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첫사랑이 뭐냐면……
그러니까, 첫사랑은
첫사랑은 합성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문법에 맞는 통사적 합성어. 첫이라는 어근과 사랑이라는 어근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합성어다. 첫은 관형사로서 ‘맨 처음의’라는 뜻이고 사랑은 ‘어떤 상대의 매력에 끌려 열렬히 그리워하거나 좋아하는 마음’이라는 뜻이다. 즉 첫사랑은 처음으로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윽.”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갑자기 목까지 빨갛게 달아오른 박경은 노트 위에 써놨던 첫사랑이라는 단어를 마구 지우기 시작했다. 혹시 몰라 뒷장까지 넘겨 꼼꼼하게 볼펜으로 덧칠한다. 철두철미하게 지운 경이는 그제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때 누군가가 다가오면서 종이 위로 검은 그림자가 졌다.
“박선생님 아직 퇴근 안하셨네요?”
“아! 네, 네. 곧 할 거에요. 표선생님은 지금 가시는 건가요?”
“네. 먼저 가볼게요. 요즘 늦게까지 남던데 박선생님도 얼른 일 마무리하시고요.”
박경은 어색하게 웃으며 끄덕였다. 곧 문 닫히자 그제야 경은 쓰러지듯 책상에 엎드릴 수 있었다. 탈탈거리는 고물 선풍기가 오늘따라 유난히 더 시끄럽다. 모두가 퇴근한 교무실에는 한적한 햇빛만이 엿가락처럼 길게 늘어져있을 뿐이다. 아무도, 없지? 박경은 빼곰 고개만 들어 주변을 살피다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꼼지락 꼼지락 손을 놀렸다. 무엇 때문인지 잔뜩 긴장한 채 눈치를 보며 확인 버튼을 누르고 나서도 경계의 태세를 늦추지 않는다.
쾅ㅡ
얼마 지나지 않아 교무실 문이 벌컥 열리면서 한 학생이 혜성처럼 등장했다. 경첩 소리를 듣고 경은 자동반사 수준으로 벌떡 일어났다.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옷매무새를 정돈하면서 흐릿하게 미소를 그린다. 벌써부터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내색을 안 하려고 노력해도 벌써 이렇게 입 근육이 잔뜩 풀려서 녹은 마시멜로우처럼 흐물거리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경은 목에 빳빳이 힘을 주면서 퉁명스럽게 ‘아니?’ 라고 대답했다. 하마터면 고개를 끄덕일 뻔했네. 경은 높아져만 가는 심박동을 무시한 채 도도한 컨셉을 유지했다. 찬찬히 앉아서 고민해봤는데, 그동안 자신이 너무 물렀다. 자고로 매력적인 애인이란 어느 정도 밀당을 구사할 줄 알아야하는 법이다. 경은 빨개진 얼굴과는 안 어울리게 한껏 턱을 위로 치켜 올리면서 눈을 내리깔았다.
“흐음. 의외네요.”
학생은 짐짓 초조하다는 듯이 턱을 문지르면서 말했다. 물론 행동과 달리 얼굴은 여유로움이 철철 넘치지만 말이다. 학생은 흥미롭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경에게 한발자국 다가섰다.
“저는 선생님이 너무너무 보고 싶었는데.”
“어, 어…?”
학생은 느긋하게 팔짱을 끼고 사과처럼 빨갛게 익어가는 경의 얼굴을 감상했다. 순간 다리가 풀릴 뻔해서 경은 겨우겨우 의자를 짚으며 자세를 고정했다. 어찌나 심장이 쿵쿵 거리는지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다. 슬쩍 시선을 돌려 학생의 남색 마이에 붙어있는 명찰을 따라 읽었다. 우지호. 햇빛에 반사돼 유난히 이름이 반짝거린다.
“선생님.”
“으응…?”
몽롱하게 젖어 들어가는 박경의 눈을 보며 지호가 빙긋이 웃었다.
“오늘…… 수업시간에 배운 내용이 이해가 안 돼서요.”
끈적한 분위기를 잡아가던 지호가 돌연 가방에서 국어 교과서를 꺼내 내밀었다. 에? …어, 어디가 이해가 안 되니? 잠시 멍 때리던 경은 얼른 정신 차리고 태연한 척 대답했지만 실망으로 굳어지는 안면은 숨길 수 없었다. 지호는 그런 경의 반응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즐겁게 지켜보고 있었다.
“여기요. 오늘 배운 음운론 파트에서 입술소리가 뭔지 잘 모르겠어서요.”
아~ 아. 그런 거였구나. 난 또… 하하하하! 아이참 오, 오늘 왜 이렇게 덥지? 속으로 엉큼한 상상을 했던 경은 달아오른 얼굴에 열심히 손부채질하며 교과서를 받아들였다. 잠깐 당황하긴 했지만 국어 교사라는 제 본분을 잊지 않았던 경은 이내 침착하게 볼펜을 들고 글씨를 써내려가며 설명했다. 그러니까, 입술소리는 말이지……
“자음 중에서 두 입술이 만나 소리 나는 걸 뜻해. ‘ㅁ,ㅂ,ㅃ,ㅍ’이 입술소리라고 할 수 있지. 지호 네가 직접 발음해 보면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거야. 마, 마, 마. 어때, 입술 사이에서 소리가 나오지? ‘ㅂ’이나 다른 것도…….”
“에이.”
지호가 말하는 중간을 툭 끊고 들어왔다. 경은 커다란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갸웃했다. 왜? 이해가 잘 안가니? 친절하게 되물어 봐도, 지호는 아무 말 없이 불만스럽다는 듯 교과서를 내려다볼 뿐이다.
“제가 알고 있던 거랑 달라서요.”
“어? 그럼 뭔 줄 알았는데?”
궁금해요? 갑자기 지호가 짓궂게 웃는다. 햇살에 녹는 밝은 갈색 톤의 두 눈동자가 찌르듯이 경의 심장을 옥죄였다. 살짝 왼쪽 입 꼬리를 올리고 눈을 길게 찢는 황홀한 웃음. 조금 잠잠해지나 했던 심장이 다시 미친듯이 뛰어댔다. 경은 붉어진 뺨에 손등을 대면서 시선을 회피했다.
“이거요.”
경의 턱을 부드럽게 그러모으고 자신의 쪽으로 당긴 뒤 지호가 입을 맞췄다. 솜털 같은 버드키스. 아…! 약간은 민망한 신음이 튀어나왔다. 경은 미동도 없이 얼음땡 놀이하는 꼬마처럼 정지한 채로 지호의 뽀뽀를 받아들였다. 부비부비. 경의 입술을 가볍게 비빈 뒤 지호가 얼굴을 뗐다.
“저는 입술소리가 이건 줄 알았죠. ‘ㅁ’ 보다는 더 섹시한데요?”
어버버 어버버. 뒤늦게야 정신이 돌아온 경이 황급히 주변을 살폈다. 누, 누가 보면 어떡하려구! 이미 자신을 제외한 모든 선생님이 퇴근하고 없다는 걸 아는데도 괜히 누가 있을까 겁이 났다. 아니, 사실은 벌렁거리는 마음을 숨기기 위한 얄팍한 술책이었다. 평정심을 잃지 않기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
“선생님. 저 질문 아직 안 끝났어요.”
“으, 응? 또 뭔…데……?”
의미심장한 미소를 그리는 지호의 얼굴이 아지랑이처럼 일렁인다. 박경은 폭발 직전의 뺨을 두 손으로 감싸며 지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향했다. 혓소리.
“아!”
심장이 쿵! 떨어진다는 게 바로 이 경우를 두고 한 말일까. 경은 지호의 얼굴도 쳐다보지 않은 채 횡설수설했다. 진동운동기구를 타는 것처럼 목소리가 정신없이 떨렸다.
“그… 혓소리는 설음으로… ‘ㄷ,ㄸ,ㅌ,ㄴ’이 있는데… 바, 발음은… 윗잇몸에 혀를 붙여서 …….”
“이런이런. 아니에요.”
제가 하고 싶은 말, 그게 아닌 거 아시잖아요. 지호가 목울대를 움직이며 허스키한 웃음소리를 뱉었다. 뒤에서 경의 몸을 의자째로 끌어안는다. 커다란 손이 육감적으로 자신의 가슴팍을 더듬자 경은 척추가 다 찌릿해졌다. 손이 천천히 올라와 따듯하게 경의 목과 턱을 감쌌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뒤로 당기자 지호의 얼굴이 거꾸로 망막에 맺혔다.
“제가 아는 혓소리가 맞는지 확인해줄 수 있어요?”
입을 벌리는 순간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아 경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행이라면 지호는 처음부터 경의 대답 따위는 듣지 않을 작정이었다는 점. 허락도 없이 경의 입술에 다시 한 번 지호가 다가왔다. 만약 키스에도 69자세가 있다면 바로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일까. 경은 바르르 속눈썹을 떨며 눈을 감았다. 보통은 눈을 감으면 온통 암흑천지가 되는 게 맞는데 이상하게 아주 따듯한 핑크색이 보였다.
봄날의 햇살을 머금은 듯한 소중하고 정중한 키스. 입술 사이를 파고들어오는 지호의 혓바닥을 경은 수줍게 받아들였다. 목이 뒤로 꺾인 탓에 느껴지는 아픈 감각도 잊었다. 오로지 지호가 전해주는 예쁜 사랑에 첫날밤을 앞둔 새색시처럼 조용히 뺨을 붉힐 뿐이다.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좋겠어. 경은 꽉 양 손을 맞잡았다.
1분…5분…10분?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는 알 수 없다. 지호의 입술과 자신의 입술이 얽힌 뒤부터 시간관념 따위는 머릿속에서 깨끗하게 지워졌으니까. 오로지 이 세상에는 지호와, 나뿐. 호흡이 부족해 숨이 가빠질 무렵, 드디어 지호가 입속에서 빠져나갔다. 양지의 기운이 사라지자 먼저 아쉬운 기분이 든다. 치아와 잇몸에 흐르는 지호의 타액에서는 수십억을 주고도 살 수 없는 달콤한 맛이 느껴졌다. 지호가 눈웃음치며 물었다.
“어때요?”
“바, 바보… 틀렸잖아…….”
여전히 숨이 부족해 헐떡이며 경이 대답했다. 지호는 천진난만하게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상하네요. 세상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혓소리는 없을 텐데요.”
우, 웃기시네. 잔뜩 비웃어주며 콧방귀를 뀌려고 했지만 심장이 떨려서 시원찮게 끼고 말았다. 경은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오르는 얼굴을 지호의 반대방향으로 틀며 괜히 부산스럽게 서랍을 열고 닫았다. 보, 볼펜이 어디 갔지? 내, 내가 다시 제대로 설명해줘야 하는…….
“선생님.”
“…….”
“박경 선생님.”
지호가 허리를 숙여 경의 귀에 나지막이 속삭이자 경의 눈이 점점 커졌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떨리는 눈동자가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 없다. 홀린 듯이 경이 자리에서 일어나 지호를 올려다봤다. 누가 사제지간에 연애를 하면 안 된다고 했는지. 지호는 흘러내리는 경의 앞머리를 귀 뒤로 다정하게 넘겨주면서 다른 손으로는 허리를 껴안았다. 마치 태어날 때부터 이렇게 될 운명이었는지 경의 허리가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게 딱 알맞게 감겨온다. 눈물이 날 만큼 기뻤다.
“방금, 너, 뭐라고……?”
“좋아해요.”
“…아…….”
“진짜진짜 좋아해요. 영원히 제 곁에 있어주세요.”
상투적인 어구 하나 없는 투박한 고백.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 쯤 입에 담을 흔한 말이 어떤 위대한 시인이 쓴 서정적인 글귀보다도, 어떤 유명한 노래 가사말 보다도 더 깊숙이 마음에 와 닿았다.
굳이 입 밖으로 긍정을 표하지 않아도 마음으로 통하는 사이.
경은 발꿈치를 들어 지호의 목을 끌어안았다. 지호의 품에서는 자신의 것처럼 아니, 오히려 자신보다도 더 힘차게 뛰는 심장박동소리가 들려왔다.
더보기 |
혓소리, 입술소리 설명 출처 - 네이버 국어사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