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아침부터 화창한 날이었다.
쏟아지는 햇빛에 부신 눈을 가늘게 뜨며 운동장을 가로질렀다. 저 멀리서 익숙한 뒷통수가 보였다.
"오, 김태형!"
반가운 마음에 이름까지 외쳐가며 옆으로 두다다 뛰어갔다.
항상 지각하기 직전에 시간을 맞춰오던 김태형이, 웬일로 일찍왔대? 은근슬쩍 장난스런 말투로 태형이를 무시하자, 아직 덜 떠진 눈을 부비적대며 웅얼대는 태형이었다.
"몰라.. 나 오늘 주번인가 그거라고.."
"너가 그런것도 챙겼어?"
"아니 탄소가 아침부터.. 같은 주번이라고 엄청 난리쳤어.."
김탄소?
며칠째 하루에 꼭 한 번씩은 듣는 그 이름이 아침부터 들릴줄은 몰랐다.
짝궁끼리 주번을 시켰던 듯, 하필이면 깐깐한 김탄소야.. 하고 투털거리는 태형의 목소리가 아직도 잠에 잠겨있었다.
슬쩍보니 태형이의 핸드폰은 계속 번쩍거리고 징징 울려대며 그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너 전화 와."
"알아. 백퍼 김탄소야."
"걔가 왜?"
"학교 도착했댔는데도 빨리오라고 계속 전화하잖아.."
칭얼대는 김태형을 달래주다보니, 얼떨결에 반까지 데려다주게 됐다.
내가 얘 애인도 아니고 남자끼리 남사스럽게... 뒷문을 열고 김태형을 말 그대로 '털어'냈다.
툭툭- 옷 매무새를 정리하는데, 고새 자기 자리로 쪼르르 달려가 엎드려버린 김태형이 그렇게 미울수가 없었다.
기껏 반까지 같이 와줬더니만.
"너도 되게 일찍왔네?"
뜬금없이 들려온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그 곳을 쳐다보면,
아.
딱 저 한마디가 입을 비집고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이상하게 아침부터 화창하더라니, 햇빛이 쨍 하더라니.
내가 그토록 신경에 거슬려했던 그 여자애는, 김탄소는. 등 뒤로 쏟아지는 햇쌀을 그대로 받고 있었다.
나는 그 여파를 그대로 맞고 있었다. 이렇게도 밝았었나, 네가.
뭐랄까, 그냥 마법같았다. 너를 완벽하게 만들어 놓는 마법.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과 고개를 돌렸을 때의 너의 옆모습은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이건 조금, 아니 많이 위험했다.
"태형이 친구야."
"......"
"어디 아파?"
내 이름을 알고 있음에도 끝까지 불러주지 않아서, 혹은 너무나도 밝은 너를 견딜 수 없어서, 혹은...
난 그 자리를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너는, 오늘의 마법을 알고 있을까.
너는 내 마법에 걸려줄까? 걸리기는 할까? 아니면 혹시라도 이미 걸려있을까.
*
딸기우유의 겉표면에 물방울이 맺혔다.
맺혀있던 물방울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아래로 떨어졌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기분 좋게 이 우유를 건네고 또 몇마디 나눌 생각이었다.
나는, 이렇게 갑자기 마법에 걸리고 싶지 않았는데. 천천히 다가가고 싶었는데. 생각에 생각을 물다 무언가 깨달았다.
아, 나 원래부터 그 애에게 관심이 있었던 거구나. 이 마법은 그 도화선에 불을 지핀 성냥일 뿐이구나.
이제서야 알게 된 나도 바보구나.
사온지 꽤 된 우유는 시간이 지나 점차 미지근해지고 있었다.
입술을 비죽이며 우유를 구석으로 치웠다. 지금 이 기분으로 어떻게 건네, 이걸.
수업종이 치든 말든, 복잡한 심정으로 책상에 엎드렸다. 옆에서 누가 톡톡 건드리는 것 같았지만 귀찮아서 손을 휘휘 저었다. 오늘은 제발 나 건들지 마라. 기분이 뭣 같다.
"지민아. 어디 아프니?"
아아, 젠장.
주변은 날 가만히 놔두질 않았다. 평소 수업을 듣진 않아도 자지는 않았던 내가 엎어져 있으니, 그래도 걱정은 됐는지 선생님이 날 불렀다.
많이 아프면 보건실이라도 가 있으렴.
분위기를 흐리지 말라는 소리같아 기분이 더 나빠졌다. 딱딱한 말투도 짜증나고.
지금 상황에서는 어딜가나 똑같겠지만, 차라리 혼자 있는게 더 좋을 것 같았다.
그럼 저 보건실 갈게요. 목소리까지 축 쳐졌다. 내가 들어도 힘없고 볼품없는 목소리. 폼에살고 폼에죽던 박지민 어디갔냐...
푹 한숨을 내쉬자, 여자애들이 걱정 됐는지 또 수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너네 가쉽따위 듣고 싶지 않은데. 들려오는 말들을 무시하고 계단을 내려갔다.
기껏 들어온 보건실에는 보건 선생님은 없었다.
일 안하고 어디간거야, 진짜. 목으로 넘어오는 반항심 가득한 말들을 꾹꾹 눌러 담았다.
지금 기분으론 사람이라도 한 대 칠 것 같다니까.
픽- 비틀린 웃음을 지으며 대충 비어있는 아무 침대에 가서 누웠다. 아니, 누우려고 했다.
"어, 태형이 친구?!"
왜 널 피하려고 온 곳에서 하필 네가 있는거지.
목소리를 듣자마자 석고상처럼 굳어버렸다. 멍청하게도 눈은 소리가 들려왔던 곳에 멈추어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몸 주인은 나야! 말 좀 들어라!
"어디 아파? 표정이 많이 안좋아보이네."
"...너는..?"
"아, 나 체육하다가 조금 쓸려서. 근데 선생님 없어서 몰래 쉬는 중."
많이 다친 건 아니구나. 다행이네.
나도 모르게 튀어나올 뻔 한 말에 흠칫했다. 아직은, 아직은 우리 이럴 사이조차 아니지 않나.
아까까지만 해도 축 늘어졌던 기분이, 김탄소를 만나니 하늘로 쏫구쳤다.
하지만, 또 이름이 아닌 김태형 친구라고 불린 사실이, 다시 기분을 바닥으로 패대기 쳤다. 롤러코스터도 아니고 잘한다, 기분 새끼.
"그렇게 서있지만 말고 누워, 엄청 편해."
"그래..."
"넌 어디 아파서 왔어?"
"그냥, 감기 기운..?"
"여름에 감기라니 너도 참 고생이네."
흐응, 하고 콧소리를 낸 너는 다시 누워버렸다.
나도 슬그머니 옆 침대에 누웠다. 새삼, 아까 책상에 놔뒀던 우유를 가져올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누가 보건실가는데 우유를 들고가겠어? 그걸 들고 왔을 나를 생각하니 그것도 웃겼다. 다음에 새로 사다줘야지.
"뭐가 그렇게 재밌어, 태형이 친구?"
"...야."
"엉?"
"나 태형이 친구 아니야."
"...엉? 그치만 둘이 엄청 친해보였.."
"나 박지민이야."
"......"
"앞으론 그렇게 불러."
훕. 또 나를 태형이 친구라고 부르는게 짜증이 나서 한 마디 톡 쏘아붙였다.
내뱉고도 내가 다 당황해서 숨을 들이마시며 아무말도 못했지만..
헐, 근데 방금 되게 박력넘쳤어 박지민.
스스로 뿌듯해하는데, 뒤에서 작게 웃음소리가 들렸다. 복수해주자 싶은 마음에 나도 똑같이 말했다.
"뭐가 그렇게 웃겨, 김태형 짝궁?"
"야."
"왜."
"나 김태형 짝궁 아니야."
"어라, 짝 바꿨ㅇ..."
"나 김탄소야."
"......?"
"앞으론 그렇게 불러."
잠시간의 정적이 지나고, 우리는 크게 웃었다.
크큭, 너도 진짜 징하다. 너도 마찬가지거든? 눈물이 찔금 나도록 웃은 우리는 그새 잠잠해졌고, 그 약간의 어색함을 견디지 못한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야, 태형이 짝궁."
"김탄소라니까."
"그래, 탄...소야."
"응 왜 불러 박지민이야."
"그게 뭐야."
"제대로 안부르면 나도 이렇게 부르려고."
"하여간... 튼, 너 딸기우유 좋아해?"
"응! 어떻게 알았지?"
그냥, 감이야. 쉬는시간에 매점이나 가자.
너가 쏘는거야? 와!
아이같이 좋아하는 탄소를 보니 입술 끝이 말려 올라간다. 아, 진작 이 생각을 왜 못했지. 직접 같이 가서 사주면 되는 거였는데. 그러면서 말도 트고.
가슴속에서부터 올라오는 간지러움에 웃음이 참아지질 않는다. 아, 어쩌면 좋아.
아마도 내 잘난척은, 너 앞에서는 잠시 접어둬야 하나보다.
~*~
끼야야ㅑ야약 이틀만인데도 왜 이렇게 오랜만같나요ㅜㅜㅜㅜㅜㅜㅠㅠ 앞으로 시험기간 되면 더 못오겠죠..?큽
잘난맛은 10편안으로 끝낼 생각이에요.. 얼릉 다른 이야기도 쓰고싶다!!!! 갑자기 전개한감도 없잖아있어서 오잉? 하실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나름 제대로 쓰는 첫작..! 열심히하고있어여!
이부분은 이러면 좋겠다- 싶은 부분은 피드백 주시면 빠른 시일 내에 고치겠슴당!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암호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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