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누스
w. 채셔
학교를 다니기가 더 힘들어졌다. 소문의 시발점은 어딜까. 집착할지도 모른다며 불안해하던 정국의 볼을 쓰다듬어준 뒤에, 정국과 나는 곧장 다시 교실로 들어섰었다. 하루 새에 민윤기와 내가 뒹군다는 소문은 점차 빠르게 흘러나갔고, 우리 반 아이들은 물론 학교 전체가 나를 피하기 시작했다. 이 순간, 내 손을 잡아주는 정국이 없었다면………. 아이들은 나를 보며 수군댔다. 아주 징그러운 벌레를 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런 눈길들을 보며 나는 견딜 수 없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왠지 아주 익숙한 느낌이 들어 미소를 지었다. 아이들이 미친 년이라고 소근거릴 때마다 나는 오히려 더욱 환하게 웃었다. 정국이 나를 보고 그런 표정을 지었을 때처럼. 수업과 체육대회 준비 시간이 모두 끝날 때까지, 나는 입가에 경련이 날 정도로 웃었다.
아이들이 체육 대회를 위해 모두들 반을 나갔다. 나는 그제야 입가에 걸려 있던 웃음을 지워냈다. 하아…, 하고 답답한 숨을 내쉬었다. 이내 정국의 어깨에 지친 얼굴을 기댔고, 그런 나를 정국이는 안타깝게 바라보기만 했다. 정신이 약해지기는 했던 모양이었다. 아주 당연하게 눈물이 흘러내리는 걸 보니. 정국은 가만히 손을 올려 엄지손가락으로 눈물을 지워냈다. 남은 것은 이제 정말 정국 뿐이다. 나는 그것을 알기에 나를 바라보고 있는 시선을 외면하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정국은 곧 내 고개를 제 손으로 잡고 눈물에 젖어 엷붉어진 입술에 입맞춤했다. 그리고 말했다. 나 여기 있어…. 그러니까 괜찮아. 나는 결국 정국의 품에 안겨 눈물을 쏟아냈다. 불행했던 유년의 추억들이 다시금 떠올라서 그것을 떨쳐내듯 서럽게 울었다. 그 때의 나로 돌아간 것처럼. 그 때와 다른 것이 있다면 그 때는 나에게는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고, 지금은 안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나 버리면 안 돼, 정국아…."
"내가 널 왜 버려, 이 바보야."
"……."
"안 버려…."
정국은 말을 끝내고 다시금 입술을 찾아들었다. 분명히 나는 울음을 그쳤는데, 입술에 눈물이 툭, 하고 떨어졌다. 나보다 훨씬 덩치가 큰 정국이 울고 있다. 무엇 때문에 울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내 등을 안쓰럽게 쓸고 있는 정국의 손을 느끼며 추측할 뿐.
정국아, 나는 그 애처럼 죽어버리지 않을게…. 그러니까, 나를 계속 지켜줘야 돼….
야누스
일과가 끝날 때까지 정국과 함께 있었다. 굳이 집에 데려다준다는 정국의 강요 섞인 말을 거절하고, 곧장 택시를 탔다. **대학교 병원으로 가주세요…. 나는 불안하게 아저씨에게 말했다. ……세경이를 만나고 싶었다. 정작 만나서 무엇을 해야 할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떤 표정으로 세경이를 맞아야 할지 아무 계획도 생각해낼 수가 없었지만. 그저 세경이에게 사과라도 하면, 이 상황이 조금은 나아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울고 있던 정국이. 집착을 할지도 모른다며 한참을 불안해하던 정국이. 그리고… 위태롭게 말을 내뱉던 민윤기. 그들이 무너지지 않기를 바랐다.
택시는 도로를 달려 **대학교 병원에 도착했고, 나는 떨리는 발걸음으로 병원에 들어섰다. 병원은 생각 외로 한적했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그 안에 서서 6층을 꾹 눌렀다. 잠시 꺼내든 폰에는 이미 메시지 하나가 와 있었다. 「무슨 일 생기면 문자해. 거기로 갈게.」 정국이 보낸 내용에 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답장 버튼을 누르고, 문자에 대한 답장을 보냈다. 응, 정국아. 고마워. 너무 딱딱한가…. 이어 하나를 더 보냈다. 좋아해, 많이. 진심이었다. 나는 정국을 좋아한다. 내 옆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정국이를….
6층에 도착하자 마음이 쪼그라드는 기분이 들었다. 민윤기 앞에만 있으면 긴장으로 마음이 오므라드는 것처럼 온몸이 딱딱하게 굳기 시작했다.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생각들을 뒤로 하고, 나는 세경의 병실 앞에 섰다. 창문으로 병실 안이 들여다보였다. 세경은 그 때와 똑같이 책을 읽고 있었다. 누군가 그 정적을 깨지 않으면 영원히 잠자고 있을 것만 같은 평온한 얼굴이었다. 아주 조용히 병실 문을 열었다.
"세경아…."
세경은 고개를 들었고 아주 천천히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맑았던 눈에 금방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 얼굴에 옛 기억이 고스란히 되살아나는 기분이 들었다. 세경은 곧 몸을 부르르 떨었다. 손에 든 책도 함께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그 책을 쳐다보다가, 세경아, 하고 한 번 더 세경의 이름을 불렀다. 세경은 책을 잡은 채로 떨던 손을 들어 책을 나에게로 던졌다. 아주 짧은 순간, 책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와 나의 팔을 강하게 강타했다. 아, 하고 짧은 신음을 내뱉고 책이 닿았던 부분을 손으로 꽉 잡았다.
"나가. 당장 나가란 말이야!"
"…세경아, 나…."
"안 나가?"
세경은 나에게 소리를 치며 울부짖었다. '세경아, 네가 편지….' 하고 급하게 내뱉었지만, 곧바로 달려온 간호사들에 의해 병실에서 쫓겨나야 했다. 곧 세경의 비명이 들렸다. 그 때와 흡사한 비명이었다. 나는 귀를 틀어막고 주저앉았다. 세경은 아직 나를 용서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럼 편지는 도대체 왜 보낸 걸까…. 머릿속이 온통 엉크러지기 시작한다. 복도까지 크게 울리던 세경의 비명이 갑자기 사라졌다. 진정제를 놓았거나, 금방 기억을 지워내버렸거나, 둘 중에 하나일 거라고 빠르게 추측했다. ……세경에게 또 상처를 줘버렸다. 기억하기 싫었던 기억들이 다시 떠오르면서 나를 찔러왔다.
"…네가 여기서 뭐하는 거야."
주저앉아 숨을 고르고 있는데 앞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윤기였다. 운동복을 입고, 손에는 검은 봉지를 들고 있는 사람. 눈길이 단단히 굳어 있었다. 굳게 닫힌 입술에, 나는 여기 있으면 안 되는 사람이라는 말이 여실히 담겨 있었다. 나를 망가뜨리려는 사람이 앞에 있다. 세경의 오빠. 나에게 그 모든 것을 되갚아주려는 사람. 내가……… 갖지 못해 미쳐버리게 만드는 사람. 나는 무너져 정신을 놓았다. 내 앞으로 다가오는 민윤기을 희미하게 바라보며 직감했다.
편지는 세경이가 보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야누스
w. 채셔
눈을 뜬 곳은 병실이었다. 잠에 든 동안 꽤나 길고 기괴한 꿈을 꿨다. 대충 요약하자면, 민윤기와 내가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는 내용이었다. 바다 앞의 방조제 위로 발을 동동 구르는 정국이 보였지만, 몸을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나는 바다에 더 빠져들었다. 몸을 일으켜 헤드보드에 지친 몸을 기댔다. 어둑해졌던 창밖이 매우 환해져있었다. 하루가… 지났구나. 나는 손을 뻗어 서랍 위에 놓인 폰을 들었다. 곧 삑삑, 하고 배터리가 없다는 경고음이 울렸다. 상단 메뉴에 부재중 전화 표시와 문자 표시가 여러 개 있었다. 정국이…. 느릿느릿 움직이던 손을 그제야 재빨리 놀렸다.
「왜 학교 안 와?」-정국이 PM 07:30
★매너콜★ 고객님께 걸려온 전화입니다 PM 08:01
「어딘데」-정국이 PM 09:20
★매너콜★ 고객님께 걸려온 전화입니다 PM 10:05
「혹시 민윤기랑 같이 있어?」-정국이 PM 10:45
「한 눈 팔지 말랬잖아」-정국이 PM 11:20
★매너콜★ 고객님께 걸려온 전화입니다 PM 12:00
★매너콜★ 고객님께 걸려온 전화입니다 PM 12:50
「나 화날 것 같아」-정국이 PM 13:30
★매너콜★ 고객님께 걸려온 전화입니다 PM 14:09
「보면 문자해, 제발」-정국이 PM 14:55
「너 지금 민윤기랑 있지」-정국이 PM 15:30
「제발, 김여주」-정국이 PM 16:10
입술을 깨물며 답장 버튼을 눌러, '정국아, 나 병원이야....' 하고 서둘러 문자를 보냈다. 보내자마자 시끄럽게 울려오는 전화 벨 소리. 나는 망설임 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너 왜 병원에 있어.' 정국의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그대로 울렸다. 세경이 만나러 왔다가…. 우물쭈물 느리게 대답을 했고, 정국은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미안해, 정국아. 침묵하는 정국에게 사과했다. 민윤기와 내가 몸을 섞는 사이로 알려져 있는 상황에서 정국도 좋지 못한 스캔들에 휘말려 있을 것은 보지 않아도 뻔한 상황인데. 미안한 이유를 따지자면 셀 수가 없어서, 나는 미안하다고 밖에 할 수가 없었다. 얼핏 너무 쉽게, 바로 걸려온 전화에 괜히 미심쩍은 기분이 들었다. 결국 추측만 하던 질문을 정국에게 던졌다. 정국아, 너… 수업 안 듣고 있어?
"네가 없어서."
"…아아, 미안해…."
"앞으로 미안하단 말 하지 마."
단호한 정국의 말 뒤로, 정국은 '우리 사귀는 사이잖아. 미안할 게 어딨어.' 하고 덧붙였다. 하지만 평생 정국은 내게 미안한 존재일 수 밖에 없을 텐데. 나는 혹여라도 미안하단 말을 할까, 입술을 꾹 깨물었다. '나 병원 갈까?' 하고 다정히 물어오는 정국에게 '내일… 보자.' 하고 대답했다. 나를 용서했을 줄로만 알았던 세경이가 발작까지 해대면서까지나를 밀어내는 것에 한없이 비참한 기분이 들어서였다. 그래서 정국이나 민윤기, 누구에게도 이 모습을 보여주기가 싫었다. 정국에게는 부끄러워서였고, 나를 괴롭히는 또다른 남자에게는 자존심이었다. 내가 그 사건에서 할아버지를 말렸다면 지금쯤 어땠을까. 사실 과거는 정해져 있다. 말리지 못하고, 숨어서 그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었지. 비겁한 겁쟁이라는 질책은 나에게 수치나 다름이 없었다. 이렇게 정국에게 비참하고 못된 모습을 보여주기를 원하지 않는 거였다. 물론 남은 하나에게는 들켜버렸지만.
"…그래. 내일 봐."
"…응, 정국아."
"내일, 체육대회인 거… 알지."
'응, 갈게.'라는 확답에 정국은 곧 전화를 끊었다. 체육대회. 연습도 하나도 못했는데…. 조용히 폰을 서랍 위에 다시 올려놓고 다시 누웠다. 세경의 책에 부딪혔던 자리가 이제는 시커멓게 멍이 들어있었다. 아무런 생각 없이 멍을 만졌고, 거기에서 묵직한 아픔이 느껴졌다. 세경은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까. 진정제를 놓은 것 같았는데.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밖의 날씨가 제법 따뜻한 것 같았지만, 갑작스레 오한이 들어서 몸을 파들파들 떨어야 했다. 사랑스럽고 착한 반장은 이제 어디에도 없다. 양다리를 걸치는 더러운 이중인격자만이 있을 뿐.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잠을 자고 싶은데, 잠을 잘 수가 없다.
야누스
눈을 감고 오랜 시간을 보냈다. 몇 분이 흘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생각을 하지 않다보니 꽤 많은 시간이 흐른 것처럼 느껴졌다. 정정을 하자면, 생각을 하지 않은 게 아니라, 할 수가 없는 거였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병실에 이내 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내 앞에 섰다.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민윤기였다. 그래, 찾아올 사람은 애초부터 하나 밖에 없었다. 민윤기는 내 눈에 제 시선을 두고 의자를 끌어와 내 앞에 털썩 앉았다.
"편지… 잘 읽었어요, 선생님."
저주한다는 듯한 어투의 말에도, 그 표정에 미동이 없었다. 민윤기는 다 알고 있었던 거다. 내가 세경에게 용서를 구하다 처절하게 내쳐질 것임을. 그 편지에는 분명히 용서하는 투의 말들이 가득했었다. 사실은 세경에게 얼른 용서를 구하고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사실은, 착하고 사랑스러운 반장으로 평범하게 살아가고 싶었던 내 못된 마음을 꿰뚫어본 거야…. 정국의 눈물로 세경를 만나야겠다고 결심했었다. 세경에게 용서를 빌고, 민윤기는 세경의 다정한 오빠로, 전정국은 평범한 여고생의 남자친구로 지내기를 바랐다. 민윤기가 보기에는 못된 마음이겠지만. …나에게는 서로가, 그리고 우리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아프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아니,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러기를 바라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렸다는 것을. 부질없는 짓임을 알면서도, 여기에 오고 싶었던 것은………….
"그럼 짐작했겠네."
"……."
"소문 낸 사람도 나였는데."
나는 아아, 하고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내가 말했어, 여자 애한테.'라며 제 소행을 말하는 민윤기의 말투는 매우 담담했다. '갑자기 뜬금없이 고백을 하잖아. 귀찮아서 말했어. 너랑 나랑 깊은, 사이라고.' 끝까지 담담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마지막에 목소리가 조금씩 떨려 나왔다. 왜 민윤기는… 자기에게 상처를 내면서까지 나를 상처주려고 할까. 세경이 힘들어질 것을 알면서 왜…. 이내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편지에 어떤 말이라도 용서의 어투였다면 내가 속아 넘어갔을 텐데, 왜 하필 제 스스로 민윤기를 버리라는 말을 했을까. 퍼즐을 거의 다 완성했는데, 한 조각이 맞아 들어가지 않는 느낌이었다. 나는 손을 뻗어 민윤기의 뺨을 쓸었다.
"네가 무너져버렸으면 좋겠어."
"…벌써 무너졌어요…."
"아니, 넌 아직 안 무너졌어."
민윤기의 눈에 상처가 가득했다. 이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알 수 없는 사람이라고만 정의하기에는, 민윤기의 눈이 너무 많은 걸 담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더욱 이 사람을 알 수가 없었다. 민윤기의 눈이 내 팔의 멍에 꽂혀들었고, 이내 나를 눕히고 병원복을 벗겼다.
"무너지란 말이야, 제발…."
"……."
나쁜 년….
민윤기는 다시 위태롭게 말해왔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이미 나는… 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