜시리 시선을 돌려 공원을 휘휘 둘러보았다.
말이 공원이지 동네의 흔한 놀이터보다도 작은 땅 한구석께에 화단을 만들고 나무를 심어둔, 그야말로 정원 같은 곳이었다.
누가 이 곳을 관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깔끔하게 가지를 쳐둔 나무들과 키가 작은 관목들,
그리고 정체 모를 색색의 꽃이 색깔별로 자라고 있는 화단과 몇 개의 벤치가 다였다.
그리고 그 작은 관목들 옆에 오도카니 백현의 제라늄이 자라고 있다.
"얼핏 보기에는 잘 있는 것 같네요, 꽃."
"정말? 다행이다!"
신나서 생글생글 웃는 모습은 마냥 해맑아서, 제 마음이 다 행복해지는 기분이다.
펄쩍펄쩍 물웅덩이를 넘어 다가가 보니 보들보들한 잎새 위로 간밤에 내린 빗방울들이 이슬처럼 종종 맺혀 반짝이고 있었다.
짜식, 비실비실하게 생긴 녀석이 나름 알차네.
흐뭇한 아빠미소를 지은 찬열이 문뜩 뒤를 돌아보자, 제라늄이 괜찮은지 궁금해 왔다던 사람이 저 멀리에서 멀뚱하니 서있다.
...뭐지? 하고 물끄러미 바라보던 찬열이 뒤늦게 '아-' 하고 빙구 같은 소리를 냈다.
바닥이 흙으로 된 공원은 찬열이 지나온 아스팔트 골목길과는 비교도 안될만큼 이 곳 저 곳 움푹움푹 패여있었다.
백현이 서 있는 한발짝 앞에도 깊은 물웅덩이가 넓게 고여있었다.
백현의 손에 들린 하얀 지팡이가 그 물가에 퐁당 발을 담근 채 우두커니 섰다.
"...찬열아-"
"...?!"
그가 자신을 부른 그 순간, 갑자기 가슴이 부웅- 하고 벅차오르는 기분에 찬열은 숨을 들이마쉬며 자신도 모르게 눈을 꼭 감았다.
태어나서 이 순간보다 심장이 더 떨려본 적이 있을까.
엄마가 늦잠 자는 아들 등허리를 쿡쿡 찌르며 날카롭게 외치던 그 '찬열아-'가,
누나가 저가 챙겨둔 아이스크림 몰래 먹었다고 꽥 소리지르며 부르던 그 '찬열아-'가,
김종인이 개새끼 소새끼를 꼬리표처럼 덤으로 붙여 부르던 그 '찬열아-'가-
이렇게나 설레는 이름이었나.
이렇게나 행복한 이름이던가.
"찬열아... 여기도 물 있지?"
제 지팡이로 찰박찰박 물가를 두드리며 물어오는 그의 목소리, 그가 부르는 제 이름 한 글자 한 글자가 제 가슴을 너무나 행복하게 울려서,
찬열은 숨도 쉬지 못한 채 제자리에 서있었다.
"찬열아. 찬열아?"
어리둥절한 듯 자꾸만 불러오는 제 이름이 너무 좋아서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멍하니 선 찬열의 코 끝에서 달달한 사과향이 맴돌아 아침 햇살에 섞여들어갔다.
.
.
.
그렇게 한 사람은 자꾸만 이름을 부르고, 한 사람은 멍하니 자리에 서서 그 목소리만 듣고 있다가-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제 나름대로 조심조심, 옆으로 발을 내딛은 백현이 '풍덩',
신발을 쫄딱 적시고 나서야 찬열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제라늄을 심은 곳까지 빙 돌아오는 내내 발이 척척하다며 울상을 지으면서도 백현은 촉촉하게 젖은 제라늄 잎과 새로 열린 꽃봉오리까지 제 손으로 다 만져보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씩씩하게 잘 자라고 있군!'하고 뿌듯하게 웃는 백현을 보면 저보다 다섯 살이나 많은 형님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머리를 자꾸 쓰다듬고 싶어진다.
"아침 먹었어?"
애플 제라늄은 까다로운 녀석이라, 습기가 너무 많아도 뿌리가 금방 썩어버린댔어-
여름철에는 하루 한 번만 물 주면 된댔는데, 얘 어젯밤에 완전 물배 채웠겠다, 라며 흙바닥을 꾹꾹 눌러보고 짚어보던 백현이 지저분해진 손을 탈탈 털며 물어왔다.
그제서야 찬열은 아침 해가 뜨자마자 달려나오느라 잊고 있었던(워낙은 자느라 잘 챙겨먹지 않는 편이기도 하지만) 허기가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아뇨."
"안 먹었어? 나도! 너, 빵 좋아해?"
"빵...이요?"
빵이라면.. 빵덕후 김종인의 뺨을 찰싹찰싹 칠 수 있을 정도로 좋아하긴 하지만...?
"좋아하죠, 엄청.. 근데 그건 왜...?"
"그럼 우리 빵 먹으러 가자!"
참 뜬금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활짝 웃는 백현의 모습을 보니 찬열은 뭐라 대꾸할 생각조차 잊어버렸다.
가만히 있을 때는 끝이 순한 눈 때문에 강아지 같다가도 환하게 웃으면 어린 아이같은 모습이 사랑스러워 자꾸만 헤실헤실, 저도 모르게 덩달아 미소가 피어오른다.
'가자!!'라고 당차게 말해놓고선 뒤를 돌아서자마자 또 주춤주춤, 멈칫멈칫하는 그 동그마한 뒤통수가 귀여워서 결국 찬열은 조용히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 바람에 잔뜩 부루퉁해진 백현의 얼굴에 누르고 또 눌렀지만 한 번 터진 웃음은 그칠 줄을 몰랐다.
찬열의 도움으로 압록강 같던 거대한 공원 물웅덩이를 지나 평탄한 아스팔트 골목길로 들어서자, 백현은 다시금 기분이 좋아진 듯 조잘조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걷는 내내 괜스레 마음이 쓰여 안절부절 못하는 찬열과는 달리, 흰 지팡이로 아슬아슬하니 고인 물웅덩이들을 찰방찰방 짚어내며 씩씩하게 걸어간다.
너무 씩씩하게 걸어 종종 얄팍하게 고인 물가에서 튀어오른 빗물이 이미 젖어있던 백현의 신발과 바지 끝자락을 적셨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좀 축축하긴 해도, 비가 오면 기분 좋아."
"찝찝하지 않아요?"
"말리면 되는데 뭐- 시원하잖아. 너무 좋아"
환하게 웃으며 가벼운 발걸음을 옮기는 그 천진한 뒷모습이-
찬열도, 너무 좋았다.
그렇게 백현을 따라 도착한 곳은 골목 한 구석에 위치한 작은 카페-
「Cafe May & June」
5, 6월이 아니라고 해도 왠지 썩 잘 어울리는 듯한 이름의 카페였다.
까만 나무 간판 한 구석에 연두빛 새싹 그림이 뽀록 돋아있다.
그 작은 그림 하나마저 기분좋게 만들어주는, 작지만 깔끔한 가게였다.
아직 이른 아침인데도 벌써 문을 열었는지, 유리문 앞에 걸린 작고 흰 나무판에 OPEN이라는 글씨가 짙은 초록빛으로 쓰여있었다.
가게 앞에 있는 스피커를 타고 조용하게 음악이 흘렀다.
낯익은 멜로디의 곡인데,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하지만 잔잔하고 차분한 기타 선율이 아침 공기에 섞여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져주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문을 열지도 않았는데 앞에 서자마자 벌써부터 온통 고소하게 빵 냄새가 피어올랐다.
이른 아침 갓 나온 이런 빵 냄새는 빵을 싫어하는 사람이든, 좋아하는 사람이든- 누구라도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다.
딸랑-
척척 계단을 오른 백현이 익숙하게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자 유리문 끝에 매달려있던 작은 종에서 맑은 소리가 울렸다.
"어서오세요-"
맡기만해도 행복해지는 빵 내음과 서늘한 가게 안의 공기에 실려 들려온 목소리는 가게 안에 흐르고 있는 음악만큼이나 차분하고 어딘가 마음을 평안하게 만들었다.
카페 안에는 여기저기 초록빛, 연두빛을 띈 작고 큰 화분들이 가득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이 환하게 맑아지는 것 같았다.
"나 왔어!"
백현이 익숙하게 지팡이로 테이블이며 의자를 짚어내며 들어서자, 목소리만 들리고 사람은 보이지 않던 카운터 저 안쪽에서 누군가 검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환한 얼굴 안에 장난끼 어린 웃음이 가득하다.
서글서글한 인상의 썩 잘생긴 남자였다.
'왔냐, 멍멍아?'하며 장난스럽게 백현의 머리를 흐트러뜨리자 백현이 제 손으로 버둥버둥 남자의 팔을 잡아댔다.
'하지마, 하지마!!'하며 버둥대는 손놀림에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시원하게 웃던 남자가 옆에 멀뚱히 선 찬열을 보고 눈을 댕그라니 떴다.
그 와중에도 백현의 머리를 부벼대는 손은 멈추질 않는다.
"어서오세요."
의문의 빛을 띄었던 것도 잠시- 이내 밝게 웃는 모습이 백현과 어딘가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햇살 같은 사람이었다.
"내 손님이야. 나 배고파, 준면아-"
덤불숲처럼 엉망이 된 제 머리를 울상이 된 얼굴로 정리하던 백현이 이내 또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니 손님이라면서, 소개는 시켜주고 밥을 찾아야지, 이 바보야."
"아! 지난 번에 너한테 받았던 애플 제라늄, 꽃 많이 피웠다고 너 갖다준다고 했잖아?"
"응. 그거 너네 동네 공원에 심었잖아."
"그거 같이 심어줬던 사람! 내가 말했었잖아."
"아-"
백현에게 지난 번 만났을 때 이야기를 들은 듯, 얼굴에 화색을 띈 남자가 다시 한 번 제 손을 앞치마에 쓱쓱 문질러 닦고는 찬열에게 턱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김준면입니다."
"아... 박찬열입니다. 안녕하세요."
"백현이한테 얘기 들었어요. 그 때 신세 많이 졌다면서요?"
"아... 뭐 신세랄 것까지 있나요, 별 거 아니였는데요..."
멋쩍게 어깨를 으쓱이는 찬열을 보고 씩 웃은 남자가 어서 이 쪽으로 앉으시라며 자리를 안내했다.
'나도, 나도!' 제가 앉았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백현에게 '넌 거기 있어, 멍멍아'하고 핀잔을 주자 백현이 입을 뚱 내밀고 툴툴거린다.
"저 자식은 맨날 날 똥개 취급이야."
"똥강아지 같이 생긴 게 어딜 사람 대접 받으려고 그래."
"에이씨!"
불만 가득한 얼굴이, 자신과 함께 있을 때는 또 몰랐던 표정이다.
찬열이 저도 모를 묘한 기분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찰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 쪽으로 오려던 백현이 미처 지팡이에 걸리지 않은 테이블에 걸려 휘청했다.
그 모습에 놀라서 벌떡 일어난 찬열보다 한 발 빨리, 장난스레 웃고 있던 준면이 얼른 달려가 백현의 팔을 잡아챘다.
"아야야.."
"으이구, 거봐- 여기 있으랬잖아, 멍멍아."
"씨이..."
면박을 주는 말투와는 달리 꽤나 꼼꼼하게 백현이 부딪힌 곳을 살핀다.
그러다가 그제서야 물웅덩이에 엉망이 된 백현의 신발과 바지자락을 봤는지, 준면이 쯧쯧 하고 혀를 찼다.
"너 또 비오는 날 똥개마냥 물구덩이 밟고 다녔지?"
"아니야- 오다가 잘못 밟아서 그랬어."
"아니긴.. 내가 널 하루이틀 보냐. 신발 벗어봐, 다 젖었겠네. 하여튼 똥강아지...
내가 비온 다음 날은 옅은 색 바지 입지 말랬지? 그 칸에 있는 거 다 비슷한 거라고 그랬잖아."
"너, 손님 앞에서 쪽팔리게 자꾸 이러기냐?"
구박하는 준면에게 대들며 퉁퉁거리면서도 또 얌전히 시키는대로 신발을 벗자 백현의 하얀 발이 드러났다.
'팅팅 불었네, 불었어-'하며 고개를 저은 준면이 백현을 앉혀둔 채 백현의 흰 컨버스화를 들고 카운터 뒤로 사라졌다.
입을 부루퉁하게 내밀고 앉아있던 백현이 옆에서 멍하니 앉아있는 찬열에게 불쑥 말을 걸었다.
"...못 본 걸로 해라."
두 사람의 장난스러우면서도 어딘가 간질간질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뭔가 기분이 오묘해져있던 찬열이 그런 백현의 말에 그제서야 피식 웃었다.
꼼지락거리는 백현의 하얀 발을 바라보며 가슴께에 어딘가 아까와는 또 다른 느낌이 와닿을 때쯤,
카운터 뒤로 사라졌던 준면이 나타났다.
한 손에는 만든지 얼마 되지 않은 듯 김이 소르르 올라오는 식빵과 우유 두 잔, 크림치즈와 딸기쨈이 올려진 쟁반을, 또 한 손에는 까만 슬리퍼를 들고 있었다.
'드세요- 만든지 얼마 안된거라 맛있을거예요' 하고 쟁반을 찬열의 앞에 올려두고 나서는 또 '나도, 나도'하고 발을 동동 구르는 백현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는다.
'너 땜에 비오는 날이면 우리 가게 슬리퍼가 남아나질 않아, 이 자식아. 돈 내-'라고 툴툴대면서도 조심스레 백현의 하얀 발에 슬리퍼를 신겨주는 그 모습을 보며-
찬열은 가슴이 조금 답답해오는 것 같아 앞에 놓인 찬 우유를 얼른 한 모금 들이켰다.
시원한 우유가 타고 내려가도 가슴 깊은 곳에 박힌 것 같은 답답한 기운이 사라지질 않는다.
"무슨 빵이야?"
"옥수수 식빵."
"오오오- 옥수수 식빵 좋아."
"니가 싫어하는 빵이 어딨겠냐."
여전히 투닥투닥하면서도 백현의 손을 잡아끌어 찬열의 맞은 편 의자까지 데려다준다.
의자에 자리잡고 앉은 백현이 한껏 기대에 부푼 얼굴로 냄새를 킁킁 맡았다.
"오른쪽이 크림 치즈, 왼쪽이 딸기쨈이야. 빵은 가운데, 우유는 오른쪽 위쪽에 있으니까 엎지르지 마."
"안 엎질러, 이 자식아."
흥- 하고 콧방귀를 뀐 백현이 이내 베시시 웃으며 테이블 위에 놓인 쟁반 가장자리를 조심스레 더듬었다.
손 끝으로 대강 위치를 확인하자 잘려진 식빵을 하나 들고는 이내 가장 가운데 희고 보드라운 속살만 야금야금 파먹기 시작한다.
백현의 얼굴 가득 행복한 미소가 퍼졌다.
준면이 그런 백현의 손에 버터나이프를 쥐어주었다.
"손님 앞에서 잘하는 짓이다. 딸기쨈 어제 새로 만든거야- 왼쪽에 있다니까."
"하나만 이렇게 먹을래"
제 손에 든 버터나이프는 다시 자리에 내려놓은 채 아랑곳하지 않고 식빵을 파먹는 백현의 모습에,
못말린다는 듯 고개를 젓던 준면이 찬열과 눈이 마주쳤다.
자신이 무슨 표정으로 둘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일까-
알아차릴 새도 없이 멍하게 마주친 시선에 준면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눈을 찡긋했다.
"얘가 아직 철이 안나서 그래요, 이해해요."
"스끄러어-(시끄러워-)"
입 안 가득 보들보들한 식빵 속살을 우물대며 백현이 불만을 표현했지만 준면 역시 대꾸도 하지 않는다.
뭔가... 그냥 친구라고 하기엔 좀 더.. 좀 더 뭔가 간지러운 느낌.
자신과 나름대로 학교 베프인 김종인 사이에 저런 분위기가 흘렀다면.. 우엑. 갑자기 빵 맛이 뚝 떨어질 것 같아.
한쪽에선 신나게 식빵을 파먹고, 한쪽에선 간간히 잔소리를 해대며 찬열에게 이것저것 물어오고,
또 한편에서는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조심히 관찰하며 질문에 대답하는, 그런 평화로운 아침 나절의 카페 안-
따르르르릉- 따르르르릉-
누가 들어도 전화가 왔구나- 싶은 클래식한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갑작스럽게 깨진 분위기에 우유를 향해 뻗던 찬열의 손이 우뚝 멈춰섰다. 그러거나 말거나 백현은 열중해서 와구와구 아침 식사 중이다.
"어.. 죄송해요, 잠시만 전화 좀.."
간판에서 보았던 새싹 그림이 그려진 검은 앞치마 앞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낸 준면이 발신자를 확인하더니 끼익- 의자를 끌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찬열에게 양해를 구하는 눈짓에 고개를 꾸벅, 해보이자 열심히 우물대고 있는 백현의 머리를 버릇처럼 한 번 또 부시시 부벼주고 돌아서 전화를 받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대충 손을 살랑살랑 흔들어보인 백현은 여전히 식사 삼매경.
"어, 지은아.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다정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으며 카운터 뒤로 사라지는 준면의 모습을 찬열이 멀뚱히 바라보았다.
"더 먹어-"
더 이상 빵이 줄어들지 않고 있는 것을 눈치챘는지, 우유 한 잔을 마지막까지 비운 백현이 말을 걸었다.
'아, 네..'하고 새로 빵 조각을 하나 집았지만, 왠지 흘끔 백현의 눈치를 보게 된다.
"준면이 여자친구."
아...?
"우리 준면이는 잘생기고 다정하니까-
...뭐, 잘 생겼는지 나야 모르지만, 지 입으로 그랬어.
그래서 여자들이 엄청 좋아한대-
근데 그 전 여자친구들은 나랑 있는 거 불편해한다고 헤어졌어.
근데 지은씨는... 지은씨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준면이보다 날 더 챙겨줬으니까.
엄청 착하고, 또 엄청 예쁘대."
그렇게 말하며 씩 웃는 백현의 모습은 지금까지 보여준 어린 아이 같은 모습이 아닌, 무언가 정말 자신보다 성숙한 어른의 미소 같아서-
찬열은 왠지 제 가슴 한 편이 싸해오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아침식사를 마치고 찬열은 가게를 나섰다.
어느새 아침 햇살이 아까보다 더 맑고, 조금은 더 따갑게 내리쬐고 있었다.
든든해진 배와는 달리 마음 한구석이 어딘가 가게로 들어가기 전보다 조금은 비어있는 것 같다.
문뜩, 다시 한 번 유리창 너머 가게 안을 바라보았다.
비가 온 길을 슬리퍼만 신겨 보낼 수 없으니 교대할 알바생이 올 때까지 기다리라는 준면의 말에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던 백현은 혼자 빈 테이블에 앉아 다리를 달랑달랑 흔들고 있었다.
그런 백현의 모습을 잠시 빤히 바라보다가 이내 발걸음을 돌려 집으로 향했다.
어딘가 멍한 기분에 떨떠름한 얼굴로 돌아가는 길.
잠시 자리에 우뚝 선 찬열이 조금 망설이는 듯 하더니 이내 가만히 두 눈을 감았다.
대학생은 지금이 방학이지만, 직장인들에게는 방학이 없다.
가만히 선 찬열의 곁으로 사람들이 바쁜 걸음으로 스쳐지나갔다.
그가 보는 세상. 그가 느끼는 공기. 그가 듣는 소리.
그것이 이런 것들일까.
한참을 그렇게 내리쬐는 태양볕을 오롯이 받고 섰던 찬열이 조심스럽게 한발짝 한발짝 걸음을 뗐다.
눈을 감자마자 제가 서있는 세상은 다른 곳으로 변했다.
비록 이사를 온지 얼마 안되긴 했지만 몇 번을 지나다니며 눈에 익었던 거리였는데, 몇 발짝 걷다보니 깜빡 방향감각을 잃었다.
자연스레 두 팔이 잔뜩 긴장한 채 제 앞과 옆의 허공을 더듬어댔다.
한 발 한 발 떼는 것조차 잔뜩 신경이 곤두섰다.
사실 발을 뗀다고 할 수도 없었다.
다리를 들었다 내리는 것조차 어려워 거의 발이 바닥에 질질 끌렸다.
그렇게 천천히 걷다가 물웅덩이를 철벅철벅 그냥 밟는 바람에 소스라치게 놀라긴 했지만, 그래도 찬열은 꼭 감은 눈에 더 힘을 주었다.
앞이 보이지 않자 세상은 온통 소리와 온 몸으로 닿아오는 공기의 촉감만으로 이루어진 것 같았다.
아무리 걸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낯선 암흑 속을 주춤주춤 그렇게 걷다가 문뜩 움푹 패인 곳을 밟는 바람에 반사적으로 눈이 번쩍 뜨였다.
긴 몸이 한 번 비틀하니 균형을 잃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으악!!"
철푸덕- 볼썽사납게 바닥에 넘어지면서 요령없이 아스팔트 바닥에 박은 무릎이 금세 싸-하게 아려왔다.
"쓰읍..."
아직은 비가 마르지 않은 골목.
그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아버린 찬열은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바쁜 출근길에 들어서던 사람들이 허우대 멀쩡히 바닥에 앉아있는 찬열을 힐끔힐끔 쳐다보기도 했고 몇몇 사람이 '저기요- 괜찮아요-?' 하고 한번씩 어깨를 잡아 흔들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 말 없이 바닥을 내려다보며 눈만 꿈뻑이는 모습에 이내 포기했는지, 다들 제 갈 길을 찾아 바삐 떠났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있던 찬열이, 어느새 사람들이 모두 떠난 텅 빈 골목길 한가운데에 앉아 조용히 중얼거렸다.
"아씨...
나, 어떡하냐..."
나...
그 사람... 좋아하나...?
+ 주저리주저리
아이고;;;
이번 편은 쓰는데 왜 제 심장이 다 두근두근거리나요;;;ㅋㅋㅋㅋㅋ 이런 증상은 처음인데?;;;ㅋㅋㅋㅋ망상이 폭주해서 병이 났나;;;
정성하 군의 기타연주 때문일까요-ㅎㅎㅎ 아, 정성하 군 앨범의 곡들은 진짜 하나하나 다 너무 좋네요.
누나가 많이 에낀다ㅠㅠㅠㅠ ..나.. 누나 맞지?ㅠㅠㅠㅠ이모 아니지?ㅠㅠㅠㅠㅠ(-_ㅠㅠㅠㅠㅠㅠㅠㅠㅠ)
사실 이번 편을 처음 쓰기 시작했을 때 생각해두었던 BGM은 이게 아니었는데-
처음 찬백편을 쓸 때부터 이쯤에서 꼭 뮤지컬 빨래 ost인 홍광호 님의 '참 예뻐요'를 쓰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쓰다보니 뭔가 좀 더- 이번 편은 그 곡보다는 좀 더 달달하고 좀 더 뭔가 간지러운 곡이 어울릴 듯 하여 마지막에 급 선곡을 바꿨습니다;ㅋㅋ
정성하 군 앨범의 다른 몇몇 곡들이 다 물망에 올랐지만- 역시 제목과의 싱크로를 생각해본다면 love of my life 만한 게 없네요..:)
마지막까지 치열한 경쟁을 펼친 more than words와 wake me up when september ends(단지 9월이 아니라서 짤림.....*-_-*)에게 애도를...
아아아 심장에 병이 생겼나, 왜 아직까지 이렇게 떨리나요;;ㅋㅋㅋ
오늘 밤잠은 다 잤습니다ㅠㅠㅠㅋㅋㅋ 내일 할 일이 많은데 큰일났네요;;ㅋㅋ
굳이 길이에 너무 연연할 필요가 있을까- 제가 그리고 싶은 장면만 잘 표현하면 되지- 하는, 제 편할대로 생각하는 예의없는(;;) 마음으로 쓰다보니
확실히 길이가 좀 짧군요;;ㅋㅋㅋ 그래도 요래요래 해서 좀 더 진도를 빨리 빨리 빼고 싶은 제 마음..... 이..이해해 주실려나요....허허허..
(난 좀 더, 좀 더 달달함을 원한단 말이다, 이 녀석들아ㅠㅠㅠ)
아마 이제는 과거에 대한 이야기는 아무래도 점점 줄어들 듯 싶으니 확실히 길이가 앞으로도 그닥 길지는 않을 것 같은데... 아닐까나요;;
오늘은 왠지 뭔가- 유난히 준면군이 다정돋네요-
그치만 여러분... 제가 살아보니 이런 남자...이런 남자 따위는 세상에 없는게 분명해요.. 아무리 두근거려도 이런 남자는.. ASKY...
...아.. 갑자기 눈물이 왜 나지..??
저녁도 안 먹고 딩굴거리다 쓰는거라 이제서야 배가 고프네요..
쓰다보니 저도 빵이 확 땡기는게- 내일은 아침에 빵집에나 가볼까 싶습니다.
아침 빵집 냄새는 진짜 너무 좋아서- 그거 하나 때문에 제 어릴 때 꿈이 빵집 사장님이였는데 말이에요..:)
이편을 열심히 쓰는 동안 제 방에 들어온 모기 한마리가 제 다리를 무려 7번 물어뜯고 갔습니다ㅠ
누님이 이렇게 안 돌아가는 머리를 데굴데굴 굴려가며 글을 쓰시는데 감히 다리를 물다니!
정의의 이름으로!!! ...거실 가서 자야겠네요. 모기 스피드를 따라갈 수가 없어서 잡지도 못합니다..ㅠㅠ
부족한 글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 그리고 댓글 달아주시는 고마우신 분들-
모두모두- 사...사.......좋아합니다:)
항상 감사드려요.
ps) 올려놓고 보니 줄간격이 진짜 매 회마다 엉망진창..;;; 제가 이래요ㅠㅠ.. 날잡아서 하루 싹 수정을 봐야...-ㅁ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