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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방탄소년단 정해인 변우석 더보이즈 세븐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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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이게 뭐야? 어제 이삿짐 싸다가 나온 건데.

글쎄... 뭐려나...

딸이 빛이 바랜 편지 봉투를 식탁 위에 올렸다. 손에 묻은 빵가루를 휴지에 닦아내고 조심스럽게 집어올렸다. 오래된 종이가 바스락거렸다.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봉투였다. 단단히 밀봉되어 있어 열 수가 없었다. 눈치가 빠른 딸이 가위를 가져왔다. 손녀가 잠에서 깬 건지 엄마를 찾은 목소리가 들렸다. 딸이 자리를 떴다. 가위를 들고 맨 윗부분을 조심스럽게 천천히 잘랐다. 봉투로 거꾸로 뒤집자 편지 몇 장과 세월이 지나 거뭇해진 마른 장미가 떨어졌다. 단번에 알아차렸다. 손끝이 떨었다. 작게 떨리는 손으로 여러 번 접힌 편지지를 펼쳤다. 이제는 닳고 닳았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그 온기가 남아있었나 보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엄마 울어?

...진짜 주책맞게 왜 이러지.

왜애 뭔데 그래? 난 아빠가 준 연애편지라고 생각했는데.

아빠가 준 거 아니고 엄마가 쓴 거야.

편지가 한 번도 안 열린 걸 보니 아빠한테 쓴 건 아닐 테고 누구야?

첫사랑. 엄마 미국에 유학 갔을 때 만난 사람한테 쓴 거야.

세상에 그럼 도대체 얼마나 된 편지야?

엄마가 20대였으니까...

육십 년이나 지난 거야? 와 진짜 유물이다 유물. 근데 그 첫사랑이 누구였는데? 생각해보니까 엄마는 나한테 이런 얘기 한 번을 안 했다. 엄마 첫사랑 얘기 궁금해.

기억이 드문드문 나서...

울 정도면 뭐 다 기억하는 거 아니야? 아픈 사랑이면 굳이 말 안 해도 돼. 각자 비밀 하나쯤은 안고 사는 거지.

뭐 이게 대단한 거라고... 엄마가 유학 갔을 때 잠깐 봤던 사람이었어,

맞다. 엄마 유학 갔었다 그랬지.

엄마가 미국에 스무 살인가 스물한 살에 갔을 때 어떤 강의를 같이 듣는 남자가 한 명 있었거든. 세상에... 그 이름은 아직도 기억이 나.

이름이 뭔데?

...카이 카말 휴닝.

같은 수업을 듣는 동양인은 나 하나였다. 인종차별도 심했고 말도 잘 안 통했다. 교수님이 들어오기 전 학생들이 각자 시끌벅적하게 수다를 떨고 있을 때 어떤 백인 남자애가 나를 걸고넘어졌다. 뭐라고 대꾸를 할 수가 없었다. 나보다 삼십 센티는 더 큰 백인 남자애가 내 앞에서 건들거리는 데 그 몸집 하나만으로 이미 압도됐었다. 아무 말도 못 하고 벌벌 떨고 있는데 참, 무슨 드라마도 아니고 그 애가 백인 남자애를 막아섰다. 말이 서로 너무 빠르게 오가서 그 당시에는 못 알아들었다. 근데 얼마 안 있다가 그 백인 남자애가 욕을 막 내뱉으면서 돌아갔다. 나중에 고맙다고 인사하면서 알게 됐는데 어머니가 한국 분이시란다. 처음은 그렇게 만났다.

그 애랑은 그렇게 가까운 사이가 못 됐다. 오면 가며 마주칠 때 살짝 인사만 하는 정도로만 만족했다. 그 애는 늘 어떤 여자애와 같이 다녔는데 그때까지 그 여자애가 애인인 줄 알았다. 그 뒤론 잘 마주치려고 하지 않았다. 이미 그 애를 보면 심장이 떨리는데 이미 애인이 있다면 그래서는 안되니까. 한동안은 그 애를 잊고 살았다. 시험 기간이었나 무슨 과제 기간이었나 암튼 내 생활만 해도 너무 바빠서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그러다 다른 수업에서 처음으로 동양인을 만났다. 정말 신기하게 한국인 여자애였다. 미국으로 입양된 한국 여자애. 한국말은 거의 하지 못했지만 알아듣는 건 꽤 잘했다. 그래서 그 여자애랑 있을 때 내가 한국말을 하면 그 앤 영어로 답했다. 이 여자애 이름도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제니 명은 스미스. 그래서 난 그 앨 명은이라고 불렀다. 명은이가 나를 도와준 그 남자애와 항상 같이 다니던 애였다는 건 명은이와 내가 둘도 없는 친구가 됐을 때 알게 됐다. 그때 처음으로 이름을 알게 됐다.

명은은 붙임성이 좋았다. 밝고 쾌활한 성격 덕분에 친구가 아주 많았다. 명은과 같이 다니기 시작하자 나도 자연스럽게 친구가 늘었다. 아직까지도 가끔 연락을 주고받는 제임스를 이때 처음으로 만났다. 제임스는 좋은 친구였다. 제임스는 친절했다. 매너도 좋았다. 그래도 가끔씩 그 애가 생각났다. 이름만 말해도 심장이 간질거려서 이름 한 번 제대로 불러보지 못한 그 애가.

명은은 항상 나에게 말했다. 나만큼 자길 이해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고. 그 어떤 남자친구들보다 네가 더 좋다고. 그리고 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만약 전생이 있었다면 명은과 자매가 아니었을까 하고 진지하게 고민했던 날도 있었다. 명은은 내가 그 어떤 것들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나도 그렇다고 말했다. 명은하고 죽으면 못 살 것처럼 굴었다. 먼 미국 땅에서 처음 본 동양인 여자애가 사실은 한국인이었고 이렇게 마음이 잘 맞는 건 사실 운명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정말 운이 좋게 그 애하고 같은 강의를 듣게 됐다. 여전히 그 애하고는 서먹하게 인사했다. 그리고 정말 가끔, 아주 가끔 명은에 대한 얘기를 했다. 그 애와 나 사이에 명은이라는 교집합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명은이 아니었다면 그 애하고 말이라도 한 번 붙일 수나 있었을까 싶었다. 난 그 강의가 시작하기 항상 20분 전부터 강의실에 앉아있었다. 거의 맨 뒤 줄에 자리를 잡았다. 오직 그 애의 뒤에 앉기 위해 그랬다. 그 애의 등이라도, 그 애의 뒤통수라도 질리게 보고 싶어서 늘 항상 뒷자리를 고집했다. 그 애가 내 뒤에 앉은 날이면 입술을 깨물고 속으로 울부짖었다. 그 애가 나를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강의 내내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강의를 끝내고 나면 온몸이 근육통이라도 생긴 듯 욱신거렸다. 너무 긴장한 탓이었다.

명은은 그 애가 나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엄청 친한 사이라고 했다. 어쩐지 그 애하고 늘상 붙어 다닌다 싶었다. 명은에게 미안한 일이었지만 아무리 명은이라도 명은이 그 애의 옆에 있는 게 신경 쓰이고, 거슬리고, 싫었다. 명은이 너무 좋으면서도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내가 너무 싫어서 참고 참다 결국 제임스에게 실토했다. 고민이 있는 것 같다며 털어놓으라는 제임스의 꾐에 넘어갔다. 제임스는 내 말을 듣고 선뜻 말을 하지 못했다. 한참 동안 머뭇거리다 내 옆으로 와서 그냥 등을 토닥였다. 그게 뭐라고 그렇게 펑펑 울었다. 이 날 이후 난 내 마음이 썩어 문드러질 것 같으면 명은 대신 제임스를 찾았다. 제임스의 위로는 서툴렀지만 나에게는 꼭 필요했다.

누가 보면 내가 명은에게 집착이라도 하는 것처럼 굴었다. 실은 그게 아니라 그냥 그 애하고 만나지 않았으면 싶어서 그랬다. 명은이 카이하고 어디라고 가려고 하면 내가 떼를 썼다. 명은은 나에게 약했다. 어김없이 그 애하고의 약속을 파투 냈다. 명은이 나에게 약한 걸 알면서 그걸 이용할 생각이 나 한 내가 너무 끔찍했지만 그 애가 명은하고 같이 있는 걸 보면 피가 거꾸로 솟을 것 같았다. 숨이 턱턱 막혀 죽을 것 같았다. 내가 유독 그 애에게 과민반응을 한다는 걸 명은이 서서히 알아챈 듯싶었다. 명은은 그 애하고 약속이 있을 때 무조건 나도 같이 데리고 나갔다. 나는 명은의 부탁에 못 이기는 척 항상 따라갔다. 아직도 명은에게 미안했다. 사랑이 처음이어서 그랬다는 변명 말고는 할 말이 없지만 그래도 미안하다.

해가 바뀌고 졸업이 다가왔다. 졸업을 위해 논문을 쓰고 밤낮없이 바쁠 때 명은이 쓰러졌다. 명은이 병원에 입원했다. 학교를 쉬었다. 명은은 점점 말라갔다. 명은의 얼굴만 봐도 눈물이 나왔다. 명은은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명은이 아픈 덕분에(덕분에라고 말하고 싶진 않았지만) 나와 그 애는 마주치고 또 길게 대화할 날이 많아졌다. 그 애는 매일 명은의 병실을 찾아갔다.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그 애는 명은을 사랑했다. 내가 그 애를 사랑하는 것처럼. 그 애는 명은을 따라 학교를 쉬었다. 하루 종일 명은의 옆에 있었다. 명은 그 애가 학교를 쉬었는지도 몰랐다. 명은이 하루 중에 깨어있는 시간이 이제 얼마 되지 않았다. 그 애는 이따금씩 나를 옆에 두고 명은을 걱정하면서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졌다.

그 애도 명은을 따라 점점 야위었다. 얼굴이 거칠어지고 낯빛이 안 좋았다. 그 애가 미친 듯이 걱정되어서 참을 수가 없었다. 내가 학교를 가지 않는 날 명은의 옆에 있겠다고 해도 그 애는 가지 않았다. 두 명이 명은의 옆에 있었다. 제임스에게 찾아가는 날이 점점 늘었다. 거의 매일 제임스에게 찾아간 것 같았다. 이제 명은이 더 이상 나에게 첫 번째가 아니었다. 명은이 아픈 것보다도 그 애가 밥을 챙겨 먹지 않은 게 더 걱정됐다. 이런 내가 끔찍하게 싫으면서도 그만큼 명은이 미친 듯이 미웠다. 명은이 좋았다. 그래도 미웠다.

이제 그 애의 얼굴만 머릿속으로 그려도 눈물이 났다. 어떤 의미에서의 눈물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그만큼 감정이 깊어졌다. 그 애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명은을 찾아갔다. 그때 꽃을 잔뜩 사갔던 것 같은데 지금은 딱 두 종류만 생각이 난다. 마가렛하고 메리골드. 명은에게 꽃다발을 안겨주고 바로 얘기했다. 뭐라고 얘기했더라. 세월이 하도 지나서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을 그만 힘들게 하라는 식으로 얘기했던 것 같았다. 그리고 바로 미안하면서 울었다. 그 애가 힘들어하는 걸 보는 게 너무 힘들어서 그랬다고 미안하면서 한참을 울었다. 그리고 곧장 바로 병실을 나왔다. 내가 무슨 정신으로 그런 말을 명은에게 했는지 지금도 솔직히 모르겠다. 명은에게 다녀오고 나서 근 일주일은 울면서 지냈다. 그 뒤로 단 한 번도 명은을 찾아가지 못했다.

제임스와 거의 붙어 지냈다. 제임스는 내 마음에 심한 파도가 치면 곧바로 잡아줬다. 내가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사이 그 애는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명은이 아프고 나서 오히려 더 친해진 것 같이 지냈는데 학교로 돌아온 그 애는 나를 완벽하게 무시했다. 내가 있는 곳은 무조건 자리를 떴다. 제임스마저 내가 그 애하고 싸웠는지 물었다. 날이 지날수록 점점 더 그 애는 나에게 못되게 굴었다.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약간의 혐오도 포함되어 있었다. 난 영문을 몰랐다. 눈물이 마르는 날이 없었다.

매일 방 안에서 온몸을 끌어안고 감정에 휩쓸렸다. 그 애는 나에게만 못되게 굴었다. 나에게만. 명은에게는 그렇게 잘 웃고 온몸으로 사랑을 속삭이면서. 그러다가도 다시 정신을 차렸다. 더 욕심을 부려선 안됐다. 명은에게 이미 상처까지 줘 놓고서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인지 싶었다. 그 애를 내 눈에 가득 담으면 그때 더 외로웠다. 난 그 애가 없으면 죽을 것 같았지만 그 애가 내 안에 들어올 때 미치도록 외로웠다. 누군가 나를 깨워줬으면 싶었다. 하루하루가 괴로웠다.

제임스가 갑자기 인화된 사진 한 장을 건넸다. 흐릿하지만 그 애의 모습이 담겨있었다. 그 애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 밴드 활동을 잠깐 했었는데 그 애하고 같은 고등학교를 나온 애한테서 얻은 사진이라면서 어렵게 구해온 사진이라고 말했다. 그 흐릿한 사진이 뭐라도 되는 양 항상 들고 다녔다. 제임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빼놓지 않았다. 그 애 때문에 마음이 힘들면 사진을 봤다. 사진 속에서는 웃고 있었다. 이렇게라도 웃는 모습을 보니 좋았다.

명은이 죽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명은을 찾아간지 반 년 만이었다. 제임스에게서 그 소식을 전해 듣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서 쓰러졌다. 수도꼭지를 튼 것마냥 눈물이 걷잡을 수없이 쏟아졌다. 그 애의 장례식이 곧 시작한다고 했다. 일단 제임스를 먼저 보냈다. 검정 원피스를 입고 그 애 몰래 장례식을 찾았다. 그 애를 보면 명은의 죽음을 오롯이 슬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애의 눈에 내가 띄지 않게 또 내 눈에 그 애가 띄지 않게 장례식에 있었다. 남들보다 늦게 장례식에 가서 남들보다 빨리 장례식을 나왔다.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그 애가 뭐라고 명은에게 마지막으로 좋은 소리 한 번 못해주고 왔는지 후회가 미친 듯이 밀려왔다. 지금도 기쁘거나 슬픈 일이 있으면 가장 먼저 명은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그리고 아직도 후회하고 있다.

명은이 없는데도 잘만 학교를 졸업했다. 학교를 졸업했으니 이제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간 지내던 하숙집에 있던 짐을 정리했다. 타고 갈 배 편에 짐을 부쳤다. 아무도 모르게 미국을 떠날 예정이었다. 모두에게 편지 한 통만 남길 작정으로 책상에 앉았다. 사랑하는 제니 명은 스미스, 그 누구보다 가장 많이 의지했던 제임스 카터, 그리고 나를 사랑하지 않는 그대에게. 명은의 편지에는 꽃집 주인의 추천을 받은 말린 보라색 튤립을, 제임스의 편지에는 말린 아이리스, 그리고 마지막 편지에는 말린 장미를 같이 동봉했다.

제임스의 편지를 우체통 안에 넣었다. 그리고 이제 정말 미국을 떠나기 몇 시간 전 마지막으로 명은의 무덤을 찾았다. 이번에도 꽃을 잔뜩 들고 갔다. 묘비 앞에 꽃다발을 내려놓았다. 그 옆에 편지도 같이. 눈물만 나왔다. 미안했고 고마웠고 사랑했고 또 이루 말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들이 뚝뚝 떨어졌다. 눈물을 닦고 명은에게 말을 하려고 하는데 그 애가 나타났다.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지만 금방이라도 얼어붙을 것 같았다. 그 애가 낮은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그러더니 점점 언성이 높아졌다. 어떤 말을 했더라. 내가 명은에게 이러면 안 된다고 했다. 명은은 니가 주고 간 꽃이 시들기라도 할까 봐 그렇게 아꼈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도대체 무슨 말을 했길래 명은이 그렇게 울었냐고. 내가 명은에게 너무 집착할 때부터 친하게 지내도록 그대로 두면 안 됐었다고. 처음엔 아니라고 했다. 나도 명은이 나를 생각하는 것만큼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하지만 이 말이 거짓 같아서 더 말하지 않았다. 어차피 듣지 않았다. 그 애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그 애가 도대체 나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아는 것 같아서 괴로웠다. 여기서 더 듣다간 내가 전부 무너질 것 같아서 그만하라고 소리쳤다. 말을 멈춘 그 애의 시린 눈빛을 보자마자 그냥 도망쳤다. 끝까지 명은에게 좋지 못한 모습만 보여주는 것 같아서 미안했다. 그 애에게 마지막으로 주려고 했던 편지는 꺼내보지도 못한 채 그대로 안고 한국에 올 수밖에 없었다. 어째 항상 마지막을 이런 식으로 마무리하는지 마음이 난도질당하는 느낌이었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선을 보고 바로 결혼했다. 좋은 사람이었다. 늘 배려해 주고 존중해 줬다. 내가 마음 어딘가에 묻어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알았다. 평생토록 남편을 사랑하지 못했다. 죽는 순간까지 미안할 사람을 한 명 더 만들어버렸다. 아이가 생기고 잊고 산 줄 알았는데 어느 날 전화가 왔다. 남편은 회사에 가고 아이들은 학교에 갔을 때 나를 찾는 전화가 한 통 왔다. 미국에 있을 때 지내던 하숙집 주인의 딸이었다. 나와 친하게 지내던 언니였다. 하숙집을 정리하다 나에게 온 편지 한 통을 찾았다고. 이 번호는 어떻게 알고 연락을 했냐고 물으니 정말 힘이 많이 들었다고 말도 마라며 생색을 냈다. 한 달 뒤에 한국에 놀러 갈 예정인데 그때 얼굴을 보기로 했다. 잊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얼굴들이 떠올랐다.

직접 인천공항까지 데리러 갔다. 언니는 며칠은 우리 집에서 지내기로 했다. 전에 신세 진 게 많았다. 그날 밤 언니에게 편지를 받았다. 남편과 아이들은 모두 자고 있을 때 그 편지를 가득 끌어안고 울었다. 얼마나 쓴 건지 거의 열 장은 될 것 같은 편지 안에는 오직 나를 위하고 걱정하는 명은의 목소리가 담겨있었다. 어떻게 잊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지 나에게 화가 났다. 언니는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내가 조금 진정됐을 때 언니는 어떤 남자애가 이걸 주고 갔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머리색을 물었다. 제임스는 금발이었고 그 애는 흑발이었으니 머리색만 들으면 누군지 금방 알 수 있었다. 검정 머리 였던 것 같다는 언니의 말을 듣자마자 다시 눈물이 쏟아졌다. 보기도 싫었을 그 얼굴에게 이 편지를 전해주러 찾아왔었구나. 명은 말이 전해지길 바라면서 넌 모든 걸 참고 왔었겠구나.

아... 그러면 어릴 때 그 이모는 편지 주러 한국에 온거야?

기억은 나니?

흐릿하긴 한데 그래도 기억나는 것 같은데? 나한테 초콜릿 엄청 줘서 혼났지 않았나?

맞아. 편지도 줄 겸 놀러도 올 겸 한국에 온거지.

연락해?

아니. 끊겼어. 죽었지 않았을까. 엄마하고 나이가 꽤 차이가 났던 사람이라.

그랬을 수도 있겠네.

아마 그럴거야. 좋은 사람이었는데.

엄마.

응.

미국 갈래?

지금 다 늙었는데 어딜 가.

이 편지도 전해줄겸 놀러갈 겸 엄마도 겸사겸사 미국 가자고.

몇 십년 만에 다시 미국 땅을 밟았다. 새 꿈에 희망찼던 아가씨는 이제 다 늙은 할머니가 되어 왔다. 세월이 이렇게도 빨랐던가. 비행기를 너무 오래 타서 온몸이 지쳤다. 딸하고 아들의 가족은 이번 여행은 오직 나를 위한 여행이라며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바로바로 말하라면서 귀찮게 했다. 알겠다니까. 알겠대도. 다시 미국에서 아침을 맞았다. 엄마, 뭐 하고 싶은 건 없으세요? 아들이 물었다.

차에 올랐다. 나무가 빠르게 지나갔다. 이렇게 많이 바뀐 미국을 보니 어색하면서도 익숙한 공기가 느껴졌다. 엄마, 다 왔어. 딸이 차 문을 열었다. 그렇게 많이 바뀐 줄로만 알았는데 여긴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익숙한 곳을 지나 발걸음을 멈췄다. 오래된 비석이 눈에 들어왔다. 마지막으로 봤을 땐 반짝반짝한 새 돌이었는데. 제니 명은 스미스. 이제 이름이 쓰여진 곳은 잘 보이지 않았다. 딸하고 아들은 구경을 다 하면 꼭 전화를 하라면서 눈치껏 빠졌다. 주름이 자글자글하게 진 손으로 비석을 어루만졌다. 오랜만이야. 주머니에서 편지를 꺼냈다. 이제 이건 네가 전해줘야겠다. 난 이제 영어도 다 까먹고 얼굴도 흐릿해. 완전 할머니가 따로 없지? 넌 아직도 피부가 팽팽한 아가씨일 텐데. 한참을 혼자서 말했다. 중간에 말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봤다. 그 애는 아직도 너를 찾아오니? 이젠 그냥 궁금하네. 네가 외로우면 안되는데.

누군가 옆에 다가섰다. 친구 분이신가요? 아. 너구나. 아무말 못하는 나를 보면서 그 애는 들고 있던 꽃을 내려놓았다. 붉은 장미. 너도 참. 여전하네. 난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이렇게 나란히 서 본적이 있던가. 바람이 기분좋게 불었다. 할머니! 바람을 타고 저 멀리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작은 남자애가 나를 향해 뛰어왔다. 할머니! 밥 먹으러 가자! 배 안 고파? 한국어가 들리니 그 애의 표정이 묘해졌다. 아이가 내 손을 잡고 물었다. 할머니 친구야? 나를 보는 눈빛이 요동쳤다. 맞아 할머니랑 제일 친한 친구야. 그런데 이제는 하늘나라에 갔어. 자 이제 가자. 먼저 등을 돌렸다.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등너머로 들렸다. 딸이 손자를 찾으러 왔는지 급하게 뛰어왔다. 아이를 넘겨주자 딸의 시선이 저 건너편으로 향했다. 엄마 부르는 거 아니야? 몸을 돌렸다. 이렇게 마주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냥 딸을 따라갔다. 이 정도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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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이 글 너무 좋네용.... 일단 이뤄지지 않은 첫사랑이라는 게 좋고... 일방통행이라는 점도ㅠㅠ 글 전체에서 아련하고 막먹한 느낌이 나서ㅠㅠ
4년 전
42
감사합니다 배경음악으로 깔린 노래를 듣고 펑펑 울면서 쓴 글이라 더 그렇게 느끼시나봐요 좋아해주셔서 감사합니다(하트
4년 전
비회원28.73
한동안 이 노래만 주구장창 들을 것 같아요ㅠㅠ 어떻게 이렇게 영화같이 표현하실 수 있나요.. 정말 슬프고 아름다운 글이에요ㅠㅠ
4년 전
42
허걱쓰.. 너무 감사해요ㅠㅠㅠㅠ 그렇게 느끼셨다니 제가 너무 뿌듯합니다ㅠㅠ
4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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