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머리아파." "어, 일어났네." 루한은 무거운 눈커풀을 겨우 깜박거렸다. 어젯 밤 과음을 한 탓에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고, 누운 자세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런 루한과 함께 있던 이는 민석이었다. 루한은 눈을 껌벅이며 자신이 누워있는 곳이 어딘가를 곰곰히 생각했다. 우리집이야. 너 어제 쓰러져서. 민석이 말했다. 아... 루한은 그대로 누워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짚었다. "학교, 안갈거야?" "아, 학교." 그러고보니 민석은 이미 교복을 다 입은 상태였다. 루한은 겨우 몸을 일으켰다. 바닥에 보기좋게 개켜진 이불들이 눈에 띄었다. 나 때문에 밑에서 잔건가... 루한은 잠시 민석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루한이 화장실에서 대충 세수를 하고 나오니 민석의 아버지가 아침식사를 차리고 있었다. 순간 눈이 마주쳤다. 나이가 들면 살아온 인생이 얼굴에 보인다는 말이 맞는지, 부드러운 인상이 잠깐 놀란기색을 보였다가 미소를 짓는다. "민석아, 친구는 언제 데려온거니?" "아..." 난처한 기색을 띄운채로 슬쩍 곁눈짓으로 루한을 본다. 술에 취해서 쓰러진걸 데리고 들어와서 재웠어요. 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민석을 본 루한이 민석의 옆으로 가서 섰다. "제가 술을 좀 마셔서... 죄송합니다. 다음부턴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민석이 경악했다. 가만히 있어도 큰 눈이 더욱 커진 채 루한을 향했다. 간밤의 일을 솔직하게 털어놓은 루한은 민석의 아버지를 향해 상체를 살짝 숙였다. 죄송하다는 표시였다. "흠, 그래? 그렇구나. 학생이 그럴 수도 있지. 시간이 늦었으니 얼른 아침 좀 들고 가도록 해. 민석아, 밥이랑 국 좀 친구한테 가져다 줘." "네? 아, 네 아빠." 의외로 그는 덤덤했다. 4인용 식탁에 그와 루한이 앉았다. 민석은 루한의 앞에 국그릇과 밥그릇을 놓고 숟가락과 젓가락도 챙겨주었다. 고마워. 루한은 민석을 보고 싱긋 웃어보였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루한이 숟가락을 드려고 하는 순간, 민석의 아버지가 두 손을 모으며 기도하겠습니다, 라며 운을 떼었다. 루한은 아, 하고는 두 손에 깍지를 꼈다. 항상 자비롭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로 시작한 기도는 좀처럼 끝을 보기 어려웠다. 중간에 루한의 이야기가 끼여있었기 때문이다. 호기심에 방황의 길을 걷지 않게 해주시고… 루한은 제 이야기를 하는 걸 알고있었던지 표정을 살짝 굳혔다. 툭툭, 제 앞에 앉은 민석이 깍지낀 손으로 루한의 손 위를 건드렸다. '뭐' '표정풀어.' '...' 조용했지만 입모양으로 짤막한 대화를 한 후 루한은 굳혔던 표정을 풀었다.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서도, 민석의 아버지의 기도는 계속되고 있었다. - "아빠가 너 조심하래." 민석은 루한과 함께 등교하던 중에 그런 말을 했다. 루한은 어깨를 한번 으쓱해보였었다. 지금 생각하니까 나 진짜 망나니였네. 루한은 녹음실 안에서 부스스한 머리를 손으로 잔뜩 헤집었다. 술먹고 떡되서는 쓰러져서 아들이 집에 데려와 재운 아들친구. 객관적으로 보면 목사인 민석의 아버지 입장에서는 루한이 요주의 인물임이 틀림없었다. 아니, 목사면 날 사랑으로 감싸줘야하는게 아닌가? 잠깐 반기를 들었지만 이내 민석은 그의 아들이니 그런 반응이 당연할 수도 있다고 수긍했다. "루한, 정신 못 차릴래? 해장 제대로 안했어?" "너네가 나 술먹인건 기억 안나지? 밥 먹고 왔어." "헐, 웬일이래 니가 아침밥을 다 챙겨먹고. 그리고 좋다고 부어라 마셔라 했던건 너거든 이 웬수야." 찬열이 계속 루한을 쪼았다. 넌 할 짓도 없냐, 연극부는 학예회준비 안해? 루한의 물음에 찬열이 아! 하고 뭔가 생각났다는 듯 생글생글 웃었다. "뭐야, 미친놈. 실성했어?" "아-니? 니가 좋아할만한 소식이 있어." "뭔데?" "너의 빠오즈에 관련된거." 루한이 에이, 하며 녹음실의 헤드셋을 썼다. 야 진짜 안들을거야? 찬열이 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돼지한테는 관심 없어. 그 뒤로도 찬열이 무어라 쫑알대는 소리가 들렸지만 루한은 모든 말을 깡그리 무시하곤 녹음하는데 방해된다며 찬열을 녹음실에서 내쫓았다. 찬열이 투덜대며 녹음실을 나왔다. 복도로 나오니 민석이 맞은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안녕, 부장!" "어? 어, 그래 안녕 찬열아." 지난 3년간 같은 연극부원으로 지냈지만 서로 어색했던 둘은 끝마저 어색한 눈빛으로 서로를 마주한 후 스치듯 지나갔다. 민석은 처음 받아본 찬열에 인사에 잠깐 의아해했지만, 이내 좋은 일이었으니 됐어, 라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도서관에 가던 길을 마저 걸었다. - "실음부?" "응 그래, 거기. 이름은 모르겠고 엄청 잘생긴 애 있었잖아, 외국인같이. 걔랑 이민철이랑 싸웠대." "웬일이야, 서로 친한 거 아니었어?" 민석의 귀에 거슬리는 수다소리가 들려왔다. 대본을 외우는데 한창 곤두서 있던 신경은 여학생들이 나누는 수다소리에 이미 예민할대로 예민해진 상태였다. 특히 루한을 칭하는 것 같은 수식어들-엄청 잘생긴 애, 외국인, 실음과 등등-은 왜인지 모를 짜증을 동반했다. 마음같아서는 의자를 소리내어 끌어 눈치라도 주고싶었지만, 무른 민석의 성격으로는 택도 없을 일이었다. 민석은 그저 한숨을 쉬며 흑연과 지문으로 얼룩진 대본을 덮고 필기구를 챙겨 도서관을 나왔다. 잔 소리 하나 없이 텅 빈 복도가 좋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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