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피니드ㅡ]님과 [한재호]님께 감사드립니다.*
열일곱의 봄 07 Written by. 여우 |
찬 바람이 귓가를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하긴…, 있을리가 없지. 아오, 김성규 병신병신. 성규는 이마에 인상이 써졌다. 입으로는 없을 것을 알았다며 중얼중얼 거리면서도 눈동자는 얼마나 빨리 굴러가던지 저 멀리서도 성규의 눈 굴러가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다. 성규는 애꿎은 휴대폰 홀드버튼만 눌렀다 뗐다를 반복했다. 아씨, 그냥 집에 들어갈까. 김성규-! 부르르 떨리는 몸에 건물속으로 들어가려던 성규의 몸이 뒤돌아졌다. 익숙한 음성은 우현이었다. 우리 성규, 여기서 뭐해-. 너야말로 뭐하는 거야!. 코 끝이 찡하게 빨개진 채로 배시시 웃고 있는 우현의 꼴은 꽁꽁 얼은 동태보다도 못 해보였다. 야 이 멍청아, 집이라도 쳐들어오던가!, 네 시간 째 뭐하는 거야, 밖에서. 씨방나무 같은게…. 성규의 코 끝도 짠해졌다. 틱틱대는 가로등때문인지 저 멀리 서 있는 우현의 덩치가 유난히도 커보였다. 성규는 맨발에 슬리퍼를 찍찍 끌며 우현에게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아씨, 이거 뭐야…, 악! 김명수우! 성규는 우현가까이 가서 꼭 안아주려하던 참이었는데 가까이서 보니 유난히도 커보이던 우현의 덩치가 사실은 뒤에 업힌 술에 취한 명수라는 걸 알게 되었다. 참다 못한 성규의 입에서 육두문자가 남발하기 시작했다. "아니, 시발-. 아 왜 이 김명수가 니 등에 업혀있는데, 진짜 장난하나-." "…헤, 기다리다가 만나서…." "어떡하라고, 그냥 버리고 와야지. 너 그럼 나 기다린 게 아니고, 얘 바래다 주러 왔어?" "나 춥고…, 무거운데…. 우리 성규, 화 그만 내고 들어가서 얘기하자, 응?" 성규가 화를 내던지 말던지 배시시 웃기만 하는 우현을 보니 성규로서는 한숨이 절로 나올 수 밖에 없었다. 망할 놈…, 걱정은 걱정대로 시키고. 게다가 저렇게 숨을 가쁘게 쉬고 있으면서 저 미친놈은 왜 데리고 있었던 거야. 성규의 짜증이 한껏 솟구쳤다. 성규는 바보같이 웃기만하는 우현때문에 속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결국 성규가 할 수 있는 것은 두 눈을 흘기다 명수의 등짝을 매섭게 내리치는 것 뿐이었다. 아씨…, 진짜 속상하게. 성규는 바보같이 웃고 있는 우현을 뒤로하고 앞서나갔다. 그 뒤를 졸졸 쫓던 우현은 얼굴가득 송글송글 땀이 맺었지만, 성규가 뒤돌아볼때면 또다시 바보같이 웃어주기만 하였다. * 여기다가 눕히면 돼-?. 그냥 방 아무데나 던져 놔. 명수의 방에 처음으로 발을 들인 우현의 질문에도 성규는 대충 말을 올렸다. 밖은 흰 색으로 온통 도배해놓더니, 왜 이 방은 이렇게 까만색이야? 각자 취향이야-. 으흥…, 그러하구나. 우현의 고개가 끄덕끄덕하는가 싶더니 어서 나오라는 성규의 말에 서둘러 문을 닫고 방을 빠져나왔다. 식탁의자에 앉아 오렌지주스 한 잔을 권하는 성규의 모습은 가히 매혹적이었다. 우현은 고개를 들자마자 보이는 성규의 모습에 꿀꺽 침을 한 번 삼켰다. 이리 와서 앉아봐-. 우현은 천천히 식탁으로 다가가 맞은 편 의자로 가 앉았다. 투명한 글라스에 담긴 오렌지 주스의 새큼햔 향이 우현의 코로 와 닿았다. 얼마나…기다렸는데. 성규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은 것이 걱정이 가득 담겨있음을 알 수 있었지만, 그 착 가라앉은 목소리를 와구와구 먹어버리는 우현의 목소리는 너무나 천진난만 했다. 세…시간 정도밖에 안 기다렸어! 아오…, 이 멍청아! 추우면 집에 가야할 거 아니야! 성규의 분노가 하늘을 찔러 옥황상제의 항문에 틀어박히기 직전인데도 불구하고 우현은 도무지 침착함을 잃을 줄을 몰랐다. 오히려 이런 성규의 태도를 당연하게 예상했다는 듯이 말이다. 딱 열두시까지만 기다리려고 했는데, 열한시에 명수형이 오셨단 말야-. 그게 뭐 어쨌는데, 그래서 넌 어떻게 했는데? "너 울었다고 하시길래, 같이 술동무 해드렸는데?" 뭐…뭐? 성규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저 멍청한 꼴뚜기가 어디까지 말한거야. 자신은 몇 시간동안 좋아하는 마음을 걸렸을까 걱정하느라 눈물까지 질질짜고 있었는데, 그런 자신을 보고 저 씨방나무는 얼마나 행복해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니 치가 떨렸다. 아마 내일 명수 등짝의 안전은 보장되지 않을 것 같았다. 야-, 너 그냥 집에 가. 성규는 하다못해 결국 식탁위로 엎어져 고개를 들지 못했고, 그런 성규를 바라보는 우현의 얼굴에 당혹감이 드러났다. 왜…왜. 놀란 듯 질질 끌려대는 우현의 목소리가 성규의 감성을 자극했지만 이미 쪽팔림이란 쪽팔림은 모두 다 당해버린 성규의 얼굴이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들 수 있을리가 없었다. "대체 왜 그러는데, 응?" "…아 됐으니까, 가라고." "아직도… 화난거야?" "아니니까…가." 우리 성규 왜 그래-, 응? 아까 왜 화났는지부터 말해줘, 응? 우현의 질문이 끊이지를 않았다. 목소리는 또 왜이리 부드러운 것인지 성규의 머릿속이 웅웅 울려댔다. 밤 늦은 시각, 막 잠들려는 자신을 괴롭히는 모기 두마리보다도 징그러웠다. 신경쓰지 않고 어서 가라는 말만 반복하려 하는데도, 이 놈의 입술과 혀는 뇌의 명령을 도무지 받아들일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아…아니, 그게…, 아씨. 그러다 갑자기 이런 모습을 하고 있는 자신이 다시 쪼잔해보였다. 난 쿨해, 쿨하다고, 난 상남자니까. 성규는 스스로 주문을 몇 번 걸다시피 중얼거리더니 고개를 들어올려 우현을 바라보았다.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뱉기가 몇 번이었을까. 성규는 먹혀들어갈 소리가 걱정되어 아랫배에 힘을 주고서는 목을 가다듬었다. …그 여자애…. 소리는 잘 들렸다만 너무 떨려 들린 것이 문제였지만. "뭐라고…? 안 들려, 우리 성규야- 조금만 더 크게 말해줘." "아니…이…. 아까… 그 여자아!" "여자…?" "아…응." 아아아-. 점점 기어들어가는 성규의 목소리에 우현은 무엇인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술새로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는지 그만 배를 잡고 테이블 위로 쓰러지듯 엎드려버렸다. 웃지말고 해명이나 해-. 성규는 엎드린 우현의 머리를 톡톡 두드리며 뾰루퉁히 말을 이었다. 우현은 고개를 들더니 끅끅거리는 웃음을 참으며 천천히 입을 뗐다. 아니-, 내가 사실 널 불러서 할 말이 있었단 말이야. 우현의 입술이 계속해서 무언가를 말하는데도 성규는 도무지 기다릴 수가 없는 것인지 계속해서 손톱을 깨물었다. "떽-, 손톱 깨물면 못 써." "아씨. 그냥 집에 가라고 한다?" 아이- 사람이 인내를 가져야지. 쓰읍, 우리 성규. 쉿, 말해줄게. 우현의 다독임속에 이 멍청한 김성규는 또다시 홀랑 넘어가서 슬쩍 입을 열었다. …그럼 말 해보던가…. 입술을 달싹이는 성규의 숨결이 이내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연 우현에게로 옮아갔다. 우현은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서도 자신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귀를 쫑긋거리는 성규의 모습에 자꾸만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래도 귀여운 내 새끼가 언제 또 토라질지도 모른다는 마음에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떼었다. 어쩜 저렇게 귀여워도 되는 것인지 사실은 자신의 입술보다도 성규의 입술을 확 깨물어버리고 싶었지만 빨리 말하지 않으면 정말 집으로 보내버릴 태세로 툴툴거리는 모습에 얼른 입을 열었다. "나 연기연습생이었잖아. 근데 나 아이돌로 데뷔할지도 몰라. 카메라테스트할 때 노래 한 곡 불러보라고 해서 불렀거든. 오늘 처음 오라고 해서 연기연습하고 나머지 트레이닝 받을 줄 알았는데, 그렇게 말하는 거 있지? 나 사장님이랑 일대일로 면담도 했어." "그래서… 뭐. 아이돌로 데뷔 하는데 뭐 어떡하라고." "응응. 어때? 나 좀 멋있어 보여?" "어. 근데 지금은 하나도 안 멋있으니까 아까 그 여자얘기나 계속하지?" "풉, 우리 성규 급하네. 우쭈쭈." "아씨- 하지마, 진짜." "아, 어쨌든-. 처음으로 동기 연습생들 만나봤는데, 같이 배우 되자고 초등학교 때 약속했던 애가 있었거든. 소꿉친구였는데 거기서 딱 만난 거 있지? 그래서 아는 척 좀 하고, 집 잘가라고 인사도 해줬지." "그럼…, 그 여자애가 네 소꿉친구고?" "뭐…, 헤. 그런 것 같은데?" 웃지마-. 성규는 미간을 확 찌푸리며 괜히 부끄러운 마음에 우현의 앞에 두었던 오렌지주스를 단숨에 들이켰다. 아씨- 이럴 줄 알았어, 괜히 오해했잖아. 성규는 큼큼 거리며 귀를 붉혔다. 어- 우리 성규 귀 빨개. 크헠, 켁-. 성규는 마시던 오렌지주스에 사레라도 들린 것인지 켁켁 대면서도 얼른 두 손으로 귀를 가려버렸다. 에…이, 우리 성규 질투했었던 거야? 아, 아니라고! 성규는 토마토보다 빨갛게 익은 볼이 터지기 일보직전이었다. 우리 성규 지금 여기저기 다 빨개. 으아, 몰라- 이제 집이나 가. 싫은데에-? 저런 씨방나무…. 우현은 일부러 성규를 놀리려는 듯 질질 말을 끌며 괴롭혔고, 성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자신의 어이없는 질투에 부끄러워하며 중얼중얼 계속해서 비속어를 곱씹는 것 뿐이었다. * 버스를 놓쳤다며 택시비를 빌려달라는 우현의 말에 지갑을 열어보았지만 역시나 성규의 지갑또한 텅 비어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어, 없네…. 뭐 별 수 없네, 여기서 자야겠다, 헤…. 우현의 능청스런 목소리가 성규의 귓전에 들렀다. 야야, 어딜! 성규의 흥분한 목소리가 집 안에 울려퍼지는데도 배시시 웃는 우현의 표정이 개구져보였다. 이씨-. 성규는 또다시 혼자 김칫국을 마셨나하는 생각에 쥐구멍으로 숨어들어가고만 싶었다. 오…옷 빌려줄게, 기다려. 성규는 이내 붉어진 얼굴을 감추려 옷장으로 후다닥 달려가버렸다. 이것을 입히자니 너무 불편할 것 같고, 저것을 입히자니 평소 자신의 패션센스가 드러나는 것 같아 걱정이 넘쳐흘렀다. 아씨, 대체 어쩌자는 거야…, 헙. 그 순간 성규의 허리를 무언가 강하게 움켜쥐었다. 뭐…뭐야, 이거. 성규는 자신의 배꼽위에 가지런히 겹쳐 안착된 손으로 시선을 옮겼다. 거참, 손 한 번 오질라게 부드럽당가.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옷장을 향하던 성규에게서 육성이 터져나왔다. 아씨! 이…이거 안 놔? 역시나 우현이었다. 등에 닿은 건 조금 더 따뜻하다고 느껴지는 얼굴과 가슴뿐인데, 왜 닿지도 않은 자신의 가슴이 이렇게 물만난 고기마냥 팔딱팔딱 대는 것인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우현의 팔을 걷어낸 성규가 대충 옷을 꺼낸 뒤 등을 돌렸다. 허억…. 옷장에 등을 맞댄 성규가 더 이상 달아날 곳은 없었다. 아씨, 뭐하냐고! 성규의 텁텁한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리며 성대를 빠져나오자 성규의 머리맡까지 다가온 우현의 광대가 싱긋 올라갔다. 쪽-. 뽀뽀해줄라 그러지. 우현은 성규의 머리를 살짝 헝클이고서는 멀어져갔다. 나 침대에서 자도 돼? 싱글대는 목소리가 망원동 전체에 퍼지는 게 들리는데도 성규는 옴싹달싹하지 못한 채 그자리에 서 있어야 했다. 안 누워? 아아…어, 누울건…데. 정말 저 멍청한 김성규는 자신이 주인인데도 그 자리에 눕지를 못했다. 결국 우현의 손에 이끌려 침대에 누운 성규는 귓가를 스치는 우현의 숨결에 밤새 한 숨도 잘 수가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