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설공주
w. 채셔
그녀에게는 모든 것이 주어졌다. 새 남자를 만난 뒤로 그녀에게는 마치 새 왕국의 왕비가 된 것처럼 모든 것을 제 손에서 놀아나게 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질 수 있었다. 그녀는 전의 삶은 생각조차 나지 않는다는 식으로 굴었다. 아니, 제 자신이 전의 세상에서 온 것마저 부정했다. 전의 세상은 가난하고 더러운, 모든 부정적인 형용사들이 난무하는 그런 곳이었다. 사창가에서 태어났고 자라왔던 그녀가, 남자 하나로 인생을 바꾼 격이었다.
그녀의 인생은 꽤 가련했다.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 매일 반복되는 아버지의 술주정과 폭력으로 미쳐버린 어머니, 갑작스레 눈이 먼 언니와 그 집안에서 자라온 그녀. 가난한 세상에서는 매춘과 마약이 성행했고, 그녀가 그런 쪽으로 발길을 들였던 건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녀가 남자를 만난 것도 매춘 업소였다. 남자는 꽤나 젠틀했고, 손꼽히는 재력가였다. 모든 이들이 남자를 탐낼 때, 그녀는 남자를 탐내지 않았다. 늘 욕망과 상상력은 제 자신을 망쳤고, 이제는 그 따위 욕망과 상상력 따위로 제 세상을 손바닥 뒤집기처럼 쉽게 바꿀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빌어먹을 가난에도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똑똑한 여자였으니.
그녀를 바꾼 것은 한 남자였다. 남자는 모든 사람들을 제치고 그녀를 탐했다. 남자는 그녀의 볼을 사랑스럽다는 듯이 쓸었고, 그녀를 만나러 오는 길에는 항상 지갑 같은 것들을 사와 환심을 샀다. 그녀는 결국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고, 그 길로 남자의 집으로 들어섰다. 그녀가 잘못한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판타지로 들어설 문이 제 발 앞에 서 있었고, 그 문을 박차고 그 속으로 들어갔을 뿐.
남자의 아내가 되어 모든 것을 쥐었지만, 그녀는 남자와 자주 싸워야 했다. 그녀가 남자의 아내가 되겠다고 서약할 때에도, 그녀는 남자가 결혼했지만 사별한 상태이며, 전 부인에게서 난 딸까지 있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딸을 받아들일 준비도, 사랑할 용기도, 키울 자신도 그녀에게는 분명히 있었다. 남자에게 불만을 토로하게 된 건 그저 그녀를 속였다는 것, 그것 하나 뿐이었다. 하지만 싸움이 반복될수록 소문은 이상하게 퍼져나갔다. 시간이 지났을 때 수십 명의 메이드에게 그녀는 이미 딸을 사랑하지 않는 악독한 여자로 뒤바뀌어 있었다.
아아, 내가 누구냐고? 나는 그녀를 9살이 되던 해에 만났다. 가난이 들끓는 세상에서. 부모님이 모두 나가버린 집에 방치되어버린 나는 결국 고아원으로 옮겨져야 했다. 동정 받고 애정을 구걸하는 생활에 질려버린 나는 고아원을 탈출했고, 거지처럼 거리를 떠돌던 중 고등학생이던 그녀를 만나게 됐다. 그녀는 나를 동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다 결국 나를 제 집으로 데려갔다. 그 때부터 나는 그녀의 하인이 되었다. 하인이라고 하기에는 뭣하지만, 하인과 같은 일들을 하고 몇 푼의 돈을 받았으니 그 표현이 맞을 듯 하다. 누나와 동생 사이는 아니었고, 고용주와 직원의 관계로 지내왔다. 그래서 '누나'라는 이름보다는 '아가씨'라는 이상한 호칭을 썼고. 그녀는 나에게 기이한 형태의 애정을 주었다. '일이나 해. 그래야 돈을 받을 거 아냐.'와 같은 차가운 말을 자주 내뱉었지만, 그 안에는 분명히 따뜻한 애정이 깃들어있었다.
그녀의 집에서 일을 한지 대략 15년. 뒤돌아보니 나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것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내 손을 잡고 이끌어준 그 작은 몸을ㅡ 나는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 생각엔 이미 그녀와 나는 한 몸이었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와서, 딸의 이름은 '백설'이었다. 성은 백, 이름은 설. 메이드들에게 주워 들은 것은 설이라는 이름이 눈을 의미하는 한자에서 따온 이름이라는 것. 그에 걸맞게 딸은 눈에 띌 정도로 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었고, 매우 아름다웠다. 딸은 고등학생이었고, 이미 제가 다니고 있던 명문 고등학교에서 수많은 남학생들의 눈길을 받고 있었다. 아직 성인이 되지도 않았는데 딸에게 결혼 상대를 보는 선 자리가 들어왔을 정도니. 그만큼 딸은 미모가 출중했다. 게다가 세상 물정을 모를 정도로 순진했고 착했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딸에 대한 얘기를 나에게 항상 하고는 했다. 가령 침울한 얼굴을 하고는,
'설이 예쁘지.'
'…에이, 아가씨가 더 예뻐요.'
하고 물어보는 형태로. 생각해보면 내게 했던 얘기 중 절반은 딸의 얘기였던 것 같다. 아니, 딸에 대한 칭찬. 말투는 여전히 차가웠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그 차가움 속에 얼마나 많은 애정과 관심과 호기심이 숨겨져 있는지를. 그러나 소문은 더욱 이상하게 퍼져나갔다. 딸을 사랑하지 않는 악독한 여자로 모자라 이제는 딸의 외모를 질투하는 못난 여자가 되어 있었다. 소문이 커지면 커질수록 남자의 그녀에 대한 사랑은 줄어들었다. 메이드들이 그녀에 대한 소문을 말하는 듯 했다.
사건이 일어난 건 남자가 이제 더 이상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즈음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나에게 조금씩 따뜻해지기 시작했을 즈음이었다. 소문은 무성해져서 '딸을 시기해서 부적을 베개 밑에 넣어둔다.'는 것부터 '딸의 외모를 따라가기 위해 얼굴에 칼까지 댄다.'는 것까지. 딸이 빈혈에 걸려 있는 그 상태가 바로 그녀가 딸의 혈액을 빼내어 제 몸으로 투여하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었다. 수많은 소문들 중에는 입에 담기도 힘든 소문들이 여럿 섞여있기도 했다. 사건은 딸이 졸업하던 날에 일어났다. 그녀가 가만히 앉아 딸의 모습을 사랑스럽게 지켜보는 도중에도, 그녀의 소문 때문인지 여러 명의 눈총을 받아야 했다. 결국 시선에 시달려 그녀가 일어나려고 할 쯤, 딸이 갑작스레 쓰러졌다. 딸은 발작했고 그녀와 남자는 딸에게 달려갔다. '도와주세요!'를 열심히 외치는데, 학부모석에서 누군가 튀어나와 그녀를 진찰하기 시작했다. 그 사람은 의사였다. 의사는 급하게 딸의 응급 치료를 맡았다. 딸이 쓰러진 이유는 다름 아닌 수면제 과다 복용이었다. 몇 번 의사가 손을 놀리자 딸은 벌떡 일어나 게워내기 시작했다. 살았다는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린 남자는 곧바로 그녀를 응시했다. 아니, 남자만이 아니었다. 모든 이들이 그녀를 응시했다. 이 모든 소동이 그녀의 손 아래 나왔다는 것처럼.
결국 그녀는 그 사건으로 남자의 집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한 푼도 받지 못하고, 소문에 대한 어떠한 해명도 늘어놓지 못하고. 이 이야기의 엔딩은 결국 새드 엔딩이었다. 그녀가 서글프게도 미쳐버렸으니. 그녀는 이 세상을 나와 다시 전 세상으로 돌아와야 했다. 지독한 가난의 현장으로. 며칠 교회에 머물다가 막노동으로 번 돈을 모아 겨우 원룸 하나를 구해 그녀를 집어넣었다. 그녀는 부자가 되었던 과거를 잊지 못했다. 아니, 그 과거에 살고 있었다. 그녀와 현재 살고 있는 이는 난데도, 그 지독한 욕망과 상상력 속에서의 그녀는 남자와 살고 있었다. 요리를 할 때도, 사랑을 나눌 때도, 나는 남자였다.
나는 지쳐 잠든 그녀의 볼에 키스했다. 오늘도 그녀는 반쯤 미친 상태로 남자의 이름을 쏟아냈다. 나는 결국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울어버렸다. 그녀의 욕망이, 그녀의 상상력이 그녀를 망치고 있다. 현실 속에서 남자는 다른 여자와 재혼했고, 딸은 의사와 결혼해 그녀를 헐뜯고 다니는 중인데도. 아니지, 내가 만든 그 엔딩이 그녀를 망친 게 사실이지.
'이모, 그 얘기 들었어요?'
'무슨 얘기?'
'이 집 안주인이 딸을 그렇게 못 살게 군다던데.'
여자는 지극히도 정상이었음에도 내 두 손으로 그녀를 악마로 만들어놓았다. 이렇게 하면 나를 봐줄 것만 같았는데. 나는 결국 사실을 인정할 수 없어 그녀를 다시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녀는 여전히 반쯤 취해 남자를 불러댔다. 나는 그녀의 목을 졸랐다. 그리고 그녀가 고통스럽게 남자를 부르다가 결국 '지민아….'하고 불렀을 때 손을 놓았다. 그녀는 기절했고, 나는 울부짖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해.
덧붙임
뿌ㅝ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