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용은 한 시간 쯤 지나서 다시 태환의 방으로 갔다. 문을 열자 침대에 앉아 주섬주섬 짐을 싸고있는 태환이 보인다. 성용은 고개를 갸웃하며 태환에게 물었다.
" 뭐해? "
태환은 쳐다도 보지않으며 묵묵히 옷가지들을 챙기고 있다. 보다못한 성용이 짐을 싸는 태환의 행동을 제지하려 팔을 잡는다.
" 야, 뭐하냐고. "
" 짐 싸잖아. "
" 큰 형님 화 많이나셨냐? "
하고는 ' 너 지금 쫓겨나는거야? ' 하고 물어온다. 태환은 성용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자신의 팔을 잡고있는 성용의 손을 뿌리치고 싸던 짐을 계속 싼다.
" 미쳤냐. 적어도 형님이 아저씨랑 한 약속 때문에 날 함부로 내쫓지는 않을거다. "
성용은 답답한 나머지 ' 그럼 왜 짐을 싸는데? ' 하고 물었다. 하지만 곧 그는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 설마 아침에 그 애 집으로 간다는거냐?? "
이제 맞췄냐, 하면서 큰 가방에 담긴 자신의 옷들을 확인하는 태환이다.
" 미쳤냐, 거기가 어디라고 가?! 서파 새끼들 잔챙이일수도 있다며? "
하고 버럭 화를 내자 태환은 가방을 들고 벌떡 일어나 팔을 흔들며 무게를 확인한다. 그리고 나즈막히 말했다.
" 걔가 서파 잔챙이었다면, 날 살려주지는 않았겠지. "
확고하게 쑨양을 믿고있는듯 한 태환의 모습에 성용이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 니가 언제부터 사람 잘 믿었다고 이러냐? 그리고 우리는 사람 함부로 믿으면 안된다는 거 잘 알잖아. "
" 형님도 허락하셨는데 왜 너가 더 난리냐. "
하고는 성용을 옆으로 밀쳐버린다. 비틀하며 옆으로 내쳐진 성용은 태환의 뒷모습만 바라 볼 뿐이었다.
" 내가 영영 간다는 것도 아니잖아. "
뒤이어 태환은 ' 조직 내에서만 생활하는 것도 신물 나. ' 하고 성용에게 씩 웃어보이며 방을 나섰다. 성용은 그저 태환의 뒷모습을 보며 멍하니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태환의 발자국 소리가 사라지는 걸 등고 성용은 픽 웃었다.
어쩌다보니 나오게 되긴 했지만, 이대로 무작정 가도 되나 싶었다. 분명 녀석에겐 ' 나중에 연이 닿으면 ' 이라고 말했던 걸로 기억하는 그였다.
" 괜한 짓 했나. "
하며 살짝 후회가 들 즈음에 녀석의 집 앞에 도착했다. 짐이 꽤나 무거운지 양 손에 번갈아 가며 가방을 들었던 태환의 붉어진 손이 녀석의 집 문 손잡이를 돌렸다. 열리지 않을거라 예상했던 태환의 예감은 빗나갔다. 문은 기다렸다는듯이 열렸고, 집안은 여전히 어두컴컴했다. 가방안에 든 내용물도 많고, 가방크기도 워낙 컸기에 그 좁은 부엌을 지나기 힘들었다.
" 야, 넌 집 문도 안 잠가두고 뭐하냐? "
쥐 죽은 듯 고요한 집 안에 쑨양을 불렀으나 대답이 없었다. 인기척 또한 없었다. 태환은 일단 가방을 내려두고 집 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집 안이 너무 지저분해서 이것 저것 만지기 껄끄러웠지만 그래도 역시 수상한 느낌을 버리지 못했던 태환이었다. 태환은 딱히 거실엔 별로 볼게 없었다고 느꼈다. 그러다 문득 화장품에 더럽혀진 다른 방으로 가보고 싶었다.
" 윽. "
방의 상태는 보기보다 심했다. 이미 화장품들은 썩어서 심한 악취를 풍기고 있었고, 여기저기 곰팡이고 피어있었다. 바닥에 잔뜩 나있는 립스틱 자국을 들여다 보았다.
" ...피? "
립스틱 자국이 아니라 핏자국이었다. 당혹스러웠다. 방 상태로 봐선 아주 오래전부터 방치해둔것 같았다.
"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거지. "
밀려오는 궁금증을 일단 뒤로 하고 방을 나가려는데 구석에 탁상액자가 엎어져있다. 조심히 손을 뻗어 집어 들어올리니 유리가 다 깨지고 먼지가 쌓여있어 손으로 대충 닦아냈다.
사진 속엔 여자 한명과 남자 한명, 그리고 앳되보이는 꼬마 한명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소년이 쑨양과 매우 닮은걸로 보아 쑨양이 어렸을때 찍어 둔 가족사진임을 짐작했다.
" 이렇게 웃을 줄도 아는구나. "
너무나도 행복하게 웃는 쑨양과 그의 부모님들 때문에 왠지모를 부러움 또는 씁쓸함이 같이 느껴지는 태환이었다. 그는 조용히 액자를 원래 자리에 두었다. 방을 나서고 거실에 한참을 서있었다. 시계를 보니 6시가 다 되어간다.
" 요즘 고삐리들은 수업이 늦게 끝나나? "
하고는 쑨양을 찾으러 갈 심산인지 집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