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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탄소년단/박지민] 불나비 06 | 인스티즈



자우림 - #1

반복재생 부탁드립니다.








불나비

06






 진실은 언제까지고 숨길 수 없다. 감당은 진실을 묻기 위해 노력한 자신의 몫이다. 절망의 끄트머리에 닿은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다시 돌아왔다. 드디어 저의 목소리가 절망의 균열을 비집고 새어나갔다. 미약한 빛줄기조차도 빗겨 가던 틈새로 형체 없는 무언가가 밀려 들어온다. 그것은 나를 죽일까, 살릴까. 뒤늦게 민낯을 드러낸 진실, 이제는 제 진심만 남았다. 닿지 못한대도, 제가 절망에 질식하더라도 제 곁을 지킬 진심. 감히 변하지 않으리라 단언할 수 있는 것이었다.


 “너 누구야.”


 흘끗 제 주변을 살핀 연화가 그의 뺨에 올린 손을 거두어 가슴팍을 밀어냈다. 그가 뒤로 물러났다. 연화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열린 문틈 사이로 걸어 들어갔다. 그는 연화가 밀어내는 대로 밀려났다. 연화는 제 얼굴에서 미소를 거둬냈다. 그가 미소를 띤 표정 그대로 멈추었다. 제 가슴팍을 밀어내는 연화의 손을 내려다보더니 약한 힘으로 연화의 손목을 잡았다. 연화는 제 손을 치우지 않았다.


 “무슨 소리야, 연화.”


 들려오는 목소리가 지민의 것과 같았다. 그럼에도 연화는 제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지민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얼굴을 훑어내릴수록 그런 저의 생각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연화는 더 이상 웃지 않았다. 분노, 좌절. 그런 감정은 아직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 당장 눈앞에 지민의 얼굴을 한 그가 누구인지, 지민은 어디에 있는지. 그것이 가장 중요했다. 제 곁에 없을 지민은 무엇을 하고 있을지, 일이라도 생긴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제 앞에 선 그의 얼굴을 보니 더 그랬다. 며칠 전 저를 안았던 지민의 입가에는 상처가 있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상처 하나 없이 매끈했다.


 “박지민 아닌 거 알겠으니까, 개소리 하지 말고. 박지민은 어디 있어?”

 “……아.”


 연화가 양손으로 그의 옷깃을 잡아챘다. 그대로 힘을 실어 좌측 벽면으로 밀었다. 그가 벽에 등을 기댄 채로 연화를 내려다보았다. 한참이나 말이 없는 모습을 보니 더 숨길 생각은 없을지도 몰랐다. 연화가 제 입술을 씹었다. 대체 언제부터 저 자신을 속이고 있던 거지? 무엇을 위해서. 연화의 머릿속에 불안으로 점철된 상념이 뒤섞였다. 제게 말을 건네던 지민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럼, 이중에서 진짜 지민은 누구인지. 연화는 아무리 생각을 해내려고 노력해도 할 수 없었다. 제가 알아챈 것은 바로 이 시점일 뿐이다. 저를 믿지 말라던 것이 제 눈앞에 있는 그를 말한 것인지, 정말로 저를 포함한 것인지. 지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는 저의 모습을 보며 지민은 무슨 감정을 느꼈을지. 연화는 알 수 없어 답답했고, 두려웠다. 여전히 연화의 얼굴을 감상하듯 바라보던 그가 손을 들어 잇새에 깨물린 입술을 문질렀다.


 “아파요. 그렇게 하면.”

 “묻는 말에 대답부터 해. 지민이는 어디 있어?”

 “…이렇게 빨리 알아챌 줄은 몰랐는데.”


 어느새 언성이 높아진 연화의 말에 그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연화는 금방이라도 숨통을 끊어버릴 사람처럼 양손으로 그의 목을 감쌌다. 그러나 제 온 힘을 줄 수는 없었다. 그가 지민의 얼굴을 하고 있어서 그랬다. 그가 지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그는 연화에게 아무런 저항도 해 보이지 않았다. 연화가 저를 질식시켜 죽이더라도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을 것처럼 굴었다. 그가 제 목을 누르고 있는 연화의 손등 위로 제 손을 올렸다.


 “박지민은 기억하고, 나는 기억 못 하나봐요.”

 “그런 것 물어본 적 없어. 죽어서 나가고 싶은 거면 계속 딴소리 해.”

 “걱정 안 해도 돼요. 박지민, 멀쩡히 잘 있으니까.”


 연화의 손에 힘이 풀렸다. 묘하게 안심이 되었다. 그의 말을 모두 믿을 수는 없었지만 거짓을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는 직감 때문이었다. 손에 힘이 풀린 틈을 타 그가 다정스레 연화의 손을 잡아 내렸다. 그러나 연화는 그의 손을 뿌리쳤다. 약한 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손이 잠시 허공에서 길을 잃은 채로 있었다. 그는 제 손에 잠시 시선을 두었다. 지민이 잘 있다면, 그 다음 문제는 그는 누구인가였다. 지민과 같은 얼굴을 하고 지민의 이름으로 지민의 방에 들어와 있는 그는, 그리고 그 영문은. 연화는 어느 것 하나도 예상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사실을 알려야 하는가. 딜레마처럼 제 머릿속의 생각이 연달아 충돌했다. 제가 모른 척 넘어갈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연화는 지민만 무사하다면 그렇게 넘어갈 것이었다. 지민이라면 저를 설득시키지 않아도 되었다. 아주 최악의 경우에라도 연화는 등을 돌려 바라볼 수 있는 상대가 지민이라면, 모든 것을 등질 수 있었다.


 “지금 어디 있어.”

 “딱 한 시간만, 늦었어도 됐는데. 곧 올 거예요. …아니다, 박지민 있는 곳으로 데려다 줄게요.”


 그가 뒤를 돌아 탁자 위에 놓인 스마트키를 챙겨 들었다. 정말로 지민에게 갈 심산일까. 연화는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그러나 앞서가는 그를 따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연화는 최대한 제 추측을 빨리 끝내고 싶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이렇게 자리를 오가며 제게 지민인 것처럼 행세했을까. 그 전에, 제가 사랑하던 지민은 지민이 맞을까. 온갖 불안감이 연화의 몸을 휘감았다. 여태껏 제가 알지 못한 것은 어째서. 이렇게 빨리 알아챌 줄 몰랐다는 그의 말은 그럼, 그들이 서로의 행세를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는 의미일까. 연화는 두려웠다. 제가 알던 지민이 지민이 아닐까봐.


 먼저 차로 향하던 그의 팔을 연화가 낚아챘다. 그러자 살짝은 놀란 표정으로 그가 연화를 향해 뒤를 돌았다. 연화가 그의 팔을 끌어당겨 손바닥이 하늘을 향하도록 뒤집었다. 연화가 작게 웃었다. 지문이 없었다. 굳은 표정으로 연화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우연일까, 아니면 자신을 속이는 것이 예정되어 있었을까. 작정하고 서로의 존재를 하나로 만들려고 한 것일까. 그렇다면 그들은 쌍둥이인 것인가. 일란성 쌍둥이라면 그들의 DNA는 감식할 것도 없이 같을 테고, 그렇다면 그들을 구분할 수 있는 지문을 지운 것일까. 연화의 머릿속에서 가설이 세워졌다. 


 연화가 그의 손을 놓고 먼저 조수석의 문을 열고 차에 올라탔다. 재빠르게 뒤따라온 그가 연화의 안전벨트를 채워주려 했지만 연화는 그가 그렇게 행동하도록 두지 않았다. 연화가 시선을 옮기자 익숙한 차의 내부가 보였다. 운전하고 있는 그의 모습이 익숙해 헛웃음이 나왔다. 시트에 등을 기댄 채로 팔짱을 꼈다. 이 상황을 버틸 수가 없었다. 꿈이었으면 하고 바랐다. 차라리 이 모든 것이 장난이었으면. 아니, 제가 정말로 그의 말대로 한 시간 늦게 도착해 ‘진짜’ 지민을 만나서 이 사실을 몰랐더라면? 그것이 나았을까? 그럴 리는 없다. 제가 알고 있는 지민은 하나뿐이면 된다. 속이 울렁거렸다.


 “전화 걸어, 지민이한테. 걸어서 하던 대로 해.”

 “…그걸 바라요?”


 연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제게 닥친 상황이 말 같지도 않았지만 차라리 빨리 마주하는 게 나았다. 제가 알고 있는 지민이 맞는지 그게 가장 중요했다. 코앞에 닥친 난데없는 좌절쯤은 나중으로 미루어도 괜찮았다. 제게는 박지민, 제가 안다고 믿었던 박지민이 중요했다. 실은 제가 안다고 믿었던 지민이 둘의 합쳐진 모습일까 두려웠다. 그는 연화의 말에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대로 전화를 연결했다. 차 내부의 스피커에서 통화 연결음이 들렸다. 그가 긴장하고 있는 것보다 더, 연화는 긴장하고 있었다. 만약 그가 전화를 받으면, 부정할 수도 없이 제 눈앞에 있는 상황이 진실이 되어버리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통화 연결음이 멎었다.


 - 제이, 너 지금 어디야.

 “네 호텔 방에 있다가 지금 가는 중이야.”

 - 내가 허튼 짓 하지 말라고 했지. 네가 거길 왜 가.


 연화가 두 눈을 감았다. 반대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지민의 것이 맞았다. 지민이 그를 제이라고 불렀다. 그는 지민과의 상의 없이 온 모양이었다. 들려오는 지민의 목소리가 분노로 점철되어 있었다. 지민은 그가 이곳에 오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제이가 곁눈질로 연화의 눈치를 살폈다. 연화가 한 손으로 제 머리를 짚었다. 두통이 밀려왔다.


 “연화랑 가는 중이야. 내가 박지민이 아니라는 걸 알아버려서.”

 - …뭐라고? 내가 말했지. 아무리 너라도 허튼 짓 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무슨 생각으로, 네가…. 연화, 연화는 괜찮아? 연화, 지금 듣고 있어?


 연신 제 이름을 부르는 지민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대답하지 않았다. 연화는 제가 정신을 다잡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원체 두려워도 두렵지 않은 척, 여유로운 척 그 정도는 별것 아닌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연화는 지금 당장 평정심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대답할 수 없었다. 제가 하는 말이 지민에게 어떻게 전달될지 몰랐다. 지민이 제 말을 듣고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어 말을 아꼈다. 이렇게 된 이상, 지민은 어쩔 수 없이 제게 모든 것을 털어내야 할 것임을 알아서도 그랬다. 연화가 이만 통화를 종료하라는 의미로 손을 공중에 두어 번 저어 보였다. 제이가 그 의미를 눈치채고 그대로 통화를 종료했다.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곳은 인적이 드문 낯선 건물 앞이었다. 도착하기까지 계속해서 비포장도로를 달렸다. 건물 자체는 거대하지 않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눈에 띄지 않았다. 일부러 그렇게 세운 것 같았다. 제 모습을 감추려고. 정차하기가 무섭게 건물 입구에서 빠져나와 차를 향해 걸어오는 지민의 얼굴이 보였다. 연화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숨이 턱 막혀오는 느낌이었다. 옆에 서 있는 그와 다른 것은 입고 있는 옷뿐이었다. 너무나도 익숙한 그 모습에 연화는 그만 울고 싶어졌다.


 “미안해, 연화. 미안해, 정말로 미안해.”

 “나는 괜찮아.”


 지민이 차 문을 열고 내린 연화에게 먼저 걸어왔다. 그대로 양손을 들어 연화의 뺨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연화는 그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제이가 그 모습을 가만 바라보고 있었다. 연화는 시선을 올려 지민의 얼굴에 시선을 두었다. 입가의 상처가 옅게 흐려져 있었다. 그의 눈동자에 비친 제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래, 저를 바라보던 두 눈이 맞았다. 두려움과 저를 향한 감정이 뒤섞인 그 눈동자. 지민이 맞았다. 연화가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지민의 목소리에 물기가 가득했다.


 연화는 지민에게 하고픈 말이 많았다. 언제부터 저를 속인 것인지, 저에게 곧 말하려던 참이었는지. 그래도 연화는 저를 향한 지민의 감정이 진심이기만 한다면 눈에 보이는 거짓말이라도 믿을 수 있었다. 어쩌면 저에게 죄책감을 느껴 말하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연화는 그런 지민을 알았다. 그래서 제게 아직까지도 말하지도 못한 또 다른 무언가가 남아 지민을 괴롭히고 있다는 사실을 연화는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을 지민은 알지 못할 테지만.


 “지민이 너는 차에 타 있어.”

 “…….”


 연화의 말에 지민이 어쩔 수 없이 걸음을 옮겨야 했다. 지민은 제이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그를 매섭게 보았지만 연화가 있어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지민은 연화의 목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가슴이 두방망이질을 하다못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제가 원한 것은 이런 게 아니었다. 연화가 먼저 알아채도록 두면 안 되었다. 지민은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돌리고 싶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실은 제 태생부터 잘못되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지민은 말없이 운전석에 탔다. 내부에는 아직 연화의 향수 냄새가 남아있었다. 지민은 자신에게 화가 난 것인지, 제이에게 화가 난 것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이제 유리창 너머로 연화를 바라보는 일뿐이었다.


 “너지? 거래 장부 가져간 거.”

 “네. 저예요.”


 예상외로 연화의 물음에 제이는 거짓 없이 대답했다. 정황상 찔러본 것인데도 순순히 대답해주니 고마울 지경이었다. 어차피 그가 가져간 장부는 거짓이다. 문제될 것은 없다. 그렇다면 가져간 이유는 무엇일까? 리안화를 위협하기 위해서일까. 연화는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지민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그렇다면 지민은 리안화를 무너뜨리기 위해 제 곁에 있나? 그러나 연화는 그러한 이유로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떡하지? 네가 가져간 그거. 진짜 아니거든. 내가 다시 만들어 낸 가짜야. 일을 할 거면 제대로 해야지. 너 때문에 일을 그르치면 어떡하려고 의심도 없이 그걸 가져가지?”

 “상관없어요.”

 “…뭐?”


 제이는 고작 한 줄 뱉어내곤 연화를 향해 고개 숙였다. 연화가 잡을 새도 없이 그대로 건물을 향해 뒤를 돌아 걸어갔다. 연화가 헛웃음을 뱉었다. 차에 제 몸을 기댄 채 팔짱을 끼고는 그가 걸어가는 모양새에 시선을 떼지 않았다. 상관없다니, 무슨 뜻일까. 제가 아무리 머리를 써도 답이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그가 완전히 제 모습을 감추었을 때쯤 연화가 차 문을 열었다. 지민이 연화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연화는 따라오는 그의 시선을 아는 체하지 않고 그대로 탑승했다. 연화는 입을 떼지 않았다. 그래서 지민도 쉽사리 입을 뗄 수 없었다. 연화의 머릿속이 포화상태였다. 유일하고도 명확하게 떠오르는 생각은 오직 지민이 다치지 않아 다행이라는 것뿐이었다. 저에게 사랑을 이야기하던 것도, 저를 믿지 말라던 것도 모두 지민이 맞았다. 그것만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제 기억 속 지민으로 남아있는 제이, 그는 누구인지. 연화는 어디까지 모르는 척해야 하는지.


 “지민아.”

 “…응, 연화.”

 “설명해. 믿기지 않아도, 믿어줄 테니까.”


 지민이 침을 한 번 삼켜냈다. 지금 상태에서 운전을 하는 것도 실은 무리였지만 최대한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두려움이 지민의 목젖을 간질였다. 지민은 모든 것을 토해내고 싶었다. 제가 감추려던 것이, 아니 사실은 연화가 알아주었으면 했던 사실이 수면 위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양가감정이 지민의 심장을 두드렸다. 연화가 그가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채 주어서 다행이라는 생각과 연화가 먼저 그것을 알게 두면 안 되었다는 생각이 대립했다. 매일 밤을 두려움에 허덕이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제가 아닌 사람에게 저라고 대할 연화, 그리고 그런 연화를 속여야만 하는 저 자신. 그리고 끝끝내 맺어버린 숙명과도 같은 결정. 연화를 지키고자 두려움의 불구덩이에라도 뛰어들 자신, 이기적인 선택에 연화는 언제나 상처 받아야 한다는 것도 안다.


 지민이 운전대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그의 버릇이었다. 연화는 그 모습을 보며 기억 속의 그들을 분간해 내려고 노력했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과 그. 제가 사랑한 사람이 실은 지민이 아니면 어쩌지. 두려웠다. 그들이 연화를 배신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연화는 제 목숨도, 모든 것도 지민을 위해서라면 배신할 수 있었다.


 “…쌍둥이인 거야?”

 “그건 아니야. 유전자 복제. 나를 복제한 게, …제이야.”


 지민은 그만 갓길에 차를 정차할 수밖에 없었다. 갑작스러운 브레이크에 몸이 앞으로 쏠렸지만 그전에 지민이 연화에게로 팔을 뻗어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연화는 숨을 잠깐 멈추었다. 디아바이오. 갑자기 제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생각이었다. 유전자를 연구 중인 디아바이오에 투자하는 리안화. 디아바이오에서 치료제만 연구한 것이 아니라면, 아니 그전에 리안화의 투자 목적이 이런 것이었다면?


 “계속 얘기해.”

 “복제한 건 배아 상태에서, 따지고 보면 쌍둥이라고 볼 수도 있겠네. 그런데 복제 후 유전자 조작에는 실패했어. 나에게는 신체 능력, 제이에게는 두뇌 능력이 특출나도록 만들려고 했거든.”


 연화는 이제 더 대답하지 않았다. 눈을 감고 지민의 이야기를 들을 뿐이었다. 숨을 몰아쉬었다. 덮쳐 오는 진실이 거대했다. 숨이 막혀왔다. 제가 알아채지 못했더라면 지민은 이것을 언제쯤 제게 이야기할 생각이었을까. 지민은 말을 하면서 한 번씩 숨을 헐떡거렸다. 눈물을 참는 것처럼 두 눈을 세게 감았다가 떴다. 지민은 이제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연화가 모든 사실을 알게 될 것이라는 걸. 제 선택의 결과는 연화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는데, 그 선택이 잔인하리만치 고통스럽게 돌아온다. 언젠가는 벌어질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상황을 연화를 바라보는 언제나 마음에 두고 살았고, 사랑했다는 사실에도.


 “그래서 각자 분야에서 훈련을 받았어. 선천적인 능력을 실패한 만큼, 후천적으로 힘을 기른 거야. 그러기 위해서 들어온 리안화에서 연화를 만났고.”


 연화는 훈련장에서 처음 만났던 지민을 떠올렸다. 지금보다 훨씬 작은 모습이었던 아이. 제가 있는 모든 시간에는 그가 있었다. 그래서 궁금해했다. 그가 남들보다 훈련 강도를 높여서 죽을 듯이 매달리는 이유를. 연화는 그제야 미약하게나마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쩌면 태어나기 전부터 정해진 운명을 살아오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연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남아있던가. 지민이 속해있을 또 다른 곳은 어디일까.


 “제이가 나 대신 온 건……. 속여서 미안해, 정말로. 제이가 할 수 없는 일을 하기 위해 갔어. 그동안 제이가 와 있었던 거야. 제이가 온 건 몇 번 되지 않아. 이건 사실이야. 정말 미안해, 연화.”

 “그래, 알았어. 내 기억 속에 있는 사람은, 박지민. 네가 맞는 거지?”

 “…응, 맞아.”

 “그럼 됐어. 더 자세한 건 나중에 얘기하자. 내가 지금 머리가 너무 아파서.”


 연화가 한숨 같은 말을 내뱉었다. 지민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연화는 제 머릿속을 그냥 비우기로 마음먹었다. 제가 아는 사람이 지민이 맞다면 그것으로 되었다. 지금 당장은 그 바람이 사실이라는 게 중요했다. 다른 무엇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손을 뻗어 지민에게 닿고 싶었지만 그럴 힘조차 남지 않았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어쩌면 그들이 가져올지도 모르는 죽음을 차분히 기다릴 수도 있었다. 연화는 체념했다. 제가 곁에 두고 싶은 유일한 것. 감히 지민을 욕심내겠다고. 그뿐이면 족하다.


 지민의 시선이 한참이나 연화에게로 고정되어 있었다. 던지는 시선이 절절했다. 제 마음처럼 뜨겁다 못해 타버릴 것만 같았다. 자꾸만 울컥 눈물과 함께 제 감정이 솟구쳐 올랐다. 지민은 연화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몰랐다. 그래서 더욱 두려웠다. 제가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었다. 지키지 못했던, 그래서 반드시 지키고 싶은. 지민은 연화를 사랑하기 전으로 돌아간대도, 다시 연화를 사랑할 것이었다. 다만, 연화가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도록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다. 목을 죄어 오는 무거운 감정은 저 하나로 족했다. 연화가 자신을 사랑함으로써 받을 상처를 모두 제가 받고 싶었다.


 지민은 이 모든 상황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안다. 잘못된 것은 제 숨이 처음 트인 그날부터였다. 제가 이 상황에 나서 무언가를 더 할 수 없다는 사실과 그럼에도 제 목숨은 연화의 것이라는 다짐이 제 심장을 찔렀다. 차라리 연화가 제게 모진 말이라도 했으면. 제게 불가능해 보이는 무언가를 지시하여도, 지민은 그것이 연화의 지시라면 가능하게 만들어 낼 수 있다. 연화가 그런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었으면 했다. 절망에 뛰어든 그 이유, 모두 연화를 위해서라고. 눈을 감으면 그려지는 연화의 얼굴, 밤마다 저를 울게 만들던 다정한 그 목소리, 저를 바라보는 따뜻한 눈길, 부드러운 손길까지. 주제를 넘어선 욕심이겠지만, 저를 다정함에 파묻히게 만드는 연화를 웃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제 손으로 연화를 지키는 것을 넘어서서, 저로 인해 연화가 웃었으면. 행복해했으면. 너무나도 큰 바람이었을지 모른다.


 진심을 전하는 건 어떻게 하는 것일까. 나조차도 감당하기 어려운 진심을 드러내는 것은 그이에게 너무나도 거대한 짐을 안겨주는 것이 아닐까. 지나가 버린 유예와 함께 제 모습을 드러낸 절망에도 무력해지지 않겠다. 이미 끝내 버린 선택은 더는 유예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절망과의 투쟁에서 지켜낼 달아오른 진심. 제 가슴에 너무나도 오래 머물러 그을린 화상 자국을 남겼다. 더 타오를 일밖에 남지 않은 제 진심을 전해버리면 그이가 데이지 않을까. 진심이 제 가슴을 짓눌러도, 물집이 솟아올라 찐득한 진물을 흘려도. 아직은 제 가슴에 진심을 안아둘 수 있었다. 영원히 제 가슴에 진심을 안고 달아오르다 못해 모두 태워버려 재가 되어도 괜찮다. 제가 그이를 계속 사랑할 수만 있다면 모두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더욱이 간절한 저의 마음과 욕심을 그이가 알지 못하게 숨겨야만 하더라도. 그것이 코앞에 닥친 절망 앞에서 내린 선택 이후로 다가온 숙명이라고 하더라도. 그이를 해하지 않을 수만 있다면.



2021.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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