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타 아저씨의 아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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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여주는 자꾸만 감겨오는 눈을 억지로 들어 올리려 무진장 애썼다. 그도 그럴 것이 최여주는 일단 방금 7시간짜리 코스 스파를 받고 왔으며, 최여주는 일정 스트레스 지수를 넘어서면 급격하게 잠이 오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고로, 최여주가 여기서 졸도하지 않는 게 더 신기한 일이다. 최여주는 으리으리한 집 응접실에 얌전히 앉아있었다. 엄마는 최여주에게 최대한 단정한 옷을 입혔다. 최여주는 검정분홍의 젠의나 입을 법한 샤널 에이치라인 스커트와 그와 세트로 제작된 재킷을 입었다. 화려한 브로치까지 셔츠에 더했으니 이 옷값만 백은 훌쩍 넘을 것이다. 이 예쁜 쓰레기들... 최여주는 옷 입는 것에 큰 관심이 없다. 특별한 때가 아니고선 아주 캐주얼한 옷차림을 고수하는 편이다. 이런 화려한 옷 따위들은 최여주에게 그저 구 오빠들의 굿즈 정도나 하는 셈이었다. 최여주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테이블에 놓인 찻잔을 들어 올렸다. 후후 불어서 홀짝 마셨다. 미친, 국화차. 그것도 뜨뜻한 국화 차였다. 국화차를 좋아하는 엄마 덕에 어렸을 때부터 국화차를 자주 마신 최여주는 아주 잘 알고 있다. 국화차는 불면증 환자들에게 아주 효과적이다.
2.
최여주, 가 아니라 오늘부로 개명한 최사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디어. 맞은편에 앉아있는 남자도 같이 일어났다. 엄마는 테이블에 있는 통장을 가방 안에 넣었다. 맞은편에 앉아있던 남자는 지금까지 제주도에서 살던 최여주가 산타를 믿을 때까지 한 달에 한 번 찾아온 산타 아저씨였다. 그리고, 17년 만에 처음 알게 된 진실인데 생물학적 아버지에 해당하는 사람이 맞단다. 산타 아저씨와 엄마는 알고 있었다. 최여주만 몰랐지. 최여주는 -17년 동안 불려온 이름을 한순간에 바꾸는 건 아무래도 어려운 일이다.- 응접실을 나가기 전 엄마의 포옹을 받았다. 고등학생이 되어도 엄마의 품은 아직도 고팠다. 이제 엄마는 한국에 없을 것이다. 최여주는 어렸을 때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엄마는 여주가 열일곱이 되는 해에 세계 여행을 할 것이고, 여주는 아빠의 집에 살게 될 것이다. 엄마는 절대 여주를 버리는 것이 아니며 주기적인 편지를 할 것이다. 그러니 여주는 아빠의 집에서 열심히 학교를 다니면 된다. 엄마는 여주가 성인이 되는 해에 한국에 들어올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산타 아저씨도, 그렇다고 아빠도 아닌 최회장이 엄마가 나간 문만 멍하니 바라보는 최사라를 불렀다. '사라야, 이제 갈까?' 최사라는 이제 참을 수 없는 졸음으로 아프기까지 한 머리를 겨우 가누며 최 회장을 돌아봤다. 최 회장은 자상하게 웃었다. 최사라는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저런, 많이 졸린가 보구나.' 최 회장은 최사라가 스트레스를 받으면 잠이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산타 아저씨는 생각보다 많은 걸 알고 있다. 최사라는 최 회장의 뒤를 따랐다. 이 으리으리한 집은 그저 별장에 불가했다는 걸 차에 타는 순간 알게 되었다.
3.
최 회장은 이름만 대면 전 세계 사람들이 알만한 대기업의 회장이었다. 각종 전자제품에 자동차, 건설, 라이프까지. 계열사만 해도 열 손가락이 부족할 것이다. 최 회장은 지금까지 회자되는 전 세계에서 가장 잘생긴 기업인 중 한 명이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최 회장 나이대의 아저씨들과는 다르게 최 회장은 군살 하나 없는 꽃중년이었다. 꽃중년 이름값을 한다 이건지 최 회장은 아내가 무려 다섯이나 있었다. 실질적 혼인신고는 첫째를 낳은 부인과 했지만 최 회장의 다섯 아들들의 엄마는 달랐다. 최여주까지 합하면 이제 여섯이겠지만. 암튼 그래서 그 기사와 찌라시를 마주한 최여주는 최회장이 가정적인 사람은 아니구나 싶었다. 근데 이게 무슨 시추에이션인지 최 회장은 본인의 아들들에게 엄청나게 헌신적이었다. 애들 교육이 지금 가장 중요한 사람이며, 틈이 나면 애들과 시간을 보낸다는. 이 대목이 더 미친놈 같았다. 최여주는 이 기사를 떠올리고 한층 더 머리가 아파졌다. 최여주를 태운 겁나 비싼 외제차는 기사의 운전에 아주 부드러운 승차감을 자랑하면서 도로를 쌩쌩 잘도 달렸다. 최여주는 뒷좌석에서 이미 의식 불명인 상태였다. 오늘 하루아침에 모든 게 달라진 상황에 미친듯한 스트레스를 느끼면서.
최 회장은 최여주와 다른 차를 탔다. 최여주는 덕분에 한결 편하게 잤다. 그렇다고 잠을 편하게 잤다는 소리는 아니고, 한결 편하게 잤다는 소리다. 한결. 차가 별장보다 더 거대한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차가 멈추고 운전석에 앉은 기사가 친히 뒷좌석의 문을 열어두고 최여주를 깨웠다. 최여주는 17년 만에 처음으로 아가씨 소리를 들으면서 잠에서 깼다. 어디 침이라도 흘리지 않았는지 입가를 톡톡 두드리면서 차에서 내렸다. 풀린 눈에 힘을 한 번 줘보면서 최사라는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최 회장의 옆보다는 살짝 뒤에 섰다. 최 회장은 수행비서에게 뭔갈 지시하더니 최사라를 돌아봤다. '사라, 이제 안으로 가자.' 최사라는 머리를 급하게 정리하면서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아, 또 잠이 온다.
커다란 정원을 지나서 자동으로 열리는 유리 문을 지나자, 대리석 바닥과 샹들리에가 눈이 부시게 반짝였다.
4.
최여주는 오늘이 일요일이라는 걸 수행 비서를 통해 전해 듣고 나서야 알아챘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이따금씩 이 집에 처음 들어온 날에 대한 꿈을 꾸면 머리가 아팠다. 익숙한 듯 침대 옆 탁상 서랍에서 진통제를 꺼내 물도 없이 삼켰다. 아침 8시. 일요일을 시작하기엔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그런데 이 짓거리도 8개월이 돼가니 몸에 익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더니 정말이지 소름이 끼쳤다. 9시 미사에 늦지 않으려면 서둘러야 했다. 최 회장과 자식들은 같은 집에 살았지만 그 부인들은 각자 본인의 자택에서 살았다. 최여주는 이 시스템에 대해 잘 모르지만 아마 부인들끼리 엄청난 싸움이 있었을 것이라고 거의 단정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일요일마다 성당에서 만나는 부인들의 기싸움이 어마 무시했기 때문이다. 부인들은 일주일 만에 만나는 본인의 아들을 옆에 끼고 미사가 끝나고 가족 모두가 함께 하는 식사까지 함께했다. 아들들은 서로 아주 친했지만 이때가 오면 서로 척을 진 것처럼 연기했다. 엄마가 한국에 없는 최여주만 낙동강 오리알 신세겠구나 싶어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갔지만 엄마가 여행을 간 막내아들인 카이도 같은 신세라는 걸 알고 둘은 일요일마다 서로에게 꼭 붙어있었다. 최여주는 부인들의 기싸움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말은 거의 하지 않고 카이의 옆에 찰싹 붙어있는 게 일요일의 시작이었다.
최여주는 적당한 길이의 플레어스커트와 재킷을 입었다. 얼마 전 최회장이 사준 작은 가방에 면사포와 핸드폰, 파우치를 챙겨 넣었다. 문을 열고 1층으로 내려갔다. 최여주의 오빠들은 전부 1층에 방이 있었다. 최여주가 밑을 내려다보자 거실 소파에 티비를 보면서 앉아있는 최여주의 오빠들이 보였다. 다들 바나나 한 개씩을 손에 들고 있는 채로 소파에 앉아서 핸드폰을 보기도 하고 실없는 예능을 보고 있었다. 최여주가 계단에서 내려오자 다들 계단을 힐끔 바라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최연준은 바나나를 한 입에 다 넣고 껍질을 테이블에 던졌다. 최수빈은 여전히 바나나를 손에 든 채로 열심히 오물거렸다. 최범규는 바나나를 깔짝깔짝 먹어대고 있었다. 강태현은 반쯤 먹은 바나나를 테이블에 내려놨고, 카이는 최여주에게 바나나를 건넸다. 양치를 하고 나온 최여주는 카이에게 바나나를 받아들고 그대로 가방 안에 넣었다. 다들 말이 없었다. 활개를 치는 최연준과 최범규도 오늘은 얌전했다. 귀에 주렁주렁 달린 피어싱까지 전부 뺀 채로 다들 같이 현관으로 향했다. '사라야, 티비 꺼.' 최연준의 말에 인공지능의 목소리가 차갑게 들리고 티비가 꺼졌다. 최 회장의 뜻에 따라 이름을 최사라로 개명한 최여주는 아직도 헷갈린다. 저들이 나를 부르는 건지, 아니면 저 인공지능을 부르는 건지.
정문을 나서자 커다란 벤이 대기하고 있었다. 이 차는 일요일만 쓰는 차였다. 성당까지 한 번에 이동하기 위해서 최회장이 최여주 환영 기념으로 시원하게 산 차였다. 이 차의 이름은 사라 원(one). 이 집에 이름이 붙을만한 건 죄다 사라였다. 인공지능도 사라, 차 이름도 사라, 그리고 최여주도 사라. 심지어는 형제들의 인형 중 여자 캐릭터는 무조건 사라였다.
최여주는 여섯 개의 자리 중 맨 뒤 줄에 앉았다. 차로 20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는 대성당에는 오늘도 기자가 바글거릴 게 분명했다. 이제 기사들의 셔터가 조금 익숙해지고 있었다. 일요일마다 최사라가 어떤 옷을 입고, 어떤 귀걸이를 하고, 어떤 가방을 들고, 어떤 신발을 신고 나타나는지 포폴을 만드는 사람까지 등장할 정도였다. 최사라의 영향력에 맞게 각종 브랜드에서 협찬도 들어왔지만 최 회장은 그게 무슨 격 떨어지는 소리냐면서 전부 매몰차게 거절했다. 그리고 최여주에게 감히 어느 나라 공주에게 협찬 제의가 들어오는 걸 봤냐며 그저 블랙카드만 손에 꼭 쥐여줬다. 공주님을 위해 특별히 만든 카드라면서. 덕분에 최여주는 17년 동안 한 번도 입어보지 못했던 갖은 종류의 명품을 일요일마다 휘감을 수 있었다. 원래는 그럴 생각도 없었으나 그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최여주의 '밋밋한' 패션을 도저히 눈을 뜨고 봐줄 수가 없어 최연준과 최범규가 발 벗고 나섰다. 최여주만 모르지만 최연준과 최범규는 최여주의 패션을 살리겠다는 그 열정 하나로 날밤을 까며 최여주 패션 집을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비록 고등학생이나 엑셀 하나는 미친 듯이 잘 다루는 강태현도 일조했는데 문서화 시키는 과정에서 아주 노예처럼 부려먹혔다. 후에 최수빈이 최여주와 포폴을 같이 넘겨보면서 '아... 저 사람들이 그렇게 쌩지랄을 했던 게 이거였구나...' 하고 꼭 저 셋에게 뭐라도 선물하라고 말했다. 그리고 벽에 기대서 머리 너머로 슬쩍 흘겨보던 카이는 수빈이 형과 나중에 저걸 좀 훔쳐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솔직히 패션 감각으로 치면 최여주는 강태현 정도 되는 꼴이었다. 최여주가 있거나 말거나 결과적으로 최수빈과 휴닝카이가 넘사로 패션 최악이었다. 형들은 평균 정도는 먹고 들어가는 최여주 하나 살려보겠다고 저 난리를 친 것이다.
5.
첫째 최연준부터 차례대로 사라원에서 내렸다. 그리고 마지막, 최사라가 내리자 셔터 소리가 더 박차를 가했다. 최여주는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서둘러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최 씨들은 이미 부인들의 치마폭 안으로 사라졌고, 강 씨는 부인을 찾았다. 최여주는 카이의 팔을 꼭 붙들고 본당 안으로 들어갔다. 안 그래도 사람 많은 대성당은 최 회장 패밀리의 여파로 더 많은 신자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최여주는 그저 딸려갔다. 누군가를 뚫고 갈 힘도 헤쳐나갈 기운도 없었다. 미사 시작까지 10분 정도가 남았다. 최여주는 가방을 옆자리에 뒀다. 미성년자들은 청소년부 지정석에 앉아야 하기에 강태현 자리를 맡았다. 스무 살이 되는 순간 엄마들의 전담 마크 아래에서 미사를 드리게 된다. 최범규의 성인과 새해 기념으로 술을 마시던 최연준은 가장 마지막에 남아 있는 사람으로서 최범규가 엄마와 미사를 드리는 게 싫다고 질질 짜는 걸 찍었는데 그걸 들고 최여주에게 전부 일러바쳤다. 정신이 멀쩡한 최연준은 카메라맨을 자처했고, 미자들은 그 옆에서 웃느라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최범규는 맥주캔을 든 채로 울어재꼈고 최수빈은 그 옆에서 인생은 다 그런 거라고 다 꼬부라진 말로 되도 않는 위로를 했다. 실컷 비웃는 강태현에게 최범규는 벌떡 일어서서 '니, 니네! 일 년 금빠앙이다!' 라고 말하는 걸 끝으로 영상은 끝났다. 그 영상을 생각하면서 소리 없이 웃고 있는데 옆에 강태현이 가방을 옆으로 밀고 앉았다. 최여주는 가방에서 면사포를 꺼냈다. 빛을 받아 세상 반짝거리는 면사포가 최여주의 머리를 덮었다. 남아있는 유일한 청소년부가 된 강태현과 휴닝카이는 말없이 머리에서 걸린 면사포를 펼쳤다. '기도 시작하겠습니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주십시오.' 최여주는 다른 최형제들은 어디 있나 고개를 한번 살폈다. 신부님의 말씀이 시작됐다. 최여주는 눈을 감고 손을 모았다.
6.
'오늘이 축일이신 최사라 아타나시아, 김민지 푸블리아....'
카이가 최여주의 팔을 슬쩍 치고 몸을 숙이고 속삭였다. '너 오늘이 축일이야?' 최여주는 덩달아 몸을 기울였다. '그런가 봐.' 강태현은 카이 쪽으로 기울여진 최여주를 따라 같이 몸을 기울였다. '축하해. 메뉴 결정 잘하고.' 최여주는 면사포 위로 관자놀이를 붙잡았다. 최 회장은 일주일에 한 번씩 성당에서 만날 때마다 축일인 사람이 식사 때 메뉴를 결정할 수 있는 결정권을 부여했다. 부인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모두가 좋아할 만한 메뉴를 고르기란 차라리 그럴 바에 별을 따오는 게 쉬울 판이었다. 최연준부터 강태현까지는 엄마를 등에 업고 있으니 지들이 먹고 싶은 걸 고르지만 빽이 없는 최여주는 그럴 깡이 없다. '그냥 먹고 싶은 거 말해. 형들이랑 나랑 카이가 연막 칠게.' 최여주는 한숨과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최여주의 세례명은 아타나시아. 불멸이라는 뜻이다. 최여주의 세례명은 부인들이 지었다고 했다. 최여주는 이 이름을 받아들고 도대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감을 못 잡았다. 일단 이름을 전달해 준 최 회장에게는 감사 인사를 표했으나 떨떠름했다. 불멸이라는 이 뜻이 어째 '죽지도 않고 잘 살아서 이 집구석에 들어왔구나'라고 들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참 신기하게도 부인들은 아타나시아의 뒤를 똑 떼어 최여주를 '시아'라고 불렀다. 사라라는 이름은 인정을 못한다는 뜻인가, 의도가 어찌 됐든 일단 애칭의 의미는 절대 아닐 것 같았다.
최연준 베네리오, 최수빈 그라토, 최범규 테우세타, 강태현 아브라함, 휴닝카이 미카엘, 최사라 아타나시아. 몰라 다 집어치워 난 신도 안 믿는데 시발. 한 시간짜리 미사는 다리가 아팠고 지긋지긋했다. 평생 미신 하나 안 믿고 살았던 최여주였는데 이제는 꼬박꼬박 미사를 드리고 성체를 모신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최여주 옆에 있는 강태현만 해도 남자 애들한테 질릴 정도로 고백을 받는데. 아, 혹시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덧붙인다. 천주교는 동성애를 금지한다.
7.
최여주는 무난함을 선택했다. 근처에 있는 고급 레스토랑 이름을 말하며 그곳에 가고 싶다는 개구라를 깠다. 사실 최여주는 지금 스테이크를 썰 위장 상태가 아니었다. 최대한 덜 느끼한 리소토나 깨작깨작 퍼먹어야겠다는 심산이었는데 최연준의 엄마가 태클을 걸었다. 최연준은 최대한 연막을 쳤지만 최여주는 그 태클에 그냥 걸려 넘어져 줬다. 그래서 결국 최연준의 엄마가 원하는 일식을 먹기로 했다. 최여주는 가는 길에 소화제나 사 오려고 했지만 부인들의 레이더망을 벗어날 수 없었다. 최수빈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막둥이를 챙겨주려고 다가갔지만 어머니에 이끌려 근처에 가지도 못했다. 결국 휴닝카이가 최여주를 거의 업다시피 부축했다. 부인들과 만날 때마다 최여주는 위경련이 온다. 최 씨들은 계속 뒤를 돌아보다 부인들에게 한 소리를 들었고, 강태현은 잔꾀를 쓰려다 부인에게 완전히 묶였다.
8.
평소에 눈썰미가 좋은 최범규의 엄마가 최사라의 상태를 정확히 짚었다. 셋째 부인의 재량으로 최사라는 성당에서 바로 집으로 꺼질 수 있었다. 최 회장은 이런 최여주를 걱정하면서 의사를 집으로 불러줬다. 최여주는 나머지 형제들에게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비서님에게 온몸을 맡기고 차에 올라탔다. 8개월을 살았지만 아직도 적응이 안 되는 사이즈의 집 대문을 들어섰다. 집에 얼마나 큰 지 전용 진료실도 따로 있었다. 최사라는 환자 침대에 누웠다. 최 회장은 그냥 의사를 불렀겠지만 설마 진짜 그냥 의사겠어. 회사 산하에서 지원을 받고 있는 대학 병원의 교수가 최사라에게 링거를 놓았다. 원래는 다른 교수가 왔지만 그 교수가 최사라에게 링거를 놓다가 맥을 못 잡아 손목을 아예 아작을 낸 전적이 있어서 바뀌었다. 최사라는 원래 핏줄이 잘 안 잡히는 편이라 별 감정 없었지만 최 회장은 길길이 난리를 쳤다. 그리고 형제들도 거기에 일조했다. 불쌍한 교수님. 최여주는 그 교수가 딱했지만 나서줄 마음은 없었다. 그리고 바뀐 교수가 핏줄을 두 번 정도만 찌르면 바로 찾아서 오히려 더 좋았다. 최 씨 일가들 중에서 가장 예의가 바른 최여주는 오늘도 교수에게 바쁘실 텐데 죄송하다고 인사했다. 교수는 당연히 와야 하는 거 아니냐며 허허 웃으면서 진료방에서 나갔다. 최여주는 작은 캡슐 안에서 톡톡 떨어지는 링거 액을 보면서 눈을 감았다. 이 집에 들어오면서부터 링거를 맞는 횟수가 기하학적으로 늘었다.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런가. 최여주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깊게 잠에 들었다. 링거를 다 맞자 전담 치료사가 와서 최여주의 팔에서 주사를 뺐다. 비몽사몽 한 정신을 붙들고 최여주는 방으로 올라갔다. 최여주가 두 번째 낮잠을 자고 있는 동안 형제들을 밥만 먹고 -어디로 먹었는지도 잘 모를 정도로 먹었지만- 집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워낙 비실비실한 최여주가 이렇게 골골댈 때 형제들은 예민해졌다. 고작 이 정도로 아픈 걸 가지고 그러나 싶은 정도로.
최연준이 총대를 메고 최여주의 방문을 노크했다. 한참을 기다려도 문 너머로 답이 없자 강태현이 그냥 열어버렸다. 최여주는 모든 속세의 홍진을 벗어던지고 으리으리한 침대에 누워있었다. 최수빈은 침대로 걸어가면서 헛웃음 지었다. 참, 누가 봐도 애 취향이 아닌데. 이 정도는 좀 바꿔주지. 이제 막 대학교 2학년이 된 최수빈은 통장에 찍혀있던 숫자를 기억해내려 애썼다. 혹시 가구를 안 바꿔서 그런가. 나중에 애들한테 얘기해봐야겠다.
"이 방은 진짜 소름끼쳐요. 천장이 다른 방에 비해 좀 낮아서 그런 것 같은데."
최여주의 의자를 손으로 가볍게 훑은 강태현이 작게 말했다.
"그러게."
카이 혼자만이 한 대답이었지만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10개월 남았나?' 최범규의 말에 최연준이 대답했다. '어. 이제 1년도 안 남았어.' '안 아팠으면 좋겠는데.' 최범규가 최여주의 이불을 끌어올려 덮어줬다. '그게 진짜 효과가 있긴 한 가봐요.' 최수빈이 방에 떨어진 가정통신문을 책상에 올려 두면서 말했다. 최대한 작게 속삭이면서 말했지만 신경이 예민해진 최여주는 잠에서 깼다. 불도 안 켜놓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얘기하는 누군가를 본 최여주는 잔뜩 잠긴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스위치에 가장 가까이에 있던 카이가 다급하게 불을 켰다. 정말로 놀란 최여주가 기어코 와아앙 울기 시작하고 나서야 형제들은 정상적으로 움직였다. '아 진짜 불도 안 키고 뭐 하는데에' 다섯 형제가 침대에 달라붙어 달랬다. '미안미안 많이 놀랐지.'
9.
최여주는 고등학교를 가는 20살 하고 늘 같이 아침을 먹었다. 굳이 의도하지 않아도 제일 잠이 많은 둘이 식탁에 앉는 시간이 얼추 비슷했기에 일어나는 해프닝이었다. 최여주가 숟가락을 내려놓자 유리컵에 한약에 따로 담겨 대령되었다. 쓰디 쓴 한약을 먹기 전 심호흡을 하는 최여주를 보면서 물을 마시던 최범규가 물었다. '한약?' 최여주가 얼굴을 잔뜩 찌푸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왜애?' 한약을 먹기도 전에 쟁반에 올려져 있던 사탕을 먹은 최여주가 흩어진 발음으로 대답했다. '그냥 갑자기 최 회장이 먹으라고 줬는데, 아 진짜 싫어.' 최범규의 미묘해진 표정에 최여주가 덧붙였다. '나 어디 안 아픈데 그냥 준거야.' 최여주의 말에 살짝 고민하던 최범규가 슬쩍 물었다. '내가 대신 먹어줄까?' 최여주의 표정이 눈에 띌 정도로 밝아졌다. '진짜?' 말은 그러면 안되는뎅... 하면서 이미 컵을 최범규의 앞으로 스윽 밀었다. 최범규는 갈색물을 보면서 이건 아메리카노다.... 커피야... 세뇌를 걸면서 한 번에 마셨다. 최범규를 보고 최여주가 박수를 쳤다. 최범규는 쓴 맛에 혀를 내밀고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정신을 못차리고 있는 최범규를 보면서 최여주가 책가방을 뒤져 츄파츕스 하나를 서둘러 까 최범규의 입에 집어 넣었다. '이거 하루에 몇 번 먹냐?' 최범규가 혀에 사탕을 붙인 채로 말했다. '몰라. 식후 세 번이었나?' 최범규가 손사레를 쳤다. '이거 못 먹어...' 최여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왠만하면 먹으려고 했는데 오빠 먹는 거 보고 생각이 달라졌어' 최범규가 가방을 한쪽 어깨에 걸치면서 츄파츕스를 입에서 뺐다. '아니면 연준이 형 줘.' 남매가 사이좋게 부엌을 나섰다. '그럴까?' '그 형 백퍼센트 먹어줄걸.'
최여주는 최범규와 다른 차를 탔다. 형제들은 전부 같은 학교를 다녔다. 졸업한 연준과 수빈도 같은 학교를 다녔었다. 최여주만 다른 학교를 다녔다. 형제들은 남녀공학 학교에 같이 보냈으면서 최여주만 혼자 여고를 보냈다. 안 그래도 살갑지 못한 성격에 전학까지 온 상태라 친구가 없어서 최여주는 은근한 따돌림을 받고 있었다. 최여주도 딱히 어울리려는 노력을 들이는 편은 아니었지만 어울리지 않는 것과 따돌림을 받는 건 엄연히 다른 종류의 일이었다. 혼자 남은 점심 시간에 최여주는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길목에 있는 벤치에 앉아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오빠 뭐해?' '오빠는 우리 여주 생각하고 있지~' 최여주가 우웩하는 소리를 내자 최연준이 웃었다. '막둥이 지금 학교 아니야? 왜 오빠한테 전화했어.' 최여주가 아스팔트 바닥에 신발 앞코를 쿡쿡 내리찍었다. '나 친구 없는 거 알잖아. 지금 점심 시간이라 심심해서.' 최여주의 말을 들은 최연준의 목소리가 짐짓 심각해졌다. '그래? 조퇴할래? 오빠 갈까?' 은근 이런 최연준의 유난을 기대했던 최여주가 만족하는 웃음을 지었다. '뭐래. 완전 호들갑 장난 아니야.' '막둥아 막내들이랑 같은 학교 다니는게 훨씬 좋지?' 최여주가 머리카락을 빙빙 돌렸다. '같은 반 안되면 여기가 거기나 똑같아. 진짜 한국식 학교 적응 안돼. 나 약간 사회부적응잔가.' 최여주는 제주도에서 최 회장의 도움으로 국제 학교를 다녔었다. 그러다 서울로 올라오면서 어쩔 수 없이 사립학교로 전학을 와야 했다. 갑자기 들이닥친 입시에 최여주는 머리가 다 어지러웠다. 대학을 그니까 어떻게 해야 가는건데.
최연준과 통화를 마친 최여주는 점심 시간이 끝나기 5분 전을 알리는 종소리를 들으면서 교실로 올라갔다. 자리에 앉고 교과서를 꺼내자 선생님이 들어왔다. 대충 교과서를 펼치고 턱을 굈다. 배가 고팠다.
10.
최여주는 점심을 먹지 않았다는 걸 빌미로 한약을 쓰레기통에 넣었다. 아침에 최범규가 다 먹고 난 표정을 보니 다시금 마시고 싶은 욕구가 뚝뚝 떨어졌다. 한약 하나 버렸다고 왠지 가볍게 느껴지는 가방을 매고 학교 앞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정류장에서 학생들의 가방에 치여가며 서있는데 익숙한 차 한 대가 급하게 멈춰섰다. 창문이 내려가고 최연준이 고개를 내밀었다. '막둥아 빨랑 타!!' 최연준이 미친듯이 반가웠던 최여주는 얼른 조수석 문을 열고 차 안으로 쏙 들어갔다.
"막둥아 너 약 먹는다며 요즘."
흐물거리는 책가방을 뒷자석에 던져놓은 최여주는 최연준의 말에 미간을 팍 찌푸렸다. 최여주가 보기에 최연준은 은근 고분고분 최회장의 말을 잘 듣는 편이었다. 최연준은 생각보다 교묘했다. 최회장의 앞에선 생글생글 웃으며 사람 좋게 네네 거렸지만 속으론 늘 칼자루를 쥐고 있었다. 최회장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다 보니 최여주의 눈에도 잘 보이지 않은 모양이었다. 사실 최범규보다 더한 반항은 최연준이 온몸으로 하고 있었다. 그 노고의 흔적은 최수빈과 강태현만 간간히 알아줄 뿐이었다. 그도 아니면 모두가 알면서도 모른척 해주는 게 아닐지 모른다. 원래 이 집 안에서는 한 마디 말이 백 가지 행동보다 무서운 법이었다. 최여주는 최연준이 한약을 먹으라고 할 줄 알았던 모양인지 우선 입에 발린 '아니...' 부터 꺼냈다. 최여주가 질질 끄는 말꼬리를 알아챈 최연준은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게 아니라 일단 가지고 있는 약이라도 좀 달라고. 아버지가 너랑 내 한약이랑 헷갈리셨더라. 몸에 안 맞는 거 먹으면 안되지, 우리 막둥이.' 최연준의 말에 최여주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책가방에 있어. 나머지는 부엌에 있는데. 오빠가 다 가져갈거야?' 최연준이 부드럽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웅 그래야지. 그리고 원래 너 약은 오빠가 잘 버려줄게. 먹기 싫었지?' 최여주가 주먹을 쥐고 방방 뛰었다. '예쓰! 나 진짜 오빠밖에 없는 거 알지? 오빠가 짱이다 진심.' 최연준은 사이드 미러를 확인하면서 웃었다. '오빠밖에 없지?!' 최여주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역시 첫째오빠. 내 맘 알아주는 건 오빠밖에 없어.'
최연준은 최여주를 데리고 유명한 디저트 카페에 갔다. 최여주가 좋아하는 이것저것을 시키고 최여주가 쫑알쫑알 하는 얘기를 들어주다 같이 열을 내면서 화 내기도 했다. 최연준의 열띤 호응에 최여주는 포크를 창처럼 디저트에 꽂아넣었다. 지금이 만약 선사시대였다면 메머드의 동맥을 단번에 찔렀을 것만 같은 움직임이었다.
11.
최회장과 그 슬하에 있는 여섯 자식들은 같은 집에 살았지만 정작 마주치는 건 얼마되지 않았다. 집이 워낙 넓은 탓에 동선이 잘 겹치지 않는 탓이 컸다. 그리고 직장인과 학생이라는 그 간극이 컸다. 최여주는 한 집에 살면서 생물학적 아버지라는 작자의 얼굴을 흐릿하게 떠올릴 정도였다. 친구들과 함께 가족 얘기를 하면 최여주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에피소드는 전부 형제들에 대한 얘기였다. 대학을 다니는 최연준과 최수빈은 이따금씩 방으로 불렀다. 무슨 얘기를 하는지는 알려주지 않아 최여주는 몰랐지만 여하튼 피곤한 얼굴들이었다.
최회장의 동선과 겹치고 싶다면 최여주는 평일 저녁과 주말 오전에 식물원으로 향해야 했다. 집 후원에 딸린 온실 식물원이었다. 규모는 개인이 가지고 있기엔 하여간 컸다. 그래도 무식하게 크진 않았다. 보기엔 딱 좋았다. 소소한 꽃들이 거창하게 많았다. 최여주는 L자 파일을 손에 팔랑팔랑 쥐고 꽃들 사이로 나있는 돌길을 겅중겅중 뛰어갔다.
최회장은 식물원의 전망이 가장 잘 보이는 가장 자리에 티 스팟을 만들고 그 자리에서 꽤 많은 시간을 보냈다. 다도를 즐기는 최회장은 그곳에서 차와 함께 시간을 즐겼다. 실제로 차를 우리는 실력은 별로인지 늘 그 옆에서 차를 우리고 따르는 사람이 대기하고 있었다. 최여주는 최회장의 티 스팟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최회장은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고 인자하게 최사라를 맞았다. '좋은 아침, 사라. 무슨 일인데 그렇게 뛰어왔니.' 최여주는 숨이 차는지 아무말 없이 파일을 최회장의 앞에 내려놓았다. 최회장은 놀라거나 당황한 기색 없이 파일에서 종이를 꺼냈다. 진로희망조사서였다. 최회장은 최여주가 미리 써놓은 조사서를 찬찬히 읽어내렸다. 최회장은 늘 가지고 다니는 만년필을 꺼내 보호자 란에 서명했다. 그러곤 부모 희망 진로에 사라와 같은 걸 썼다. 최회장이 느릿하게 글을 쓰는 걸 보다못한 최사라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식물에는 큰 관심이 없어 식물원 안 티 스팟까지 들어온 적은 이번이 세 번째 아니면 네 번째 일 것이었다. 익숙치 않은 공간에 최사라는 익숙한 것들을 찾으려 했다. 확실히 식물원이 풍경은 좋았다. 고개를 마구 움직여도 다 푸른, 조금만 고개를 들면 최사라의 방이 보인다는 건 좀 뜻밖이었지만. 여기에서 최사라의 방 안은 보이지 않았지만 하여튼 좀 의외였다. 최사라는 까치발을 들어 본인의 방을 더 보려고 애썼다. 내 방 천장 생각보다 되게 높네. 그 사이 최회장이 만년필 뚜껑을 닫는 소리가 났다. 최회장은 조사서를 파일에 잘 끼운 다음 최사라에게 건넸다. '사라는... 파일럿이 되고 싶은가 보구나.' 최사라는 파일을 받아들었다. '네. 제복이 멋지잖아요. 감사합니다. 저 이제 갈게요. 오빠들이 기다려서.' 최사라는 짧게 인사하고 티 스팟을 빠져나갔다. 티 스팟은 나가는 문과 들어가는 문이 달랐다. 나가는 길 중반쯤엔 들어오는 길과는 다르게 길이 질펀했다. 방금 물을 준건가 싶을 정도로 흙이 젖어있었다. 최여주가 흙이 다리에 튈까 잠깐 속도를 줄였다. '여기는 관리가 잘 안되는 덴가? 엄청 시들어 있네. 아 그래서 물을 많이 준건가?'
12.
최여주는 티 스팟을 거의 뛰쳐나오다시피 나와서 방까지 달렸다. 방 안에서 강태현과 휴닝카이가 미리 할리갈리 판을 깔고 대기 중이었다. 최여주는 방문을 세게 열어 젖히고 파일을 침대 위에 던져둔 뒤 만들어 놓은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았다. '오늘도 사기치면 죽는다 카이오빠.' 최여주의 눈은 물론이고 강태현의 눈까지 흉흉하게 불타올랐다. 가운데 끼인 카이는 눈알만 도륵도륵 굴리며 부드럽게 부정했다. '에이 무슨 소리야~' 강태현이 카드를 섞었고 최여주가 종의 위치를 섬세하게 조정했다. '진짜 다들 너무하네.. 하핫'
땡. 소리에 맞춰 카이가 카드를 싹 쓸어갔다.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한 강태현과 최여주가 카이의 양팔을 포박했다. '야 이 사기꾼아!!!!!' 최여주가 카이의 소매 안 쪽에서 다량의 카드를 발견하고 달려들었다. 강태현은 이미 카이에게 암바를 걸고 있었다. '아이 그게 아니라 아악!!!!' 사기꾼을 외치는 최여주의 비명과 암바의 고통에 내지르는 카이의 비명이 섞여 아름다운 이중창을 완성했다. 강태현도 암바가 힘에 부치는지 기함 아닌 기함처럼 같이 소리를 질렀다. 셋이서 우당탕쿵쾅 거리며 어지간히 얽혀있어야지 정말이지 엄청나게 시끄러웠다. 결국 카이의 눈물 젖은 탭에 강태현이 암바를 풀었다. 최여주는 칼칼한 목을 부여잡고 방에 굴러다니던 생수 한 통을 깠다. 물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물을 마시고 같이 소리를 지른 카이에게 생수병을 넘겼다. 강태현은 카이가 건넨 생수병을 거절했다. '헐 목 안 아파? 소리 엄청 질렀잖아.' 최여주의 말에 강태현이 여기저기로 날아간 카드를 주우면서 답했다. '난 소리 안 질러서 괜찮아.' 강태현의 말에 최여주가 귀를 감싸고 카이를 바라봤다. '나 이제 이명도 듣나봐... 너무 소리 질러서 그런가?' 최여주의 말에 카이가 최여주의 배를 쓰다듬었다. '괜찮을거야! 나도 가끔 그랭' 카이의 말에 최여주가 귀를 매만졌다. '하긴 아까 골이 울리긴 했어.'
13.
"넌 어딘데? 난 지금 정문 앞."
담임에게 붙잡혀 강제적인 야자를 한 최여주는 손에 교과서를 잔뜩 들고 아슬아슬하게 학교를 가로질렀다. 핸드폰을 들 손조차 없어 어깨와 턱으로 간신히 잡고 있었다. 정문에 다다르자 검은 인영이 쑥 나타나 최여주가 들고 있던 교과서를 받아들었다. '안 무거워?' 강태현에게 교과서를 넘겨주다 최여주가 핸드폰을 떨어뜨렸다. 마지막 교과서까지 안전하게 넘겨주고 나서 최여주가 허리를 숙여 핸드폰을 잡았다. 다시 몸을 일으키는데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몇 번 비틀거리더니 아예 무게중심이 뒤쪽으로 넘어가 쓰러지려는 걸 강태현이 들고 있던 교과서를 내팽겨치고 겨우겨우 팔목을 잡아 끌어올렸다. 강태현이 끌어올리고 나서도 최여주는 정신을 못차리고 헛걸음을 해댔다. 앓는 소리에 강태현이 최여주를 잡고 다급하게 말을 걸었다. '너 괜찮아? 어디 아파? 야 너 진짜 어디 아픈거야?' 최여주는 말 없이 강태현의 어깨를 붙잡고만 있다 고개를 들어올렸다. '와 갑자기 핑 돌았다. 빈혈인가?' 창백해진 최여주의 얼굴을 강태현은 말 없이 바라만 봤다. '너 내일 학교 끝나자마자 나랑 병원부터 가.' 최여주가 강태현의 어깨에서 손을 떼고 떨어진 교과서를 주우려 허리를 숙이자 강태현이 막아섰다. '내가 할게. 너 진짜 내일 튈 생각하지 말고 학교 앞에서 딱 기다려.' 교과서를 줍는 강태현을 보면서 최여주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야 그냥 잠깐 어지러웠던 걸 가지고 뭐 이렇게 과민반응 해...' 강태현이 교과서를 차곡차곡 쌓아 들어올리자 최여주가 강태현의 옆으로 걸어갔다. '사람이 갑자기 쓰러지려고 하는데 당연히 병원을 가봐야지 그럼. 이건 과민반응이 아니라 일어난 일에 대해 상응하는 올바른 처치야.'
강태현은 최여주의 책상 위에 교과서를 올려주고 신신당부했다. '내일 토끼지마. 병원 예약 해놓을거니까.' 고마움의 표시로 며칠 전에 산 초콜릿을 강태현에게 주면서 최여주가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다구... 종례 끝나고 전화하면 되지?' 강태현은 바로 초콜릿 포장을 벗겼다. '응. 고맙다. 잘 먹을게.' 최여주는 교과서를 정리하다 방을 나가려는 강태현을 잡았다.
"나 교수님은?"
"교수님이 뭐?"
"아니 나 교수님 부르면 되는데 굳이, 아! 깜짝이야... 누가 계단에서 이렇게 뛰는거야!"
난데없는 쿵쿵 소리에 최여주가 소리 질렀다. 최여주의 말을 들은건지 밑에 층에서도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우리 아니야!!' 최여주가 입으로 바람을 후 불었다. '그럼 누군데!!' '몰라!! 나랑 수빈이 형이랑 연준이 형은 여기서 게임 중인데!! 태현이 아니야?!!' '전 여주랑 같이 있어요! 카이 아니에요?!' '어 맞네! 카이네!' '저 화장실에 있어용!' '여주가 잘못 들은 거 아니야?' 수빈의 말에 여주가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무슨 게임하는데?!' '춤추는거!' '아 그럼 그 소리였나보네!' 최여주가 주먹을 들어올렸다. '아오 진짜 간 떨어지는 줄 알았네.' 최여주가 다시 강태현에게 초점을 맞췄다. '나 김교수님 있잖아. 굳이 가야해?' 강태현이 입술을 깨물었다.
"...어제 최회장한테 김교수님 출장이라고 들어서. 내일은 다른 교수님한테 진료 받아야 할 듯."
강태현의 말에 최여주가 납득의 표시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키. 알겠어.'
14.
최여주가 잠 잘때만 입는 토끼 패턴 파자마를 입고 1층으로 내려왔다. 환한 거실을 지나면서 불을 컸다. 부엌 불 하나만 남겨둔 채 냉장고에서 물을 꺼냈다. 시원한 물을 벌컥벌컥 들이키고 크아- 소리를 내고 있는데 화장실 문이 열리더니 수빈이 젖은 머리에 수건을 뒤집어 쓰고 부엌에 들어왔다. '오빠도 물?' 최여주가 새 컵을 꺼내서 수빈에게 물을 건넸다. '땡큐.' 수빈이 컵을 내려놓고 수건을 목 뒤로 내렸다. '지금 자는거야?' 최여주가 물을 다시 냉장고 안에 넣었다. '응. 내일 병원까지 가야해서 일찍 자두게. 이래저래 체력 달릴 것 같아서.' 식탁 의자 하나를 빼고 수빈이 앉았다. '아 맞아, 여주야 내일 병원 태현이 대신 나랑 갈거야.' 부엌을 나가려던 최여주가 수빈의 앞에 섰다.
"갑자기?"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됐네. 태현이가 내일 과학경시대회 있는 거 깜박했대."
"아... 그럼 뭐 어쩔 수 없지. 내일 그럼 오빠랑 학교 앞에서 만나는거야?"
"그럴려구. 아 그리고 여주야 잠깐 앉아 볼래?"
묘한 수빈의 어조에 최여주는 고분고분하게 따랐다. 혼내는 것도 아니고 타이르는 것도 아닌 어중간한 어투가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왜...?"
"너 요즘 어디 많이 안 좋아?"
"아니? 딱히 아픈 데 없는데."
"근데 방 치워주시는 이모님이 너 진통제 너무 많이 먹는 것 같다고 걱정하시던데."
허를 찌르는 수빈의 말에 최여주가 입만 벙끗거렸다.
"아 그게... 그냥, 머리가 좀 아파서."
"심한거야?"
"아니이! 그냥 가벼운 편두통이야... 그렇게 심한 건 아니구 내가 좀 거슬려서..."
"너무 많이 먹지마. 내성 생겨서 점점 더 센 약 먹어야 하니까. 일단 방에 있는 건 이모님이 다 치우셨대. 너 그러다 진짜 중독 되 여주야."
"알겠어... 줄일게..."
"많이 아프면 오빠한테 말해. 다른 방법 찾아보자. 그렇게 무턱대고 진통제나 먹고 있으면 어떡해."
"응... 알았어..."
최수빈이 자리에서 일어나 최여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데 여주야, 그 많은 진통제는 어디서 난거야?"
"머리 아프다니까 교수님이 처방해주셨는데..."
최수빈이 이를 꽉 깨물자 턱뼈가 튀어나왔다.
15.
오랜만에 최수빈이 운전대를 잡았다. 학교 근처 갓길에 차를 잠깐 세워두고 최여주의 전화를 기다렸다. 어젯밤 최여주의 말을 듣고 최수빈은 더 불안해졌다. '태현이가 병원 가자고 해서 다행이야 진짜.' 최수빈의 생각은 벨소리가 울림으로써 깨졌다. 핸드폰을 볼에 꾹 누른 채 최여주가 조수석 창문을 두드렸다. 최수빈이 락을 풀자 최여주가 얼른 차에 올라탔다. '많이 안 기다리겠지?' 최여주의 말에 최수빈이 미러로 최여주의 얼굴을 살폈다. '왜? 배고파?' 최여주가 가방을 뒷자석으로 던졌다. '그게 아니라 너무 많이 기다리면 지루하잖아.' 최수빈이 눈이 뚱뚱해질 정도로 웃었다. "뭐야~ 유치원생이야?" 최수빈의 도발에 최여주가 되레 찔려 버럭 소리를 냈다. '뭐래 진짜!"
최여주는 과장이 아니라 정말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진료실에 들어갔다. '대학 병원인데 이게 가능해...? 암만 예약을 했다지만 무슨 동네 병원도 아니고...' 최수빈이 어리둥절한 최여주의 등을 밀고 진료실 안으로 들어갔다. 최여주를 교수의 앞에 있는 의자에 앉히고 간호사에게 몇 마디 말을 하니 진료실 안에 대기하고 있던 간호사가 밖으로 나갔다. 다시 최여주의 옆에 서서 최여주 대신 증상을 말했다. 그러자 교수가 다시 최수빈에게 몇 가지를 물었고 최수빈은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끝 없는 문답에 최여주는 교수의 명패나 멍하니 바라봤다. 되게... 반짝거리네...
"…해서 일단 피검사한 수치 보고 다시 봐야겠네요."
난데없는 피검사에 최여주는 낯빛이 파리해졌다. '네? 피검사요?' 최여주의 급발진에도 교수는 차분하게 차트를 보면서 말했다. '일단 빈혈이 의심된다고 하시니 빈혈 검사하고 다시 뵙겠습니다.' 최여주는 최수빈에게 붙들려 진료실 밖으로 나왔다. '채혈실은 같은 층 B동에 있으니까 바로 가서 대기하면 되세요.' 간호사의 안내를 받고 최수빈은 최여주를 질질 끌고 채혈실 앞까지 왔다. 최여주는 거의 울기 일보 직전이었다. '오빠 진짜 안 하면 안되? 나 진짜, 진짜 괜찮아. 아니 강태현이 잠깐 비틀거렸던 걸 가지고 아 오빠 나 진짜 피 못 뽑아. 아 진짜 오빠 주사 진짜 나 못해.' 최수빈이 최여주를 살살 달랬다. '금방 끝날거야. 오빠가 옆에서 손 잡아줄게. 눈 딱 감고 한 번만 뽑자.' 부드럽지만 단호한 최수빈의 말에 결국 최여주가 울음을 터뜨렸다. '진짜 무섭다고오...'
최여주는 눈물을 멈추지 못하고 엉엉 울면서 채혈실 안으로 들어갔다. 최수빈이 눈물을 닦아주면서 최여주의 교복을 접어올렸다. 교복을 걷어올리는 최수빈의 표정이 짐짓 심각해졌다. '최여주 이게 다 뭐야?' 이미 주사가 보여서 패닉이 온 최여주는 정신이 없었다. '그게 멍이 아니면 뭔데!' '뭘 했는데 이렇게 많아.' '그냥 막 생기는 데 어쩌라.. 아 진짜 주사 아...' 최수빈은 일단 최여주의 한쪽 팔을 채혈 탁자 위에 올려두고 다시 최여주를 달랬다. 최여주는 최수빈을 끌어안고 겨우겨우 피를 뽑았다. 주사가 꼽혔던 자리를 소독솜으로 문지르는 최여주의 눈에는 안광이 다 죽어있었다. 최수빈은 최여주의 어깨를 토닥였다. '잘했어. 수고했어.'
최여주가 난리를 쳐가며 뽑은 피 검사가 끝나자마 둘은 다시 진료실로 들어갔다. 간호사는 자연스럽게 진료실 밖을 나왔다. 최여주는 여전히 얼이 빠져서 의자에 앉아있었다. '검사 결과 적혈구 수치가 현저히 떨어져 있는 상태고... 그 외 다른 검사는...' 교수의 길고 긴 말이 끝나자 최수빈이 최여주의 팔을 교수에게 보였다. 교수는 최여주의 멍을 자세히 보더니 적혈구 수가 줄어들면 멍이 많이 생기니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최수빈은 감사 인사를 끝으로 다시 최여주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최여주의 겉옷을 챙기면서 말했다. '맛있는 거 먹으러 갈까?' 최여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16.
여주 몸 상태가 많이 안 좋아요. 이대로 가면 여주 그때까지 못 버텨. 일단 지금 연락 닿았으니까 방학 시작하는 대로 여주 보내자.
17.
금요일 저녁. 어쩐 일인지 최회장이 아들들과 최여주를 데리고 외식을 나왔다. 새 모이만큼 나오는 전채 요리를 시키고 저녁 시간을 보냈다. 최여주는 초반에는 잘 먹더니 음식이 나오면 나올 수록 중간에 수저를 내려놨다. 급기야 아직 뒤에 요리가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배가 불러서 더 못겠다는 말을 했다. 최회장은 그런 최여주를 보고 사람 좋게 웃었다.
"왜 이렇게 못 먹나 했더니 사라가 요즘 다이어트 하는구나!"
최회장의 말에 공기의 흐름이 바뀌었다. 원래도 불편하던 게 날카롭게 변했다. 카이가 애써 웃으며 최회장에게 대답했다.
"아버지 여주가 무슨 다이어트에용... 너무 말랐잖아요..."
카이의 말에 회장이 대뜸 호통을 쳤다.
"여주라니! 그게 무슨 말도 안되는... 사라라고 해야지! 쟨 최사라야!"
테이블을 내리쳐 그릇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사납게 울렸다.
"사라. 누가 너보고 여주라고 하면 사라로 꼭 고치렴. 알겠니? 넌 누가 뭐래도 최사라야."
최여주가 입꼬리를 끌어당겨 입만 웃었다.
18.
최여주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저녁 때 입었던 옷을 벗어던졌다. '소화도 안되고 머리도 존나 깨질 것 같아.' 다급하게 서랍을 열었지만 아무것도 없는 걸 보고 신경질적으로 서랍을 닫았다. 원래 진통제가 있어야 할 자리였다. 갑자기 치미는 화에 최여주가 책상에 있던 필통을 집어던졌다. 필통이 열려있던 모양인지 샤프와 볼펜이 튀어나와 벽에 부딪혔다. 안 그래도 붕 떠있던 벽지가 찢어졌다. 떨어진 필기구를 주우려고 했는데 벽지 안에 쨍한 노란색이 언뜻 보였다. 찢어진 벽지를 벌리고 노란색을 잡아 당겼다. 꿈쩍도 않자 최여주가 떨어진 커터칼을 들고 벽지를 조금 잘라냈다.
"미친. 이게 뭐야."
알 수 없는 붉은 글씨가 쓰여진 반듯한 직사각형 모양의 노란 종이가 벽지 속의 벽지에 붙어있었다. 누가봐도 부적이었다. 최여주가 부적을 잘라냈다. '이게 뭐야 도대체...?' 최여주가 입을 틀어막았다. 우선 뜯은 벽지를 다시 테이프로 붙여놓고 떼어낸 부적을 책상 위에 올렸다. 구글에 검색을 해도 비슷한 모양의 부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최여주는 핸드폰을 껐다. 부적을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만졌다. '설마, 이게 벽지 안에 다 붙어있는 건 아니겠지...?' 소름이 돋는지 최여주가 몸을 웅크렸다. '말도 안되는 소리다 진짜.'
19.
최여주가 잠에서 깼다. 잠만큼은 정말 죽은 듯이 잤는데 진통제를 뺏긴 날부터 밤에 몇 번이고 잠에서 깼다. '미치겠다.' 최여주가 침대를 박차고 나왔다. 몸은 피곤해 미치겠다고 아우성을 치는데 정신머리를 또 그 반대였다. 너무 쌩쌩해서 돌아버릴 것 같았다. 최여주가 물이라도 마시려고 문고리를 누르는데 문 너머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최여주의 몸이 굳었다.
"사라야."
본인을 부르는 최회장의 목소리에 최여주는 숨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머릿속에서 온갖 생각이 핑핑 돌았다. 최여주는 아무것도 못하고 우두커니 서 있을 때 문이 덜컥하고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최여주의 방에서 이렇게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릴만한 곳은 바로 옆에 붙어있는 창고 뿐이었다. 최여주가 입을 막았다.
"우리 사라 많이 답답했지. 자 이제 나가서 산책하자."
두 사람의 것처럼 들리는 발소리에 최여주는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대로 자리에 주저 앉았다.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 모두 생생하게 최여주의 귀를 찔렀다. 최여주는 그 자리에 주저 앉아 벌벌 떨다 겨우겨우 창문으로 기어갔다. 커튼을 살짝 당겼다. 캄캄한 밤이었지만 청명한 달빛이 드리워 부족함 없이 보였다. 최회장은 본인보다 작은 숏컷 여자의 손을 잡고 정원으로 들어갔다. 여자는 걸음걸이부터 이상했다. 자꾸 최회장의 손을 놓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최회장은 그 여자애의 손에 질질 이끌려 정원을 돌아다녔다. 그러더니 갑자기 잔디에 드러누워 이리저리 움직였다. 최여주는 커튼을 놓고 다시 문까지 기었다. 겨우 문을 열었다. 심장 박동에 뇌까지 울렸다. 문 밖을 엉금엉금 기어나가 계단 난간을 잡고 겨우 일어섰다. 최회장의 목소리가 다시금 최여주를 스쳐 지나갔다. 최여주는 난간을 잡고 미친듯이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다리가 속도를 이기지 못해 마지막 두 계단을 남겨두고 굴러 떨어졌다. 최여주는 최여주의 방에서 가장 가까운 카이의 방으로 다리 아픈 줄 모르고 뛰어갔다. 최회장이 볼세라 막무가내로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누구야..."
카이가 소음에 잠에서 깨어났다. 최여주는 말 없이 방문을 닫고 그 방문에 기대서 아무말도 못하고 다시 주저 앉았다. 카이는 졸린 눈을 비비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누구냐니까...' 카이가 최여주에게 다가왔다. 방문 옆에 있는 불을 키기 전에 최여주를 본 카이는 누군가 머리를 내친 느낌이었다.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눈물을 쏟아내며 벌벌 떨고 있는 최여주를 안아 침대에 올렸다. '여주야 왜 그래? 괜찮아? 꿈 꾼거야?' 카이가 휴지를 여러장 뽑아 최여주의 눈물을 닦았다. '여주야 어디 다친거야? 무슨 일 있었어? 왜 그래?' 카이가 불을 키려고 하자 최여주가 다급하게 잡았다. 카이의 방은 최여주의 방 바로 밑이었다. 불을 킨다면 최회장이 있는 정원에 바로 보였다. 카이가 최여주의 옆에 앉아 최여주를 달랬다. 최회장이 다시 현관을 열고 계단을 올라가는 소리에 최여주는 잠이 든 카이의 옆에서 다시 떨었다. 최회장이 출근하는 소리에 그제서야 기절하듯 잠에 들었다.
20.
날이 밝자 카이는 최여주를 잡고 다시 물었다. '여주야, 무슨 일 있었던거야?' 최여주는 손톱 까득까득 씹었다. 카이에 의해 바로 제지 당하긴 했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너도 알고 있었어?' 질문을 질문으로 답한 최여주에 카이는 탱탱 부은 최여주의 눈두덩이를 손으로 쓸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여주야?' 최여주는 눈물이 차오른 채 카이를 노려봤다. '너도 알았냐고. 최사라.' 카이는 최여주의 말에 오랫동안 답이 없었다. '...어떻게 알았어 여주야.' 최여주가 카이의 손을 뿌리치고 침대 끝으로 도망쳤다. 최여주의 반응에 오히려 카이가 더 충격이라도 먹은 듯 보였다. '설마 최회장이 보여줬어?' 알 수 없는 카이의 말에 최여주는 다시 노려봤다.
"최회장이 병원에 널 데려간거야?"
"...알아듣게 얘기해."
"아니야? 그럼 어떻게 안거야...?"
"..."
"여주야... 제발 말해줘..."
최여주의 손을 잡고 애원하는 듯한 말에 최여주가 소리를 내어 엉엉 울었다. 거실에 나와있던 나머지 형제들은 최여주의 울음소리에 카이의 방에 달려 들어왔다.
최여주가 시선을 어지럽게 옮겼다. 터져나오는 울음에 어떻게든 말을 하려고 애썼다.
"벽지, 사이에서, 부적, 있, 있어서, 이상, 이상하다, 싶었는데, 바, 밤에 갑자기 최회장이 내 이름, 내 이름 부르더니, 어떤 여자랑, 밖에, 산책,"
최여주의 말에 형제들의 표정이 차갑게 식었다. 카이가 본인의 울음에 잡아 먹히려 하는 최여주를 안았다. 최여주가 카이의 어깨에 얼굴을 박고 악을 쓰며 울었다. 형제들은 최여주가 진정되길 기다렸다. 최여주의 울음이 차츰 잦아들기 시작하자 최범규가 최여주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여자가 어디 있었는지 알겠어?"
최여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 할 수 있겠어?"
최여주가 다시 고개를 끄덕이곤 말을 덧붙였다. '같이, 같이 가.'
21.
최연준이 미지근한 물이 담긴 컵을 카이에게 건넸다. 카이가 최여주에게 물을 먹였다. 최연준은 머리를 쓸어올렸다. 그러곤 최여주의 옆에 있는 카이를 제외하고 나머지 형제들만 들을 수 있는 정도로 말했다. '걔 병원에 있다며.' 형제들의 시선이 복잡하게 얽혔다.
최여주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카이에게 팔짱을 끼고 방을 나왔다. 계단 앞에 서서 본인의 방 바로 옆에 있는 창고를 가리켰다. '저기.' 최연준과 강태현이 먼저 앞장 섰다. 최여주는 카이에게 반쯤 기대서 맨 뒤에 있었다. 최여주까지 창고 앞에 오자마자 강태현이 망설임 없이 문을 열었다. 창고 안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최여주는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카이와 함께 방 밖 멀찍이 형제들이 들어가는 것만 지켜보고 있었다.
나머지 네 형제들이 창고를 샅샅이 뒤졌다. 사람이 있을 법한 장소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돌연 강태현이 고개를 뒤로 젖혀 바둑판 모양으로 갈라져 있는 천장을 바라봤다.
"수빈이 형. 여기 천장에 손 닿죠."
최수빈이 팔을 쭉 뻗고 살짝 뛰자 천장에 손이 닿았다.
"왼쪽에서 네 번째 있는 칸 눌러볼래요, 한 번."
최수빈이 천장을 꾹 누르자 강태현이 말한 천장이 열리고 사다리가 펼쳐졌다.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카이를 잡은 최여주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내가 올라갈게."
최연준이 사다리를 잡고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상체만 보이지 않자 최연준이 멈췄다.
"연주니? 째연쭌!!!"
천장 위에서 들리는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최여주가 입을 틀어막고 화장실로 내달렸다. 카이는 최여주의 뒤를 쫓았다. 최연준이 서둘러 사다리에서 내려오려고 했지만 이미 따라잡힌 후였다. 최사라는 사다리 밑으로 내려가는 최연준을 따라 사다리를 타고 내려왔다. 중심을 잃은 듯 몇 계단 남지 않은 사다리에서 떨어졌지만 그 아무도 최사라를 일으켜주지 않았다. 최연준은 손등을 입을 가리고 뒷걸음질쳤다.
"연주나! 와아 연주니다! 연주니!"
최연준이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방 밖을 뛰쳐나왔다.
"어어? 연주나 어디가! 연주나 사라랑 놀자! 연주나! 오빠!!"
살집이 있는 몸에 짧게 잘린 머리, 분홍색 원피스를 입은 최사라는 최연준을 따라 쿵쿵 계단을 내려갔다. 최연준은 최여주를 불렀다. '여주야...! 최여주!' 카이와 같이 이제 막 화장실을 나오던 최여주는 계단을 뛰어내려오는 최연준과 최연준을 따라 달리는 최사라 그리고 그 최사라를 잡기 위해 미친듯이 뛰는 형제들은 보고 다시금 속이 뒤집혔다. 하지만 이미 위액까지 토해낸 탓에 더 이상 토해낼 것도 없었다. 카이는 최여주를 본인의 뒤로 보냈다. 최여주는 화장실 문과 카이의 사이에서 카이의 옷만 붙잡았다.
최연준만 보고 쫓아오던 최사라는 1층에 있는 카이를 보곤 더 흥분했다.
"카이야아!!"
퉁퉁 불은 몸에도 어찌나 빠른지 나머지 형제들이 뒤늦게 쫓아왔지만 쉽게 잡히지 않았다. 최사라는 카이를 향해 돌진했다. 최연준은 다리에 힘이 풀려 거실에 이도저도 못하고 널부러져 있었다. 강태현이 최연준을 일으켜 세웠다. 최수빈과 최범규가 최사라를 잡으려 했지만 최사라는 둘을 밀치고 카이의 앞에 멈춰섰다. 숨이 차지도 않은지 멀쩡하게 카이에게 말을 걸었다.
"카이야 사라랑 놀자! 놀자 놀자 놀자! 사라 지금까지 너무 심심했어!"
카이는 본인에게 매달려 온몸으로 때를 쓰는 최사라를 밀어냈다. 카이에게 밀린 최사라는 상처 받은 표정으로 곧 울음을 터뜨리려 하다 카이의 뒤에 숨어있는 최여주를 발견했다.
"카이야 얘는 누구야?"
최범규와 최수빈이 그나마 얌전해진 최사라의 양팔을 붙잡았다.
"어?! 수비니랑 범규다아!! 우와아!"
"최사라, 이제 돌아가자."
최사라는 최수빈의 차가운 말투에 놀라 최수빈을 올려봤다.
"수비나... 사라한테 왜 그러케 마래...? 사라가 지금 잘못해써?"
"어. 지금 잘못하고 있어. 다시 방으로 가자."
"아니야! 지금 사라 잘못 안했어! 수비니가 잘못했어!"
도대체 그런 힘이 어디서 나오는 건지 최사라는 최수빈과 최범규를 뿌리치고 카이의 옆으로 다가갔다. 카이가 몸을 돌려 최사라를 막았다.
"친구야... 친구는 누구야아...?"
"..."
"왜 사라가 묻는데 대답을 안해!"
최사라가 최여주의 머리카락을 잡은 건 정말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최사라가 최여주의 머리카락을 잡고 있는 힘껏 잡아당겼다. 최여주는 머리가 뿌리채 뽑힐 것 같은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카이가 최사라를 최여주에게 떼어냈지만 최사라는 최여주의 머리카락을 쥔 손만은 놓지 않고 마구 흔들어댔다. 최여주가 소리쳤다.
"아악!! 아파!! 아프다고!!!"
카이는 이미 최여주에게 달려들려고 하는 최사라를 온몸으로 막아서고 있었다. 강태현이 최사라를 향해 뛰어가 최사라의 손목을 손날로 여러 번 내리쳤다. 최사라가 꽤액 소리를 지르며 머리카락을 놓았다. 최사라가 머리카락을 놓자마자 최여주는 풀썩 쓰러졌다. 카이가 최사라를 등지고 최여주의 상태를 살폈다. 최여주를 다시 일으켰다.
카이가 범규를 조용히 불렀다. 카이는 최사라가 잡았던 최여주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고 최범규와 함께 최여주를 화장실 안으로 밀었다. 최범규는 머리를 감싸고 잔뜩 웅크린 최여주를 안고 토닥였다.
22.
최사라는 카이의 합세로 창고까지 질질 끌려갔다. 최사라가 울고불고 소리치는 소리에 귀가 다 먹먹할 지경이었다. 최수빈이 서둘러 사다리를 내렸다. 아무래도 사다리까지 최사라를 끌고 올라가는 건 무리였다. 강태현이 창고 문을 잠궜다. 한참이나 바닥에 엎어져 악을 악을 쓰는 최사라에 최연준이 한숨을 쉬고 머리를 한 번 쓸어올렸다.
"최사라!!"
최연준의 호통에 최사라가 조용해졌다. 다른 형제들도 깜짝 놀라 최연준을 바라봤다.
"방으로 들어가."
"싫어! 심심해!"
"방으로 들어가. 좋은 말 할 때."
"왜 자꾸 들어가래! 오빠는 사라 안 반가워? 사라는 연주니 오빠 너무너무 반가운데..."
최연준이 어이가 없는지 실소를 터트렸다. 그런 최연준 대신 최수빈이 최사라에게 말했다.
"누난 우리가 반가워?"
"당연하지! 수비니 무지무지 보고 싶었는데... 연주니 오빠는 아닌가봐..."
"진짜 웃긴다. 그렇게 장난감 취급할 땐 언제고."
최연준이 최사라의 손을 우악스럽게 잡아끌어 사다리를 잡게 했다. 그때 옆 방인 최사라의 방에서 웃음과 울음이 섞인 소리가 들렸다. 최연준은 최사라의 엉덩이를 막무가내로 밀었다.
"태, 태혀나..."
"뭘 바래. 올라가. 문제집이나 풀면서 놀면 되잖아."
"카이, 카이..."
"이름 부르지 마."
최연준이 최사라를 위로 억지로 쑤셔넣자 강태현이 사다리를 올려버렸다. 최사라가 천장을 쿵쿵 치며 울었다. 카이가 창고 문을 열고 형제들과 함께 바로 옆 방으로 갔다.
23.
최사라의 소리가 점점 멀어지자 최범규가 화장실 문을 살짝 열었다. 창고 안으로 들어간 최사라를 확인한 뒤 최여주를 일으켜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내 방에 가자.' 최여주의 말에 최범규는 말 없이 따랐다. 최여주는 방에 들어가자마자 필통을 뒤엎어 커터칼을 찾았다. 최범규가 최여주를 막으려 하자 최여주가 힘 빠진 웃음을 지었다. '벽지 좀 뜯을게.' 최범규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최여주를 바라봤다. 최여주가 힘껏 벽지를 찢었다. 최범규는 찢어진 벽지를 잡고 뜯었다. 거의 한 면을 다 뜯자 빼곡한 노란 종이가 보였다. 최여주는 웃었다. 눈에선 눈물이 흘렀다. 들고 있던 커터칼을 반대편 벽을 향해 던졌다. 최범규도 벽을 보곤 충격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머지 형제들이 최여주의 방에 들어왔다. 다 뜯겨나간 벽지를 한 번, 그 앞에 주저 앉아 울고 웃는 최여주를 한 번 보곤 움직일 수 없었다. 최여주가 형제들을 돌아봤다.
"이거 나 죽으라고 해놓은 거 맞지?"
24.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최수빈이 트렁크에 무작정 최여주의 짐을 쓸어 담았다. 시간이 촉박했다. 최회장이 오기 전에 최여주를 이 집에서 보내야 했다. 최수빈은 형제들에게 일단 어머니에게 찾아가라고 말한 뒤 최여주를 데리고 공항에 갔다. 급하게 비행기 티켓을 예약하고 최여주의 어깨를 붙잡고 얘기했다.
"너 어머니 지금 그리스에 계시대. 내가 연락 드렸으니까 그리스 공항에 도착하면 나와 계실거야. 빨리 가 알았지?"
최여주는 최수빈의 허리를 끌어 안았다. 최수빈은 최여주의 등을 두어번 쓸어주고 얼른 보냈다.
25.
형제들은 어머니의 집에서 숨어지내다시피 지냈다. 정실의 아들이었던 최연준만 그 화를 피하지 못했다. 최연준의 엄마가 기를 쓰고 아들을 보호하자 최회장이 그제서야 물러섰다.
26.
신문사 집안인 강태현은 외가의 힘을 빌어 최사라의 존재를 언론에 알렸다. 최회장은 최사라를 병원에 보냈고 회사는 심각한 주가하락을 겪었다.
27.
최여주는 그리스에 도착해 엄마를 만났다. 최수빈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최여주의 엄마는 만신창이가 된 딸을 보고 울분을 터뜨렸다. 최여주는 법적 성인의 나이가 될 때까지 엄마와 함께 여행을 다녔다. 그리고 최여주가 성인이 된 해, 형제들이 최여주를 찾아왔다.
아니 이게 원래 이렇게 호러로 갈 생각은 아니었는데... 머쓱...
근데 글을 쓰면서 이렇게까지 몰입한 건 처음이라 정말 재밌게 썼습니다.
여주가 부적 처음 발견하고 잠에서 깼을 때 진짜 부들거렸습니다.
아오 최회장 딱 한 대만 맞자 장미칼로.
단편이라 속 시원하게 해결이 안된 부분도 많이 있으실 것 같아요
얘기를 추가해보려고 했는데 다 어그러져 그러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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