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참 쨍쨍하게 내리쬔다.
역시 여름에 가까워 가고 있긴 한건지 슬슬 더워오는구나.
호원이가 자는 사이 조심조심 열심히 옷장을 뒤져 겨우 찾은 베이지색 면 반바지가 좀 답답할 지경이다.
가디건 들고 왔으면 큰일 날 뻔했네.
맨날 별만 접고 공부를 안 해 당연하게도 망친 중간고사가 끝나고.
성열이와 성종이, 명수 사이에서 머리가 어지럽도록 눈치를 보다가,
그리고 호원이가 접은 학 개수가 어느새 600개를 넘기고,
쪼그만 할 때부터 그랬듯 또 약속 잡아놓고 해외로 튄 우현이 덕에 몇 주나 미뤄진, 우현이네집에 놀러가는 날이 다가왔다.
그나저나 남우현이 얘는 중간고사 잘 쳤으려나, 여행 다니느라고 공부는 했나 몰라…….
그래, 그래도 나보단 잘 쳤겠지만.
아무튼 부잣집도련님인데, 집에 에어컨정도는 틀려있겠지.
손부채질을 하면서 교문에 기대어기다린지 한 십 분 쯤...됐을까,
저-쪽에서 어김없이 2000년대 초 스타일로 차려입은 우현이가 막 뛰어온다.
막상 와서는 자기가 내 차림새를 이상하다는 듯 아래위로 훑어보고…….
이게 약 십년 후에는 완전 트렌드거든?
"안녕! 아, 늦었지, 미안해-"
"아냐, 으 더워어...빨리 가자"
서있기가 싫어서 대충 어서 가자 그러니까 수줍게 머리를 만지작거리더니 뒤로 돈다.
적당히 나란히 걸어 따라가니 대기하고 있는 검은 차.
"어....미안..알아서 가겠다고 분명히 말을 했는데-……."
뭐가 그렇게 미안한지 눈치를 살살 본다.
아무튼,으이구…….
"뭐가, 좋은데- 시원하잖아,흐하하. 너 먼저타-!"
"어?,응-"
친구 데려가려다가 욕먹은 적이라도 있는지 빙긋, 웃으면서 내 머리를 슥슥 쓰다듬고는 먼저 차에 탄다.
그리고는 한손을 쓱- 내민다.
내가 기집앤줄 아나, 쓸데없이 다정하기는.
오늘의 우현이는 꼭, 몇 년 전 처음 만난 날의 호원이 같다.
/
우현이네, 아니 본인의 말에 의하면 우현이네 아버님의 집은 생각대로 좀 굉장했다.
딱 이천년대초 드라마에 나올법한, 그런 복층구조의 이층주택.
그래도 나름 현실감 있는 게 어느 오타쿠애니나, 미연시에 나오듯 무슨 집사님이나 정원사가 있는 게 아니라,
어머님이 정원의 꽃을 가꾸며 우리를 맞이해주셨다.
뭐, 대충 눈치로 보기에도 그냥 본인이 좋아서 일부터 고용하지 않은 것 같지만, 뭐 어때.
나는 애써 부담감을 떨쳐내며 집안으로 들어와 폭신폭신한 실내화로 갈아 신었다.
실내화도 그냥 손님용인 것 같은데 부들부들.
반질반질하게 닦인 대리석바닥을 보며걷는데,
"이쪽이야"
집이 이렇게 넓어도 자기 집인 만큼 구조를 꿰뚫고 있고, 늘 있던 공간이라 뭔가 편안한지
얼굴에 웃음을 띤 채, 내 손을 잡고 나무계단을 오른다.
2층 복도에 도착해, 막다른 벽을 향해 걷다보니
모두 나무 결무늬로 되어있는 다른 문들과 다르게 하얗게 페인트칠되어있는 문이 하나 보인다.
"사실, 니가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오자고한거야. 열어봐"
그제야 손을 놓고 문을 향해 내 등을 떠민다.
주춤주춤하다가 방음시설이 되어있는지 조금 무거운 문을 여니, 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통유리로 해놓은 한쪽벽면에서 빛이 비쳐 흰 그랜드피아노에 반사되어 반짝반짝 빛나는 광경이란.
다른 쪽 벽에는 쇼파가 있고, 그 맞은편에는 책장에 책들이 가득 채워져있다.
쇼파 주위에 베이지색 러그가 깔려있어 들어가자마자 슬리퍼를 벗고 눕듯이 앉으니
그게 웃긴지 소리 내 웃으며 문을 닫고 들어오는 우현이.
"푸흡, 무슨 고양이야?, 발 들이자마자 거기다대고부비적대게-"
"여기 완전 좋은 것 같아! 피아노도 완전 예뻐! 나 하얀 거 태어나서 처음봐!!"
자기가 소개시켜 준 장소를 내가 마음에 들어 하는 게 기쁜지
나와 마찬가지로 기분이 들떠보며 눈치 보지 않고 바로 벌떡 일어나 피아노의자에 앉았다.
막, 쳐봐도 되나?
건반에 손가락을 가져다대는데 커튼을 걷는 우현이.
그렇잖아도 흰 린넨커튼사이로 비쳐오던 빛이 환하게 들어온다.
근데 아까부터 드는 생각인데 문을 방음처리해놓으면 뭐해 창이 통유린데, 방음효과가 있긴 한가?
나 못 쳐서 밖에 들리면 안 되는데…….
아무튼, 어차피 난 악보가 없으니까, 기분 좀 내볼까싶어 눈을 감고, 가볍게 건반을 눌렀다.
보지 않고 잘 칠 수 있을까, 싶었는데.
중간쯤-곡이 흘렀을까, 내 손에 무언가 찬 게 닿았다.
눈을 떠보니 내 옆에 선채, 날 내려다보는 우현이.
늘 그렇듯이, 따뜻하게 웃으며, 찬 손가락으로 내 손을 들어 바로 옆 건반에 올려놓는다.
왼손을 들어 검은 건반에 올려놓고. 귓가에 말한다.
"다시, 하나, 둘-.."
/
남자친구가 이상해요.
안녕하세요 저는 평범한 여고생입니다.
제목그대로 요즘 남자친구가 좀 이상해요.
저에게는 별 관심도 없는 것 같고, 갑자기 어느 날 무슨 싸구려반지하나가 손에 생기더니,
제일 친한 친구가 자고 가겠다고 했을 때도 굳이 쫓아냈던 집에 동거인을 들였어요.
그것도 완전 공짜로.
둘이 뭘 그렇게 재밌는지,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학교에서도 둘이 붙어있기도 하구요…….
그 외에도 여러 가지로 찝찝한 게 많은데…….
어떡해야 좋은 선택일까요?
└RE: 그 동거인이랑 얘기를 해보시는 게 나을 듯 하네요, 제 생각에는…….
└RE: 남자친구 스스로는 자각을 못하고 그러는 거예요?
└RE: 그냥 헤어져요
└RE: 님 좀 너무한 듯. 사람은 진지한데 말이예요
└RE: 동거인이라는 사람이랑 만나 봐요
└RE: 이게 제일 나은 것 같네요 제 생각에도
└RE: 저도
"뭐해?"
"어? 어..아니, 아냐."
황급히 모니터를 껐다.
손에는 물 컵을 든 채로, 그대로 걸어와 앉는 호원이.
나에게 하나를 건네고, 나머지하나를 입에 댄다.
"오늘은 걔 없네? 그....동우."
"어어-그러네, 일어나보니까 없던데, 이성열한테 전화 해봐도 없다 그러고,
요즘 자꾸 붙어 다니던 그, 내 짝, 걔는 전화번호를 모르고-."
"뭐, 앤가-...누구 만났다가 오겠지, 뭘 그렇게 신경을 써."
"음, 그런가"
"이건 뭐야? 되게 귀엽다-, 유리병이 별모양이네?"
"아, 그거- 장동우가 종이로 별을 접는다면서 사다놨더라고, 진짜 쓰잘데기 없는데, 좀 보다보니 귀엽기도 하고-……."
"뭐가?"
"어? 그거- 너 들고있는거, 병말이야."
"아.......응."
"근데 너, 오늘 좀 이상해 진짜"
"어? 내가?"
"평소보다 말도 없고, 웃지도 않고, 아까 만났을 때부터 가까이 오지도 않고. 내가 뭐 잘못했어?"
그렇게 말하는 호원이의 눈을 보는데, 다르다.
그냥, 뭔가 다르다.
하지만 호원이에게 물으면, 정신없이 날 붙잡으려만하겠지.
그런 모습은 더 보고 싶지 않아서, 그냥 웃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곧 마주쳐야 하겠다고, 그래야만 하겠다고.
/
마치 속삭이는 목소리로 그래서 조금 마음이 간질거렸는데, 개뿔.
자기 집에 오니까 아주 살판난 건지 다정한 말투로 나를 아주 볶아댔다.
다시, 아니 잠깐, 틀렸어, 거기부터다시, 아니 거긴 플랫이지, 다시, 다시, 또, 다시.......
차라리 때려치우자고 했던 호원이가 낫다고 생각될 지경.
어쨌든 그렇게 둘이 앉아 피아노를 치다가, 어머님이 깎아주신 과일을 먹고, 우현이의 사진앨범 구경을 좀 했다.
낯익은 모습에 반가워서 아는 척을 했다가 수습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어쨌든 어영부영하다가 인사를 드리고 집에서 나오니 벌써 해가 져 깜깜해지려고 한다.
다행히 학교 앞까지 실어다주긴했지만, 혼자 가기 싫은데-..
그래도, 집까지 같이 가준다는 걸 거절했다.
사실 그러자고 했어도 됐는데, 왠지 꺼려졌다.
그리고 아파트입구에 다다라서, 그 이유를 깨달았다.
아파트 경비실 기둥에 반쯤 기대선 채로, 걸어오는 나를 노려보는 호원이.
아, 호원이는 우현이를 아주 기를 쓰고 싫어했지.
뭐라고 둘러대야 하지…….
"어디 갔다 와"
"어.....어.....?아니....어...그냥-……."
"어디 갔다 온 거냐고"
"음.....그니까……."
"지어내지 말고 말해"
"아..........몰라!말안해!왜 내가 누굴 만났는지를 니가 알아야 되는데! 몰라!안해!"
호원이의 반응은 의외로 얌전했다.
나가라고 떠밀 것 같았는데, 그냥 아무 말 없이 뒤돌아 집으로 들어갔다.
뭘 그렇게 생각을 하는지, 말도 한마디 없고 아직 저녁 안 먹었다고 같이 먹을 거냐고 물었는데도 그냥 문 닫고 들어가 버렸다.
그냥 사실대로 말할걸 그랬나........
혼자 먹는데 뭘 차려먹기가 좀 그래서 대충 선반에 있던 너구리를 하나 꺼내 끓여서 먹으려고 식탁에 앉으니
때마침 나오길래 먹을 거냐고 하나 더 끓일까 물으니
뭐가 또 마음에 안 드는지 아까처럼 인상을 쓰고 날 보다가,
냉장고와 가스레인지를 몇 번 왔다 갔다 해 계란말이를 하나 뚝딱 만들어서는 식탁위에 올려놓는다.
먹고 싶으면 말을 하지. 내가 해준다니까…….
그러나 먹으려고 만든 게 아닌지 젓가락도 없이 맨손으로와 맞은편에 앉는다.
영문을 알수가 없어 쳐다보고만 있으니까 대충 먹으라는 듯 고갯짓.
이게 무슨 고문이야. 체하겠네 진짜…….
아씨, 몰라!
"아니, 아까 그게-....그냥 말해본거고-..딴게아니라 그냥, 우현이네 놀러 갔다 왔어....흐하하.."
"뭐?"
"어? 아니, 아까 그건 진짜 그냥 한번 해본 말이었다고……."
"누구?남우현?"
"아, 어-...그냥, 잠깐, 뭐, 마실?"
예상 했던 반응이라, 그냥 웃으면서 대충 얼버무렸다. 그러자 뭐라 화를 내려는 듯 입을 떼다가, 다시 다문다.
그리고 그냥 아무 말 없이 한숨을 푹 쉬고는 다시 먹으라고 고갯짓을 하고는 그 자리에 잠시 앉아 있다가,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오늘 민지가 집에 온다고 했던 것 같은데...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학 접는 거 들켰나? 하지만 거실구석에 치워뒀던 유리병은 아침에 봤던 그대로 놓여져있다. 그럼, 왜지?
/
그리고 다음날아침, 눈을 떠보니 호원이의 침대 위였다.
평소보다 편안하고 넓은 느낌에 눈을 떠보니 호원이가 셔츠를 꿰어 입은 채 단추를 잠그고있는게 보였다.
다시 자려다가, 문득 깨달은 위화감에 놀라 다시 벌떡 일어나니 내가 한심한지 살짝 비웃는 표정으로 내려다본다.
"어.....나...뭐야? 어...왜..."
"쇼파에서 구르다가 결국 떨어져서 내 집 바닥에 아주 침으로 도배를 하고있길래."
"....니가 옮겼다고? 여기로?"
"먼저 간다."
앞으로는, 들어와서 자.
,뭐? 뭐라고? 잘못 들었나 싶어서 되물으니까 대답도 없이 나가버리는 호원이.
문을 쳐다보다가 웃음이 나와서 침대를 퍽퍽 쳐가면서 웃다가, 다시 누웠다.
왜 그러지? 게이냐? 아니.....물론 후에는 좀 그렇다만 지금은 아니잖아. 아니면 그냥 내가 불쌍해보였나?
원래 그래도 안 떨어지고 잘 자는데......어제 무슨 꿈을 꿨더라......
곰곰히 떠올려보다가 문득, 침대 옆에 놓인 디지털시계를 보니, 벌써 시침이 일곱 시를 지나 여덟시에 가까워가고있다.
응.............? 아, 우현이!!!!!
큰일 났다.
그래, 나 호원이 일어나기도 전에 벌써 나갔어야했는데,
머리를 대충감고 말리지도 못한 채로 대충 교복을 구겨 입고 막 뛰어가 학교에 도착하니
확실히 늦긴 했는지 성열이와 성종이가 벌써 등교해 나란히 앉아 매점 빵을 먹고 있다.
물론 성종이 소세지빵의 소세지는 이미 이성열입으로 들어간 것 같지만.
아무튼 그게 문제가아니라,
대충 인사를 하고 가방을 팽개쳐놓은 다음 둘을 부러운 눈으로 흘끔흘끔 훔쳐보고 있는 명수를 지나쳐 곧장 음악실로 뛰었다.
5층에 도착하니 뛰어온 보람도 없이 이미 음악실문을 잠그고 있는 우현이.
"아...미안해-, 늦잠을 자가지고..."
"아, 왔네― 괜찮아, 어제 많이 했잖아. 그건 그렇게, 머리가 이게 뭐야-"
약 두 시간쯤 늦은 거고, 화낼 만도 한데 왜 이만큼이나 늦었냐고 뭐라 말도 꺼내지 않고 그냥 내 머리를 정돈해준다.
...말리지도 않고 막 뛰어와서 좀 엉망이긴 하겠다.
이리저리 건드리다가 도저히 안 되겠는지 이제 좀 길어 눈을 덮을락말락한 앞머리를 건드리며 여긴 좀 잘라야겠다―..
빙긋, 웃고는 내 이마를 손으로 살짝 밀고는 계단을 먼저 내려간다.
뭔가, 되게, 따뜻하다. 늘 그렇듯이.
//
안녕하세요!!!!
지난주에 늦어서 이번주는 제시간에 왔습니다!!ㅋㅋㅋㅋㅋㅋ
대신 지난주보다 짧다는거.....하지만 여기서 끊을수밖에없었어요...ㅠㅠ..
이 뒤에서 끊기는 너무 애매했기때문에~...ㅎㅎ..
이번편은 또 열종이 하~나도없네요...^^;;;;;;
참 균형못맞추는듯... 다음편은 노력해볼수있도록~하겠습니다ㅋㅋㅋㅋㅋ
음, 뒤에 재미있는 전개를 생각해놓았어요.
늘 챙겨봐주시는여러분감사합니다! 눈팅하고계실지도모르는분들도 감사해요!
좋은 저녁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