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뭐야! 박찬열 너 자꾸 이딴 식으로 약속 깰 거야?" [스케줄이 갑자기 잡혔는데 어떡하냐. 미안해.] "한두번도 아니고 이게 뭐냐고!" [야, 진짜 미안하다. 응? 나 스케줄하러 간다. 끊어!] 내 대답은 듣지도 않고 끊어버린 박찬열 때문에 더 짜증이 나버렸다. 고딩 때부터 그 놈의 연습실 간다며 약속이 깨지는 경우가 허다했다. 데뷔를 한 이후로는 두 말 할 것 없이 훨씬 심해졌고. 덕분에 친구라고는 박찬열 하나뿐인 나는 외로운 신세다. 이런 주말 저녁에 같이 영화보러 갈 친구 하나 없이, 쓸쓸하게. 오늘도 솔로 플레이구나. - 혼자서 심야영화 보러 가는거니까 꾸밀 필요도 없이 후드집업에 반바지만 입고 슬리퍼를 질질 끌며 영화관에 도착했다. 심야라서 그런가, 커플들이 많이 보인다. 에이씨, 누구는 남친 없어서 살겠나. "월드워즈 성인 1장이요." "네, 8000원 입니다. 좌석은 어디로 하시겠어요?" 어디긴요... 혼자서 온 주제에 정중앙에 앉으면 뻘쭘하기만 하죠, 뭐. 벽쪽으로 딱 붙은 뒷자석으로 자리를 지정받았다. 영화볼 때 팝콘은 안먹어도 콜라는 박찬열꺼까지 다 뺏어먹을 정도로 많이 먹으니까 콜라를 사러 갔다. 줄이 좀 기네. "오빠, 나 살쪄. 안 먹을래. 응?" "넌 좀 쪄도 상관없어. 지금도 엄청 말랐어, 애기야." 내 앞에 서있는 커플로 보이는 사람들의 지랄육갑 떠는 꼴을 보고있자 줄 기다리는 게 그렇게 지루하지만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근데 쟤네는 지들이 뭐 연예인이야? 얼굴들은 왜 죄다 가리고 지랄... 잠깐. "커플콤보 B번 주세요. 음료는 환타 오렌지로 바꿔주시고요." 이 목소리가 흔한 목소리는 아닌 걸로 알고 있다만? 이건 내가 아는 그 불알 두쪽 달린 그 친구, 즉 오늘 나랑 영화 약속을 깨버린 그 박찬열 목소린데. 가만보니 이 큰 키랑 모자 썼어도 안 가려지는 저 커다란 귀. 박찬열 맞네, 씨발. "참나." 내가 어이가 없어서 한마디 하자 여자가 흘긋 돌아본다. 눈이 똥그래서 예쁘장한게 이 년도 연예인인 것 같은데. 아까 애기애기 거렸었지? 아, 그러니까 지금 나랑 약속을 깨고 저 여자애랑 영화를 본다... 이거? "저기요." 내 성격대로 이런 건 그냥 못넘어간다 이거지. 바쁘다며, 박찬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어떻게 10년 친구인 나한테. 무작정 앞에 있는 박찬열의 허리께를 툭툭 쳤다. 뒤돌아보는 박찬열. 그리고 이내 나를 보고는 소리 없이 커지는 눈. "...네?" 네? 네에? 이 새끼가 진짜 돌았나. 모른 척 하겠다, 이거지? "제가 먼저 계산 좀 할게요. 제가 좀 짜증나는 일이 있어서." 당황한 박찬열과 황당하다는 눈으로 나를 보고 있는 여자의 눈을 무시하고 둘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카운터에 있는 박찬열이 주문한 세트메뉴를 힘겹게 들고 계산을 마친 후 여전히 멍때리고 있는 둘의 어깨를 치며 나왔다. 후, 아직도 열불 나네. 얘넨 뭘 이렇게 많이 샀어. 존나 무거워! 혼자 들기엔 좀 많은 먹을거리들을 들고 태연한 척 대기하는 의자에 가서 앉았다. 오며가며 사람들이 흘깃 거렸지만 지금 거기에 신경쓸 만큼 마음이 여유롭지가 않다고, 내가. 핸드폰을 꺼내 변백현에게 카톡을 보냈다. 저번에 한 번 만났을 때 자기랑도 친구하자면서 번호를 주고 받은 걸 이런 일로 쓸 줄이야. 카톡을 보내고서 엄지손톱을 자근자근 깨물면서 기다린지 2분정도가 흘러서 답장이 왔다. > 어? 징어다! 왜? > 아닝ㅋㅋ박찬열너랑논다면서신나서나가던데못만났어? 와, 이새끼 내 이름까지 판거네? 진짜 돌았구나. 박찬열이랑 친구 생활한지 10년도 더 넘은 지금까지 제대로 싸운적은 거의 없었다. 싸울만한 이유도 없었을 뿐더러 거의 박찬열이 져주고 참았으니까. '안내방송드립니자. 10시 10분 월드워즈를 예매하신 분은 3관으로 입장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안내해드립니다.' 상영관으로 입장하라는 안내방송이 들리자 사람들이 입장하기 시작했다. 나도 얼른 들어가서 이 먹을거리나 좀 빨리 먹어치우고 버려야겠다는 생각에 입장 줄을 섰다. 상영관 안에 들어서서 내 자리를 찾다. 그래, 역시 으슥한 데에 앉길 잘했어. 혼자 와놓고 커플 콤보 시킨 여자면 역시 좀 이상해보이니까. "오빠, 아까 그 여자 진짜 이상했어. 그치?" "응? 아, 응..." 아, 진짜 오늘 무슨 날인가. 박찬열이랑 그 여자가 왜 내 바로 앞좌석인거지? 왜? 도대체 왜? 박찬열과 그 여자는 내가 자기들 바로 뒤에 있다는 걸 모르는 눈치였다. "오빠. 이거 좀비 막 나온대. 나 손 잡아줘야 된다?" "어, 어. 그럴게." "오빠. 왜 갑자기 이렇게 굳었어? 식은땀도 나는데?" "아... 아니야. 괜찮아." "그 여자 때문인가? 힝, 우리 오빠 놀랬나부다." 니 년이 자꾸 그여자, 그여자 거리는 년 여기 있다! 나이도 나보다 어린 것 같은게 자꾸 그여자, 그여자 거려. 그거 안 말리고 있는 박찬열도 빡치고. 저 년놈들을 그냥. "어? 불 꺼진다. 영화 시작하나봐. 경아 손 잡아줘." 박찬열의 대답 소리는 없었지만 저 여자의 말이 더 없는 걸 보니 박찬열이 그냥 말 없이 손을 잡아 준 모양이다. 영화가 시작 됐으니 스크린을 봐야 되는데 왜 자꾸 내 앞의 뒤통수한테 눈이 가는지. 영화 초반부부터 서로 머리를 기대고 팝콘을 먹여주고 난리가 났다. "허...?" 내가 영화를 보러 온 건지 아니면 저 둘 뒷통수나 보자고 8000원씩이나 주고 영화관에 온 건지 모를정도로 둘에게만 시선이 고정된 상태다. 영화가 가장 조용한 부분이었을거다. 심야영화를 보러 오는 사람들의 목적이 대개 그렇듯 여기저기서 쪽쪽 거리는 소리가 났다. 로맨스 영화면 이해를 하겠어, 내가! 공포영화도 아닌데 왜 다들 쪽쪽 거리냐고! 뒤에도, 옆에도... 그리고 앞을 보니 키스할 듯한 모양새로 눈을 감고 있는 박찬열이 보였다. "꺅! 이게 뭐야! 오빠 괜찮아?" 내 손 안에서 아직도 많은 양으로 남아있돈 오렌지 환타를 박찬열의 정수리에 부어버렸다. 속에 들어있는 얼음까지, 전부. 차가움을 느끼자마자 바로 인상을 쓰며 뒤돌아 본 박찬열은 어둡지만 봤을거다. 나를, 울고있는 나를. 여자의 비명소리와 박찬열의 제대로 굳은 표정을 보며 영화관을 나와버렸다. 최악이야, 정말. 너무해. 박찬열 쓰레기. 나한테 그러면 안되잖아. 우리가 몇 년 친군데. 여자 생겼다고 이렇게 나 버리면 난 이제 누구랑 어떻게 놀으라고. 난 너밖에 없는데. 손에는 라지컵의 팝콘을 들고 찌질하게 질질 짰다. 나 원래 진짜 안 우는데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철저한 배신감이였을까.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눈물 때문에 흐린 시야로 비틀대며 영화관 로비를 나오던 나는 앞에 있는 계단 턱을 발견하지 못하고 넘어졌다. 쏟아진 팝콘들이 처량맞고 내 신세도 처량 맞은 것 같아 일어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앉아 울었다. 그래. 혼자가 뭐! 박찬열 따위. "야. 일어나." 뛰어왔는지 헝클어진 머리에 흩뜨러진 옷 매무새를 한 박찬열이 앞에 와 서있다. 지금 주저앉힌게 누군데 일어나래. 개새끼. "일어나라고! 뭐하는데, 여기서!" "니가 뭔 상관이야! 씨발, 저 아세요?" "안 일어날래, 정말?!" "아는 척 안할거면 끝까지 하지말고 꺼져! 가서 그 여자애 손이나 더 잡아주고와, 이 찌질한 새끼야!" 바닥에 흩어져있는 팝콘을 손에 잡히는 대로 한움큼 잡아 박찬열에게 던졌다. 맞아봤자 아프지도 않을 거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너무 밉잖아. 처음보는 내 눈물에 많이 당황해서 저러는건지, 아니면 자신의 데이트를 망쳐버린 나에게 어이가 없는건지 쉽게 다가올 생각을 안한다. "흡, 나... 너한테, 실망, 했어. 개새끼야..." 박찬열을 등지고 어서 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어났다. 순간적으로 발목에 엄청난 통증이 느껴지면서 크게 휘청였다. 내가 넘어지려는 게 보이자 옆으로 와서 내 몸을 잡으려는 박찬열의 손을 쳐내고 절뚝이면서 로비 출구를 향해 걸었다. 잡지도 않지, 개새끼. 진짜 개새끼. "업혀." 박찬열이 빠른 걸음으로 따라와서 내 앞에 등을 보이고 몸을 숙인다. 중학교 때 까지도 내가 넘어지거나 아픈 날이면 이렇게 늘 업어서 집까지 바래다 주고는 했는데. 옛생각이 나니까 더 눈물이 쏟아지는데 짜증나 죽겠다. 난 뭐가 이렇게 아쉬워서 우는건데. 어차피 친구로 남기로 했던 거잖아. 울지 좀 말자, 제발. "업히라고." "싫어. 이제 너 안 봐." 박찬열을 지나쳐 절뚝거리면서 한 두발 앞으로 나아갔을까. 조금은 거칠게 나를 억지로 업어버린다. 처음엔 내려달라고 악을 쓰다가 5분 정도가 지나서는 나도 힘이 빠져서 얌전히 우리 집 쪽으로 가는 길을 걷고 있다. 둘 다 아무 말 없이. "...미안해." "......" "너한테는 사실대로 말 했어야 되는데." "......" "너도 알거야. 경아라고, 우리 학교 애였어." 박찬열이 말하니 어렴풋이 생각난다. 우리보다 한 학년 후배였던 그 눈 또랑또랑한 여자애. 박찬열은 물론, 나도 예쁘다고 생각했었던 여자앤데. "저번 달인가. 데뷔해서 찾아왔어." "그래서. 걔가 사귀재?" "...날 좋아한대." 끝까지 밉다, 박찬열. "나 이제 내려줘." "왜, 다 왔어." "내려줘, 그냥." 박찬열의 등에서 내려온 후 또 한번 말 없이 조용하게 우리 아파트 입구까지 다 왔다. 여기까지 바래다준 건 오랜만이네. "...화 많이 났냐?" "찬열아." "...응." 나 아까 너 영화관에서 마주쳤을 때부터 많이 생각해봤는데... 나 아무래도. "너 좋아해." 사실 뭐 어쩌면 어렸을 때부터 계속 너를 좋아했는지도 모르겠다. 니가 나 말고 다른 여자애들이랑 친구하면 항상 삐져서 몇일 동안 말도 안하고는 했었잖아. "근데 넌 나 좋아하지마." "......" "그냥 나 혼자 좋아하다가 나 혼자 조용히 끝낼게." "...야." "알았지? 우리 친구잖아. 난 친구 박찬열 좋으니까." 박찬열이 영화관에서 나를 만났을 때보다 더 당황한 눈으로 나를 보며 어쩔 줄 몰라했다. 그래, 나 같아도 당황할 것 같아. 10년도 넘게 알고 지낸 가족 같은 놈이 갑자기 그러면 당황스러울거야. "마음 접기전에 한 번만 안아보면 안되냐?" 여전히 놀라서 굳어있는 박찬열은 거의 울상인 지경이 되서 나를 본다. 그런 박찬열의 품을 파고들어 안기자 어정쩡하게 손을 들어 내 등을 토닥토닥. 그런 박찬열의 손길에 또 눈물이 찔끔 나와버려서 박찬열의 옷에 꾹 눌러 찍었다. 그리고는 몸을 떨어뜨려 얼굴을 한 번 확인하고는 인사했다. "야, 나 막 심각하게 너 좋아하고 그런거 아니다?" "......" "원래 남녀가 같이 오래 지내다보면 정도 트고 그러는거야." "......" "그럼 잘가라, 박찬열. 여자친구한테 말 잘 하구." 박찬열에게서 뒤돌아 아파트로 들어왔다. 센서등이 켜지며 나만 비춰주는 주황색 빛을 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내일부터 다시 박찬열은 친구야, 친구. 오렌지 환타 향이 나던 오늘의 박찬열은 내일부터 다시, 친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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