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전 남친이 직장상사 02
: 아픈 기억
" 모르는 척 하는 거에요 지금? "
" 네? "
" 나 김민규잖아. 너 고등학교 때 남친. "
그 말을 듣고 나는 그냥 장난끼가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장난이 조금 과했지 않나 싶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전남친을 건들이면서 장난을 치다니. 하지만 또 사뭇 진지해 보이는 표정에 팀장님 입장에선 단순한 장난 같지는 않아 보였다. 어찌나 무서운 표정으로 날 보는지, 혼자만 기억하고 있는 전 애인에 대해 한이 맺혔나 싶었다. 나 혼자서도 살짝 헷갈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가 지금까지 만나본 남자가 많은 것도 아닌데 남자친구 하나 기억 못 하진 않지 않겠는가.
" 아, 네.. 그러시구나. "
" 모르는 척 그만 하고. "
" 그럼 제가 그 있지도 않았던 남친 기억이라도 할 수 있게 힌트를 좀 주세요. 고등학교 때가 벌써 몇 년전 일인데. "
" 와, 남자 많이 사겼었나보다, 나봉이. "
이건 또 무슨소리야. 어이없는 소리에 조금 황당해서 살짝 헛웃음을 짓자 자기도 따라서 웃는다. 따라서 웃는 게 또 기분나빠서 살짝 표정을 굳히니 같이 표정을 싹 굳혀버린다. 이게 뭐하자는 건지, 얄미워 죽겠다.
" 계속 이런식으로 장난 치시지 마시고… "
" 진짜 기억 못해요? "
" 그렇다니까요. "
" 큰일이네 이거, 혹시 고등학교 이후에 무슨 사고라도 당했어요? "
" 아뇨. "
" 우리 그래도 1년씩이나 사겼었는데. "
" 1년이요?! "
" 네. 물론 내가 차였었죠. "
" 왜 차였는데요? "
" 기억도 못하는 사람이 그거 알아서 뭐하게. "
그렇게 말하더니 내 이마를 툭 치더니 그대로 슥 병원을 나가버린다. 아프다고 한 것 같은데, 저렇게 막 나가도 되는 걸까. 하지만 남을 걱정하기엔 내 몸이 너무 아프다고 아우성을 치고 있었기에 따라 나가려다 다시 이불 안으로 들어갔다. 이불 속에서도 나는 이런저런 생각에 쉽게 잠들지 못했다. 정말 저 사람의 말이 다 사실이라면, 그렇다면 내가 지금 기억 못 하는 이유는 뭘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 혼자선 하나의 판단밖에는 내릴 수 없었다.
어릴때부터 나한텐 습관이 하나 있다. 나는 어릴때부터 정말 겁이 많았다. 그런 성격은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여기서 내가 겁이 많았다는 건, 사람과의 관계나 단순히 귀신과 벌레를 무서워 하는 것 둘 다 포함 되었다. 그래서 조금 우습겠지만 아직까지도 엘레베이터를 혼자 타거나, 어느 공간에 혼자 남겨지는 걸 못 한다. 이 겁이 많은 성격때문에 나는 나한테 상처가 되거나, 아픈 기억으로 남겨질 것 같을 땐 그 존재와 사건 자체를 잊어버리려 노력한다. 그래서 내가 지금 존재 자체도 모르는 사람이나 사건이, 과거의 나한테는 굉장히 큰 상처가 되어있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완전히 잊혀지거나 잊혀지지 못했거나, 둘 중 하나다. 둘 중에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저 사람은 나한테 굉장히 아픈 존재였던 건가.
내 아픈 기억 중에 하나인 걸까.
쉽사리 내려지지 않는 판단에 더욱 더 몸을 웅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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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을 자고 나니 조금 개운해지는 정신에 곧바로 사무실로 돌아왔다. 퇴근 시간인 건지 모두들 가방을 챙겨 나가고 있었다. 나도 집으로 가려고 내 자리로 향하니 옆 자리에서 순영씨가 나를 빤히 바라본다. 뭐지 싶어서 같이 바라보니 표정이 완전 울상이 되버린다. 어어, 왜 이래 이사람.
" 봉이씨, 어디갔었어요! "
" 네..네? 아 저 잠시 병원에.. "
" 병원? 많이 아파요? "
" 아니요, 그냥 감기몸살이에요. "
" 말을 하고 갔었어야지. 심심해 죽는 줄 알았잖아요. 번호를 모르니까 전화도 못 해보고. "
애처럼 말끝을 늘리는 순영씨에 나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그러고보니 회사에서 가장 친한 사람한테 내가 어딜 간다는 말 한마디도 없이 쌩하니 병원으로 향해버렸으니 이 사람 입장에서는 당황했을 듯 했다. 혼자 심심했다는 말에 이 사람도 나를 가장 친하게 생각해주는 것 같아 또 웃음이 났다.
" 그랬어요? 미안해요. 앞으로는 말 하고 갈게요. "
" 번호 좀 줘봐요. "
" 네? 아, 네. 핸드폰 주세요. "
말이 끝나자마자 내밀어지는 핸드폰에 엉겁결에 내 번호를 입력했다. 번호를 받자마자 함박웃음을 짓더니 그럼 잘가라며 쌩하니 나가버린다. 참 볼수록 귀여운 사람이었다. 순영 씨가 나가자마자 혼자 남겨져 불안해지는 마음에 재빨리 가방을 챙겼다. 잠시 팀장실 쪽에 눈을 두니 신기하게도 팀장님이 눈을 비비며 나온다. 멍하니 굳어 그쪽만 바라보니 팀장님도 날 발견하고는 씩 웃었다. 괜히 떨리는 기분에 심호흡을 뱉었다. 또 무슨 소리를 해서 날 당황시키려나.
" 아직 안 갔어요? "
" 네. 팀장님은요? "
" 저는 뭐, 야근이죠. "
" 아.. 네. "
" 나한테 할 말 진짜 없나봐. 배는 안 고파요? "
" 조금이요. "
" 이거 먹어요. 참치 샌드위치. "
기다렸다는 듯이 웃으며 나한테 샌드위치를 하나 건넨다. 어제 순영 씨한테도 이 샌드위치를 받았었는데. 그때는 아무런 느낌도 안틀었는데 팀장님이 준 샌드위치를 보고있자니 이상하게 복잡한 마음과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에 샌드위치를 잠깐 내려놨다. 진짜 팀장님이랑 있으면 기분이 왔다갔다 이상해진다. 내 아픈 기억이 정말 맞는 걸까. 그래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고 있는 건가. 시큰해지는 눈에 부채질을 하니 팀장님이 나를 가만히 본다.
" 울어요? "
" 아니요. 그냥 기분이 갑자기 이상해져서. "
" 나봉이가 맞긴하네, 이거 보고 울려고 하는 거 보니까. "
무슨 소리냐는 듯이 바라보자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한다. 혼자만 아는 얘기를 늘어놓으니까 괜히 둘밖에 없는 데도 왕따 당하는 기분이다. 계속 있자니 어색한 기분에 꾸벅 인사를 하고 사무실을 나가려니 나를 졸졸 따라 나온다. 심지어 엘레베이터를 타고 회사 밖으로 나올때까지도 내 옆에서 딱 붙어있었다.
" 저기, 야근하신다면서.. "
" 잠깐 데려다줄까 싶어서요. "
" ...저희 집이요? "
" 당연하죠. "
" 괜찮아요. 들어가세요. "
" 아직 이사 안 했죠? 그럼 길이 이쪽일텐데. "
정말 나에 대해 뭔가 알고 있는 사람이였다. 모르는 사람이 날 내 집으로 데려가는 데도 괜히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익숙하고 이상하지 않았다. 혼자 휘적휘적 걸어가길래 가만히 추운 몸을 웅크리고 따라가고 있는데 갑자기 날 홱 돌아본다. 그러더니 또 뭐가 웃긴지 실실 웃는다. 나도 모르게 살짝 웃었던 것 같기도 하다. 계속 따라 걷다보니 정말 신기하게도 자꾸 내 집과 가까워져 갔다.
한참을 걸었을까 갑자기 뚝 멈춰선다. 그 때문에 바닥을 보고 걷던 나는 팀장님 등에 이마를 딱 부딫혔다. 고개를 드니 정말 웃기게도 보이는 건 우리집이 맞았다. 분명 내가 기억하고 있어야 할 사람이 맞는 것 같은데, 이 사람에 대한 기억은 없으니 답답했다.
" 여기 맞죠? "
" ... "
" 나 진짜 전 남친 맞거든요. 이제 좀 믿겨져요? "
" ..조금이요. "
" 왜 나를 기억 못 하는 건지는 모르겠네. 난 얼굴 보자마자 알았는데. "
" ... "
" 앞으로 열심히 기억해내보죠 우리. 나는 전부 다 기억하고 있으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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