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이루마 - Love Me
민석은 한숨을 푹푹 내쉬며 대본에 형광펜으로 줄을 쓱쓱 긋다 이내 펜을 탁, 하고 책상위에 올려놓고는 책상에 뺨을 대고 엎드렸다. 실음부 잘생긴 외국인, 이라는 단어 하나하나가 머릿속을 계속 배회했다. 왜일까 계속 생각해봐도, 간밤 연극부에서의 취한 루한의 얼굴외엔 떠오르는게 없어 막막했다. 가슴이 답답해 몇번 쳐보아도 감은 가시질 않았다. 좋아하나...? 떠오른 의문에 곰곰히 제 마음을 되짚어봐도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다행이다.
다행이다. 뭐가? 민석은 당혹스러웠다. 제가 루한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마음이? 민석은 한 때 제 마음을 의심했던 적이 있었다. 교회에서 처음 만나고, 눈을 마주친 그 순간 이후부터 저를 계속 괴롭히고 놀리던 루한에 적의는 없었다. 그러려니, 항상 부드러웠던 제 성격으로 넘겼었고 그 이후로는 그에게 무관심 외의 감정은 내 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찬열이 물었다며 루한이 제 입으로 널 좋아하느냐, 고 묻더라는 말을 했을 때에 자신은 어떠했나.
안된다고, 좋아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제 종교와 지금까지의 신념과도 관련이 있었다. 민석에게 종교란 제 신념의 바탕이 되며 기본이 되는 아주 중요한 삶의 요소였다. 그런 종교의 교리를 어기는 짓은 실수로라도 하면 안된다며 스스로를 타일러왔던 것이 살아온 시간들.
어느 순간부터 민석은 루한을 위험한 인물로 인지하고있었다.
끼익-. 예의 그 불쾌한 문이 열리는 소리가 어지러운 민석의 생각들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리고 열리는 문과 함께 민석의 눈에 보이는 이는 다름아닌 루한이었다.
"...뭐야."
저도 모르게 날카로운 말투로 툭 내뱉었다. 그러자 루한은 머쓱하게 웃으며 문을 닫고 그 문에 기대어 섰다. 참 잘났다, 민석은 속으로 생각했다. 너는 그저 술먹고 지껄인 얘기일 뿐이지, 어쩌면 그저 주정이라 기억조차 안날테지? 그의 말에 흔들리고 있는 제 마음이 너무나 야속했다. 항상 감정과 이성은 같은거라 생각했던 민석이, 서로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오늘부터 일주일동안 연극부 소품청소." "......"
민석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무슨 일로 이 곳의 청소를 맡게되었냐 묻고싶었지만 일부러 묻지 않았다. 한마디라도 더 나누면 좋아하지 않는다, 에서 좋아할지도 모른다,로 마음이 바뀔 것만 같았기에. 민석은 제 일생의 큰 고민거리 앞에서 당황하고 불안해하고있었다.
대본이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극의 제목은 <lunar>. 로미오와 줄리엣을 각색한 연극으로 주요 등장인물은 로미오와 줄리엣, 그리고 보름달이 뜰 때만 모습을 나타내는 천사가 있다. 천사는 여자의 모습을 하기도 하고, 남자의 모습을 하기도 하는데, 민석은 이 중 남자의 모습을 한 천사를 맡았다. 사실 천사는 성별이 없지만, 그래도 사람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설정이라고 연극을 각색한 부원이 말해줬다.
문제는 대사의 양에 있었다. 천사가 옛기억을 회상하며 혼자 말하는 독백의 양이 엄청났다. 연극의 특성 상 그 장면에 모두 쏟아내야 하는 말들이라 민석은 막중한 책임감을 떠안고 역할을 결정했다. 3학년 부장, 곧 연극부 부장이 아닌가. 민석은 애써 수긍하려 노력했지만 여전히 2장을 빼곡히 메우고 있는 대사들을 보면 머리가 아파왔다.
"저도 한 때 당신과 비슷한 상황에 놓인 연인을 만난 적이 있어요. 서로 사랑을 속삭이며 여의치 않는 상황을 이겨내려하는 모습이 얼마나 안쓰럽던지, 도와주려다 신께 혼난 적도 있었죠. 그래서 저는 당신을 이해합니다. 사랑이란, 어쩔 수 없는 감정이며 그와 동시에 주체할 수 없기도 해요. 그대를 응원해요."
"많이 힘들거에요."
"해줄 수 있는게 없어서 미안해요."
독백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대사를 찬찬히 외우기 시작했다. 루한은 민석의 옆에 와 앉아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부담스러운 눈길에 민석이 들고있던 대본을 조금 더 위로하곤 얼굴을 완전히 가려버렸다.
"그래도 이렇게... 가끔 말동무... 해 줄 순 있을.."
야속하게도 루한이 대본을 그의 손에서 빼어냈다. 아 왜...! 민석이 고개를 루한쪽으로 홱 돌렸다. 루한이 무표정해 있다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뭔가 이상해. 도대체 뭐가. 민석은 입술을 삐죽거렸다. 루한이 대본을 한장한장 넘겨보다 아! 하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대사에 감정이 없잖아. 대본 다 읽어본거 맞아?" "설마 다 안읽어봤겠어?" "그야 그렇지만... 이것 봐, 여기서 천사는 로미오를 좋아하는 역으로 나오잖아." "..." "근데 니가 연기하고 있는 천사는 뭐랄까... 그냥 로미오와 줄리엣을 안쓰럽게 생각하는 천사같아." "그런 천사가 아니면 뭔데?" "그건 어느 천사나 그렇게 여길 수 있잖아. 로미오를 흠모하는 천사로서 그들을 안쓰럽게 생각할 수 있는 천사가 바로 너라고."
어느정도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극에는 재미를 위해 은근하게 나타내야하는 설정이 한가지 더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천사가 로미오를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민석은 잠시 고민하다 알았다며 다시 대본을 가져와 연필로 구석에다 '천사의 심리에 주요해서 연기할 것.' 이라고 적어두었다. 루한이 다시 대본을 가져갔다. 이건 뭐, 줬다 뺏었다... 나랑 놀자는 것도 아니고. 민석이 루한과 눈을 마주치며 이리 줘. 라고 말했다.
"내가 상대역 해줄게." "니가 로미오역을 맡겠다구?" "응."
둘은 한참이나 상대역을 해주니, 안해주니를 두고 말싸움을 했다. 애초에 말싸움이라는 단어는 민석에게 어울리지 않았지만, 루한이 워낙 고집을 부리는 탓에 그랬다. 흔히 괜한 오기라고들 한다. 루한은 결국 민석에게 허락을 받아냈다. 노래든 연기든, 감정표현이 중요한거야. 루한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시작한다. 민석이 대본을 책상의 가운데에 두고 루한이 읊어야 할 대사를 손으로 짚어주었다. 루한이 고개를 끄덕거리자, 민석의 표정이 살짝 바뀌었다. 그는 극 중 역할에 몰입하고 있었다.
"어, 안녕. 또 왔네요." "...네. 힘든 일이 있었어요." "무슨 일이에요, 말해봐요."
"저한테는, 아주 사랑스럽고 무엇보다도 소중한 연인이 있어요." "......" "첫눈에 서로에게 반해서... 지금까지 만나고 있어요. 앞으로도 그럴거지만..." "울지말고. 계속 말해봐요." "서로의 집안끼리 사이가 좋지않아요. 굉장히요. 길에서 만나면... 죽여버리기도 해요." "아..."
"전 다음주에 다른 사람과 약혼을 하게 되요. 그래서 내일 떠날거에요." "그건...!" "네?"
민석은 살짝 뜸을 들였다. 언뜻 본 민석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고, 루한은 느꼈다.
"좋은방법이... 아니잖아요." "하지만 도망치는 것 외에는 피할 방법이 없어요. 저도 많이 생각해봤어요. 이게 정말 옳은 감정인지, 제가 그녀를 정말 사랑하는지... 끝은 결국 사랑이었어요." "저도 한 때 당신과 비슷한 상황에 놓인 연인을 만난 적이 있어요. 서로 사랑을 속삭이며 여의치 않는 상황을 이겨내려하는 모습이 얼마나 안쓰럽던지, 도와주려다 신께 혼난 적도 있었죠. 그래서 저는 당신을 이해합니다. 사랑이란, 어쩔 수 없는 감정이며 그와 동시에 주체할 수 없기도 해요. 그대를 응원해요."
"제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집안 어른들을 설득해볼까요? 제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많이 힘들거에요."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많은 힘이 되었어요. 열심히 노력해서, 꼭 그녀와 함께 살거에요. 예쁜 아이도 낳고, 누구보다 멋진 집에서, 그렇게..."
"해줄 수 있는게 없어서 미안해요." "괜찮아요."
대본 위로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씬이 끝났음에도 민석은 계속 훌쩍거렸다. 괜히 말해줬나... 루한은 작게 읊조리곤 어색하게 민석의 어깨를 손으로 토닥거렸다. 민석이 루한의 손길에 놀라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바싹 다가온 루한의 얼굴이 가까웠다.
두 얼굴사이의 간격이 너무도 좁아 루한의 숨결이 느껴졌을 때, 민석은 진심으로 이 상황이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S | 제가 쓰면서도 너무 두근대고 안쓰럽고 막 그렇네요...ㅠㅠ 스토리상 잠깐 등장하는 연극인데도 천사의 역할이 너무 비참해서 그랬어요. 이렇게 예쁜 애들을 나중에.. 휴휴 ㅠㅠㅠㅠ 오늘은 이전보다 분량 조금 늘여왔어요! 여전히 짧지만 ㅇ<-<. 헷 아마도 10편에서 12편정도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항상 읽어주시고, 피드백 해주시는 모든 분들 감사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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