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냥냥이와 댕댕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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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할 조별과제
" 강아지. "
" 고양이. "
" 멍멍이. "
" 야옹이. "
" 댕댕이. "
" 냥냥이. "
“ ... “
“ ... “
탁,
정국과 태형이 동시에 잔을 내려놓았다. 꽤 왁자지껄한 호프집인데도 둘의 주변에만 삼엄한 공기가 자욱했다. 둘은 서로를 잠시 노려보더니 각자 제 옆에 있는 소주병을 들어, 그대로 제 소주잔에 털어넣었다. 쪼르륵 따라지는 소주가 각 잔의 절반정도를 채우고 바닥이 나자 둘은 동시에 손을 들었다.
“ 이모 여기 소주 두병 추가요. “
카운터에서 빌지를 들고 오던 이모는 입꼬리가 귀에 걸려서 주방으로 돌아갔다. 둘은 그 틈을 참지 못하고 절반채운 소주잔을 제 입에 털어넣곤,
“ 제법이네. “
“ 너야말로. “
느와르물이나 나올 법한 얼굴로 서로의 주량을 칭찬했다. 자기 술잔을 빙글 기울이며 눈썹 한 쪽을 들어올리는 정국이나, 한쪽 입꼬리만 올리곤 혀로 입술을 훑는 태형이나, 꽤나 비장한 얼굴이었다.
지랄한다... 그 중간에 끼여서 셋이 해치운 술병을 찬찬히 세고 있는 여주만 울상인 채 짜게 식어가고 있었을 뿐.
겨우 초면인 정국과 태형이 이렇게 근본없는 맞다이를 뜨고 있는 이유를 설명하자면, 오늘 오후에 있던 교양수업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수강신청 폭망이었던 여주는 호석의 도움을 받아 오후 교양을 하나 얻을 수 있었고, 그 수업의 이름은 ‘반려동물의 이해’였다. 꿀교양급은 아니지만 조별과제만 무난하게 해내면 후한 점수를 받을 수 있다던 교양수업.
교수님은 오티가 끝난 후 첫 수업에서 3-4명 이내로 자유롭게 조를 짜라고 했고, 여주는 자연스럽게 유일하게 아는 얼굴이었던 정국, 그리고 정정기간에 들어온 태형과 조를 짜게 되었다. 그리고 받은 과제는, 대표적인 반려동물 고양이와 강아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서 2주 뒤 발표하기.
그래, 그게 이 지랄판의 원인이 되시겠다.
할머니 집에서 어릴적부터 누렁이들과 함께 뛰놀며 자란 정국과 동네 캣카페를 운영하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다섯마리의 고양이를 키우던 태형은 발표주제를 두고 극렬히 갈라섰다. 동갑인데다가 한 자존심하는 둘은 절대로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은 다이다이를 떠서 이긴 사람이 원하는 대로 하기로 지네 맘대로 결정했더랬다. 중간에서 뭔들 상관없다며 가위바위보로 정하라고 했던 평화유지군 여주의 의견은 싹 무시한 채로.
그래서 결국 교양수업이 끝나자마자 대뜸 낮술을 시작한 게 벌써 반나절이었다. 서로의 주장을 굽히지 않으며 한잔한잔 마시던 둘은 벌써 이미 각 세 병이상의 술을 마셨고, 그 사이 분위기에 휩쓸려 여주도 이미 한병이상을 마신 상태였다. 소주 반병인 제 주량은 이미 넘어선 상태였다. 아주 좋지 않았다. 이러다가 진짜 꽐라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여주의 시야는 이미 흐릿해져서 앞의 소주가 처음처럼인지 참이슬인지 한라산인지도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혈기왕성한 스무살과 함께하는 술자리는 너무도 고달팠다. 여주는 얼른 누군가가 쓰러져서 이 시간이 끝나길 바라고 있었다. 눈이 이미 풀렸는데도 주먹을 불끈 쥐고 있는 태형과, 얼굴이 달아올랐는데도 여유로운 듯 웃어보이는 정국을 보면 아직도 먼 것 같았지만.
여주는 이 술자리에서 제 주사가 나오지 않기만을 바라며 생수를 들이켰다. 이미 제가 비운 생수통도 세통이나 쌓여있었다. 나름 취하지 않으려는 발악이었다. 가까이 있는 상대에게 서슴치 않고 애정표현을 하거나 앵기는 제 주사를 잘 알았기에 편한 친구나, 윤기 호석 곁에서 말고는 과하게 술을 마시지 않으려고 노력하던 여주였으니까.
그 때 이모가 소주 두 병과 황태포를 들고 왔다. 서비스, 웃으며 가까이 앉아있는 정국의 머리를 쓰다듬고 떠났다. 정국은 그 등을 향해 감삼다, 제대로 혀꼬인 말로 답했다. 그 틈에 태형은 소주병을 들더니 핫, 기함을 넣었다.
그리곤 팔을 돌려 지랄맞게도 소주병을 땄다. 태형은 뚜껑을 멋들어지게 올려놓곤, 세상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둘을 쳐다봤다. 정국은 그 묘기에 놀랐는지 두 눈이 동그랗게 커졌고, 태형은 리액션이 마음에 들었는지 씨익 웃으며 정국의 잔에 소주를 따랐다.
“ 원샷. 밑잔 깔면 죽인다. “
“ 내가 할 소릴 하고 앉았네. “
정국도 지지않고 소주를 받아 태형의 잔에 가득 따랐다.
시발...또 시작이네. 여주는 길어질 술자리를 예감했다.
*
“ 아니, 그니까아. 고양이가 왜 싫은데? “
“ 누가 싫대? 그냥 고양이보다 강아지가, 아니. 개가 더 멋있는 건 팩트잖아. “
“ 뭐래에. “
“ 봐봐. 개는 일단 충성심이 쩐다고. 주인이 부르면 뙇 오고. 근데 고양인 주인을 주인취급해주긴 하냐. 집사취급이지 “
“ 그게 매력이거든. 고양일 안키워본 놈들이 꼭 그딴 말하더라. 야, 솔직히 강아지는 막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더럽잖아. 근데 고양이는 안그래. 얼마나 깨끗한데. “
“ 뭐가 더러워어. 그게 걔네 매력인데. 꼬질꼬질한 거. “
“ 꼬질꼬질한 게 뭔 매력이야. 넌 그루밍이란 단어는 아냐? “
“ 하, 야. 넌 강아지 꼬순내는 아냐? “
“ 하, 꾹꾹이는 아냐? “
“ ... “
이 정도면 고딩, 아니 중딩보다 못한 레벨의 무의미한 말싸움이었다. 어느덧 자리에는 아홉병이 넘는 소주병이 쌓여있었다. 둘 다 한계점에 도달했는지 이제는 술마시는 속도가 현저히 느려진 대신 유치한 말싸움이 오고갔다. 그것도 계속해서 반복되는. 사이에서 여주는 마른 안주를 헤집어 놓으며 빠져나갈 궁리를 하고 있었다. 이제 속이 울렁거리는 게 스물스물 취기가 머리 꼭대기까지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주사가 드릉드릉 시동을 걸고 있는 느낌이었달까.
여주는 생수를 쪼록 따라서 원샷하곤, 그만. 근엄하게 말했다. 여주의 말에 유치한 말싸움을 벌이던 둘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이미 제정신은 아닌 눈동자들이었다.
“ 이쯤하면 됐잖아. 그냥 가위바위보해서 정해. “
“ 여기까지 왔는데요? “
“ 여기서 끝내면 의미가 없죠. “
둘의 대답이 동시에 돌아왔다. 여주는 아씨, 짜증을 내며 말했다.
“ 니네 이미 취했어. 내가 보기엔 여기서 절대 결론 안나. 그리고 솔직히 고양이고 강아지고 뭐가 중요하다고, “
“ 중요하죠. “
“ 완전. “
또 동시에 답이 돌아왔다. 제 의지를 절대로 꺾지 않을 눈빛이었다. 여주가 하, 기막혀하자 태형이 물었다.
“ 누나는 그래서 뭔데요. “
“ 어? “
“ 자꾸 아까부터 둘 다 상관없다곤 하는데, 누나는 뭘 더 원해요. “
“ 뭘 원해...난 상관없다니까? “
“ 선배가 더 좋아하는 동물은 있을 거 아니에요. “
정국이 여주의 잔에 소주를 따르며 덧붙여왔다. 여주는 그 잔을 자연스럽게 받아들며 미간을 좁혔다.
뭘 더 좋아하지, 나는. 사실 둘이 싸울 때부터 뭘 하든 상관이 없던 여주였다. 둘 다 좋았으니까.
어릴 때 여주의 집엔 푸들 한 마리와 코숏 한 마리가 있었고, 누굴 더 좋아한다는 느낌 없이 평등하게 사랑했었다. 다만 푸들이었던 초코는 다섯살 때 집을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기에 끝을 함께하진 못했다. 그게 여주의 나이 여덟살 때였다. 초등학교 입학식날. 그리고 그 아이가 떠났던 날. 평소에 그를 잘 따르던 초코는 정말 함께 떠난 것처럼 그 날 사라졌다. 그 아이처럼, 말없이.
여주는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라서 자연스럽게 소주를 들이켰다. 목을 타고 흐르는 소주가 참 썼다.
“ 고양이. “
“ 엥. 왜요? 선배는 당연히 강아지일 줄 알았는데. “
“ 야 당연히 고양이지. 누나 딱 봐도 고양이 좋아하게 생겼잖아. “
" 아니...그런 건 아닌데. 굳이굳이 따지면, "
그래도 같은 편이네요 누나, 태형이 다시 한 번 여주의 소주잔에 소주를 채웠다. 왠지 저를 먹이려는 것 같았지만 잠자코 받아들였다. 여주는 채워진 소주잔을 흔들었다. 찰랑이는 물결이 어쩐지 서글펐다.
“ 계속 곁에 있을 것처럼 굴다가 떠나는 것보단 낫잖아. “
“ ...네? “
“ 영원할 것처럼 굴어놓고 말도 없이 가버리는 것보다. “
여주는 채워진 소주를 한 번 더 들이켰다. 어리둥절한 표정의 태형과 정국이 서로 눈빛을 주고 받는 게 흐릿한 시야 속에 울렁이며 담겼다. 그치, 그 말을 끝으로 여주는 암흑 속으로 고꾸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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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순간
“ 우리 시간 좀 갖자. “
“ ...뭐? “
“ 생각해봤는데 진짜 네 말이 다 맞아서. “
“ 그게 무슨 소린데. “
“ 김여주 말고 너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겠어. “
“ ...하. “
“ 바로 헤어져주길 원하면 그렇게 하고. “
윤기가 무심하게 말했다. 쩍쩍 갈라지는 건조한 말투에 희주의 표정이 굳었다.
“ ...그게 지금 며칠만에 겨우 만나서 할 소리야? “
“ ... “
“ 갑자기 여리로 온대서 무슨 바람이 들었나 했더니. “
“ ... “
“ 진짜 너 사람 비참하게 만든다. 민윤기. “
희주는 이를 악물었다. 그 날 이후 처음 보는 윤기의 얼굴이었다. 윤기가 없던 시간동안 희주는 매일밤 클럽을 전전하며 이런 저런 남자와 밤을 보냈다. 공허함을 그렇게 채우고 나면, 다시 돌아오는 건 지독한 외로움이었다. 그 속에선 매일 윤기의 얼굴이 떠올랐다. 저를 사랑하지 않는 민윤기의 얼굴이, 아주 지독하리만치 저를 따라다녔다.
그렇게 열흘이 넘었는데, 다짜고짜 새벽에 집 앞까지 찾아와서 한다는 말이 ‘시간을 갖자’였다. 희주는 어이가 없었다.
“ 왜, 헤어지자는 말하긴 미안해? “
“ ... “
“ 말해봐. “
“ ...미안하진 않아. “
“ 개새끼. “
짝,
희주의 오른손에 윤기의 고개가 거칠게 돌아갔다. 윤기의 왼쪽 뺨이 선명하게 붉어지며 부어 올랐다. 윤기는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희주를 쳐다봤다. 극심히 메마른 눈이었다. 희주의 입이 파르르 떨렸다.
“ 시간? 그래. 네 맘대로 해. 근데, 그 뒤에 헤어지잔 말은 신중히 해야 할 거야. “
희주는 가디건을 여미며 윤기를 노려봤다.
“ 내가 쉽게 헤어져줄 거라고 생각한거면 너 진짜 잘못 생각한 거거든. “
희주는 그대로 몸을 돌려 집을 향해 걸어갔다. 그 뒷모습을 보던 윤기는 입 안쪽에서 비릿한 피맛을 느끼며 돌아섰다. 저런 표독스러운 얼굴을 마주하는 건 제 엄마 이후 처음이었기에 윤기는 속이 울렁거렸다. 오랜 시간이 지나왔지만 윤기는 알 수 있었다. 그 속에 담긴 독기를.
공연히 가슴이 답답해져서 윤기는 주먹으로 가슴께를 쿵쿵, 쳤다. 별다른 효과는 없었지만 어린 날의 습관이었다. 엄마를 피해 숨어있던 창고에서, 턱 막히는 숨을 겨우겨우 내뱉으려 했던 습관. 술 한 잔 걸치지 않았는데도 윤기는 머리가 지끈했다.
제 앞에 길게 이어진 골목길이 유난히 어두웠다. 가로등 하나 변변치 않은 희주의 동네는 캄캄한 어둠이 지배한 것 같았다. 그래서 매일 밤만 되면 집 앞까지 데려다달라며 보채던 희주였다. 항상 어둠 속을 홀로 돌아오는 건 윤기의 몫이었고. 희주는 아마 모를 것이었다. 윤기도 사실 두렵다는 것. 희주를 데려다주고 돌아오는 길에 윤기의 걸음이 자주 멈췄다는 것. 그래서 몇번이고 길을 잃었다는 것.
제 엄마를 떠올리게 하는, 한 치 앞도 가늠할 수 없는 어둠은 윤기로 하여금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이런 순간에는 꼭.
여주의 얼굴이 생각났다.
한 번은 초등학생 때 방과후 수업을 듣고 돌아오던 길이었다.윤기는 우연히 길거리에서 피아노를 치는 사람을 보게 되었고, 그걸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까무룩 해가 진 적이 있었다. 엄마가 떠난 뒤 처음 마주하는 어둠에 윤기는 길을 잃었고, 하늘 위에 떠있는 보름달에게 의지해 걸었다. 야속하게도 보름달은 길을 인도해주는 것이 아닌 저를 그저 따라왔을 뿐이었지만.
골목 어귀마다 있던 가로등의 수가 점차 줄어들었고, 길은 갈수록 좁아졌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생경한 풍경이었다. 어느 주공아파트 뒤에 있는 작은 공터였던가. 작은 놀이터만한 공터에는 희미한 불빛만이 반짝이는 가로등 하나가 있었다.
“ 윤기야!!! “
그리고 그 아래에 있던 사람.
“ ...김여주. “
여주였다.
제 옆집에 사는, 시끄럽고 소란한, 그럼에도 밉지 않았던.
제 엄마가 떠나던 날 돌연 장례식장에 와선 펑펑 울어놓곤, 그 다음날부터 생글생글 웃으며 별 시덥잖은 이야기를 주절거리던 작은 여자애.
여주는 저를 발견하곤 우다다 달려와선 제 어깨를 잡고 마구잡이로 흔들었다. 정신없이 흔들리는 시야 속에서 윤기는 여주의 눈가에 반짝이는 물기를 발견했다. 조용히 여주의 행동에 따르자, 여주는 곧 잦아들더니 코를 훌쩍였다.
“ 오늘, 너 집에 갔는데, 없어서, “
그러곤 우엥, 울어버렸다. 걱정했다며, 나쁜 아저씨 따라간 줄 알았다며 우는 아이가 어쩐지 가엾고 귀여워서 윤기는 작게 웃었다. 하지만 금방 어색해져서 미소를 지웠다. 어렸던 윤기였지만 웃음은 아주 오래전 잃어버린 것이었다. 다른 이도 아닌 엄마에 의해서.
그래서 윤기는 고사리같은 작은 손으로 더 작은 여자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정작 위로가 필요한 건 자신이었는데도, 그랬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스쳐오는 아이의 가늘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꼭 애달팠다.
“ 여기 있잖아. “
제 말에 여주는 눈물을 댕글댕글 매단 채로 저를 쳐다봤다. 윤기는 순간 공터가 환해지는 기이한 기분이 들었다. 아까는 흐릿하던 보름달이 갑자기 선명하게 반짝이는 것 같았고, 제 주변의 모든 공기가 붕 떠올라 부드럽게 부유하는 느낌이었다. 이유 모르게 가슴이 콩콩 뛰어왔다. 공연히 가슴을 치고 싶을 정도로.
이젠 거의 다 떨어졌다고 생각한 벚꽃잎 몇개가 살랑살랑 여주의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여여쁘게도.
그 이후, 윤기는 전처럼 어둠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다. 어딘가 있을 여주가 꼭 제 빛처럼 느껴졌기에.
물론 여주가 곁에 없을 땐 자주 어둠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맸지만 어딘가 그녀가 저를 기다리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까마득한 기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래서 윤기에게 그 날은 아주 특별한 날이었다. 오늘처럼 혼자 돌아가는 길이 유독 길게 느껴지는 순간에도, 그 날의 기억이 위안이 되었으니까.
그리고, 윤기가 그 날에 특별한 이름을 붙인 건 아주 먼 훗날의 이야기였다.
그 날의 이름은 첫사랑의 순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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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정의 이름
“ 어. 윤기형!!!!!! “
윤기의 걸음이 멈춘 건, 대학 먹자골목 근처의 작은 호프집 앞이었다.
희주의 동네를 겨우 벗어나서 쉐하로 돌아가던 길에 별안간 제 이름이 불려오자 윤기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삽시간에 표정이 굳었다.
“ 혀엉! “
김태형이었다. 얼마나 마신 건지 서있는 것조차 힘들어보일 만큼 취해보였다.
그리고 그런 태형의 팔에 축 늘어진 채 안겨있는 건.
“ 김여주. “
윤기는 여주의 이름을 부르며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태형에게 온 몸을 쏟고 있는 여주는 이미 취해서 잠에 빠진 듯했다. 풍겨오는 술냄새에 윤기는 얼굴을 구기며 신경질적이게 태형에게서 여주를 떼어냈다. 여주가 순순히 제 품에 안겨왔다.
“ ...얘 얼마나 마셨어. “
“ 누나여? 흐응, 모르게써여 태형이는 세병 넘게 마셨는데! “
“ ...똑바로 대답해 “
“ 진짜 모르겠는데. 근데 두 병은 마셨을걸여? “
윤기의 얼굴이 더 굳었다. 고작해야 한 병 마시면 취하는 애였다.
“ 혀엉. 저 쟤랑. 정구기랑 3차 갈거거등요? “
“ ... “
태형의 손가락 끝에는 가로등 아래서 속을 게워내고 있는 등짝이 보였다. 친군가, 윤기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그래서. 태형에게 물었다.
“ 구니까 누나 좀 부탁해여 “
“ ... “
“ 저눈 정구기랑 3차 감니다~~! “
윤기가 뭐라고 할 틈도 없이 태형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정국에게 달려갔다. 어차피 말려도 끝까지 마시고 올 놈이었다. 윤기는 태형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쓰러지듯 안겨져있는 여주를 고쳐안았다. 그러자 여주가 잠이 깬 듯 눈을 뜨더니 제 눈 앞의 상대가 누구인지 가늠하듯 꿈뻑였다.
“ 윤기야!!! “
그리곤 와락 제 품에 파고들었다. 순간 느껴지는 여주의 온기에 윤기가 설핏 굳었다.
“ 윤기가 웬 일이야. 오늘도 여친 만난다고 해놓구. “
" ...집 가던 길이야. "
" 진짜? 그럼 같이 가면 되겠다아 "
여주는 몸을 떼고 앞서 걸었다. 하지만 몇걸음 못가 크게 휘청이더니 그대로 넘어지고 말았다. 윤기가 급하게 달려가 넘어진 여주에게 시선을 맞췄다. 저를 마주보는 여주는 잠시 빤히 바라보더니, 아, 작은 신음을 흘렸다. 윤기가 눈썹을 찡그리며 시선을 내렸다. 짧은 바지를 입은 탓에 여주의 무릎이 까져있었다.
" 씨. 까졌네에. "
" ... "
" 괜찮아 괜찮아. "
" 뭐가 괜찮아. "
" 엉? "
" 피나잖아. "
" 에이 이 정도는 금방, "
여주가 대수롭지 않게 말하려던 순간 윤기가 큰 손으로 제 무릎을 쓸곤, 주머니에서 티슈를 꺼내 모래가 잔뜩 묻은 그 위를 조심스럽게 닦아냈다. 따끔한 통각이 일었지만, 그보다는 저를 걱정하는 듯한 윤기의 얼굴이 어쩐지 가슴에 쿵 내려앉는 것 같아서 여주는 숨을 훅 들이켰다. 취해서 정신이 온전치 않은 와중에도, 무릎에 닿은 윤기의 손이 지나치게 뜨거웠다.
" 일단 집가서 연고 바르자. "
" ...응. "
" 그리고. "
윤기가 몸을 돌려 여주의 앞에 수그려앉았다. 상황파악이 덜 된 여주가 의아한 얼굴로 가만히 있자 윤기가 말했다.
" 업혀. "
" ...어? "
" 업히라고. "
" 아, 아아냐 나 걸을 수 있어. "
" ... "
" 겨우 이 정도 가지고 뭘, "
" 고집 부릴래? "
" ... "
" 잔말 말고. "
괜한 고집을 피우면 항상 이런 식으로 저를 제압하던 윤기였다. 그럴 때마다 여주는 속절없이 윤기의 말에 따랐고.
윤기가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오자 여주는 순순히 그 등에 업혔다. 제 몸에 닿는 윤기의 등이 넓고 따뜻했다. 윤기가 자세를 고쳐잡고 그대로 일어서서, 천천히 걸었다. 한걸음한걸음 내딛을 때마다 느껴지는 작은 진동에 묘하게 온 몸이 간질거렸다.
" 왜 그렇게 많이 마셨어. "
먹자골목을 벗어나고 고요한 주택가 골목에 접어들자 윤기가 물어왔다. 여주는 밤하늘에 떠있는 별들을 흐린 눈으로 바라보다가, 윤기의 말에 나른하게 답했다.
" 그르게. 분위기에 휩쓸려 버렸어. "
" 한병이 치사량인 애가. "
" 헤. 윤기야 나 안무거워? "
" 말 돌린다. "
" 내가 언제에. "
윤기가 잔소리를 하려는 것 같아서, 여주는 그 등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스며드는 윤기의 냄새가 좋았다. 하지만 얄궃게도 그 사이에서 희미하게 향수냄새가 났다. 시원한 바다같은. 희주를 만나러 갈 때마다 나는. 여주는 강아지처럼 그 냄새를 맡으며 공연히 서글퍼졌다. 잔잔하게 두근거리는 이 가슴이 꼭 죄짓는 것 같아졌으니까.
" ...왜 울어. "
그래서 눈물이 났다. 미련을 다 털어냈다고 생각했지만 아직도 이렇게 흔들리는 제 마음과, 언제까지고 곁에 있을 것만 같던 윤기가 너무나도 멀게 느껴지는 거리감, 그리고 그런 윤기의 상대가 희주라는 사실의 잔인함. 무뎌졌다고 여겼지만 역시 여주에겐 버거운 혼란이었다. 마음이 너무 아팠다.
윤기가 걸음을 멈춰서서 제 등에서 눈물자국을 만들어 내고 있는 여주에게 물었다. 그 슬픔의 근원인 사람이, 왜 우냐고, 그렇게 물었다.
" 내가 너무 바보같아서. "
" ... "
" 그래서 울어. "
네가 이렇게도 다정해서. 이미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네가, 꼭 이 순간만큼은 날 사랑하는 것만 같아서.
그래서, 우리가 더이상 친구가 될 수 없을 것 같아서, 내가 그걸 망쳐버려서 울어. 윤기야.
여주는 목 끝에서 그런 말들을 삼켜내며 눈을 꼭 감았다.
윤기와 여주의 머리 위, 일렁이는 하늘엔 별들이 어느새 사라진 채 깜깜한 어둠만이 가득했다. 달조차 구름에 가려진 채로.
*
" ... "
윤기는 밴드를 떼어내서 연고를 발라 반들해진 무릎 위에 조심스럽게 붙였다. 잠에 든 여주가 깨지 않게 조심스러운 움직임이었다.
다행히도 여주는 규칙적으로 새근새근 숨을 내쉬며 예쁘게 잠들어있었다. 윤기는 그런 여주의 얼굴을 바라보며 확인하듯 그 무릎을 쓸어내렸다.
작고 가냘픈 무릎뼈가 제 큰 손안에 들어오자 윤기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곧 떼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직감이었다. 더 있다간 스스로가 충동에 빠질 수도 있다는.
이미 겼었던 일이었다. 윤기를 죄책감에 빠지게 만들었던.
윤기는 제가 걸터앉았던 쪽을 정돈하며 여주의 얼굴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사이 여주의 눈가에 그렁한 물기가 보였다. 또. 윤기는 작게 혼잣말하며 그 눈가를 조심스럽게 검지로 쓸었다. 손가락 끝에 묻어오는 눈물이 꼭 뜨거웠다. 마음이 괜히 아려오는 것 같았다.
집으로 돌아오던 길 돌연 제 등에서 소리없이 울더니 잠에 들었던 여주였다. 이유를 물어도 자기가 바보같아서라는 이상한 답변만 돌아왔다. 그래서 윤기는 구태여 더 묻지 않았다. 그저 제 등에서 울음이 멈추기를 천천히 기다렸다. 어느샌가 쉐어하우스 근처에 다다랐지만, 여주의 눈물이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윤기는 근처를 한 바퀴 더 돌았다. 가로등이 희미하게 점멸하는 골목은 어두웠지만 여주가 함께였기에 괜찮았다. 아마도 내내 등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여주는 몰랐겠지만.
그렇게 이십분이면 가는 거리를 윤기는 사십분을 걸어 돌아왔다. 집에 도착해 여주를 침대에 눕힐 때 허리가 좀 지끈하긴 했지만, 언제 울었냐는 듯 예쁘게 잠들어있는 여주의 얼굴을 보니 통증은 순식간에 가신 것 같았다.
이유는 내일, 정신이 멀쩡할 때 들으면 될 일이었다. 윤기는 여주가 속상한 일이 있을 때 집요하게 물어오지 않았다. 여주가 스스로 말할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을 뿐.
그래서 재우고 떠나려고 했는데 여주는 잠결에서도 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슬픈 꿈을 꾸고 있나. 윤기는 손가락으로 그 눈물을 닦아내며 잠자코 눈물이 멈추길 기다렸다.
그 때 여주가 입을 열었다.
" 호석아. "
난데없는 호석의 이름에 눈물을 닦아내던 윤기의 손길이 멈췄다. 여주는 입술을 달싹이며 호석아. 반복해서 그 이름을 불렀다.
찬 물을 끼얹듯 윤기의 눈빛이 지독하게 가라앉았다. 윤기는 손을 떼어내며 그런 여주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술기운에 나온 이름이 아니었다. 분명 잠결이었다.
무슨 꿈을 꾸고 있는지 알 순 없었지만, 여주의 꿈 속에서 그 이름이 튀어나왔다. 저가 아닌, 호석의 이름이.
" ...왜. "
왜, 그 이름을 부르면서 그렇게 서글프게 울고 있는지. 윤기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바라만 볼 수 밖에 없어서 가슴이 답답했다. 자신은 닿을 수 없는 그 꿈 속으로 들어가서 묻고 싶었다. 그리고 여주의 손을 잡고 끌어오고 싶었다. 호석이 없는 세계로. 저와 여주만이 있는 세계로. 그 정도의 충동적인 감정이 윤기를 덮쳐왔다.
가만히 여주를 바라만 보고 있는데도 윤기는 숨이 모자란 느낌이 들었다. 저 밑바닥에서 끓어오는 감정들이 온 몸을 달아오르게 만들고 있었다.
" 호석아. "
윤기는 또 한 번 호석을 부르는 여주의 입술위에, 제 입술을 포갰다.
명백한 충동이었다. 그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호석의 이름을,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윤기는 잠시간 닿아온 입술의 온기를 느끼다가 황급히 몸을 떼어냈다. 여주는 입을 꾹 다문 채 규칙적으로 숨을 뱉고 있었다. 더이상 호석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윤기는 떨리는 손끝으로 제 흔적을 지우듯 여주의 입술을 쓸어내렸다.
윤기는 이제서야 알 것 같았다. 이 혼란스러운 감정의 이름을.
최근 윤기의 깊은 내면을 괴롭히던,
여주와 호석이 단 둘이 있기만 해도 이유도 모르게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그 감정의 이름은,
지독한 질투였다.
***************
빠르게 돌아왔습니다!
오늘은 온통 윤기 이야기네요, 여주보다 눈치가 없는 윤기가 드디어 제 감정을 알아챈 듯 하죠!
너 왜케 오래 걸렸어...!!
여튼 이제 로맨스가 급물살을 탈 것 같아요 (아마도...!!!)
여러분의 어남땡은 아직 확고하신지요ㅎㅎㅎ 완결까지 끝까지 달려주시길 기원합니다!
또 곧 돌아올게요.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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