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 만큼은 꼭 비지엠을 바꿔서 들어주세요!
마지막 부탁입니다 :)
12월 중순, 기말고사가 끝나고 겨울방학이 찾아왔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남은 건 다름아닌 제주도 여행이었고, 승관은 일주일이나 남았음에도 제 흥을 주체하지 못하는 듯 밥을 먹다가 말고도 이런 식으로 떠들곤 했다.
승관) 취지지ㅣ지취ㅣ치칯.. 우리 비행기는... 제주도.. 제주도로 갑니다.. 승객여러분께서는-..
지훈) 또 시작이다 또.
지수) 나 쟤때문에 비행기 몇번은 탄 것 같아.
승철) 그니까 ㅋㅋㅋㅋㅋㅋㅋ 누가 진정 좀 시켜봐. 여행이 무슨 내일도 아니고
승관) 내일은 아니지만! 벌써 7일밖에 남지 않았는 걸요!?!!?
지훈) 일주일이나 남았는데 저러다니.
아이들은 익숙한 듯 고개를 저어댔고, 위처럼 몇마디 거들으며 웃어보였다. 그러다 민현의 말에 화제가 전환됐다.
민현) 오늘 여주 몇시에 끝난다고?
민규) 아홉시. 집에오면 아슬아슬하게 사십분정도 될 걸?
석민) 열시 전에 도착하려고 엄청 노력하더라. 가게에서 버정까지 좀 뛰는 것 같던데.
민규) 벤토린 잘 들고 다니라고 해야지.. 스트레스 받으면 천식 더 심해질텐데.
정한) 그럼 여유있게 오라고 우리가 마중을 나가는게 낫지않아?
민현) ..그게 좋긴 하겠다. 너무 급하게 오는 것도 좀 그러니까.
민규) 그럼 일단 오늘은 나랑 석민이가 데리러 갈게.
승철) 그럼 너무 뒤죽박죽이면 아무도 기억 못할게 뻔하니까 3층부터 2층 1층 순으로 하자.
지훈) 그래. 막 정하면 우리 아무도 기억 못햌ㅋㅋㅋㅋㅋ
여주) ..뭐야?
민규) 마중.
석민) 너 자꾸 통금시간 맞춰서 급하게 오는 것 같으니까 넌 천천히 오고 우리가 마중 나오기로 했어. 앞으로 급하게 오지말고 여유있게 와!
민규) 대신 연락 잘 받고.
여주) 뭔 마중이야. 됐어- 버스에서 내리면 집까지 얼마나 걷는다고.
민규) 그게 중요한게 아니라 사람들이 잘 안다니잖아. 어차피 이미 다 결정난거야~
석민) 그래~ 그리고 길가에서 책 읽으면서 다니지 좀 말고!
여주) 아익, 알았어 알았어.
민규) 밥은 먹었어?
여주) 그럼. 너넨?
민규) 먹었지.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던 아이들은 어느덧 주택 단지에 들어서고, 살짝 언덕에 다다르자 여주의 걸음걸이가 늦춰졌다. 둘은 자연스레 그 걸음걸이에 속도를 맞추고, 석민이 여주를 향해 물었다.
석민) 벤톨린은 잘 갖고 다니는거지?
여주) 그럼. 가방에 있어. ..뭐야? 집 앞에 누구 있는데?
민규) ...뭐야. 누구야? 잘 안보여.
석민) ..형들 아닌데. 누구지.
아이들의 걸음이 늦어지고, 석민은 집에있는 민현에게 급히 전화를 걸었다. 형 나 집 앞인데, 누가 집 앞에 서성거리길래-.. 석민이 조용히 상황을 전하고, 천천히 집 앞으로 걷는 셋에 집에선 금새 몇몇의 아이들이 나왔다. 갑자기 열리는 문에 서있던 남자는 놀란 모양인지 뒷걸음질을 치고, 누구시냐는 물음들 사이에서 익숙한 음색이 남자를 향했다.
원우의 아버지가 소파에 자리하고, 이 집에서 익숙하지 않았던 정적이 꽤 오래 자리했다. 둘 사이엔 손동작이 오갈 뿐 말소리는 없었다.
원우) '휴대폰이 방전돼서 몰랐어요. 죄송해요.'
'..나는 또 무슨 일이 있는 줄 알고,'
원우) '...기다리시면 금방 연락 드렸을텐데, 무슨 일 있으세요?'
'..........'
원우의 물음에 아버지는 잠시 손을 무릎위에 올려뒀다가 다시금 원우를 향해 손짓했다.
'..니 엄마가 어제 잠깐 쓰러지셨었어. 이석증으로.'
원우) '.........'
'별 건 아니고, 나이들면서 자연스레 있을 수 있는 병이야. 문자로 말하려 했는데 통 연락이 안돼서 무슨일 있나 와봤어.'
원우) '.........'
'별 일 없는게, 괜찮아보여서 다행이구나.'
원우) '..많이 편찮으세요?'
'아니아니. 하루 쉬면 괜찮아질거래. 다음부턴 조금 조심하고.'
원우) '...다행이네요.'
'이번 설에 내려올거지?'
원우) '...네.'
'그래, 그럼 이제 가볼게.'
원우) '운전하시고 오셨어요?'
'그럼. 네 엄마 옆에 있을 때보다 혼자 있을 때 더 잘해.'
아버지가 일어나자 원우도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2층에 있던 여주가 내려오다 아버지와 마주친 두 눈에 가볍게 목례를 해보였다. 그러자 아버지가 미소를 지으며 여주를 향해 돌아서고, 여주는 옅은 미소를 걸친 채 그 시선을 맞췄다.
'얘기 많이 들었어요. 혼자 여자라며. 안불편해요?'
원우) ...혼자 여자라서 안-,
여주) '네. 괜찮아요.'
당연히 여주가 수화를 하지 못할 줄 알았던 원우는 여주를 향해 아버지의 말을 전하려했으나 여주가 서툴게 수화를 하기 시작했다.
'우리 원우도 되게 소녀감성이 있는 아이라, 둘이 잘 맞을 것 같은데?'
여주) '맞아요. 다른 사람들보다 원우오빠랑 시간 자주 보내요.'
'다음에 시간 되면 둘이 같이 내려와요. 우리 와이프가 음식을 아주 잘해.'
여주) '네. 꼭 불러주세요. 같이 갈게요.'
여주가 아버지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자 가볍게 손을 흔드신 아버지가 현관 쪽으로 몸을 돌리고, 둘은 금새 집을 빠져나갔다. 아버지가 차에 타 단지를 빠져나가는 걸 보고 나서야 다시금 집에 들어온 원우는 여유로이 소파에 앉아 티비를 보는 여주의 옆에 앉으며 물었다. 수화 할 줄 알았어?
여주) 엉? 아.. 조금? 잘 못해.
원우) 어떻게?
여주) ..저번에 오빠가 나한테 아버지 얘기 해준 날. 그 날 이후로 조금씩 배워봤었어.
그래서 진짜 조금 밖에 못해 ㅋㅋㅋㅋㅋㅋ 방금도 겨우 알아들었어.
원우) ....아. ..뭐하러.
여주) 그래도, 배워두면 좋잖아. 이렇게 오빠 아버지랑 대화도 나눌 수 있고.. 또 청각장애 택시를 타게되면 쓸 수도 있고, 하나의 언어니까.
여주의 담담한 말에 원우는 옅게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채 고개를 숙여 손장난을 해댔고, 아버지가 가시자 집은 다시금 소란스러워졌다.
원우) 고등학교 때 너 처음보고 내가 한 말 기억 나?
여주) ..무슨 말? 난 오빠 게임하는 것 밖에 본 기억이 없엌ㅋㅋㅋㅋㅋ
원우) 아잌ㅋㅋ 그런 거말고ㅋㅋㅋ 윤정한이 너 왜 좋아하는지 알 것같다고 그랬었어
여주) ...그랬나
원우) 그 땐 그냥 겉모습이 정한이네 누나랑 닮아서그랬는데,
이젠 더 확실히 왜 애들이 널 좋아하는지 알 것 같다.
민규) 솔직히 이건 반칙이지.
석민) 그니까.
지훈) 치사한놈.
민현) ....그냥 집에서 놀지 뭘...나간다고.
아침식사를 끝내고 삼삼오오 모여있는 아이들은 불만이 가득한 소리를 냈다. 켜져있는 티비는 폼인 듯 아무도 집중하고 있지 않았고, 오로지 신경은 아침식사를 끝낸 뒤 집을 빠져나간 원우와 여주였다.
석민) 평일에 죄다 알바하고 주말에만 쉬는 애를! 왜 원우형이 독차지냐고!
민현) ...에휴. 심심한 주말이다.
지훈) 무료해.
정한) 여주랑 놀려면 대체 약속을 얼마나 빨리 잡아야하는거야?
민규) 원우형도 어제 놀러가자고 한 것 같던데. 빠른게 중요한건 아닌듯. 그냥 타이밍..
정한) 언제 들어오냐고 전화해볼까?
석민) 나간지 한시간도 안됐는데?
정한) ..그랬어? 두시간은 된 줄 알았는데?
민현) 어디간다그랬다고?
민규) 몰라. 원우가 귀여운 거 많다고 했던 소품샵 간다그랬어.
민현) 여주는 별로 귀여운 거 안좋아하지 않나?
석민) 맞아. 여주는 귀여운 걸 좋아하는 귀여운 사람을 좋아하지.
지훈) ...? 그건 뭔 논리지?
민규) 아익까, 자기는 귀여운 거 관심 없는데, 귀여운 걸 보면서 귀여워하는 모습을 보는 걸 좋아해.
민현) ..나만 이해하기 어려워?
석민) 아니 그니까! 원우형이 귀여운 물건을 보고 귀여워하는 모습을 보는 걸 여주가 좋아하는 거라니까!
민규) 여주도 참. 독특해.
민규와 석민이의 말에 아이들은 미간을 찌푸리며 이해하려는 듯 그 말을 되뇌였다.
민규) ..뭐해?
여주) ..아, 바느질.
원우와 여주가 집에 돌아오고, 여주는 씻고나서 책상에 앉아 손가락을 꾸물대고 있었다. 열려있는 문을 열고 들어온 민규가 여주를 향해 물으며 여주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민규) 뭐하는건데?
여주) 북커버. 책 감싸는거 만드는거야.
민규) 그런건 안팔아?
여주) 팔지.
민규) 근데 왜 만들어?
여주) 뭔가 북커버를 사는 건 돈이 아까워. 그리고 마음에 드는 디자인도 없더라고.
그래서 헐은 옷으로 만드는거야.
민규) 왜 넌 항상 바쁜 것 같지?
여주) 내가?
민규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 고개를 기울였고, 여주는 그런 민규를 잠시 쳐다봤다가 다시금 시선을 돌려 바느질을 이어갔다. 민규는 여주의 침대에 풀썩 눕더니 천장을 바라보곤 적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민규) 응. 원우형이랑 놀고오더니 또 그거 만들고. 그거 끝나면 자고 일어나서 일요일이니까 또 책 못읽은거 읽을거잖아. 그리고 또 평일이면 알바하러 가고.
여주) ...그렇게 얘기하니까 바빠보이긴 한다.
민규) 그렇게 말하니까가 아니라 너 이렇게 살고 있어.
여주) 그래서?
민규) 놀고싶다는거지. 이런 땡깡피우기 싫은데, 피우고싶네.
여주) ..........
민규의 말에 여주의 눈이 초점을 잃어가고, 손이 느릿해지다 어느덧 멈췄다. 그리고 곧 민규의 낮은 목소리가 여주를 향했다.
민규) 힘들어?
여주) ..아니.
민규) 난 힘들어.
여주) ..........
민규) 일은 네가 다 하고, 과제도 나보다 열심히하고, 지식도 네가 쌓는데,
민규) 우리는, 이 집에 사는 모두는 방학이 좋은데 싫대. 왜 그런 줄 알아? 방학에 우린 쉬지만, 넌 학기중보다 바쁘니까.
여주) .........
민규) 그래, 이런 소리 들으면 네가 얼마나 속상할지 나도 잘 알아. 근데 나도 너무 힘들어.
나 너랑 석민이랑 같이 놀고싶고, 게임도 하고싶고, 오늘 원우형이랑 놀러간 것 처럼 놀고싶고 그래.
여주) .........
민규) 엄마가 용돈도 보내주신다며. 이렇게까지 열심히 알바하는 이유가 뭐야?
민규의 물음에 점점 물기가 묻어나고, 여주의 눈에도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여주의 눈에서 눈물이 툭 하고 떨어져 바느질하던 천을 적신 순간 민규가 물었다.
민규) 뭐가 갖고싶어서 그런거라고, 차라리 그렇다고 해줘.
여주) .........
민규) ..다른 거 아니라고 말해줘.
여주) ...미안해.
민규) .........
여주) ..미안해, 민규야.
여주는 기필코 민규가 듣고싶지 않아했던 단어를 입에 올리고 말았다. 모든게 생략된 대화였지만, 민규는 알았다.
여주가 언제일진 모르지만, 언젠가 떠날 준비를 한다는 걸.
재주도여행 가기 전 전 날이었다. 유난히 들뜬 아이들은 밤 잠을 설치다 새벽 늦게 잠들곤 했는데, 여주는 그 사이에서 소리소문 없이 제 방을 나섰다. 추운 날씨와 걸맞게 롱패딩을 입고 찬이와 승철이 서툴게 짠 두 목도리를 겹쳐 두른 여주가 일층까지 내려와 현관 앞에서 집을 훑었다. 달빛에 비친 눈동자엔 무언가 읽을 수 없는 감정들이 섞여 비춰졌고,
곧 집을 빠져나갔다.
아침 당번이었던 3층 아이들이 일어나고, 먼저 일어나지 않은 여주가 이상해 혹시 저번 처럼 아픈가 싶어 여주의 방문 앞을 서성였다. 그러다 답답함을 참지 못한 민규가 문을 여러번 두드리더니, 김여주, 나 들어간다. 하며 문을 벌컥 열어 재꼈다.
민규) ..뭐야?
정한) 여주 어디갔어? 부엌에 먼저 내려가 있는거야?
지훈) 부엌에 없던데.
석민) ...이상해.
방문에 붙어서서 여주의 방을 들여다보며 몇마디 나누던 중, 석민이 문 턱을 넘어서서 들어오더니 말했다.
석민) 짐이 없잖아.
지훈) ........
석민) 없어, 짐이.
당황한듯 눈을 굴리던 석민은 옷장을 열었고, 곧 텅 빈 옷장을 보더니 침을 삼켰다. 그런 석민을 바라보다 민규가 서랍장을 막 열어재끼더니 비어있는 걸 보고서 허탈한 듯 방바닥에 앉았다. ...김여주. 민규가 작게 중얼거렸다.
정한) ..갈 곳이 없는데. 어딜 가? 말이 안되잖아.
석민) 전화. 전화 해볼게.
석민이 휴대폰을 가지러 제 방으로 나가고, 지훈은 급히 1층으로 내려가 민현의 방문을 열었다. 잠든 민현을 흔들어 깨우고서 지훈은 말했다. 여주가 없어.
민현) ..뭐라고?
지훈) 여주가 없다고.
민현) ..방에 없으면-,
지훈) 짐도 없어.
..옷도 없고, 아무 것도 없어. 떠난 것처럼.
아침도 거른 채 앉아있는 아이들 사이에는 짙은 한숨들이 자리할 뿐 섣불리 많은 말들을 내뱉지 않았다.
석민) 전화도 안받고, 짐도 없고.. 이해가 잘 안가.
민규) .........
순영) 뭔 일 있는거 아냐?
승관) 근데 전화는 왜 안받아.
원우) 피해준다고 생각했겠지, 여주면.
...하아.
아이들의 말에 지훈이 고개를 푹 숙였고, 곧 유리 테이블 밑바닥 모서리에 보이는 돌돌 말려 붙여진 누런 종이를 보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지훈) ..저건 뭐야.
석민) 뭐가?
지훈) .........
지훈이 손을 뻗어 뜯어내자 툭하고 뜯어지고, 아이들의 시선은 모두 지훈의 손에 들린 종이로 향했다. 지훈이 돌돌 말린 걸 조심스레 펼쳤고, 짧은 글을 읽음과 동시에 지훈은 눈을 살며시 감았다.
번호가 매겨져있는 걸 보아하니 집에 더 있을 것 같다는 정한의 말에 아이들은 묵묵히 종이들을 찾아냈고, 집안 곳곳에 숨겨진 쪽지엔 아이들이 통 이해할 수 없는 글들이 가득했다.
#2. 미안해. 나는 고작 이런사람이야. 아픔 하나 이겨내지 못하고, 민규 말대로 누구한테 기대는 것도 잘 못해.
#3. 제발 행복한 것에 익숙해졌으면 좋겠다는 승관이 말도 못지켜. 행복하면 나는 자꾸 불안해.
#4. 그래서, 그냥 행복에서 도망치기로 했어.
#5. 죽지 못해 살아야한다면, 나는 그냥 이렇게 행복하지 못한 채 살아갈게. 그게 그나마 덜 불안하니까.
#6. 행복하다가, 그 행복이 사라지는게 나는 너무 두려워.
#7. 민규야. 더워도 난방 끄지마. 감기걸려.
#8. 명호는 어두운 곳에서 책 읽지 말고, 준휘오빠는 햇빛 좀 쐐고.
#9. 승철오빠랑 찬이는 운동 말고 다른 것도 해봐. 심리적으로 안정될거야. 추천하자면 이번에도 뜨개질?
#10. 원우오빠는 게임 좀 줄이고. 승관이는 뭐든 그렇게 다 잘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돼. 모난 거 하나 없는 사람이 어딨겠어.
#11. 순영오빠, 항상 잘하고 있으니까 이 길이 맞나 의심하지 않아도돼. 잘해왔고, 앞으로도 잘할 수 있을거야.
#12. 석민아, 항상 내 곁에 네가 있어서 너무 행복했어. 넌 겁쟁이가 아냐.
#13. 항상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 지훈오빠, 정한오빠, 민현오빠. 가장 미안하고, 가장 고마워.
#14. 사소한거 다 기억하고 챙겨줘서 고마워 한솔아. 항상 내 편이 되어줘서 고마워 지수오빠.
#15. 나는 잘 지낼거야. 그러니까 다들 잘지냈으면 좋겠어.
이후 여주의 동기를 통해 들은 여주의 이야기는, 이미 정해져있었던 계획이었다는 것이었다. 여주의 재능을 알아본 교수님이 외국으로 편입해, 해외에 있는 친구분 회사에 취직을 하는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여주에게 했었고, 여주 입장에선 워낙 조건이 좋아 거절할 필요가 없었다고.
이 이야기를 들은 아이들은 재빨리 그 교수님을 찾았지만, 여주가 단단히 일러놓은 탓에 자신은 말해줄 수 없다는 말만 반복했다. 그러나 여주는 잘 지내고 있다고, 너무 걱정 말라는 말을 남겼다. 이 말 가지고 아이들의 마음을 풀기엔, ‘전혀’ 였다.
석민은 부모님을 만나 여주의 학비를 내주고 있지 않냐, 어딨는지 말 좀 해달라고 하소연했지만, 교수님과 똑같은 말을 늘어놓을 뿐이었다.
그 날 이후, 다다음날에 잡혀있던 제주도여행은 자연스레 취소됐다. 석민은 자퇴를 하겠다고 자퇴서를 내려했지만, 민규가 정신차리라고 소리를 치며 석민의 자퇴서를 박박 찢어버렸다. 결국 석민은 2년을 남긴 채 휴학을 신청하고 한동안 여주의 방 침대에 누워 하염없이 울기만 했다. 승관은 그 날을 회상하면 석민이 탈수로 죽는 줄 알았다고 고개를 저어댔다.
민규는 강인한 척 견뎌내려했지만 밤마다 옛날 여주와 나눴던 연락을 재탕 삼탕을 하다가 소리없이 눈물을 흘리며 잠들기 일쑤였고, 그렇게 밝던 승관과 순영의 텐션은 끝도없이 차분해졌다.
휴학을 했던 석민까지 마지막으로 졸업을 하고 취업을 했다. 아이들은 여전히 하숙집에 살았다. 그 이유는 단순했다. 혹시 여주가 다시 나타날까봐.
여주가 떠난지 3년이 다 되어갈 때 즈음, 여주에게서 택배가 오기 시작했다. 정확히 여주에게서 온 건 아니었지만, 택배의 물건과 쪽지로 여주임을 확신했다.
열네명의 아이들이 소파에 앉아 머리를 싸매도, 어떻게 자꾸 물건이 오는지, 정확히는 자신들이 필요하다고 혹은 갖고싶다고 떠들어대던 물건들을 귀신같이 잘 알고 보내는지, 알 수 가 없었다.
범임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었지만.
민규) ...이렇게 좋은 칼을 보내놓고, 지는 안오네.
석민) ...나 앞치마 다 헐은 건 어떻게 안걸까?
민규) 김여주 글씨체 봐라. 더 못생겨진 것 같지 않냐?
석민) 그러게. 글씨 평소에 잘 안쓰나?
‘맛있는 요리, 먹으면 기분 좋아지는 요리 = 김밍구 요리’
‘이석민 선생님! 밍구 책 읽어주는 시간에 졸면 꼭 깨워주세요! 밍구 책을 너무 안읽어요..’
승관) 김여주 진짜...
순영) 이런거 다 필요없고 오기만 하면 되는데.
승관)...누가 듣고 있으면 우리 신발사이즈 말고 이런 말좀 전해줘!!!!!!!!!!
민규) 우리밖에 없는데 왜 소리쳨ㅋㅋㅋㅋㅋ
승관) 아니 필요한 건 어떻게 알고 자꾸 보내잖아!
...우리가 필요한 건 지라는걸 지도 잘 알텐데.
‘이 신발 신고 걸으면 승관이가 걷는 길이 다 꽃길로 변한답니다!’
‘순영 경호원님! 밥 잘 드시면서 일하세요! 며칠 전부터 몸관리한다고 닭가슴살 드신다는 소문이 있던데?’
순영) 와 진짜. 김여주 오기만 해봐라.
민규) 우리 여주 오기만 하면 뭐.
석민) 그래 뭐!
순영) 뭐!!!! 안아줄거라고!
석민) 미쳤어!?!?!
순영) 그래!!!!!!! 미쳐따!! 그냥 안을거야!!!!!!! 여주야!!!!!!!!!
승관) 이 씽 눈물나, 김여주!!!!!!!!!! 다 너때문이야!!!!!!!
아이들이 택배를 뜯는 날은 거의 눈물샘이 고장나는 날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3년전부터 지금까지 반복되는 택배였지만 익숙해질 줄 몰랐다.
민혁) 그래서?
순영) 그래서는 뭔 그래서야. 신발 굽이 다 달아서 또 사야겠다고.
민혁) 야 근데 니 신발 사이즈 몇이냐? 왜이렇게 작아보여.
승관) 이 형 저보다 작아요. 260일걸요?
순영) 맞아. 너가 270인가?
승관) 응.
순영과 다른 대학, 같은 학과를 나온 민혁은 순영과 같은 곳에 취직하고, 미친 친화력을 가진 민혁으로 인해 하숙집 아이들은 민혁을 거리낌 없이 대했다.
순영과 승관의 대화를 듣던 민혁은 휴대폰을 두드렸다.
짱균이- 사이즈 몇인데?
민혁) ...에휴, 이게 무슨 짓이람.
민혁은 알겠다는 창균의 답장을 보고선 휴대폰을 엎었고, 곧 턱을 괴며 고개를 저어댔다. 이런 스파이 짓을 하기 시작한건 다름아닌 3년 전, 서울대를 가지못해 유학을 당한 창균이 미국에서 여주를 만나고 나서부터 시작된 짓이었다.
낯선 땅에서 조금이라도 안면이 트여있는 인물을 만난다는 건 생각보다 반가운 일이었고, 부잣집 도련님이라 밥먹듯이 미국을 왔던 창균과는 달리 낯선 땅은 처음인 여주에겐 도움이 필요했다.
그렇게 3년동안 창균과 친해지며 민혁이 건넨 아이들의 소식을 창균을 통해 들었다.
창균) 언제까지 이러려고 그래.
여주) ..거기까진 생각 안해봤는데.
창균) 택배만 준다고 애들이 좋아하겠어?
여주) 안좋아하겠지. 눈에 보여.
..근데 내가 받은게 너무 많아서.
센트럴 파크에 앉아 바람을 쐐며 대화를 나누던 둘이었고, 여주는 다먹은 와플 종이를 곱게 접으며 중얼거리듯 답했다. 그 모습을 흘끗 보던 창균은 장난스레 말했다.
창균) 그러게, 나랑 사귀자니까.
여주) 오빠랑 사귀면 뭐가 달라져?
창균) 한국 들어갈 변명도 생기고, 남친 소개하느라 애들 만날 변명도 생기잖아.
여주) 뭐래. 한국 들어가는데 변명이 왜필요해?
창균) 가고싶은데 변명거리가 없어서 못가고 있는거 아니었어?
여주) ...내가 가고싶어 하는 것 같아 보여?
창균) 응.
너 3년 전에 처음 본 그 날부터 지금까지, 계속 가고싶은 것 같은데.
창균이 덤덤히 말하자 여주가 잔디를 멍하니 바라보고, 창균은 여주의 손에 들린 쓰레기를 부드럽게 앗아갔다. 그리고 제 주머니에 넣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창균) 가고싶으면 돌아가. 경력도 쌓았겠다, 어느 회사가 널 안받아주겠어.
여주) 오빠 나 좋아해?
창균) 말 돌리는 것 좀 봐. 선수 다됐어.
여주) 언제부터 좋아했어?
창균) 고등학교 2학년 때 부터.
여주) .........
창균) 왜. 너무 오래돼서 놀랐어?
여주) ...거짓말이지?
창균) 거짓말일리가.
여주) 그럼 아까 그 말 진심이야?
창균) 무슨 말.
여주) 사귀자는 말.
여주가 허공을 바라보던 시선을 창균으로 옮기고, 창균도 그 시선에 맞추다가 먼저 피하며 낮은 음색으로 답했다.
창균) 아니. 거짓말이야, 그건.
여주) 뭐야 그게.
창균) 지금은 안좋아해.
여주) 그럼 언제까지 좋아했었는데?
창균) 작년 크리스마스까지.
여주) ....뭐가 그렇게 구체적이야.
창균) 너 작년 크리스마스에 우는 거 보고 포기했어.
여주) 왜. 우는게 그렇게 못났었어?
창균) 아니.
네가 미친 듯이 불렀잖아. -..이름을.
창균의 말에 여주가 잔디로 손장난을 치던 걸 멈추고 침을 삼켰다. 그런 여주의 모습을 보던 창균이 피식 웃으며 씁쓸하게 말했다.
창균) 근데 내가 거기서 어떻게 널 더 좋아하냐. 미쳤냐, 내가.
여주) ........
창균) 고등학교 땐 말 섞어보고 싶었고, 같이 급식이라도 먹어보고 싶었고,
여주) ........
창균) 미국에서 만났을 땐 손잡고 싶었고, 안고 싶었고, 사귀고싶었는데.
아, 다 망했네-
창균이 탄식을 내뱉으며 몸을 비스듬히 뒤로 젖혔다. 그 장난 섞인 목소리 속 진심을 안다는 듯 여주가 살풋 웃음을 터뜨리고, 그 웃음을 보고 안심된다는 듯 똑같이 입에 미소를 걸친 창균이 다시금 말을 이었다.
창균) 근데 난 뭐 만족해. 너랑 이만큼 친해졌잖아.
여주) ...나랑 친해진게 뭐가 좋다고.
창균) 성격이 좋잖아. 같이 있으면 좋아.
여주) .. 그런가. 난 내 성격 별론데.
창균) 성격 좋으니까 좋은 애들이 네 주변에 그렇게 많지.
안그러면 진작에 다 도망갔어.
창균) 기다려줄 때 돌아가. 나중에 돌아갔더니 애들이 너 쳐다도 안본다고 다시 미국 오겠다고 소리치지말고.
여주) ....그러니까, 그러니까 안가려는거야. 쳐다도 안보는 그 날을 기다리는거야.
지금 가면 이렇게 못난 나를 또 착한 그 사람들이 날 안아줄 게 뻔히 눈에 보여서, 그 따듯함에 내가 또 무너져서 행복하고싶을 것 같아서, 내가 또 그런 욕심을 부릴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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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시그널 마냥 이 엔딩을 적는 시점을 미리 적어두자면, 08화가 올라가고 다음 날, 2월2일 입니다. 중간 부분은 안써두고 엔딩 먼저 써놓습니다. 어제 저녁에 자려고 문득 누웠다가 생각난 엔딩이었어요. 새드엔딩으로 써야지 하고 마음만 먹고 구체적으로 생각은 안해뒀었는데, 덕분에 썼습니다.
후속작에 대한 생각은 사실 아직 없어요. 다시 돌아와서 만나는 걸 쓰고싶다가도, 그럼 결국은 또 해피엔딩이 될게 눈에 훤히 보이는데.. 전 새드를 좋아해서.(취향확고)
+2월 21일, 지금 생각해보니까 가져오고 싶은데 또 고민되네요. 핰ㅋㅋㅋ 난 밥오야..
+3월 28일, 지금은 또 들고 올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려 아마 후속작은 없을 것 같아요. 있더라도 내년?
여주가 좋아하는 사람을 딱 정하는 것도 되게 어려웠고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볼까 하고 생각을 했었는데, 딱 그런 그림이 나왔습니다. 저 또한 여주가 누굴 좋아했을 지는 모르겠어요. 늘 옆에서 지켜주던 민규와 석민이? 아님 금전적인 걸 도맡아 도와주던 민현이? 감정적으로 다가왔던 지훈이? 글쎄요.. 핳하..
마지막 화인만큼 주저리가 길어지는데 그건 이해해주세요, 마지막화잖아요 ㅎㅎㅎ
생각보다 길게 걸어왔어요. 시즌제는 생각했지만, 2기까지 이렇게 많은 관심을 받게 될 줄 몰랐어요. (사실 1기도 ㅋㅋㅋㅋㅋ) 항상 댓글을 보고 기뻐하던 제 모습들이 스쳐지나가네요 ㅋㅋㅋㅋㅋㅋㅋ
마지막화 제목이 ‘그냥’ 인 건, 글쎄요. 우리가 뭔가 할 말이 많음에도 말하기 좀 그럴때, 혹은 말하기 귀찮을 때, 저사람한테 말할 필요까진 못느낄 때 등등 이럴 때 엄청 많이 쓰는게 그냥이잖아요. 저도 엄청 많이 쓰는 말인데, 그냥은 뭔가 그런 복잡한 감정선이 다 들어간 유일한 단어처럼 느껴져요.
여주가 말한 마지막의 그냥엔 무슨 의미가 담겨져있을까요. 아마 무수히 많은 생각들이 있었겠죠. 그런 복잡한 감정을 다 넣고 싶었습니다.
세때홍클1부터 세때홍클2까지 많은 관심과 사랑을 보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읽어주셨던 여러분이 없었더라면 아마 절대 끝내지 못했을겁니다..
이제 진짜 우리 세때홍클 보내줍시다! 아마 3기는 없을거거든요. (아, 나 이러다가 3기 가져오는거 아냐...?) +3월 28일, 가져오더라도 내년에 가져올거에요 ㅎㅎ )) 그래서 앞서 말했듯이 다음 글을 뭐로 찾아와야할 지 모르겠어요. 어떤 장르로 가져와야할지, 중간에 매듭을 짓지 못한 여러 글들 중 하나를 가져와야할지, 조각글에서 디밸롭을 시켜서 가져와야할지, 새로 쓸지.. 빨리 돌아오고 싶은데 제 손엔 든 게 없네요.
사실 여주가 졸업을 하자마자 떠나는 스토리를 쓰려그랬는데, 그럼 그 2년을 채워야하잖아요. 근데 소재가 없더라구요. 어느순간 글을써야하는데 손이 잘 안움직이기도 했고, 그러다보니까 아 그만 쓸 때가 됐나보다. 어거지로 이어나가는 건 글을 못나게 만드는거니까요. 그렇게 느꼈어요.
제 손에 든게 생길 때 다시 돌아올게요. 그동안 몸 건강히 잘 계시고, 저는 금방 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 모두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부록은 이거 올리고 바로 올리러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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