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정
w. 채셔
1.
"아이는, 어찌 됐느냐."
"일어났습니다. 겨우 밥 숟갈 뜰 수 있을 정도입니다."
"…보살피거라. 고뿔이라도 걸릴까 염려가 되는구나."
"…어찌 그 아이를 보살피시는 겝니까."
"내가 너를 너무 친밀히 대한 모양이지."
송구하옵니다, 도련님. 얼마 전에 들어온 돌수가 영 시원찮은지 윤기는 쯔쯧하고 혀를 찼다. 물러가거라. 이내 윤기는 고개를 돌려버렸고 돌수는 부들부들 떨며 서둘러 방을 나섰다. 윤기는 냉정하게 그 모습을 응시했다. ……천한 것. 윤기의 눈빛에는 일말의 동정도 없었다. 지민이 돌수를 바라보는 시선과는 완전히 달랐다. 윤기는 항상 사람을 구분했다. 전하, 왕족, 양반, 백성, 그리고 천한 것들. 윤기에게 천민은 사람이 아니었다. 물건과 같이 취급해 항상 천민에게 뒷담화의 대상이 되고는 했다. 반면 지민은 완전히 달랐다. 윤기에 비하면 지민은 몽상가에 가까웠다. 전하, 왕족, 양반, 백성 그리고 천민까지도 모두 같은 존재나 다름 없다며, 어느 날 신분이 없는 날이 올 것이라고 믿었다. 물론 윤기는 그것에 쓸데없는 생각이라 평했지만.
윤기는 도포를 쓸어내리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아이가 있는 곳은 서재 바로 옆이었다. 윤기는 서재를 지나 별채의 문고리를 열었다. 아이가 조용히 앉아있었다. 그 시선에는 어떠한 의욕도, 애정도 없었다. 윤기는 아이의 앞에 앉았다. 아이는 윤기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말씀 올리면 도련님도 위험해질 것입니다."
"어쩌다 이리… 된 게냐."
"모릅니다."
의원을 부를 것이다. 네 몸이 성치 않구나. 윤기는 아이의 볼을 조심스레 쓸었다. 귀중품을 다루는 것과 같이 윤기는 그렇게 아이를 다뤄주었다. 이유는 윤기 저도 모르는 아주 이상한 감정 하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아이는 떨지 않았다. 그게 제 마지막 자존심이었기에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정갈하게 행동하는 것이었다. 의원은 됐습니다. 저는 괜찮으니 물러가셔도 됩니다. 매정한 말인 즉슨, 윤기가 나가주었으면 한다는 표현이었다. 윤기는 허탈스럽게 웃으며 아이를 똑바로 응시했다. 아직도 아이를 구한 것이 지민이라고 믿는 모양이었다. 윤기는 이를 으득 갈았다. 지민은 언제나 의도치 않게 윤기의 방해물이었다. 전하의 총애도, 어머니의 총애도, 그 놈이 다 가져가고는 했는데. 성정이 매서운 윤기의 주변에는 항상 사람이 없었다. 항상 그랬다.
"나가달라는 게냐."
"…그렇게 해주신다면야 소녀 감사할 따름이지요."
"네 꽤 건방지구나."
"…그렇습니까."
윤기는, 아이에게 관심이 있었다. 첫 만남부터 아이는 남달랐다. 똑같을 것이라 생각했던 계집들과는 전혀 달랐다. 무엇보다 윤기를 이렇게 쉬이 대하는 이가 전하를 제외하고는 처음인 셈이었다. 윤기는 빈 눈동자로 저를 쳐다보는 아이의 눈길을 조심히 살폈다. 숨을 가쁘게 쉬는 것이 아무래도 고뿔에 걸린 모양이었다. 그리 고뿔 들지 않게 돌보라 했거늘. 돌수를 호되게 혼내야겠다 다짐하며 윤기는 어쩔 수 없이 별채를 나섰다. 지독한 계집이로구나. 입술을 꾹 깨물며 윤기는 사랑채로 향했다. 너를 구한 것은 바로 나란 말이다. 윤기는 분이 풀리지 않아 제 발에 걸린 돌을 세게 차버렸다. 돌이 힘있게 날아가 대문에 탁- 하고 부딪혔다가 산산조각나버렸다. 윤기는 주먹을 꽉 쥐고, 사랑채로 들어섰다. 그것도 잠시 아아-하고 탄성을 내뱉은 윤기는 몸을 돌려 사랑채 바깥을 지키고 있던 돌수를 노려보았다. 돌수는 그대로 굳었다가 그대로 허리를 굽혔다. 내 그리 아이를 잘 돌보라 명했거늘 어찌 아이가 저 모양이 되도록 가만히 두었단 말이냐. 윤기는 올곧게 돌수를 꾸짖었다. 덜덜 떠는 모양새가 덜컥 짜증이 나 윤기는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방안으로 들었다.
2.
아이는 조용히 윤기가 나간 문을 노려보았다. 닫힌 문이 자꾸만 그 날을 상기시켜 아이는 몸을 웅크렸다. 그 날은 아이에게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아버지가, 어머니가, 그리고 채원까지 모두 칼에 베여 죽은 날. 숨을 거칠게 내뱉으며 가슴을 꽉 쥐던 아이는 결국 이부자리에 제 몸을 누였다. 흐릿하게 초점을 잃어가는 두 눈에 눈물이 들어찬다. 아이는 간절하게 손을 내밀었다. 손을 내밀면 잡아줄 것 같은 이가 있었다. 헛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아이는 그 이를 잡으려 애썼다. 도련님…. 늘 따스한 웃음으로 사람을 대하시는. 양반이고 천민이고 다 같은 사람이라 여기시는, 지민 도련님이 바로 눈 앞에 어른거렸다. 잡히지 않는 지민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아이는 힘이 빠져버린 손을 턱 떨어뜨렸다. 저는 안 되는 것입니까. 끊어질 것 같은 목소리로 조용히 말하던 아이는 지민을 힘없이 바라보았다.
"그 날이 없었다면 제가 도련님의 여인이 될 수 있었을런지요."
뼈대있던 가문의 여식이었던 그 때였더라면…. 아이는 옆으로 몸을 웅크리며 문만을 바라보았다. 지민 도련님이 저 문을 열고 들어와 보살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민 도련님은, 지민 도련님은…. 안쓰럽게 문을 바라보던 그 때에 문이 거칠게 열렸다. 지민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건만 문을 연 이는 윤기가었다. 아이는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었다. 윤기는 상을 세게 밀어버리고 아이의 허리를 잡아 억지로 일으켰다. 의원이 필요없다 했지 않느냐. 어찌 이러는 게냐. 열이 올라 뜨거운 목을 한 손으로 받치고 허리를 감은 윤기는 걱정스레 아이를 살폈다. 온통 붉게 물든 아이의 몸이 안타까웠다. 정녕 필요 없습니다. 그저 고뿔일 뿐입니다. 한 박자 느리게 아이는 대답했다.
"네 왜 이리 쓸데없이 고집을 부리는 것이냐."
"…곧 이 집에서 나갈 것입니다. 몸을 추스릴 때까지만 신세를 질 터이니……."
"내 너를 내 여인으로 삼을 것이다."
아이는 윤기의 말에 초점 없던 눈동자를 재빠르게 굴려 윤기를 노려보았다. 머리가 어지러워 헛 말을 들은 모양이었다. 윤기의 말을 가벼이 여기려는 순간 윤기가 다시 말해왔다. 내가 너를 구했으니 네 주인은 나다. 윤기의 말을 억지로 이해하려던 아이는 힘들게 몸을 일으켜 윤기에게서 떨어져나갔다. 싫습니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아이는 윤기를 피했다. 윤기는 아이의 목을 잡아 그대로 입을 맞췄다. 숨이 턱 막혀버릴 것 같아 아이는 윤기의 가슴을 작은 손으로 퉁퉁 쳤다. 입을 거칠게 맞추며 윤기는 아이의 옷고름을 풀었다. 강제로 아이를 안으려던 윤기는 한순간 손을 멈췄다. 아이의 손목도, 툭 하고 치면 부러질 것만 같은 목도 모두 칼자국이 나 있었다. 윤기는 떨리는 손으로 칼자국을 어루만졌다. 윤기는 이내 숨을 길게 내쉬고 방을 나섰다. 창호지로 비치는 윤기의 그림자가 순간 지독하게 쓸쓸해보여서 아이는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윤기의 목소리가 낮게 방안으로 들어왔다. 독한 계집. 내 집에 있는 게 그리 싫더냐. 아이는 고개를 푹 숙이고 다시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림자는 그 자리를 계속 지키고 있다가 사라졌다. 아이는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다 눈을 감아버렸다.
3.
간밤에 윤기는 끔찍한 꿈을 꿨다. 지민이 어머니를 데리고 도망친 꿈이었다. 넓은 반호 속에 윤기 혼자 덩그러니 앉아 있는 꿈. 잠자리가 좋지 않은 탓에 윤기의 상태 또한 엉망이었다. 아침상을 들인 돌수가 밥그릇에 맞아 얼굴이 붓기까지 했으니 윤기는 매우 기분이 상해있는 상태인 것이었다. 제일 끔찍한 것은 아이마저 지민이 데려갔다는 것이었다.
윤기는 아침상을 물리고 바로 아이를 찾았다. 걱정과는 다르게 아이는 어젯밤과 똑같은 모습으로 힘없이 앉아있었다. 눈에서 총기가 빠진 그 모습은 영락없는 여인네였다. 헌데 어찌 독하게 굴어. 윤기는 아이에게 다가갔다. 아이는 윤기를 멍하니 바라보다 그 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윤기는 근심어린 표정으로 아이를 안아들었다. 아랫것들이 수근거리는 것이 들리는데도 아랑곳않고 아이를 사랑채로 들였다. 걱정 마라, 너는 내 여인이니. 쌕쌕거리며 거친 숨을 밭아내는 아이를 제 잠자리에 눕히고 윤기는 아이의 볼을 쓸었다.
이내 돌수가 조심히 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었다. 돌수의 손에는 차가운 냉물과 손수건이 들려져있었다. 제가 제 부인 막금이가 고뿔에 걸렸을 때 하던 것을 그대로 윤기에게 알려주는 셈이었다. 돌수는 윤기를 잘 알았다. 돌수에게 윤기는 아들과도 같았다. 돌수가 그리 생각하는 것을 만일 윤기가 안다면 경을 칠 일이었지만 정말 그랬다. 윤기는 손수건을 받아들고, 돌수에게 방을 나서 지키라 명했다. 그대로 물에 적셔 짜내고는 아이의 이마에다 올렸다. 물이 얼음장마냥 차가워 윤기의 손이 금방 벌개졌다.
"아프지 말거라."
"……."
"말했지 않아. 너는 내 여인이니 아파서도 안 된다."
조심스레 수건으로 아이의 얼굴을 닦아내던 윤기는 천천히 움직여 아이의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 윤기는 아직도 그 날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아이는 거의 죽을 것처럼 하고는 반호의 문을 세게 두드렸었다. 돌수가 문을 열고는 차갑게 내치자 그 자리에서 윤기를 목놓아 부르며 울었다고 했다. 그것이 하도 괴이하여 돌수가 윤기를 불렀고, 그것이 윤기과 아이의 첫만남이었다. 윤기는 아이를 보자마자 직감할 수 있었다. 대제학 어른에게 일이 났다는 것을. 대감에게 일이 생기면, 윤기에게 아이를 보낸다고 했던 것을 그제서야 인지하고 윤기는 아이를 뫼셨다. 귀한 사람이니 윤기는 아이를 정성스레 보살폈다. 아이가 제 이름을 말해주지 않아 윤기는 그것대로 아이를 아이라고 불렀다. 아이도 그것이 싫지만은 않은 듯 하여 이제까지 그렇게 부르고 있는 것이었다. 윤기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지민이 아이를 돌보았고, 아이가 깨어났을 때에 지민이 있었으니 아이는 지민이 저를 구했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속에서 올라오는 울분을 윤기는 가까스레 누르며 아이의 손을 닦았다. 아이의 얼굴을 한참동안 바라보다 아이의 입술이 달싹이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귀를 가까이 댔다.
"지…민… 도련…님."
윤기는 자리에서 또 한 번 절망을 느꼈다. 지독한 계집. 윤기는 입술을 꾹 깨물고 다시 허리를 세우고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지독한 계집…. 마음이 미어지는 것 같아 윤기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제 돌이킬 수 없었다. 윤기는 아이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지긋이 쓸어주었다. 이 연정을 네가 책임지거라. 네가 품게 한 연정이니. 그것이 억지와 같은 것을 윤기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얼굴을 굳히고 윤기는 다시 강압적으로 아이의 입술을 훔쳤다. 억지로 나를 밀어내지 마라. 그리 해도 떨칠 운명은 절로 떨처지지 않더냐. 아이가 다시 입술을 오물거렸다. 다시 지민을 찾는 모양이었다. 윤기는 심통이 나 아이에게서 돌려앉았다. 그러고보니 지민이 어제 오늘 보이지 않았다. 서당이라도 간 모양이었다. 이번에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에 빠져 정무를 내팽겨두고서까지 아이들을 살폈다. 한심한 놈. 그럼에도 어찌 전하가 지민을 총애하는지 윤기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전하도, 어머니도 윤기의 마음은 항상 뒤로 밀어두고 지민을 아꼈다. 윤기는 항상 뒤쳐져있었다. 이제 아이까지 지민을 아끼니 윤기가 선 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있는 터였다. 윤기는 아이를 옆으로 옮기고 빈 자리에 제 몸을 눕혔다. 너는 내 여인이야. 윤기는 아이의 몸선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굴곡진 선을 따라 움직이던 손가락을 윤기는 다시 입술로 옮겼다. 제발 나를 봐. 나를 봐주어.
"지민……."
지독한 계집…. 윤기는 아이의 볼을 다시금 쓸었다. 한번 더 윤기가 아이의 입술을 탐하려는 순간 아이의 입에서 믿기 힘든 말이 흘러나왔다. 참 안 되셨습니다, 윤기 도련님은. 이제껏 끊어질 듯한 소리와는 다르게 그 말은 매우 또렷헀다. 윤기는 털썩 손을 떨어뜨렸다. 너는 지독한 것이 아니라, 잔혹한 게로구나. 윤기는 이부자리에서 일어나 정갈하게 상 앞에 앉았다. 윤기의 손은 아직도 벌겋게 냉기가 서려있었다. 서책을 넘기는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서책 위로 눈물이 떨어질 때까지 윤기는 서책을 읽을 생각도 않고 가만히 앉아있었다.
"저를… 연모하지 마십시오."
윤기는 등뒤로 아이의 이야기를 꾸역꾸역 제 속으로 집어넣었다. 듣지 못한 것으로 해두려는 셈이었다. 너는 나를 버리지 말아다오. 너는 지민을 택하지 말아다오. 윤기는 소리없이 서글프게 울었다. 나는 언제까지 이리 살아야 한단 말이냐. 지민에게 가려진 채로, 네 연정도 받지 못한 채로, 못되먹은 성정으로 뒷담화나 들으며. 윤기의 등이 아련하고 서럽게 떨렸다. 지독한 연정이었다. 그리워할 연에 사랑할 정자가 아니었다. 윤기에게 연정이란 그러한 의미가 아니었다. 멀리 흐를 연演과 사랑할 정情일 뿐. 정녕으로, 지독한, 연정이었다.
덧붙임
3주년 축하해요♡
나의 세계는 너로 세워지고, 무너진다 -달과 6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