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이별을 해요. 나는 사랑을 할 겁니다
12 천천히 와요.
"흠집 내려고 하실 거예요. 내 아들 불찰이 아니다. 이혼 귀책 사유는 우리아들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그렇게 믿게 만들거예요. 준희씨도 겪어 봐서 알잖아요. 우리 회장님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위인이신거."
"이제 상관 없어요. 세상이 나를 어떻게 보던 정말 상관 없어요."
"내가 안 괜찮아요. 나 때문에 준희씨가 힘들어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것까지만 하게 해줘요."
재현의 변명같은 고백이 둘 사이의 애매한 관계를 아슬하게 나마 잡아주고 있었다.
곁에서 지켜줘야 한다. 그러니 옆에 있어야 한다.
핑계같이 던진 말에는 생각보다 단단한 진심이 자리 잡고 있다는걸 서로가 알고있었기에
준희는 재현을 거절하지 않았다.
이 관계가 어떤 관계인지 한마디로 정의 할 수는 없다.
한 때는 부부였던 두 사람이고, 서로를 위한 길이라 믿고 이별을 택했었지만,
돌고돌아 알게 된건 서로가 필요하다는 사실 이었다.
연인이라 할 수는 없지만
아주 아슬아슬하게 서로의 손을 붙잡고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아주 간절하게.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았으니 집으로 직접 데려다 주겠다는 재현의 말에 준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는 내내 아무 말 없이 창밖을 보고 있었지만 에전과는 달리 재현과 단둘이 있는 차안이 불편하지 않았다.
더이상 서로에게 숨기고 있는 마음도 없었고, 이유없이 상처를 줄 필요도 없었다.
한 잠, 깊이 잠을 자고 나왔더니 집은 늘 그렇듯이 텅 비어 있었고, 식탁에는 만들었다 하기에는 꽤 그럴듯한 죽이 놓여 있었다.
밖에서 사온 것 같지는 않은데, 재현이 요리를 하는 걸 한번도 보지 못했어서 이게 재현이 만든 건지 사와서 그릇에 정성들여 담아 놓은 건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죽을 먹고 싱크대에 설거지 거리를 두려고 하는데, 재현이 미처 정리하지 못하고 간 듯한 요리 도구들이 보였다.
도마에 칼, 냄비까지.
요리는 언제 배웠던 건지 재현이 직접 만들어 두고 간 죽이 맞았다.
이 사람이 주는 갑작스러운 사랑에, 준희는 조금 당황 스럽다.
저와 같은 마음이라는 걸 알게 된 이후로 재현은 서슴치 않고 마음을 표현해주고 있다..
그게 싫지는 않다. 하지만 준희는 그 마음을 어떻게 받아 줘야 하는지 서툴기만 하다.
누군가를 정말 사랑해 본적이 없어서, 어떻게 사랑을 주고, 어떻게 받아야 하는지
정말 잘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는건지. 어쩌면 아직도 조금은 시간이 필요한 건지도 모른다.
띡띡- 띡띡띡-
익숙하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재현의 손에는 마트에서 봐온 장이 한가득이다.
저를 반겨줄 줄 알았는데, 쇼파에 앉아있던 준희는 토끼눈을 하고 있다.
"좀 잤어요? 죽은 먹었고?"
"네.. 잘 자고, 죽도 다 먹었어요."
"왜 이렇게 놀래요? 준희씨 눈이 이만해요."
"재현씨가 다시 올 줄 몰랐어요."
"말했잖아요. 괜찮아 질때까지 내가 옆에 있을 거라고."
놀란 눈을 하고 자신을 바라보는 준희에게 재현은 웃으며 내가 옆에 있을 거라고 말했지 않느냐고 하면서 두손가득 봐온 장을 냉장고에 차곡차곡 넣기 시작 했다.
병실에서 깨자마자 가지 말라고 같이 있어 달라고 한건 분명 준희인데, 어쩐지 그 이후에는 무슨 말을 해도 그냥 고개만 끄덕이고 단답을 하는게 전부라 신경이 쓰였다.
이제는 가까이 다가가도 되는 줄 알았는데, 자신만 그렇게 생각하는건 아닌지 괜히 머쓱해 지는 재현 이었다.
꽤 오래전부터 준희를 좋아 했으니까, 보내주기로 마음먹던 순간부터 준희를 위한 마음이었으니까
서로 같은 마음이라는 걸 알게 되었는 때 재현은 마음이 급했다.
여태 함께하지 못한 것들이 너무 많았고, 챙겨주고 싶은 것들도 너무 많았다.
다시는 마주 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이제는 둘이 함께 할 수 있게 되었으니 한시가 급했다.
그래서 준희에게 직진하려고 하는데 준희는 그런 재현을 조금은 낯설고 부담스러워 하는 눈치였다.
"요리를 할 줄 알았어요?"
한참 이어진 정적 끝에 준희가 먼저 질문을 던졌다.
조용한 집안에서 냉장고 정리를 하고 딸기를 한팩 꺼내서 씻고 있던 재현이 준희의 목소리를 듣고 씨익 웃는다.
"나 혼자 살았잖아요. 코네디켓에 있을 때, 필름스쿨 간다고 하니까 어머니가 지원을 싹 끊었었거든요. 친자식인데도 얄짤없이."
"그럼 그 때 이야기 하지 그랬어요. 요리 할 줄 안다고."
"언제요? 아.. 떡갈비?"
"맞아요. 그 때 떡갈비.."
"준희씨가 몰랐겠지만, 내가 보기보단 착하고 배려심이 있는 편이에요. 그리고 그 라면 진짜 맛있었어요."
"요리 할 줄 아는 사람앞에서 나는 또.. 밥 못차려 먹을까봐 아등바등 했네요."
"빈말 아닌데, 누가 차려주는 저녁이 너무 오랜만이라 정말 좋았었어요."
시작이 어려웠지, "요리를 할 줄 알았어요?" 라는 질문을 시작으로 두 사람은 소소한 이야기들을 시작했다.
함께한 일년동안, 서로에게 할 필요가 없다고 느꼈던 이야기들은 이제 하나하나 기억하고픈 이야기거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