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이별을 해요. 나는 사랑을 할 겁니다
09 놓을 수 없는 당신에게
"아이들은 보통 큰 것, 힘이 센 것에 무서움을 느끼죠.
그런데 어른들은 작은 것, 약한 것을 보면 두려움을 느껴요.
육교 위에서 파는 병아리를 보면 아이들은 귀엽다고 사 달라고 조르지만 어른들은 선뜻 그러지 못해요.
왜냐하면 그 병아리가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 알아서
그 병아리를 잘 키울 자신이 없기 때문이죠.
안된다, 저리가, 차갑게 거절하는 어른등의 모습 뒤에는 미움이 아니라 두려움이에요.
손길을 뻗지 않는게, 나름의 배려였어요.
그 사람도 두려웠을 거에요.
나를 지켜줄 수 없다는 알았을 거고
사랑을 줄 수 없으니 품을 내어 주지 않으려 했던 거예요.
그게,, 그 사람의 사랑방식 이었네요."
"저 왔어요."
"앉아라."
"또 무슨 이야기를 하시려고 이렇게 무게를 잡으세요."
“얼마나 줬니?”
"네?"
"얼마나 줬느냐고."
“무슨 말씀 이세요"
”이혼을 불사 할 만큼 사랑하는 사람으로 세워두는 데 얼마나 들었냐고”
“어머니.”
“날 속이면서 까지 차준희를 이 집에서 내보내고 싶었니?”
“……….네. 놓아주고 싶었어요.”
“재현아 너, 준희 좋아하니.”
.
.
.
“연민의 감정이 시작이었겠죠. 같이 살아보니 꼭 저를 보는 것 같아서요. 그 사람이나 저나 부모 사랑 없이 컸잖아요.
어느날 문득 정신이 들었어요. 어머니가, 우리 집안이, 내가 이 사람에게 못할 짓을 하고 있구나 .. 늘 필요할 때만 하루정도 갈 이슈거리로 방패막이로만 쓰셨잖아요.
그래서 놓아주고 싶었어요.”
"어디서 부터가 거짓말 이었니. 도대체 차준희 그깟게 뭐라고 이렇게 감싸고 도는거니."
".........준희씨는 아무잘못 없어요. 그냥 저 혼자서 머리 굴린거예요. 그 사람 숨쉬면서 살게 해 주고 싶어서."
"애초에 찌라시로 나돌던 불륜사진도 니가 기획 한 거라며."
"돈으로 만든 비밀은 돈을 주면 살 수 있는 거였나 보네요."
"너...처음부터 차준희 내보내겠다고 꾸민짓이니?"
"이제 그 사람 손대지 마세요. 어머니. 차종현 의원 일도 더이상 크게 부풀리지 마세요."
뒤돌아서 나가는 재현의 뒷모습을 보면서 재현의 엄마는 작게 읖조렸다.
"차준희 그물건이 우리 아들을 다 망쳐놨네."
항상 사근사근 시어머니의 말에 "네" 하고 대답했던 준희 이지만 준희의 눈빛이 늘 마음에 걸렸었다.
다른 재벌가의 여식들과 달리 총명함이 있었고 첫눈에 외모도 마음에 들었었다.
그래서 재현이의 정략결혼 상대로 골랐지만, 항상 마음에 걸리는 게 그 눈빛이었다.
'을'의 입장으로 팔려온 주제에 뭐가 그리 잘랐는지 준희의 눈빛은 항상 맹랑하고도 도도했다.
겉으로면 숙이고 들어와지 한번도 고개를 숙이지 않은 준희였고 언젠가는 그 꼿꼿하게 세운 목을 꺽어버리려고 했던 시어머니였다.
재현은 그 길로 나가서 거하게 술을 마셨다. 기 비서님도 동행하지 않고 혼자 주량을 한참 넘기게 마시고 취해서 준희가 있는 집으로 향했다.
기 비서님이 계셨으면 두말없이 댁으로 가셔야 한다고 하셨을게 뻔해서 대리를 불렀다.
저택 앞에 차가 멈춰서고, 재현이 비틀거리면서 집으로 걸어가서 띡띡- 띡띡띡 하고 비밀번호를 누른다.
한걸음씩 내딛는데 세상이 빙빙 도는 것 같다. 비밀번호 눌리는 소리에 놀라서 거실로 나온 준희가 토끼눈을 하고 재현을 바라보는데,
재현은 뭐라 한마디 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거실 쇼파에 스러지듯 누워 잠들었다.
그래도 꼬박 일년을 함께 살았던 사이인데 준희는 처음으로 재현이 만취한 보습을 봤다.
분명 오지 말라고 선을 그었는데, 자기는 맨날 선을 그어 댔으면서 준희가 그은 선은 아무렇지 않게 밟고 넘어오는 재현이 이해되지 않는 준희이다.
만취한 장정을 들어 옮길 수는 없어서 그대로 쇼파에서 재웠다.
그렇게 두사람은 오랜만에 한 집에서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거실로 나가보니, 언제 일어난건지 재현이 냉수를 벌컥벌컥 마시고 있다.
"재현씨.."
"미안해요. 어제는 너무 취해서, 내가 정신이 없어서,"
"우리 이혼 했어요. 재현시 말대로 한쪽이 계약조항을 위반해서 그 계약은 끝이 났어요."
"미안해요. 취하니까 너무 익숙하게 여기로 와버렸어요."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결혼을 하고 또 이혼을 했어요. 이혼사유는 재현씨도 너무 잘 알고 있겠죠. 그렇게 헤어진 두 사람이 이렇게 마주하고 있는 거 또 다른 웃음거리밖에 안돼요.”
"...................."
"왜 이제 와서 나에게 흥미가 생겼는지 모르겠지만, 또 다른 기삿거리 되어 줄 마음 없어요. 그러니까 취했다는 핑계로 다시는 이러지 말아줘요.”
"미안해요. 내가 실수했어요. 앞으로 이런 일 없을 겁니다."
술에 취한 채로 다짜고짜 나타난 재현도 싫었지만, 기비서님이 아닌 대리운전으로 여기까지 왔다는게 준희는 더 싫었다.
이제는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지 않고 조용히 살고 싶은데,
이제는 더이상 웃음거리가 되고 싶지 않은데... 그래서 인지 말이 더 차갑게 나오는 준희였다.
준희는 위자료로 받은 미술관 개업 준비에 한창이었다.
이제 그냥 차준희 로써 살아야 했고, 돈을 벌 수 있는 직업이 필요하기도 했지만, 당장 뭐라고 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아서
살기 위해서 준희는 미술관 오픈 준비에 들어갔다.
차종현의원의 딸로 살면서 꿈을 접은지 오래였다. 그런 꿈을 다시꾸게 해준 게 재현이었다.
그 미련이 남아서 이혼한 때 따로 가지고 싶은 건물이 있냐는 시어머니의 말씀에 고아원 후견인 자리와 함께 미술관 하나를 소유하고 싶다고 했던 준희였다.
차갑게 재현을 내치고 있지만, 미술을 다시 하겠다는 꿈은 재현이 꾸게 해준 꿈이었다.
아직 오픈 전이라 손님이 올 리가 없는데, 또각 또각 구두고리에 준희가 문쪽을 바라본다.
"저... "
"무슨 일 이시죠?"
만난적 없지만 아는 얼굴 이었다. 정재현의 내연녀. 누가 보냈는지 모르는 사진 속에서 재현과 마주보고 웃고있던 여자였다.
"저.. 누군지 아시죠.?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일단 들어오세요."
보자마자 찬물을 얼굴에 부어버려도 모자란 판에, 준희는 마주앉아서 마실 차를 끓인다.
"여기는 왜 찾아 오셨죠?"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어요. 사과 드리고 싶어서 왔어요."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건 듣고싶지 않네요. 이미 끝난 일이고. 제가 사과받을 일이 아니에요."
"아무일이 아니라서요. 저랑 정대표님이랑 아무런 사이 아니에요."
"제가 들어할 이야기에 아니네요. 마음쓰실 거 없어요."
".... 사진을 받은 적이 있어요. 그 사진 속에 그쪽이 있었고, 그래서 내가 그쪽 얼굴을 아는거에요."
"그 사진도 정재현 대표님이 고용한 사진작가가 사전 합이하에 찍은거에요. 저는 단 하루 같이 사진을 찍혀주는 걸로 유학자금을 받았어요."
".........계약.. 이었다구요?"
"그냥 사진 몇 장을 찍는 대가로 학비, 생활비 모두 포함한 금액을 지원 받았어요.. 언론에 얼굴이 팔릴것까지 고려해서 받은 계약급이었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 사진들이 언론에 풀리지는 않았어요."
"굳이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세상 사람들이 나를 욕하는 게 어떤 기분인지 느끼는 건 나하나로 족했거든요."
"계약금은 이미 다 받았어요. 사실 얼굴이 알려져도 상관없어요. 어차피 유학 갈거고 사람들이 알아보지 않는 곳에서 살면 되니까요. 그런데 이게 옳지 않은 행동이라는 게 마음에 너무 걸려서요."
".. 그 사진들이 만들어 진거라는 거죠.?"
"정재현 대표님이 그러셨어요. 만약을 대비해두는 최후의 수단이라고."
철저하게 꾸며진 계획은 이렇게 무너졌다.
돈으로 만들어진 비밀을 돈으로 사버린 사람과, 양심에 걸리는 일을 고백해 버린 사람덕에 재현이 혼자 간직하려던 비밀은 이제 모두가 아는 거짓말이 되었다.
그제서야 이해가지 않던 재현의 행동들이 하나둘씩 이해가기 시작했다.
더 칼같이 선을 긋고 차갑게 대하던 말들을 뱉아 내면서 혼자 속을 끓였을 거다.
재현의 제작사로 찾아 갔을 때,
처음으로 고백아닌 고백을 했을 때도 재현은 그저
"착각하게 했다면 미안해요" 라는 말만 했고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사과는 여기까지 라고 선을 그었었다.
그말에 상처받고 다시 재현을 향해 돌 던지듯 던져 댄 말들이 많은데,
그 순간들을 되돌릴 수 있다면 되돌리고 싶었다.
재현을 만나야 했다. 왜그랬냐고, 어디까지가 거짓말이었고 어디까지가 진심이었냐고 물어야 했다.
하지만 준희는 당장 재현을 볼 자신이 없었다.
좋아했다. 아니 아직도 좋아한다. 이 감정으로 사랑이라고 정의 할 수 있는 지는 모르겠다.
애정을 기반한 결혼은 아니지만, 점점 가까워 지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
하지만 두 집안의 생각이 틀어지면서 재현은 준희를 내치듯 놓아줘야 했고, 준희는 이제서야 그 모든 일들이 자신을 위해 재현이 꾸민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세상이 주목하는 결혼은 하고, 세상이 손가락질 하는 이혼을 했다.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데 이젠 이질이 났고
더 이상은 재경그룹과 엮이고 싶지 않다.
이런 복잡한 감정들 사이에서도 준희는 계속해서 재현은 걱정한다. 마음이 자꾸 쓰인다.
차갑에 서로를 밀어 냈는데, 사실을 그럴 이유가 전혀 없었다는게 어이가 없고 화가 난다.
재현에게 느끼는 게 어떤 감정인지 준희는 혼란스럽다.
다시 마주보고 웃던 때로 돌아 갈 수는 없다. 많은 일을 겪었고, 준희는 지칠대로 지쳤다.
하지만, 여전히 재현을 생각한다.
정리되지 않는 감정을 한아름 쥐고 몇일밤을 설쳤다.
재현을 보고 이야기를 해야 조금은 나아질것 같았다.
기비서님께 전화를 걸어서 재현의 일정을 묻고, 오늘 일정이 끝나는 대로 만나고 싶다고 전해달라고 했다.
띡띡-띡띡띡. 익숙하게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오는 재현에 준희가 크게 숨을 내쉰다.
서로에게 힘든 이야기를 하고, 엉켜있는 감정들을 정리해야 했다.
"놀랐어요. 준희씨가 다시 보자고 할 줄 몰랐는데, "
"왜 그랬어요?"
"무슨 말이에요?"
“.........전에 말했었죠. 누가 보냈는지 모르는 사진들을 받았다고. 오늘 그 사진에 있던 사람을 만났어요.”
“………………”
“다 들었어요. 그 분이 찾아와서 다 이야기 해줬어요.”
".....어...이렇게 빨리 들킬 줄 몰랐어요..."
이렇게 빨리 들킬 줄 몰랐다는 말을 하는 재현의 얼굴에서 당혹감이 감추어 지지 않는다.
"재현씨... 왜 그랬어요?"
“내가 머리 좀 썼어요. 준희씨 숨 좀 쉬고 살라고, 우리 같이 사는 동안 너무 힘들었잖아요.”
“왜 사람을 바보 만들어요.”
“그게 내 최선이었어요. 아프게 해서 미안해요. 사람들 비웃음 손가락질이 준희씨에게 얼마나 힘들었는지도 알아요. 신사답지 못한 방법이었고 준희씨를 속여야 했지만, 나는 그렇게 해서라도 놓아주고 싶었어요. "
우리의 헤어짐이 나를 놓아주기 위한 일이었다고, 그 방법이 나를 얼마나 힘들게 했는지도 알고 있다는 말을 하는 재현이 그제서야 제가 알고 있던 재현 같아서
차가운 이별을 겪으면서 우리가 보낸 시간들이 다 거짓은 아니길 빌었는데, 다시 너무나도 사랑한다는 눈으로 자신을 봐주는 재현에 준희는 눈물이 울컥 차오른다.
"사랑하는 사람과 가정을 꾸리고 행복하게 사는 거, 내 버킷리스트에는 없었어요.. 나와 가정을 꾸릴 사람을 분명히 불행할 테니까. 내 옆에서 나와 함께할 사람은 행복 할 수 없다는 걸 나는 일찍이 알았거든요. 그래서 그랬어요. 준희씨가 행복하게 살았으면 해서. 그런 방법으로라도 놓아주고 싶었어요."
"..........."
"힘들어도 버티는 사람이잖아요 준희씨.... 매번 괜찮아 보이려고 해도 분명이 버거웠을 텐데 혼자서 버텨왔잖아요.”
".........."
준희씨가 행복하게 살았으면 해서 라고 말하는 재현의 목소리가 떨려온다. 재현도 차오르는 눈물을 애써 삼켜내고 있다.
"준희씨를 보내주는 게 준희씨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내 생각은 잘못된 답이 었나봐요."
"재현씨가 어떤 마음으로 나를 보내주려고 했는지 알겠어요. 재현씨 나름의 사랑법이었겠죠. 그런데 재현씨.. 미안한데, 나는 그 이별의 과정이 꽤나 아팠어요. 사람들 손가락질이야 이제 익숙해 질때도 됐죠.... 하지만 재현씨를 예전처럼 대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나는 이미 우리관계를 정리하던 중이었고, 이 모든 사실을 알고나니 혼란스러워요. 내가 느끼는 감정이 어떤 감정인지 정확히 모르겠어요."
".. 이해해요. 준희씨 한테 이 상황이 너무 버겁겠죠.... 부담주고 싶지 않아요."
"나한테 조금만 시간을 줘요..."
멀리 돌고 돌아서 이제야 마주한 마음인데, 서로의 마음을 고백하는 순간에도 두 사람은 서로를 그저 안쓰러워 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