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돌아가지 않을 거라고, 우리에게 다음은 없을 거라고 하던 준희는 집에 들어서자 마자 펑펑 울었다.
시작부터 평범하지 않았으니까, 평범한 결혼생활이 될 수는 없다는 건 알았지만, 적어도 서로의 온기는 나눌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젠, 정말 돌이킬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좋아했는데, 사랑했는데,
그 사람도 나와 같은 마음인 걸 이제야 알았는데,,
이제는 함께 할 수 없게 되었다.
사랑해서 보내준다는 말, 그건 다 핑계라고 생각했는데,
조금 거리를 두고, 시간을 가지다 보니 그 말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서로를 사랑하지만, 서로가 함께 할 때 더 힘들어진다는 걸 아니까.
놓아줘야 했다. 그리고 아이러니 하게도, 그게 서로를 위한 길이었다.
그렇게 한달 쯤 시간이 흘렀다.
준희의 아빠인 차종현 의원은 당대표직을 사퇴하고,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시어머니가 이 정도로 끝낼 분이 아닌데, 이 전도 선에서 끝난걸 보면, 분명 재현의 압박이 있었을 거다.
시간이 지나면 차츰 괜찮아 질 줄 알았는데,
시간이 해결 해 주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시간이 갈 수록, 재현을 향한 마음은 정리 되기는 커녕 더 커져 만 갔다.
아직도 재현은 세간의 관심의 중심이었다.
뉴스에는 항상 재현의 소식이 나왔다. 그게 경제면 이건, 연예면 이건. 하루에 한번은 일거수 일투족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평가받았다.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TV 속에, 재현의 옆자리에 있던 준희인데, 그게 너무 싫어서 도망치고 싶었는데..
이제는 정말 남이 되어서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되고 나니 깨닫는다.
아무리 힘들었어도 함께 하는게 나았다고, 재현의 옆자리는 분명히 어렵고 힘든 자리였지만, 혼자가 된 지금 보다 나았다.
오늘도 무심코 틀어놓은 TV에는 재현의 소식이 나왔다.
[오늘 오전 Jay Pictures 대표 정재현씨가 베를린 국제 영화제 참석 차 공항을 나서는 모습입니다.]
[출입국 절차를 거치는 동안 한결같이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는 모습인데요. 아무래도 이혼 후에 첫 공식 스케줄인 만큼 조심스러워 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지난 18일 개최된 베를린 국제 영화제 현장입니다. 영화제 첫날 프라이빗 시사회에서 배우들과 인사를 나누는 Jay Pictures 대표 정재현씨의 모습이 포착 되었습니다.]
[차준희 씨와 이혼 후 첫 공식석상에 올라 화제의 중심이 섰는데요, 카메라에 오랜만에 잡힌 정재현씨는 편안한 미소를 띄고 있었습니다.]
[점점 몸집을 키워가고 있는 Jay Pictures가 앞으로 일주일간 진행되는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는 어떤 쾌거를 이룰 지 기대를 모으고 있습니다.]
너무나 선명히 느껴졌다. 우리는 이제 다른 세상에 살고 있구나.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 걱정이 놓이기도 하지만, 아직도 '정재현' 이름 세 글자에 마음이 아려 왔다.
웃고 있지만 재현의 눈빛은 뭔지 모를 쓸쓸함이 비쳐 있었다.
내가 없는 당신은 잘 살고 있는데, 당신이 없는 나는 여기 이렇게 가만히 멈춰 서 있어요.
당신을 잊는 게 나한테는 생각보다 더 어려운 일이라서, 시간이 오래 걸리네요.
잊어가겠다고 했으면서, 당신도 나만큼 아팠으면 좋겠어요.
당신도 아직, 나를 못잊어서 힘들어하고 있었으면 좋겠어요.
준희는 그렇게 속앓이를 하면서, 고된 일정을 강행했다.
재현의 응원으로 다시 시작하게 된 일이라서 더 잘 해내고 싶었고, 혼자 잘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계속 해서 신경쓰이는 일들에 둘러 쌓여서 재현을 잊으려고 일부러 다 바쁘게 자신을 몰아붙였다.
그런 하루하루가 쌓여서, 정말 버틸 수 있는 한계의 가장자리 까지 가 있었다.
그렇게 자신을 쏟아 부으면서 준비한 미술관 오픈식 날,
준희는 오픈준비를 할 때 부터 심한 두통에 시달렸다. 계속 어지럽고, 배도 아파왔는데 그냥 긴장돼서 그렇겠지 오랜만에 사람들 앞에 서려고 하니까 그렇겠지 하고 넘겼다.
행사가 시작되고, 인사말을 마치고 내려오는데
머리가 갑자기 빙빙 돌면서 그자리에 쓰러졌다.
미술관의 오픈 보다는 준희의 이혼 후 첫 공식석상 이었기에, 준희의 모습을 담으려던 언론과 취재진들은 준희의 모습을 담기에 바빴다.
쓰러지고 부축을 받고, 나가는 모습까지 그대로 다 찍혀서 보도 되었다.
재현이 영화제에 가면서 기 비서님께 자기 대신 미술관 오픈에 참석해서 도와줄 게 있으면 좀 도와주라고 부탁을 하고 갔는데,
현장에 있던 기 비서님이 준희를 챙겨서 바로 재경그룹 산하의 병원 VIP룸에 입원 시켰다.
이 시점에 준희가 쓰러졌고, 그 모습은 이미 사진으로 고스란히 남았다. 어느 병원에서 어떤 검진을 받았는지 까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게 분명했다.
더 이상 재경 사람이 아니기에 기 비서가 준희를 모셔야 할 필요는 없었다. 기업의 이미지를 위해서 더 이상의 기사화를 막기 위해서 준희를 챙기기도 했지만,
준희와 재현을 오래 옆에서 지켜봐 온 사람 으로써 당연하게 해 줄 수 있는 일 이기도 했다.
[차준희씨 개인 소유의 미술관 "채움"이 오늘 오픈식을 진행 했습니다.]
[이혼 후 처음 나서는 공식석상 이었는데요. 긴장된 모습을 보이던 차준희씨가 쓰러져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현재 재경그룹 산하의 병원에서 검진을 받고 있는 것으로 확인이 되었습니다.]
[채움 미술관 오픈식, 차준희 실신]
준희에 관한 뉴스들이 수도없이 쏟아졌고, 사람들은 두 사람이 각자 나선 공식석상에서 얼마나 달랐는지, 준희가 쓰러진 이유가 뭔지 각자의 예상을 오피셜인듯 떠들어 대기 바빴다.
베를린과 한국의 8시간 시차로, 준희에 관한 기사들이 한가득 쏟아지던 한국시간 오후 1시는 베를린의 오전 5시였다.
영화제 마지막 날 큼지막한 상들의 수상을 남아있는 날이라 재현에게도 중요한 날이었다.
새벽 5시,
갑자기 울리는 벨소리에 알람인줄 알고 시계를 봤더니 아직 5시 밖에 안됐고 전화기를 울리고 있는건 기비서의 전화였다.
"네, 이른 시간에 전화를 하셨네요."
"이른 시간에 깨워서 죄송합니다. 지금 꼭 보고 드려야 할것 같아서요. 대표님 마지막 날 일정 취소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영화제 마지막 날이 얼마나 중요한지 기비서님도 잘 아시잖아요. 이것 때문에 여기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게 무슨 말씀 이세요?"
"오늘 미술관 행사 도중에 차준희씨가 쓰러졌습니다. 이미 기사화 되고 있구요. VIP 병동에 입원조치 했습니다."
"..... 당장 들어갈게요. 최대한 빨리 티켓팅 해주세요. 지금 공항으로 갈게요."
준희가 쓰러졌고, 그게 기사화 되었고, 준희는 지금 검사를 받고 있다고 하는 기 비서의 말에
재현은 남아있는 일정을 다 취소하고 한국행 비행기 최대한 빨리 들어 갈 수 있게 예매해 달라고 했다.
급하게 옷을 갈아입고, 중요한 짐만 챙겨서 차키를 손에 쥐어들고 호텔방을 나섰다.
엘레베이터가 늦는다. 아직 몇시 비행기 인지 정해지지도 않았는데, 재현은 마음이 급했다.
덜덜덜 떨려 오는 손에 직접 운전을 할 수가 없어서, 차는 현지에 두고 택시를 잡아서 무작정 공항으로 갔다.
다행히도 새벽 비행기에 캔슬이 있어서, 한 시간 안에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캔슬 좌석은 잘 안나오기도 하고 당일 예매는 원래 좌석 가격의 5-6배 이지만, 재현에게는 전혀 신경 쓰이는 숫자들이 아니었다.
베를린에서 한국까지 꼬박 16시간, 새벽녘에 해가 뜨기도 전에 출발했는데, 시차때문에 한국에 도착했을 때도 새벽이었다.
계속된 강행군의 일정에 재현도 지칠대로 지쳐 있었지만, 일단은 준희를 봐야 했다.
한국에 도착하자 마자 그 길로 준희가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갔다.
"오셨어요?"
"준희씨는요?"
"검진 다 받고, 수면제랑 수액 꽂고 다시 잠드셨어요."
"........ 검진결과는 들으셨어요?"
"그동안 너무 몸을 혹사 시키셨나봐요. 수면부족에, 영양상태도 안좋고, 거기에 스트레스성 위경련 까지 와서 더 이상 몸이 버텨낼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고.. 옆에서 듣기만 했는데도 아주 안쓰러워 혼났습니다."
"제 탓이네요."
"그게 어디 대표님 탓인가요. 두분을 둘러 싼 상황이 문제죠.. 들어가 보시죠. 베를린에서 여기까지 바로 달려왔는데."
병실앞을 지키고 있던 기비서님께 자초지종을 듣고
준희가 있는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얼마나 마음고생을 한 건지, 준희가 하지 않아도 되는 고생을 자신 때문에 하는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과 죄책감이 드는 재현이다.
가만히 누워 있는 준희옆으로 가서 환자침대 옆에 놓여 있는 의자에 앉았다.
제대로 챙겨먹지 않았는지 안그래도 마른 사람이 안쓰러울 정도로 말라 있었다.
이 여린 사람이 얼마나 혼자서 힘들어 했을까.
가만히 놓여있는 손을 잡는데, 눈에서 눈물이 뚝뚝 흘러 내린다.
그리고 재현은 마음을 먹었다. 이제는 이 손은 놓지 말아야 겠다고, 이렇게 힘들거면 차라리 제 곁에 두고 지켜야 겠다고.
재현은 잠들어 있는 준희의 얼굴을 한참을 보다가 그 자리 그대로 침대에 엎드려 잠들었다.
오늘 막 도착해서 시차적응도 안되어 있어서 재현이의 단잠은 오래 가지 않았다.
두시간쯤 자고 눈을 떴는데, 이미 깨어 있는 준희가 침대 헤드에 기대서 재현이를 보고 있었다.
"준희씨 깼어요? 언제 깼어요? 어지럽지 않아요? 괜찮아요?"
"괜찮아요.."
금방 자다깨서 횡설수설 하면서도 쏟아내는 말들은 죄다 준희 걱정이다.
그러다 준희가 잠들어 있을 때 꼬옥 잡고 있던 손이 보여서,
"아,," 하면서 손을 놓아줬다.
"나 불편해 할거 아는데, 깨어나는 것만 보고 가려고 했어요. 미안해요... 어.. 좀 더 쉬어요. 나는 괜찮은거 봤으니까.."
너무 당황 해서 어버버 하고 있는데 재현이 놓은 손을 이번에는 준희가 다시 잡는다.
"가지마요. 나랑 있어요."
".........."
화를 내거나, 이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소리를 들을 줄 알았던 재현은 손을 붙잡아 오며 가지말고 같이 있어 달라는 준희의 말에 놀란 토끼눈을 한다.
"내가 생각해도 내가 참 미련한데, 나 이제.. 재현씨 더는 못 밀어 내나봐요."
"......."
"눈뜨는 순간에, 눈 앞에 재현씨가 있어너 나 안도하고 있더라구요. 밀어내고 싶었는데, 미워하고 싶었는데, 내가 그걸 못 하나봐요."
밀어내고 싶었는데 그럴 수 없다고, 미워 하고 싶은데 저는 그걸 못 한다고 말하는 목소리가 조금씩 떨려 오더니 기어코 준희가 눈물을 흘린다.
"못해도 돼요. "
재현은 그런 준희를 품에 꼬옥 안아준다. 그리고 그런건 못해도 된다고 준희를 위로한다.
그게 두 사람의 첫 포옹이었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게 아닌,
누군가에게 사진 찍히기 위해서가 아닌,
서로를 위로하는, 빙빙 돌아 다시 마주하게 된 서로를 따듯하게 안아주는 포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