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끝
01. 하얀 눈
-본 이야기는 모두 허구이며, 실제 인물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또한 신체적 특성 또한 이야기의 일부일 뿐이고 누군가를 비방하거나 비하 할 의도는 없다는 것을 밝힙니다.
(피드백 및 수정 요청 언제나 환영, 부드럽게 댓글 남겨 주세요!)
w.선샘미가좋마묘
너를 처음 봤던 건 매일같이 차디 찬 눈이 펑펑 내리던 1년 전 12월이었다.
동아리 방까지 짐 들기를 걸고 한 가위바위보에서 진 나는 왼손에는 동아리 선배들과 내가 만든 악보들을, 오른손에는 무거운 음향 장비를 들고서 학교로 향하는 횡단보도에 서 있었다. 진짜 나빴어. 선배들은 진심으로 한 내기였는지 하나같이 나를 도와줄 생각도 하지 않았다. 뭐가 그리 재밌는지 나도 좀 끼고 싶은데 낄낄 거리는 얄미운 웃음소리만이 들렸다. 나는 얼음장처럼 차갑게 언 손을 어떻게든 녹여보려 애쓰며 서 있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하늘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아! 안돼! 굵고 하얀 눈이 내 위로 펄펄 내려오는데 혹시나 음향장비가 젖을까 내 겉옷을 음향장비 위에 올렸다. 허둥지둥 눈을 털어내고 악보가 좀 구겨지더라도 가방에 넣자 싶어서 가방을 꺼냈다. 그 사이에 신호가 몇 번이나 바뀐 건지는 몰라도 정리를 다 하고 고개를 들었을 때에는 이미 선배들은 내 시야에서 벗어난지 오래였다. 이 꼰대 개새끼들… 아까보다도 더 차갑게 닿는 바람에 몸을 잔뜩 움츠렸다.
바지의 왼쪽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휴대폰에서 알람음이 울렸다. 바닥이 눈 때문에 축축해져서 안 그래도 무거운 장비 위에 옷까지 얹고 양 손에 들었는데 말이야. 이 소리는 선배들에게 재촉 전화가 오는 알람음인 게 분명했다. 전화가 오는 걸 보니 동아리 방에 도착 했나보지? 낑낑거리며 손목 시계를 확인해보니 10분이나 지나 있었다. 이 새끼들이 상도덕 없이 먼저 앞질러 갔으면 재촉이라도 하지 말든가! 그냥 무시하자 싶어서 휴대폰을 꺼내 들지 않았다.
"저기요. 전화 계속 울리는데요."
계속 울리는 게 귀찮아서 전화를 받아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하고 있던 찰나에 웬 남자가 나를 향해 말을 걸었다. 뭐야?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큰 개가 눈에 띄었다. 처음에는 남자의 시선이 앞을 향해 있어서 나를 칭하는지도 몰랐지만 그는 내가 계속해서 대답을 하지 않자 살짝 내 쪽으로 몸을 틀었다. 아… 손에 음향 장비를 들고 있어서요. 못 받고 있어요… 말 끝을 흐리며 멋적게 대답하자 그는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정면을 바라봤다.
남자는 왼손을 뻗어 시각장애인 전용 버튼을 눌렀다. 띵동- 큰 알람음을 내던 버튼에서는 곧 있으면 신호등이 바뀐다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5, 4, 3, 2, 1- 초록불입니다. 음성이 흘러나오자 남자는 개의 뒤를 따랐다. 금빛 털이 예쁜 래브라도 리틔버였다. 헥헥 거리며 내뱉는 숨결에 맞춰 진한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소리가 신경 쓰였구나. 괜히 혼자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도 남자를 뒤쫓아 앞으로 걸어 나갔다.
횡단보도를 다 건넌 남자의 표정은 왠지 모르게 안심 되어 보였다그는 자신의 개에게 아, 기다려 하고 짧은 감탄사를 뱉었다. 여전히 낑낑대고 있는 나에게 그는 패딩 속에 들어 있던 핫팩과 제 가방 속의 우산을 내게 건넸다. 나한테 주는 게 맞나 싶어서 가만히 있자 남자의 입이 떨어졌다.
"눈 오잖아요. 지금 시즌에 음향장비 들고 다니는 거 보면 작곡과이신가봐요?"
"네… 맞긴 맞아요.”
"어느 방향으로 가세요? 가방이라도 들어 드릴게요."
남자의 말에 나는 사양을 할까 싶다가도 혼자 이걸 다 들고 가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이 들어 짧게 대답을 한 후에 악보가 든 가방을 그의 손에 건넸다. 그는 내 가방을 어깨에 걸치더니 손에 들려 있던 지팡이로 앞을 짚었다. 내 방향에서는 줄곧 보이지 않았는데, 그가 했던 행동들이 한 번에 이해 되는 순간이었다.
"누가 시켰는진 몰라도 진짜 짓궂다."
"제가 가위바위보를 져서요… 운이 안 좋았나봐요."
"액땜 한 거라고 생각해요. 오늘 더 좋은 일도 있을 거예요."
목소리가 참 부드럽고 안정적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이런 이런 이야기를 하며 걷다 보니 학교 건물 앞에 다다랐다. 그는 학교 기숙사에 살고 있다고 했고, 방금은 살 것이 있어서 잠시 개를 산책 시킬 겸 나온 것이라 했다. 우산은 어디로 갖다 드리면 될까요? 남자는 내 말에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더니 굳이 갖다 줄 필요 없다며 손사레를 쳤다.
이름이라도 물어봐야 하나 싶어서 남자를 불러세울까 했지만, 짧은 사이에 진동으로 바꿔 둔 내 휴대폰이 아까부터 선배들의 전화로 금방이라도 터질 것 마냥 울리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 동아리실로 발걸음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의 얼굴만은 또렷하게 기억났다.
검은 머리에 대조되는 흰 피부, 춥지도 않은 건지 꽤나 얇게 입은 옷과 가장 눈에 띄었던 건 커다란 개. 그리고 나와 대화할 때에는 바닥을 바라보고, 그냥 있을 때에는 허공에서 맴돌던 그의 시선. 어쩐지 텅 비어있는 느낌마저 들게 하는 그의 눈빛. 하지만 아까 내게 웃어 줄 때에는 곡선을 그리며 휘어지는 눈이 참 예뻤다. 핫팩을 꼭 쥔 채로 발걸음의 속도를 높였다.
"죄송합니다. 오다가 신호등에 여러번 걸려서"
"으이구, 그래 얼른 들어와"
동아리실에 들어가자마자 음향 장비를 한 구석에 모셔두고 다시 동아리실 입구로 가서 머리에 쌓인 눈을 털었다. 생각보다 눈이 많이 왔는지 내 눈 앞에 눈이 솔솔 떨어졌다. 선배들은 히터를 빵빵하게 틀어놓고는 귤을 까먹으며 나를 반기고 있었다. 나는 이 추운 겨울에 저 무거운 음향장비를 들고서 낑낑대며 걸어왔는데, 저 인간들은 귤이나 까 먹고 앉아 있다니. 진짜 마음같아서는 확 까버리고 싶다. 귤 같은 사람들.
"예보에도 없던 눈인데 용케도 우산은 들고 왔네?"
성격 같아서는 한 마디 하고 싶었지만 이제 막 대학 생활을 1년 채워가는 스무살 새내기가 가암히 선배들에게 언성을 높일 수는 없다는 걸 잘 알기에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그 남자가 건네 주었던 핫팩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는데, 내 앞에서 마지막 귤을 입에 쏙 집어 넣은 동진 선배가 손에 우산은 뭐냐며 깝죽 거렸다. 설마, 남자친구우? 말 끝을 늘이며 말 하는 모습에 주먹이 부들거렸다.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내가 대답을 회피하면 분명히 말 할 때까지 괴롭히고도 남을 양반들이기 때문에 아까 그 남자와의 일을 대충 설명해줬다. 내가 말 하는 중간 중간에 추임새를 넣는 동진 선배의 모습에 억지로 웃느라 입꼬리 주변 근육에 경련이 일어날 뻔 했다.
그 남자에 대해 이리 저리 설명을 하다가 큰 개를 끌고 다닌다고 말 하자 선배들의 표정이 묘하게 당황스러워 보였다. 왜지? 설마 그 남자가 시각 장애인이라서 말을 꺼내는 것만으로도 조심스러워 하는 거야? 당황스러웠다. 앞이 안 보인다고 해서 특별하게 다를 게 뭐 있다고. 비장애인의 뒷 얘기는 험담이더라도 그렇게도 잘 하면서 장애인은 '오늘 그 사람과 이런 일이 있었다.' 라는 것만을 말 해도 불경스러운 일인 건가? 나는 그런 부분들이 여러모로 이해가 되지 않아서 더더욱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그 분 이름이랑 무슨 과인지 아시는 분?"
"아마도 피아노과 19학번일 거야. 너랑 나이도 같을 걸? 이름은 이지훈"
"이, 지훈…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지훈. 이 지훈, 지후니. 지훈… 속으로 그의 이름을 서너번 정도 곱씹었다. 이름도 동글 동글하고 말간 느낌이었다. 아까 그가 주었던 핫팩은 아주 조금 식어있었다. 혼자서 그의 행동을 곱씹어 보다가 문득 깨달았다. 그와의 인연은 그저 우연으로 지나지 않을 것 같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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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년 전에 비해 나이를 한살 더 먹고, 과제가 늘어난 걸 빼면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그리고 너도 1년전과 똑같았다. 조금은 날카로운 눈매를 가졌지만 웃을때에는 반으로 휘어져 접히는 것도, 무심한 듯 다정하게 주변사람들을 챙기는 세심함도, 우리가 처음 만난 날 내리던 눈 처럼 하얗기만 한 피부에 대조되는 까아만 머리칼과 짙은 눈동자도, 모든 게 그대로였다.
달라진 건 지훈이를 좋아하게 된 내 마음 뿐이다. 매일 신호등에서 마주치더라도 내가 다가오는지도 모르는 그의 모습에 오늘도 그에게 인사를 건네려던 손은 허공에서 맴돌다가 내 주머니 속으로 다시 들어갔다. 오늘도 인사는 글렀다. 신호등을 건너는 그의 뒤를 한 발자국 뒤에서 조용히 쫓기만 할 뿐이다. 괜히 그 애가 걸었던 눈 위를 똑같이 밟았다. 우리가 걸은 발자국은 꼭 한 사람이 걸은 것만 같았다.
횡단보도에서 내가 지훈이의 뒤에 서 있으면 그의 옆에서 그 애를 지켜주는 개 해피만이 나를 흘끔 쳐다봤다. 어디선가 안내견에게는 간식을 주어서도, 인사나 애교를 부리게 시켜서도 안 된다는 말을 들었기에 옅게 웃음을 띄운 후에 해피에게서 시선을 떼었다. 초록불이 켜졌다. 그는 평소처럼 해피의 뒤를 따라 학교 건물 안으로 들어갔고, 나는 그 뒤를 따라갔다.
"아직 친해지려면 멀었구나. 너는 왜 이렇게 소심하냐? 우리한테 하는 것 처럼 해 봐. 어?"
"동진선배. 선배는 제발 가만히 좀…"
1년 전 그 날 저녁 즈음에 그에게 우산을 갖다주기 위해 그를 찾아갔지만 지훈이는 친구도 딱히 만들지 않고 동아리도 들지 않은 채로 대학생활을 보내는 것 같았다. 안면이 있는 피아노과 아이들과 먼저 친해져서 건너 건너 그 아이에게도 살갑게 말을 걸어 보려고 했지만, 피아노과 아이들은 그의 근처에 바리케이트라도 쳐져 있는 듯이 가까이 가지 않았다. 일단은 1보 후퇴.
그날 이후로 지훈이를 조금씩 관찰하기 시작했는데, 아무래도 친구가 없는 이유는 자기가 일부러 철벽을 치는 듯 했다. 사람들을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기도 했고… 여하튼 같잖은 이유로 괴롭힘을 당하거나 왕따를 당하는 건 아닌 것 같다는 말이다. 대학교씩이나 와서 그러는 애들은 거의 없을 걸 알긴 했지만 사람 일은 혹시 모르는 거니까. 피아노과 아이들에게 지훈이에 대해 물으면 대부분이 잘 모르겠다며 말 끝을 흐렸다.
어떻게든 친해지고 싶어서 같은 강의를 신청하긴 했는데 어떻게 해도 친해질 수가 없었다. 내가 친화력이 엄청 좋은 타입은 아니더라도 어디에서 친구 하나 못 만들 성격은 아닌데, 꼭 지훈이 앞에만 가면 로봇처럼 굳어버렸다. 처음 몇 개월은 탐색, 중간 몇 개월은 어떻게 해야 할 지 작전 짜기, 그리고 지금 몇 개월은 그저 옆을 뱅글 뱅글 돌며 친해질 타이밍을 엿볼 뿐이다. 지훈이와 친해지려는 타이밍 엿보기와, 과제와 시험에 치여 살다 보니 1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칠봉아… 이제 제발 좀 다가가면 안돼? 심각한 병도 이정도 잠복기는 안 가져"
"만약 무턱대고 다가갔다가 도망가기라도 하면 어떡해?"
"넌 진짜 답이 없다. 알아서 해. 그래도 사랑은 타이밍인 거 알지?"
"… …"
희연이의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1년간 내 옆에서 계속 지훈이를 지켜봐주다 보니 희연이는 이제 지훈이랑 친구가 된 거 같다는 기분도 든댄다. 미안하면서 웃기기도 했다. 같은 강의실 저 앞자리 왼쪽 끝에 앉아서 밖에 내리는 눈을 보지도 못한 채로 멍하니 창 밖에 시선을 두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마음 한 켠으로 결심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꼭, 꼭 다가가고 말 거야.
본 글의 기본 이름은 '김 칠 봉'으로 받침이 있는 이름에 더 적합한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사담 |
저녁에 온다고 해 놓고 새벽에 오는 이 인간ㅋㅋㅋㅋㅋㅋㅋ 진짜 원래 썼던 글이 은근 더 까다로운 거 같아요. 수정 할 곳이 한 두 군데가 아니에요. 그리고 어느정도 예민한 주제에 관해 글을 쓰고 있는 만큼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많은 거 같습니다. (움짤이 제일 ㅠㅠ 눈동자가 묘하게 흐트러져 있거나 많이 안 움직이는 움짤을 찾기가 힘드러요. 오늘도 완전 정면을 보는 움짤이라 조금 아쉽습니다.)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여러분의 댓글은 저의 힘이 됩니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