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사랑하는데에 반해 더 이상 그 사람은 감정이 없음을 알았을 때,
여전히 사랑하는데에 반해 그 사람은 애초에 감정이 없음을 알았을 때,
전자와 후자중 더 불쌍하고 슬픈 것은 없다.
둘 다 똑같이 불쌍하고,슬플 뿐이다.
*
**12**
그의 말을 끝으로 의자가 넘어지는 소리가 났고,눈 깜짝할 사이에 그가 준면에게 달려들었다.그가 준면을 때리기 시작했고,그와 준면 둘이 뒤엉켜 넘어졌다.주변에 있던 애들은 말릴 생각도 채 하지 못했고,그 모습을 멍하게 보고 있던 나와 찬열,수정이는 정신을 차리곤 급하게 둘을 떼어내기 시작했다.그의 팔을 잡아오면 그는 뿌리친 채 다시 달려들기를 반복했다.결국은 찬열은 그의 몸을 억지로 잡아 뒤로 물러났고,나와 수정이는 바닥에 누워있던 준면에게 다가가 몸을 일으켜줬다.준면의 입술은 다 터져 피가 났고 얼굴 곳곳에 생채기가 나있었다.찬열에 붙잡힌 그가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찬열에게서 벗어났다.씩씩거리며 화를 참는 것이 보였다.준면을 바라보다 이내 그를 바라보니 그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그러고는 순식간에 주위에 있던 의자를 들어 준면에게 던젔다.아슬아슬하게 빗나가긴 했지만 준면의 팔에 맞았고,꽤나 아픈 듯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팔을 감싸고 있었다.
"김종인!김준면!"
"...."
"학교에서 뭐하는 짓거리야!"
"...."
"김준면 외출증 써줄테니까 병원갔다와라.김종인,넌 나 따라와."
급식실에서 지도를 하고 계시던 학생주임 선생님께서 큰 소리에 오셨는지 다가와 소리를 지르셨다.학생주임 선생님의 말씀에 준면이 몸을 일으키려 했고,나와 수정이가 팔을 잡아 일어서는 것을 도와줬다.준면이 선생님께 작게 목례를 했고,돌아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그는 크게 한숨을 한번 쉬곤 머리를 쓸어넘겼다.선생님께서 그를 노려보다 앞질러 교무실로 걸어가셨다.그가 그런 선생님을 바라보다 뒤를 따라 걸어가기 시작했다.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구경하던 아이들이 꾸물대며 갈 생각을 안 하자 찬열이 크게 소릴지르며 가라말했다.찬열의 몸도 잘게 떨리고 있었다.
****
무슨 생각으로 수정이와 교실까지 올라왔는지도 몰랐다.수정이는 정작 자신도 놀랐으면서 괜찮냐며 내게 물었고,멍한 정신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솔직히 말하자면,괜찮지 않았다.무슨 정신인지도 모르겠고,준면이 했던 고백과,그의 행동이.또 찬열의 모습이,그 세명이 오버랩되면서 머릿속을 어지럽혔다.긴장하거나 불편하면 배가 항상 아파오곤 했는데 손끝이 차가워지도록 온 몸에 피가 안 통하고 배가 아팠다.그렇게 정신이 나간 채로 오후수업이 흘렸고 종례를 마친후 복잡한 마음으로 가방을 쌌다.그 때 책상 위에 올려둔 핸드폰에서 작게 진동이 일었다.
'나 병원인데 가방 좀 갖다줄수 있어?'
준면의 문자였다.준면의 문자에 아까 내게 고백하던 준면이 떠오르고,준면을 때리던 그,그리고 찬열의 모습까지 다시 눈앞에 겹쳐져 나타났다.문자를 보다 눈을 감곤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었다.안 간다고 해도 이상하고,간다고 하더라도 이상했다.문자창을 보며 한참을 고민하다 알았다며 문자를 다시 넣은 채 가방을 챙겨 준면의 반으로 향했다.선생님께 말해 가방을 가지러 반으로 들어가니 온 시선이 나를 향했다.부담스러운 감에 고개를 푹 숙이며 가방을 서둘러 챙겨 교실을 나왔다.두개의 가방을 들고 병원까지 가는데 하늘에선 또 비가 떨어질 듯 어두웠다.걸음을 빨리해 병원 응급실로 들어갔다.
"어디있어요?"
"아..벌써 왔어?나 응급실 입구 쪽에 있어."
준면에게 전화를 걸어 물으니 입구쪽에 있다며 대답하는 준면에 알겠다며 전화를 끊고는 이리저리 고갤 움직여가며 그를 찾고 있었다.그러기를 몇 번 옆에서 ㅇㅇ아!하는 목소리가 들렸고 고갤 돌리니 그가 한쪽 팔에 깁스를 한 채로 링거를 맞고 있었다.준면에게 다가가 가방을 건내니 받아 발끝에 놓고는 다시 자리에 누웠다.여전히 그는 웃고 있었다.그런 그를 바라보다 애써 외면하고 가본다는 말을 하니 그가 내 팔목을 잡아왔다.
"나 링거 다 맞고 가래."
"...근데요?"
"같이가자."
그의 썩 내키지 않는 제안이였다.한숨을 쉬다가 이내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그가 여전히 팔목을 잡은 채로 웃고는 눈을 감았다.잠을 자려는 듯 했다.그가 내 팔목을 잡고 있는 탓에 어찌할 도리가 없어 보조의자를 끌어당겨 앉아있었다.마음 속 한편으론 답을 재촉하지 않는 준면에 다행이기도 했지만 다시 머리가 아파왔다.도대체 그는,무슨 생각으로 내게 고백을 했던 것인지.할말이 있다던 준면에 인상까지 찌푸려가며 여기서 얘기하라하던 그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내 팔목을 잡고 있던 그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들어 겨우 잡힌 손을 풀어냈다.화장실이라도 다녀올까 싶어 내 가방을 벗어내려놓은 채 침대 주변에 쳐있던 커튼을 걷어 나갔다.근데 내 앞에는 의사가운을 걸친 남자의 가슴께가 보였다.
"ㅇㅇㅇ씨인가요?"
"네?..네.근데 누구세요?"
"김준면 주치의,구희수라고 합니다.그 쪽이랑 얘기를 하고 싶은데."
****
구희수라는 그 남자의 말에 무슨 얘기냐 내가 되물었고,그는 나를 자신의 방으로 안내했다.책상 위에 올려진 명패를 보니 정신과 교수 구희수라 되어있었다.이 남자는 분명 자신을 김준면의 주치의라 소개를 했었다.근데 다른 것도 아니고 왠 정신과,라는 생각이 들어 커피를 타는 그의 뒷 모습을 바라보다 방 안을 둘러봤다.그 남자가 이내 뒤로 돌아 쇼파에 앉아있던 내 앞으로 와 앉아 탁자 위에 종이컵을 올려두었다.
"내 방에 코코아같은 건 없어서.물도 괜찮죠?"
그의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종이컵을 들어 물을 마셨다.몇 모금 들이키다가 다시 종이컵을 탁자 위에 올려두고 입술을 혀로 쓸곤 그를 바라봤다.그는 종이컵에 담긴 뜨거운 커피를 홀짝이고 있었다.빈 방 안에서 우리 둘은 조용했다.그가 손에 들고 있던 종이컵을 내려놓고는 한참 후에 손끼리 맞부딪히며 소리를 냈다.탁자 위 무늬를 눈으로 쫓던 내가 놀라 그를 올려다보자 그가 작게 웃곤 입을 떼었다.
"나는 보시다 싶이 정신과 의사에요."
"..."
"김준면씨의 주치의기도 하고요."
"...네."
"지금 많이 혼란스럽죠?김준면이라는 사람이."
"..네."
"..김준면씨은 병이 있어요..일종의 집착증이죠.집착은 누구나 있어요.당신도,나도.근데 김준면씨는 병적인 수위를 초과했어요.부모님이 사람을 죽인 후부터 생긴 것으로 생각해요.사고현장을 바로 옆에서 지켜봤다고 하니까.부모가 죽인 사람은 친분이 꽤나 있던 사람이라더군요.부모는 그 사람들을 죽이고 높은 자리에 올라갔어요.그리고 그 사람들의 아이는 불구덩이 속에서 겨우 살아 다른 집으로 입양이 됬고요..사고현장 속에 있던 김준면씨가 보던 건 불타고 있는 자동차가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자신 또래의 어린 아이였어요."
"...근데요."
"그러고 그 이후로 준면이 집착하기 시작한 건 그 여자아이였어요.여자아이를 못 찾자 병은 심해졌는데,그 때 그 아이를 발견했어요.그리고 그 때부터 더 병은 전보다 더 빨리 악화됬죠.바로..당신을 발견하고부터 말입니다.ㅇㅇ씨."
멍하게 듣고만 있다가 그의 말에 머릿속에 일어나는 온 사고회로가 정지한 듯 싶었다.온 몸의 피가 말라가는 기분이였고,꽉 깨문 입술에서 피의 맛이 느껴졌다.얼굴이 새하얗게 질려갔고 주먹을 쥔 손은 부들거리기 시작했다.기억이 안 날테지만,이라며 말을 다시 시작하는 그를 바라보고는 그만하라며 소리를 질렀다.목구멍이 말라갔다.길을 잃은 눈은 정처없이 이리저리 움직였고,그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문을 열려 문고리를 잡았다가 이내 그가 하는 말에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힘들겠지만 이게 당신이 직면해야 하는 현실입니다."
문을 열고 뛰쳐나와 그대로 병원밖을 뛰쳐나갔다.
****
밖에는 언제 내리고 있었는지 모를 비가 내리고 있었다.가방도 놓고 그대로 뛰쳐나왔다.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고 그냥 빗속에서 집을 향해 달리고 있을 뿐이였다.빗물이 얼굴을 스쳐내려가고 비에 젖은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휘날렸다.물기에 쩍 달라붙은 교복이 여간 불편한게 아니였다.집으로 가는 길 가로수에는 여름이 다가오자 싱그러운 초록빛깔 잎사귀가 가득했다.
집으로 들어가 축축히 젖은 몸 그대로 현관문을 타고 주르륵 주저 앉았다.달리면서 언제 흘렸는지 모른 눈물이 얼굴에 붙은 빗물과 엉켜 턱밑으로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물에 젖은 머리를 덜덜 떨리는 손으로 쓸어넘겼고,온 세상이 핑글핑글 돌기 시작했다.머리가 지끈대며 아파왔다.처음엔 흐느끼던 작은 울음소리가 점점 커져 비명소리로 변해갔다.목이 쉬어갈 정도로 소리를 지르며 울었다.무릎에 묻은 고개 새로 터진 울음소리가 계속해서 새어나왔다.창 밖으론 아직도 비가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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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에서 일어나니 내 옆에 그 애는 없었다.겨우 편안해진 몸이 다시 불안해졌다.습관적으로 손톱을 입술에 가져다대곤 잘근잘근 씹었다.텅 빈 보조의자가 불안을 더했다.뭐 마려운 개마냥 침대주변을 돌아다니다가 나가서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에 쳐져있던 커튼을 걷으려 발걸음을 옮겼다.구희수가 커튼을 열고는 들어왔다.그의 손에는 그 애의 가방이 들려있었다.그 애의 가방을 쳐다보다가 이내 그에게 시선을 옮겼다.미간이 찌푸려졌고 온 몸이 작게 떨려왔다.
"ㅇㅇ씨가 놓고 갔어요.갖다줘요."
"...그 애 만났어요?왜 만났어요?혹시..내 얘기 말했어요?말했냐고!!"
"..말했어요."
"왜 말했어요?왜?왜!!"
악에 받친 소리를 지르다가 주저앉았다.눈물이 가득 고인 눈에서 방울방울 눈물이 쏟아졌다.엄마를 잃은 5살 어린 아이처럼 엉엉 소리내어 울음을 터트렸다.내 집착이 병적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다른 것도 아닌 오직 그 아이를 위한 집착이란 것도 알고 있었고,상식적으로 생각해서 그 애를 가질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그래서 집착은 더 심해져갔다.그냥,그냥..오직 그냥 그 애만 모르면 된다고 생각했었다.그 애만 모르면 영원히 괜찮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인생은 언제나,내가 원하는 데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였다.
내 가방을 어깨에 메고는 그 애의 가방을 손을 들고는 집으로 걸어갔다.엉엉 우느라 부은 눈은 따갑기 그지없었고 머리가 지끈댔다.그 애는 이제 날 싫어할 것이다.더 이상,옆에서 착한 척 하며 있을 수도 없었다.생각보다 신은 잔혹했고,무서운 형벌을 그대로 받아들인 나는 더욱 잔혹했다.애초에 내가 그 자리에 있지 않았더라면,아니 그 전에 그 차에 그 애가 없었다면,하는 생각을 안 해본 것도 아니였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애에 대한 집착은 사그라들지 않고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훌쩍이며 한참을 걷기를 주택가에 들어섰다.그 애의 집을 지나쳐 우리집 앞으로 왔다.그러다가 이내 내 손에 들린 그 애의 가방이 눈에 들어왔고 그 애의 집으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대문에 지붕이 있어서인지 대문 밑은 젖어있지 않았다.대문 밑 젖지 않은 곳에 가방을 살짝 내려놨다.그 애의 가방에서도 그 애의 향이 나는 것만 같아 쉽사리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한참을 가방만 내려보다 힘겹게 발걸음을 떼 집으로 향했다.불 꺼진 집 안으로 신발을 벗고 들어와 불도 켜지 않은 채 거실 쇼파 위에 그대로 널부러졌다.거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달빛이 얼굴에 비춰졌다.손을 들어 눈을 가리고 있다가 이내 몸을 일으켰다.속눈썹이 축축히 젖어있었다.
천천히 계단을 올라 다락방으로 향했다.다락방에 쳐놓은 커튼 때문에 빛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아 깜깜했다.더듬거리며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확 재꼈다.달빛이 쏟아져 다락방으로 들어왔고,어둠 속에 보이지 않다가 달빛에 비친 방 안 벽면에 빼곡히 메운 사진이 눈에 들어와 다시 눈물이 고였다.제일 먼저 보인 사진을 집어들었다.침대 위에 뒤엉킨 그 애와 김종인이 사진에 담겨있었다.그 사진을 다시 있던 자리에 붙여놓고는 주위를 둘러봤다.노래를 듣는 모습,침대 위에서 자는 모습,복숭아를 먹는 모습.여러가지 그 애의 모습이 사진에 담겨있었다.울음에 막혀오는 숨을 급히 내뱉었다.눈물이 바닥으로 툭툭 떨어졌다.바닥에 그대로 주저 앉아 무릎을 세워 그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달빛이 창문으로 들어와 내 위로 비춰졌다.나는 어릴적 7살의 모습 그대로 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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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편 남았네요.
꺄악!
ㅠㅠㅠ급전개 어쩜 좋죠...됴르르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