닿은 것이 꽤나 따뜻했다. 시야가 김태형의 얼굴로 가득 찼다. 앞에 보이는 김태형의 속눈썹이 곱게 내려앉았다. 몸이 딱딱하게 굳어 밀어낼 생각도, 도망갈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 자세 그대로 멈췄다. 꾹 잡힌 뒷덜미가 뻐근했다.
“…….”
짧은 순간에 김태형의 얼굴이 멀어졌다. 뜨인 커다란 눈이 나를 보고, 나는 멍청하게 입만 벌리고 멈춰 섰다. 왜 그랬냐고 당장이라도 물어야 하는데, 몸이 떨려서 말이 안 나왔다. 이거 대체 무슨 의미예요?
“…어?”
“…….”
“어어?!”
김태형이 갑작스럽게 얼굴을 붉히곤 거리가 멀지 않은 몸을 떼어 냈다. 당한 건 난데, 왜 자기가 엄청 놀라는지는 모르겠다만. 김태형은 변명도 없이 그저 ‘어어어!!’같은 이상한 감탄사만을 내뱉었다.
“가, 가자, 이제!”
평소라면 일어나라며 손이라도 내밀 김태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옷자락에 묻은 흙도 털어내지 못한 채 앞으로 휘적휘적 걸어 나갔다. 당황스러운 감정이 머릿속을 가득 지배했으나 이대로 김태형을 놓쳤다간 궐에 다시 들 수 없음을 알기에 애써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고 앞으로 가는 김태형을 따라 나섰다. 소맷자락에 넣어둔 노리개가 손에 닿았다. 바람결이 닿을 때마다 피부에 찌릿찌릿한 전율이 일었다.
밝혀둔 연등이 빛나고, 떠오른 달이 찬란한 밤이었다.
황녀 (皇女)
十三
나왔던 쪽문까지는 무사히 도착했다. 잘못을 저지르기는 했지만 데려다주긴 해야겠는지 김태형이 걸음을 자꾸 빨리해 따라잡는 데 어려움이 따르긴 했지만 말이다. 김태형이 나와의 거리가 좁혀질 때마다 조금씩 뒷걸음질을 쳤다. 언덕에서의 그 말 이후론 말을 한 마디 건네지 못했다. 김태형 또한 말 한마디를 건네지 않았고. 쪽문을 넘어 그것을 꼭 닫았다. 담벼락 너머로 신발 끄이는 소리가 들렸다. 김태형이 멀어지는 소리였다. 잠시 그곳에 머물다 도화궁에서 온 길을 되돌아갔다.
“…왔습니다, 폐하!”
여태 진정이 안 되는 심장을 꾹꾹 억지로 내리 누르며 도화궁으로 이어지는 문을 지났다. 도화궁에 모여든 나인들과 내관, 그리고 오라버니를 보자마자 아차 했다. 궁 사람들을 완전히 잊고 있었으니.
“어디 있다 이제 온 것이냐!”
마당에서 발을 동동거리던 오라버니가 나를 향해 한 달음에 달려왔다. 어둠 속에서 보이는 표정에 걱정이 만연했다. 내 쪽 변명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이쪽 변명도 생각해야 했음을 몰랐다. 사실 알았다 해도 아까 그 장면이 머릿속에 가득 남아 그럴 겨를도 없었겠지만.
“…마마!”
뒤이어 도화궁으로 들어온 정국이 내 쪽을 향해 달렸다. 토끼 같은 두 눈이 많은 궁금증을 내포했다. 대체 어디 계셨던 겁니까?! 달싹이던 입술을 열었다.
“수, 숨바꼭질 하다가 잠들었어!”
“숨바꼭질?”
오라버니가 되물었다. 방금 막 떠올린 변명거리긴 하지만 이건 좀 아닌가.
“…응! 숨바꼭질.”
“허나, 마마,”
그런 생각을 해도 한 번 말을 뱉은 것은 어찌 할 도리가 없었기에 잘 안 되는 거짓말을 세차게 밀고 가기로 결심했다. 내 대답에 오라버니의 곁에 서서 내 쪽으로 고개를 숙이던 황 내관이 머리를 들며 나를 불렀다. 무언가 반박할 거리를 찾은 것이 분명했다. 그런 황 내관의 말을 끊은 것은 오라버니였다.
“숨바꼭질을 하다 잠들었다지 않습니까.”
“허나,”
“많이 피곤하였나 보지요. 숨바꼭질을 했으니 못 찾은 게 당연합니다.”
“…폐하!”
오라버니가 나를 향해 인자하게 웃었다. 나를 감싸고도는 말을 가득 뱉으며. 황 내관은 오라버니를 불렀다 오라버니의 눈치에 눌려 더 이상을 말을 삼갔다. 도화궁에 가득 모인 나인들은 해체되어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고, 황 내관과 오라버니가 도화궁의 문을 유유히 빠져나갔다. 허무하게 도화궁이 비었다. 찬바람을 오래 쐬었는지 볼이 붉게 물든 정국이 입을 열었다. 옷을 평소보다 꽤 두텁게 입은 채였다.
“여태 어디서 뭘 하다 오셨습니까?!”
정국이 나무라듯 말했다. 나를 오래 찾은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어디서 뭘 했냐면…, 대답을 하기 위한 생각을 감행했다.
“…….”
근데 왜 또 김태형이랑 언덕에서 있었던 일밖에 생각이 안 나는지. 낯이 부끄러워 정국이에게 말해주지도 못할 거리였다. 아직까지 그 느낌이 생생하게 남았다. 점점 봄을 맞고 있음에도 아직 추운 날씨에, 따뜻한 체온과 달아오른 볼.
“숨바꼭ㅈ,”
“마마.”
“…미안.”
근데 그런 얘기를 차마 정국이에게 말할 수가 없어서, 똑같은 변명거리를 둘러대려다 괜히 눈치만 더 봤다. 왜 내가 혼나는 입장이 된 건지 이유는 잘 모르겠다만. 차가워진 볼을 축 내리고 입만 삐죽거렸다. 정수리 너머에서 한숨 소리가 넘어왔다.
“…쌀쌀하니 들어 가세요.”
밤이 깊어갔다.
…망했다. 망했네. 망했어.
우발적이었다. 자신의 유년 시절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다가 공주를 봤는데, 갑작스럽게 예뻐 보인 것도 입을 맞춰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정신을 차려보니. 사람이 잘 들지 않는 한적한 언덕으로 든 것이 잘못인지도 생각했다. 그 저잣거리에서, 태형은 익숙한 얼굴을 봤었다. 옷차림이 평범한 도련님의 것이긴 했으나 그 또렷한 얼굴이 안 튀고 배길 리가 없었다. 정국을 봤다. 공주의 옆을 지키는 정국. 어째서 도화궁에선 공주의 곁에 있지 않았는지 모르겠지만, 저잣거리에 있는 이유나 행동으로 봐선 분명하게 없어진 공주를 찾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잡히면 궐로 또 잡혀 들어가겠지. 그래서 반대편으로 달렸다. 골목으로 들어가 숨을 수도 있었으나 부러 언덕을 향해 달렸다. 그리고 그런 사고를 쳤다.
태형이 제 머리를 헤집으며 어둠이 깔린 자택으로 들어섰다. 대체 왜 그런 짓을 했는지는 여직 알지 못했다. 혹, 공주가 황제 폐하한테 말하면 내 목이 날아가는 것 아닐까. 혹, 누군가에게 들켜서 양반가의 위엄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다며 호되게 혼이 나는 건 아닐까. 혼잣말과 걱정이 함께 늘었다. 게 중에서도 가장 걱정되는 것은, 공주가 나를 피하는 것이 아닐까, 혹시 나를 싫어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막연한 것이었다.
“어, 왜 이제야 오십니까?”
“그런 일이 있어.”
태형이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어릴 적부터 제 종에게도 가벼운 어조를 하면 안 된다며 혼나던 기억도 지운 채였다. 지금 제가 무슨 말을 내뱉는 지도 인지하지 못한 채 안쪽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걸음이 무거웠고, 식은 그런 태형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른 우려를 했다.
“되련님, 방은 저쪽인데…!”
방도 잘 못 찾으시고. 뭐 안 풀리는 일 있나. 쯧쯧. 마당에 있던 식이 태형을 보며 혀를 찼다. 태형은 갑작스럽게 걸음을 멈췄다.
“형.”
“…….”
“그 형을 찾아가야겠다.”
“예?!”
식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태형에게 되물었다. 되련님은 형이 안 계시잖, 하고 말을 끝맺기도 전에 태형이 들어온 대문 방향 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마당에 멀뚱히 선 식은 걸음이 빠른 그를 쫓아가지 못하고 태형의 뒤에 소리만 쳐댔다. 되련님, 어디 가십니까! 불이라도 들고 가시지.
태형이 가는 곳은 도성의 한 양반 댁이었다. 태형과 함께 수학관에서 학문을 닦은 ‘형’이 있는 곳. 누군가에겐 답을 요구해야 했다. 자신은 아직 버거웠으므로. 그래서 그 대상을 그 ‘형’으로 정했다. 같은 사내의 입장으로 자신의 행위를 더 쉽게 이해하고 답을 내려줄 것 같으니. 어두운 거리를 빠르게 뛴 태형이 커다란 대문을 두드렸다. 성령제가 거행되는 탓에 통금 제한이 적용되지 않는 것이 다행이었다. 곧이어 그 대문이 열리고, 종으로 보이는 사내가 뉘시오? 하며 고개를 내밀었다.
“윤기 형 좀 불러 주겠소?”
“…….”
“김태형이 만나러 왔다고.”
사내 종이 안으로 들어갔다. 굳게 닫혔던 문이 다시 열리고, 방에서 나온 윤기가 태형을 바라봤다. 태형과 친한 형, 윤기가 사는 집이었다.
도화궁에 당도한 공주를 보고 안심한 석진이 걸음을 늦췄다. 밝은 때에 도화궁으로 간 것 같았는데, 벌써 날이 이리 저물었다. 별이 총총 캄캄한 하늘에 박혔다. 석진을 밝게 비췄다. 이 나라의 군주가 이 사람이라고 떠들어 대는 양.
“…폐하께선 아시지 않습니까.”
조금 뒤처져서 걷던 황 내관이 석진에게 말했다. 공주는 거짓말을 못한다. 이 사실은 공주를 만난 이라면 모두가 알았다. 그것을 태어날 때부터 공주를 만난 오라비, 석진이 모른다는 것은 황 내관으로선 말이 안 되었다.
“뭘 말입니까?”
“아까 온 궁을 샅샅이 뒤졌습니다.”
공주가 또 티 나는 거짓말을 했음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석진은 답답해하는 황 내관을 무시하곤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응시했다.
“그 아이가 숨바꼭질을 했다지 않습니까.”
“숨을 곳이 어디 있다고 숨바꼭질을 합니까.”
그리고 내가 무얼 압니까? 난 모릅니다. 석진은 공주를 믿었다. 굳건하게.
“더 뭐라고 하지 맙시다. 아름다운 밤이지 않습니까.”
“허나, 폐하.”
“내일 잠행도 있으니 피곤하게 하지 마세요.”
황 내관이 입술을 꾹 닫았다. 주기적으로 있는 황제의 잠행이 바로 내일이었다. 막 나라의 축제인 성령제가 잘 거행되고 있는지를 확인하려고.
“아, 그 쪽문은,”
“예, 폐하.”
“잠가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석진과 황 내관이 천천히 발을 옮겼다. 황안전으로 향했다.
“…할 말이 없다.”
“허.”
어이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 기억으론 그 일이 벌어지고 나서 너무도 싱겁게 마지막을 맞았었다. 변명도, 자신에 대한 변호도 없이. 그래서 그런 일을 당하고도 조금은 기다린 것도 사실이다. 당사자로서 무슨 말이든 들어야 했으니까. 근데 와서 하는 말이 고작 할 말이 없다는 거라니.
“미안.”
“…….”
“죽을죄를 졌어.”
하는 양이 평소보다 조금 누그러졌다. 크지 않은 마당 한 가운데 서서 큰 키를 소유함에도 고개를 푹 숙인 김태형의 정수리를 쳐다봤다.
“화났어?”
“…….”
“나 한 대 칠래?”
“…예?!”
놀란 반응을 보였다. 순간 김태형의 말끔한 볼이 내 앞으로 들이밀어 졌다. 갑작스럽게 시야에 가득 차는 김태형의 옆 얼굴에 당황해 눈을 한 곳에 두지 못하고 방황했다. 아니, 나는 말을 듣고 싶었는데.
“내가 그쪽을 왜 때려요?!”
“그럼 그거 만회하려면 뭘 어떻게 할까.”
“…….”
“뭐든지 할 테니까,”
“…….”
“…나 싫어하지 마.”
몸을 거둔 김태형을, 그 말이 들리자마자 멀뚱히 쳐다봤다. 아니, 사실은 그게 저를 싫어하라고 한 짓이었나. 손으로 뻘쭘하게 뒷덜미를 만지작거렸다. 아쉽게도 김태형의 말마따나 싫어지거나 그러진 않았는데, 괜히 기분이 언짢은 건 이유를 몰랐다.
“그럼 왜 그런 거예요?”
“…미안.”
“뭐, 갑자기 하고 싶었다거나, 하물며 잘 모르겠다거나.”
“…….”
“이유만이라도 들어 볼게요.”
그리 발언권을 넘겼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둥그런 정수리만이 보였다.
“좋아하는 것도 아니면서 대체 왜…,”
왜 그랬냐고, 변명할 것도 아니면서 왜 찾아왔냐고. 말을 끝맺지 못하고 거뒀다. 어이가 없어서 말이 빠르게 안 나왔다. 내가 알기론 그랬다. 그런 남녀간의 행위는 나와 김태형 같이 정의를 내릴 수 없는 사이가 아니라 ‘좋아하는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고. 그런 전제가 필요하다고. 근데 좋아하는 것도 아니면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이유 모를 허무감이 밀려들었다. 김태형과 마주 보고 있던 몸을 돌렸다. 안으로 들어갈 요량이었다.
“아닌데.”
“…….”
“사실 나,”
정적을 깨부순 한 마디가 들린 것은 그 시점이었다. 뒤통수를 향해 낮은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하는 말은,
“…너 좋아하나봐.”
순식간에 찾아온 내 황당함을 쫓아내기에 충분했다.
‘얼굴 폈다?’
자신의 방에 당차게 들어오는 태형을 향해 윤기가 말했다. 수학관을 나선지가 꽤 되었건만 윤기는 조그만 불에 의지해 책을 읽고 있었다. 과거 시험에서 한 번 떨어진 전적이 있어 윤기로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태형이 자신의 자리에 앉아 책을 덮는 윤기의 앞에 털썩- 앉았다. 윤기가 그런 태형을 보며 불현 듯 물었다.
‘여자 만나니까 좋냐.’
‘…어떻게 알았어?!’
‘너네 동생이 그러던데. 며칠 전에 만났거든.’
‘아.’
‘얼굴 좋아진 것도 그렇고.’
한창 태형과 혼사를 진행하고 있는 수아를 두고 한 말이었다. 며칠 전 누군가 저를 도둑고양이 마냥 지켜보기에 찾아가 왜 저를 훔쳐 보냐고 물었는데, 장옷을 걸치고 숨어있던 여인은 얼굴을 드러내며 사법부 댁 김태형의 동생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태형과 인연이 있던 윤기는 반갑게 태형의 안부를 물었고, 그때 들었다. 혼사가 꽤 진행되었고, 제 오빠 성격으로 봤을 땐 이미 친해지고도 남았을 거라고.
‘근데 무슨 일인데.’
대답이 없는 태형을 향해 윤기가 입을 뗐다. 요새 일 없다고 잘 찾지도 않더니. 태형은 대답을 우물쭈물 거렸다.
‘…그게 말이야.’
‘응.’
‘…….’
‘빨리 말해. 쫓아내기 전에.’
늘어진 한숨 상태로 봐선 분명 무슨 일이 있긴 한데. 나한테 도움을 받길 원할 만한 일이 뭐가 있지. 한동안 무슨 일이 있는지 말을 하지 않는 태형에 윤기가 으름장을 놓으며 추측에 나섰다. 마땅히 생각나는 건 없었지만. 태형은 이 사고에 대한 이야기를 어떻게 시작해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내가,’
‘어.’
‘엄청 큰 사고를 친 것 같아.’
‘뭐야, 그게.’
윤기가 싱겁게 반응하며 앉은 몸을 뒤로 조금 젖혔다. 뭐, 쟤가 사고치는 거 한두 번인가. 대수롭지도 않았다. 수학관에서 박사님한테 혼나는 것만 몇 번을 봤는데.
‘아니, 진짜 큰 사고라니까?’
‘그래, 그래. 들어나 보자. 이번엔 뭔데?’
‘…….’
‘…….’
‘…뽀뽀했어.’
태형이 울상을 지었다. 오, 누구한테? 너랑 혼인하는 그 분한테? 윤기가 감탄사를 자아내며 물었다. 태형은 대답 없이 제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아니이, 공주한테 했어.
‘나 어떡해.’
‘어떡하긴. 변명해야지. 미안하다고.’
‘나 피하면 어떡해?’
‘…미친.’
자기가 해놓고 왜 나한테 난리야. 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나 싫어하진 않겠지?’
‘네가 원래부터 싫었으면 더 싫어지겠지.’
‘…….’
‘그런 걱정할 거면 왜 했냐, 등신.’
태형은 요 며칠 새 자꾸만 자신을 피하던 공주를 떠올렸다. 생각해보니 조금 이상하긴 했다. 피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손만 대면 뒤로 빠지고, 거절하고, 저가 한다고 하고. 여자 경험이 없던 태형은 혼란스러웠다.
‘…완전히 빠졌네.’
‘뭐가.’
‘네가 엄청 좋아한다고, 그 분.’
‘…….’
‘어쩐지 얼굴 폈다 했다. 그럴 줄 알았어.’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불렀는지. 윤기가 태형이 듣지 못하게 궁시렁거렸다. 태형은 윤기의 알지 못할 발언에 눈만 끔뻑거렸다. 이게 좋아하는 거였나. 생각나고, 걱정되고, 행동 하나하나에 가슴이 덜컥거리는 게.
제 품 안에 은은한 백단향이 배인 것 같기도 했다.
“내가 꼭 밖으로 나가야 합니까. 귀찮게.”
“즉위 후 첫 축제를 듣고만 계실 것입니까.”
“거기에 내가 끼여 무슨 즐거움이 되겠습니까.”
“그리하여 ‘잠행’이 아니겠사옵니까.”
석진이 나가기 위해 입을 의복을 고르며 투덜댔다. 석진의 손끝에 고운 비단결이 오고 갔다. 궐에서만 지내니 입을 일은 없었다만, 그 수가 도성의 평범한 가문을 능가했다. 색색의 비단이 깔끔하게 걸려 있었다. 모두 자수를 즐겨하던 공주의 손에 꽃을 피운 것들이었다. 석진의 옷에는 으레 꽃이 그려졌다. 그것이 낙인 사람이었으니 석진도 그리 말리지는 않았고. 이 나라에서는 석진과 공주, 단 둘만이 가진 꽃이라 일컬어도 좋았다.
“헌데, 요 근래에 연홍색 옷이 안 보입니다.”
“연홍색?”
“예, 봤습니까?”
“못 봤사옵니다. 혹, 그걸 어디에 두셨사옵니까?”
게 중에서도 석진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연홍색 비단옷이었다. 새로 맞춘 옷인 이유도 있었으나 석진은 유난히 연홍색 빛깔을 좋아했다. 근데 요새 그 옷이 안 보인단 말이야. 석진이 기억을 되짚었다.
“그 아이에게 자수를 하라 보낸 것 같은데.”
“공주 마마 말씀이시옵니까?”
“예, 아직 덜했나. 반 년 간 한 번도 못 입은 것 같습니다.”
반 년? 정확한 기간까지 읊는 석진을 보며 내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소인이 몇 주 전에 입은 것을 봤사옵니다.”
“몇 주 전이라니요?”
“공주 마마께오서 편찮으셨던 시기였던 것 같사온데…”
내관이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정확힌 몰랐지만 어딘가 바쁘게 뛰어가는 연홍색 도포자락을 분명히 봤었다. 그때 자신은 태자가 시강원에서 강의를 듣는 동안 어딘가로 소임을 다하러 가는 길이었고. 선명한 매화 자수를 보며 또 태자 저하께서 탈출을 하셨구나, 생각했었다. 그건 분명했다.
“그 때 입은 적이 없는데.”
“잘못 아시는 것이 아니옵니까.”
“제가 그걸 왜 모르겠습니까.”
석진이 가지런히 걸린 비단 옷을 훌훌 넘기며 말했다. 내관은 그저 웃기만 했다. 사실 옷 하나 없어졌다고 실랑이를 하는 것도 웃겼다.
“…그 아이가 오늘은, 숨바꼭질을 안 한답니까.”
“이제 숨바꼭질을 하려거든 공주 마마를 꼭 찾아야 된다고 일렀으니 그리 숨어 잠이 드시는 일은 없을 것이옵니다, 폐하.”
석진이 화제를 전환하려 익숙하게 공주의 이야기를 꺼냈다. 걱정이 많은 오라비인 석진을 위해선 공주의 일과를 하나하나 기억하고 있는 것이 중요했다.
“헌데,”
내관의 이야기를 가만 듣고 있던 석진이 옷 사이에서 손을 멈추었다. 고개를 숙이던 내관은 무슨 일인가 싶어 숙인 머리를 들었고, 석진은 틈에서 한 짙은 푸른 빛깔의 비단 옷을 꺼내 들었다. 꽃의 수가 놓여있지 않은 채였다.
“이건 뭡니까? 내 것이 아닌데.”
“…폐하의 것이 아니라면 누구의 것이겠습니까.”
“…그런가. 요새 왜 이렇게 많은 게 낯선지 모르겠습니다.”
예민한지는 모르겠으나 옷도 그렇고, 요즘 자꾸 뭘 숨기는 것 같은 공주도 그렇고. 황상에 앉은 것이 낯설어 그런가. 석진이 짙은 빛의 옷을 들고 의실을 빠져 나왔다. 잠행을 얼마 앞두지 않고 마음의 환기를 할 생각이었다. 도화궁에서 그 아이를 만나 자수를 부탁하기도 하려고.
“도화궁에 가야겠습니다.”
“…잠행은 어쩌시고,”
“시간을 조금만 미루지요.”
“폐하!”
“왜애.”
“…….”
“왜. 왜 그러는데에.”
몸을 김태형이 있는 쪽으로 돌리지 못하고 다리가 풀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아니, 뭐라도 듣겠다고 뱉은 말에 수긍할 건 또 뭐야. 빠른 맥박 수가 온 몸을 제 멋대로 울리는 게 못내 맘에 안 들어 손으로 뜨끈하게 달아오르는 얼굴을 가렸다. 뒤에 섰던 김태형은 내 옆으로 다가와 무슨 일이냐며 대답을 갈구했다.
“…장난 아닌데.”
“아, 그런 말 좀,”
“응?”
“막 하지 마요.”
심장 떨리니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 너 귀가,”
“……."
“엄청 빨개.”
단풍 같다, 단풍. 직접 얼굴을 보진 않아도 웃음기 다분한 목소리가 귓가에 안착했다. 그리곤 그 밤, 내 뒷덜미를 잡았던 그 뜨겁고 큼직한 손이 갑작스럽게 내 어깨를 꾹 쥐었다.
“손 치워 봐.”
“…싫어요.”
“얼굴 좀 보자.”
“아, 싫다니까,”
“힘쓰기 전에 나 봐, 공주야.”
김태형이 말을 귓등으로 듣곤 내 손바닥 안에서 불규칙한 숨을 몰아 쉬었다. 사내의 힘이니 내가 이겨먹을 재간은 없었지만 이미 얼굴이 귀만큼이나 시뻘개졌을 테니 고개를 들 수 없음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다섯 셀 때까지 나 안 보면,”
“……."
“또 뽀뽀한다.”
하나, 둘. 어깨를 꾹 잡힌 채 마음속으로 김태형의 수를 따라 세었다. 손에 닿은 어깨에 고동 소리가 울렸다. 셋. ‘또’라는 말이 머릿속에 뱅뱅 맴돌며 가슴께를 건드렸다. 이대로 있다간 죽을 지도 몰라, 하고 말하는 것 같기도 했다. 사람이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 죽을 수도 있나. 그걸 차마 그대로 둘 수가 없어 손을 가린 손을 떼어내고 붉어진 얼굴을 천천히 들었다. 다섯을 세려던 찰나였다. 거짓이 아니라는 양 햇살만큼이나 환히 웃는 김태형이 보였다.
그리고 그의 목 언저리엔 서늘한 칼날이 자리했다. 손에 검을 들지 않은 정국이가 옆에서 우릴 쳐다보고 있었다.
“…넌 누구냐.”
오라버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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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드라마에 사극이 많이 나오는 것 같아 너무 행복합니다 흑흑 (그래봤자 둘
왜 둘다 월화인지 모르겠지만..
모두 잘자요 :D
☞ 현국 공주님 86분 ☜
0806 / 1214 / ♥김태형♥ / Remiel / 곤잘레스 카레 / 골드빈 / 공주야 / 군림 / 깻잎사랑 / 꽃게 / 꽃길 / 꽃단비 / 꽃소녀 / 꽃오징어 / 꾸꾸 / 나너조아 / 냥군땡 / 노트북 / 뉸뉴냔냐냔 / 니케 / 다홍 / 단아한사과 / 됼됼 / 뜌 / 라슈라네 / 룬 / 리자몽 / 리프 / 망개똥 / 매직핸드 / 맴매때찌 / 먹고쥭자 / 미스터 / 밍밍 / 방소 / 보고싶찐 / 복동 / 봄비 / 불나방 / 비데 / 빵빠레 / 삐삐까 / 사막여우 / 석진이시네 / 설탕파티 / 솔트말고슈가 / 슈가나라 / 싸라해 / 아망떼 / 압솔뤼 / 열렬히 / 예찬 / 오레오 / 오월 / 오징어만듀 / 온새미로 / 옮 / 우와탄 / 우유 / 유자쿠마 / 윤기 / 은갈칰 / 응캬응캬 / 이다 / 이스트팩 / 입틀막 / 정꾸야♥♥♥ / 줄라이 / 지호 / 진격 / 집수니 / 찬아찬거먹지마 / 천사소녀제티 / 체셔리어 / 초코빵 / 쵸코두부 / 커몬요 / 태형아뷔태해 / 틸다 / 피쯔아 / 하트반지 / 핫초코 / 현질할꺼에요 / 호비 / 화학 / 황토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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